엄마는 가끔 부엌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뒷물을 하셨다. 밤잠이 없던 어린 나는 가끔 그 소리를 들었다. 쪼르르..쪼르르륵..쪼르르..그 소리를 들으면 공연히 오줌이 마려웠다. 

타락하는 나를 받아줘 나 오늘 이렇게 원하고 있어 / 이미 꿈에서 널 안아본 날 가져주길 바래 / 이젠 말로 하지 않겠어 / 그냥 얻을 수 있어 / 오늘 밤 이런 맘 난 주체할 수 없었어 / 하고싶어 더 말은 말아줘 / 모두들 이런 일 다 비밀스레 숨기며 날 천하게 바라보곤 해

널 생각하면 숨이 가빠와 내 마음 이렇게 뜨거워 있어 / 그 안에 니가 잠시 들어와 날 식혀주길 바래 / 이젠 말로 하지 않겠어 그냥 얻을 수 있어 / 오늘 밤 이런 맘 난 주체할 수 없었어 / 하고싶어 더 말은 말아줘 / 모두들 이런 일 다 비밀스레 숨기며 날 천하게 바라보곤 해 / 내가 완전하지 않다는 말한 적 있었었잖아 넌 그래도 상관없댔어 / 다들 아무렇지 않은 척 깨끗하게 서 있지 구역질 나 참을 수 없어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소리는, 관능적이면서도 애처로웠다. 늙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젊지도 않은, 여자로서의 몸보다는 엄마로서의 몸이 더 우선되는 그런 다섯 아이를 가진 여자의, 뒷물하는 소리. 관능보다는 사실 애처로움이 더 크다. 이소라가 가사를 쓰고 직접 부른 이 노래처럼.

발매되자마자 샀다가, 사자마자 누군가에게 빌려주고, 그러다 결국 누군지도 몰라 돌려받지 못한 이 앨범을 운좋게도 6년 뒤인 (오..6년이나?) 2003년 3월 8일에 다시 구할 수 있었다.

고르는 물건마다 몇 년은 가게에 묵었던,  내가 아니면 누구도 돌아봐주지 않을 것 같은 것들. 작은 키에도 바바리가 꽤 어울리던 그가 한 자리, 한 자리에서 오래 박힌 그것들을 빼낼 때마다 잊고 있었던 저 노래가 한 소절, 한 소절, 머리에 와 박혔다. 그가 마침내 열 몇 장의 씨디를 안고 나를 향해 돌아섰을 때, 내 머리는 저 노래로 가득차 있었고, 나는 더이상 참지 못하고 그에게 말했다. . 하고싶어 더 말은 말아줘..

오, 그랬으면 지금쯤 애 하나를 옆에 끼고 있었겠지만 아쉽게도 그 때 내가 절실히 갖고 싶었던 건 그 자가 아니라 저 씨디였다. "고르시는 음반을 보니까 갖고 계실 것 같아 여쭙는 건데, 한상원 2집 있으세요? 있으시다면 제게 잠시 빌려주시던가 공씨디에 녹음 좀 부탁드릴께요." 있다고 했다. 두 장이나. 게다가 하나는 미개봉 상태란다. 이게 웬 봉이냐. 우리는 서로 주소와, 이름과, 전화번호를 주고 받았고, 나는 그에게 미선이, 아무밴드, 신해철 정글스토리 같은 것들을 주고, 그로부터는 한상원 2집, 동물원 3집, H2O 3집, 한영애 2집, 임재범 1집 같은 것들을 받았다. 그가 나보다 세 살 많지만 우리는 이렇게 친구가 되었다.

나는 다시 kiss와 solitude를 들을 수 있게 되었고,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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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4-02-19 0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상원이 베이스파트를 맡았던 곳이 어데죠? 분명한데...저 사람, 좀 째지하면서 담배연기처럼 늘어지는 가락이었고요. 저, 스무살 때 저 사람 음악 잘 들었는데...지금은 당최 생각이 안 나네요. [봄, 여름, 가을, 겨울]인가...아닌 거 같은디...

비로그인 2004-02-19 0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검색해서 찾아보니 2집이구만요. [신촌블루스]로 또 착각할 뻔 했네요. 음...구냥 [한상원밴드]구나, 올커니...

비발~* 2004-02-19 0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아깝다... 한상원2집을 이야기할 때 알아들었어야 했는데...

비로그인 2004-02-19 0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하하...쌤 답글에 뒤로 넘어져 버렸네요. 이해해 주쑈. 지가요, 일주일 간격으로 학년별로 읽어야 될 책이 많아서 속독을 하는데 꼭 중요한 것을 빠트린당게요. 흐흐...겸연쩍...

마태우스 2004-02-19 1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soul kitchen님의 취미 중 일부를 알게 된 것 같네요.

soulkitchen 2004-02-19 1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제목에 앨범명을 써 넣었어야 하는 걸 깜빡~ 처음 이 앨범을 샀던 건 유앤미블루나 이범용, 신해철 같은 이름들 때문이었는데, 저 두 곡을 가장 좋아하게 됐지요. 다른 트랙들도 하나 버릴 것이 없습니다. 마태우스님, 취미 중 일부..남들 다 잘 때 안 자고 깨어서 뒷물하는 소리 훔쳐 듣는 거요? ^^; (제대로 들켰다!)
아...날씨 좋습니다.
 

그저께, 황석영의 <손님>을 다 읽고 왠지 몸서리 쳐지는 몸을 추스르며 뭔가를 쓰기 위해 책상 앞에 앉았다. 앉았는데 어떤 것도 쓸 수는 없고, 대신 머리만 깨져라 아파왔다. 무서울 정도로 괴괴한 가운데 어느집 보일러 돌아가는 소리가 거짓말처럼 또렷이 들려왔다. 추웠다. 추워서 책상위의 책이며 연습장 따위를 주섬주섬 챙겨 이불 속으로 기어들었다.

전날 읽은 황순원문학상 수상작품집은 한 편, 한 편이 끝날 때마다 작은 탄식 같은 것이 흘러나왔었다. 특히, 성석제의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는 열 번 잘게 웃고 그 웃음 뒤에 그만큼의 슬픔을 조금씩 담아 두었다가 한 번 크게 울, 문학평론가 하응백 교수의 말처럼 "문장의 재미와 삶의 곡진한 슬픔이 공존하는 소설" 이었다. (나는 이 말을 포스트 잍에 적어 다이어리의 맨 첫 장, 짐 모리슨의 사진 위에 붙여 놓았다.)

특별히 입맛에 맞는 과자를 종합선물세트의 여러 과자 중에서 발견하게 되면, 이전에 먹은 과자가 아무리 질이 좋고 이후에 먹을 과자가 아무리 맛있는 것이라도 그저 '괜찮네' 정도로 뭉뚱그려지고 유독 그 과자 맛만이 입 안에 오래 남는 것처럼, 성석제의 작품이 너무 인상적이어서 다른 작가들의 작품이 크게 되새겨지지 않은 것일 뿐 모두 탄식이 터져나올 만큼 좋은 소설들이었다. 그 좋음은 사실 책을 읽기도 전에 표지의 사진만으로도 느껴졌었다. 그 분(박완서)의 웃음은 아무래도 외할머니의 그것을 닮았다.

그런가 하면 황석영의 옆모습은 아들과 대판 싸우고 석 달 전 집을 나가 아직도 소식이 없는 아랫집 나리 할아버지를 닮았다. 굿판에서 나리 할머니가 춤을 추면 그 곁에서 장고인가 북을 쳤다는. (어디서 뭘 하며 사는지 그런 건 전혀 궁금해 하지도 않고 나는 그저 주차할 자리가 생긴 것만 좋아라 했다.) 그 나리 할아버지같이 생긴 '장길산'의 아버지가, 마누라의 춤사위도 북채의 휘두름도 없이 불러낸 '귀기의 허깨비들'이 책과 함께 덮히면서, 비명에 간 망령들로 시끄럽던 방 안이 갑자기 괴괴해졌고, 그래서 한기가 밀려들었던 것이다.

살인을 한 적도, 교사(敎唆)를 한 적도 없으며 누군가를 죽일 만큼 미워한 적도 없었지만, 어쩌면 내게도 원한까지는 아니라도 섭섭한 맘 한 자락 감고 있는 귀신이 있어, 저 작가의 영매술에 묻어 여기까지 온 것이나 아닐까, 무서웠다. 무섭고 추웠다. 추위는 추위라도 아주 낯선 추위였다. 무언가 방 안으로 스며들었음이 분명했다.

작은 몸피에 한 갈래로 대충 묶인 징그럽게 검고 긴 머리, 저것은..그날의 이모다. 나는 대학교 1학년 때부터 졸업한 후 1년까지, 5년 동안 해마다 여름이면 외가에 자두를 따러 갔었다. 밭은 꽤 넓은데 일할 사람이라곤 할머니 뿐이어서 웬만한 힘쓰는 일은 모두 내 차지였었다. 꽉 찬 망태를 천막 아래 한 곳에 모아 붓고, 꽉 찬 궤짝을 리어카에 싣고, 꽉 찬 리어카를 농협까지 끄는 그런 일들. TV채널은 두 개 뿐이고, 음악은 전혀 들을 수 없고, 뒷간의 나무 판때기는 불안했지만 대체로 살기 좋은 날들이었다. 저...이모만 없었다면.

미친 사람이 까닭없이 웃는 것은 행복한 과거를 추억하는 중이기 때문이다. 미친 사람이 묻는 말에 대답을 하지 않는 것은 그 추억이 너무도 감미로워 그를 온통 잠식해 버렸기 때문이다. 듣기는 하지만, 들은 내용을 되새기진 않는다. 추억을 거슬러, 거슬러 그들은 이미 아이의 감성을 가진 때로 돌아가 있다. 의미도 모르는 험한 욕을 하고, 칼이나 가위 같은 흉기를 장난감처럼 가지고 논다. 그들은 아이이기 때문에 그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한다....그리고 그시기의 나는 저 순수한 사람의 그런 순수함을 알지 못했다.

5년째 되던 해, 비가 왔었던가...대낮인데도 밭에 나가지 않고 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책을 읽고 있었는데, 이모가 불쑥 방 안으로 들어왔다. 외가에 있은 지 며칠이 지난 후였는데, 이모를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손에는 큰 가위를 들고, 입가엔 이상한 웃음을 머금은 그녀. 기름이 떡이 진 징그럽게 길고 검은 머리를 들이밀더니 좀 짤라줘, 간지러워 죽겠어 한다. 나는...너무 놀라서, 무섭고 불결하고 징그러워서, 자리를 박차고 맨발로 도망을 쳤었다.

그해 겨울, 이모는 죽었다. 사람이 그렇게 죽을 수도 있다는 걸 그때야 알았다. 예쁘고 상냥한 여자였다. 예쁘고 상냥했는데...그녀는 아무래도 세상 밖으로는 나갈 자신이 없었나 보았다. 자기 속으로만 자기를 키우다가 그렇게 자기 속으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리 와. 나는 이모의 머리에서 삭아내릴 것 같은 고무줄을 끄르고, 머리를 빗기 시작했다.그리고, 사진 속에서 본 가장 예뻤던 때의 머리로 잘라 주었다. 깜찍한 귀밑 단발머리를 찰랑거리며 고마움의 웃음을 한 번 지어보이던 그녀가 방 저쪽 구석을 향해 고갯짓을 했다. 왜? 하고 돌아보니, 거기에 옷 밖으로 보이는 상체가 온통 자줏빛으로 퉁퉁 부어오른 여자가 슬픈 얼굴을 하고 앉아 있다. 아아....오늘은 여기까지만....작은엄마는 다음에 오세요...무섭고 슬프단 말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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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lkitchen 2004-02-12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01년 10월 16일에 쓴 글. 황석영은 내게 이런 울림을 주던 작가였다.
(글을 다시 읽다 보니, 아래에서 쓴 마지막 해에 이모를 못 봤다는 건 아니었나 보다. 그래, 머리를 짤라 달라고 가위를 들고 왔었다. 나는 도망갔었다...)

비발~* 2004-02-12 18: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쏠키야 사람 맘 좀 고마 미어지게 해라...ㅜㅜ

soulkitchen 2004-02-12 1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a 그나저나 비발쌤, 원숭이 수건이 도착했다는 분덜이 많이 계신데, 쌤은 아직 못 받으셨는게라우? 받으셨음 우덜도 구경 잠 시켜주씨요..디카로 팡! 찍어서..

2004-02-12 18: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발~* 2004-02-12 1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았으... 들왔더니 현관에 놓여있드만, 잠깐 기다리더라고~

비로그인 2004-02-13 0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똑같단 생각이 들어요. 자기 자신 안에 사는 사람과 외부의 사람들과 부딪히는 사람들. 내 안에 있는 수많은 나와 다른 나. 이모님은 그런 자신을 바라보았을 것이고 우리는 타인들을 통해 나를 들여다 본다는 것만 다를 뿐...분명히 예사 사람관 달리 무척 아름다운 이모님이셨을 거에요. 이모님의 평안을 빕니다.

마태우스 2004-02-13 0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가슴이 미어지는 글입니다....저도 이모님의 평안을 빌겠습니다.

비로그인 2004-03-25 0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폭스바겐님 댁 갔다가
이 글을 거기서 읽고
맘이 쨘 해져서
그렇구 그랬었다는
이야기가, 여섯 줄!
 

 

원래, 도서정가제가 풀린 후에 사려던 책을 이번에 5만 원 적립금도 받고 해서 기분이다 싶어 샀더니..돈으로 물르고 싶다. 이거랑 같이 끼워팔기로 들어온 모랫말 아이들까지 같이. 이 책들을 나는 장장 11일에 걸쳐 읽었다. 이는 장길산 한 질을 읽은 기간과 맞먹는다. 황석영에게 내가 이러면 안 되는데..아니다, 나에 앞서 황석영이 우리에게 이러면 안 된다.

내가 읽은 이, <심청>은 기획력과 자료만 있으면 누구나 쓸 수 있을 소설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아니 차라리 젊은 신인 작가가 썼다면 아주 죽이는 작품이 나올 수도 있었을 매력적인 소재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를 황석영은, 의뢰받은 자서전 전문 작가처럼 꾸려 나가고 있다. 황석영이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하는 건 나 뿐인지, 평론가들이고 뭐고 칭찬 일색이다.

황석영은 몇 달 전, 중앙일보의 이문열과 대담으로 엮은 특집 기사에서 자기는 한창 때 옥살이를 해 돈벌이는 영 시원찮았다, 그 동안 이문열 씨는 돈 많이 벌어두지 않았냐, 이번 삼국지도 내 책이 도서정가제에 묶여 이문열 씨 꺼보다 덜 나가지만 그래도 제법 나가는 편이다..라며 돈에 대해 제법 솔직하게 얘기를 했었는데 나는 그게 나빠보이지 않았다. 어, 솔직하군, 역시 황구라다워. 솔직해서 좋잖아, 그랬다. 그래서 나도 솔직하게 말하는데, 돈 아깝다..제길..

   

이 책도 마찬가지. 책으로 엮일만한 이야기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아니 엮었어도 두 배는 되게 엮을 것이지 달랑 이렇게 열 편 남짓에 책 값은 6,500원이라니! 공짜로 딸려 온 것이기에 망정이지 땅을 치며 후회할 뻔하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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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lkitchen 2004-02-12 1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희 동네에 사신다면 빌려드리고 싶구만요. 근데 봐하니...멀리 계시는 것 같고, 도서관에서 빌려보시는 것도 괜찮으실 듯.

마태우스 2004-02-13 0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서재에 와주셨더군요. 님의 후련한 글을 보니 황석영의 명성이 무서워 비판을 제대로 못한 저의 소심함이 부끄럽네요. "그래서 나도 솔직하게 말하는데, 돈 아깝다..제길.." 이말이 특히 멋집니다.

soulkitchen 2004-02-13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야 뭐 공식적으로 그런 것도 아니고, '우리끼리 얘긴데..' 이런 수준이지만, 마태우스님이야말로 공식 리뷰에다가 무슨 유사 에로물 "심창"인 줄 알았다..햐..이게 제대로 한 방입죠. 방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태극기를 휘날리며"라니, 가당찮다. 차라리 솔직하게 "오, 형제여" 내지는 "무엇을 위하여 총구는 불을 뿜나" 정도로 하는 것이 낫겠다. 세계 시장에서 한국영화라는 이미지를 부각시키기 위해 지은 제목이라면 뭐 할 말 없다. 근데 그렇다고 해도 웃기다. 저 "태극기"라는 영문 제목 아래 조그맣게 "태극기는 대한민국의 국기를 말함"이라는 설명이 붙을 것이 아닌가. 거기에 좌,우의 대립으로 일어났던 전쟁이 배경이라고 하니, 아 저건 반공이데올로기로 점철된 극우영화겠구나, 라는 생각을 누군들 하지 않겠는가. 나도 그랬는데.

그러나, 반공영화 아니다. 그리고, 제목에서의 반감은 영화를 보는 동안만은 잊게 된다. (물론 다 보고 나서는 근데 왜, 태극기냐고~하게 되지만) 내가 지금 전장에 있는지 극장에 있는지조차도 분간할 수 없도록 혼을 쏵 빼놓게 잘 만들어진 전투 장면 속에서 뭘 제대로 생각 해보기란, 나같이 평소에도 머리로 생각하기보다는 가슴으로 느끼기 좋아하는 사람(그니까 머리는 나쁜데 감성은 나름대로 풍부한) 사람에겐 애시당초 불가능하다. 피난민들의 행렬, 중공군의 인해전술, 몰살된 마을의 참혹한 모습..이런 말은 좀 거시기하지만 시체 하나하나에까지 들인 정성은 정말 놀랍기만 하다. 국사책의 한 줄 역사가 아니라 이건 정말 전!쟁!이었구나 싶어지는 것이, 갑자기 그 시기를 겪어 온 모든 어른들께 경외감까지 느껴지는 거다. (이쯤 되면 머리의 운동은 완전 멎는다)

하지만, 그 뿐이다. 같이 영화를 봤던 동생은, 주인공들이 인물이 좋으니 감정이입이 몇 배나 잘 된다고 했지만, 그래서 영화를 보고 나와서도 콧물 훌쩍이며 정말 잘 만들었다고 감탄했지만, 나는 초반부터 감정이입에 완전 실패하고 말아,(사실 별로 땡기지 않는 영화였는데, 공짜로 표가 생기는 바람에 그냥 봤던 것이므로 내내 좀 꼬여 있었다) 후반엔 전투 중에 형제가 서로 찾으러 댕기고 하는 장면에서는 왜 이렇게 길게 끄냐 싶으면서 몸이 마구 뒤틀렸다. 두 주인공의 연기도 사람들은 극찬을 하던데, 뭐..내 생각은 그렇다. 그런 영화에서는 누구나 그 정도는 할 거라고. 다만, 두 사람의 외형적 조건이 그 배역에 잘 어울리기는 했다. 해외 시장에서도 영화의 시각적 완성도와 함께, 저 정도 외모의 배우면 거 좀 먹히겠다 싶기도 하고.

아무튼 내 맘에 썩 들지는 않았지만 잘 만들어진 영화임에는 틀림없다. 게다가 이 영화는 삼대가 둘러 앉아, 그 시기를 겪었던 어른들의 생생한 증언과 함께 하면 더욱 좋을 영화다. 주인공 형제들의 얘기는 잊어도 좋다. 개봉영화가 해가 바뀌기도 전에 TV에 방영되는 요즘의 추세로 보건대, 내년 설쯤이면 온 가족이 둘러 앉아 TV에서 볼 수도 있겠다. 그 때가 되면 태극기는 펄럭이지 말고, 가족끼리 둘러 앉아 옛날 이야기하며 보면 딱 좋겠다. 단, 식사시간은 피하는 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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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발~* 2004-02-08 1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식사시간 피해서 봐야하는 영화는 시러...ㅜㅜ 울 딸이 보자고 조르는데 어찌할끄나...

비로그인 2004-02-09 0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 꿈틀꿈틀하는 것들 나오고 그러면 죠그셔틀로 계속 틀어보는데...친구네집에서 그러고 있다가 리모콘으로 등짝 딱 ~ 소리 나게 맞았네요. 제 취향이 SF, 괴기, 호러, 컬트, 스릴러, 공포...대충 이렇습니다요. 키키키...심약한 우리의 비발샘. 영화가 끝나고 극장불이 켜졌을 때 하나가 비발샘에게 '엄마, 가자, 에이 씨씨해~!' 그러면서 비발샘의 어깨에 손을 얹는 순간, 조용히 옆으로 쓰러지는 우리의 비발샘 ~ 쿠하하하...

비로그인 2004-02-09 0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 멋진 감상평 잘 보았습니다. 추석까지 기다려 보죠. 뭐, 그 안에 분명 이 영화, 잊어버릴 듯...

soulkitchen 2004-02-09 1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비발샘, 보세요. 괜찮아요. 전쟁의 참혹함에 대해 잘 모르는(그저, 게임같이만 생각하는) 아이들이 한 번쯤 보면 좋을 영화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징그러운 장면 몇 안 되요. 살점 몇 번 튀고, 썩은 살에 구더기 들끓고, 깨진 머리에서 골인지 뭔지 비져 나오고, 시체가 정말 시체 같다는 거 말고는..@,@ 글구, 복돌성..거참..저는 살아있는 육체가 헐떡이는 영화는 미치게 좋아하는데, 이젠 죽은 몸이 꾸불텅대는 건 못 보겠더라구요..으..혹시, 성.."네크로맨틱" 보셨어요? 시간(屍姦)하는 사람들 얘기..제가 그거 보고 완전 그쪽에서 시선을 접었더랬어요...에구...어제 간만에 사람들하고 술먹어(맨날 혼자 먹다가) 너무 오버하는 바람에 시방까지도 죽겠수..

비로그인 2004-02-09 1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긍게 난 할리우드 공포가 젤 싫은데 얼마든지 그런 잔인하고 엽기적인 장면을 배제하더라도 우리 내부안에 잠재된 공포를 끌어내올 수 있어요. 꼭 그딴 식으로 자극적인 장면에만 치중해야 하느냐, 라는 게 의심스럽더만요. '네크로맨틱'은 못 봤네요. 시간...으...보통 간뗑이가 부은 게 아니구만. 아무튼, 쏠키님, 속을 푸셔야 할텐데. 근처에 해장국집 같은 거 있으면 뜨끈한 국물 사드세요. 얼큰한 전주 콩나물국밥 한 그릇 때리면 속이 개운해져요...뿌시락뿌시락 김도 넣고...나두 오늘 새벽까지 꼬창에 멸치찍어 맥주 마시다 잤네요. 얼굴이 밀가루 반죽에 이스트 넣은 것 마냥 팅팅 부었는데...나가려고 단화 찾아봐도 당최 안 보여요. 복돌이 이 자식이 또 어데다 물어다놨는지. 1시간째 이러고 동동거리네요.

soulkitchen 2004-02-09 1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구, 복돌이 자식. 다 나았구만. 다시 장난치는 거 보니..전주콩나물국밥 말만 들어도 속이 션해지는 것 겉은 것이..쩝..배고프다..엇..우리 밥 시켜먹는 집에도 전주콩나물국밥이 있어서 지금 그거 시켜놓고 기다리고 있어요. 언젠가 전주서 먹었던 그 맛 같기야 하겠습니까만..쓰읍..

비발~* 2004-02-09 1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안에 잠재된 공포..." 히야~ 그나저나 신발을 찾았는지? 혹시 못 나간 거 아닌감? 쏠키는 속 풀었는지? 헐헐. 난 집에 왔는데 쏠키는 어디쯤 (가고) 있을라나? 자라자는 어디있을지 짐작가지만서두~

마태우스 2004-02-13 0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영화평을 잘쓰는 분을 지금까지 몰랐다니! 아니, 지금이라도 알게 되어 다행인지도^^ 잽싸게 즐겨찾기 등록했습니다. 자주 오렵니다.
 

 "형호야, 니 저 밑에 엎드려 볼래?"

그러나 아우는 상기된 얼굴로 나의 속내를 꿰뚤어 본다는 투로 대꾸했다.

"히야가 내 등때기 밟고 올라설라꼬 그래제?"

"살짝 밟는다."

"내사 몬할따."

"내가 엎드리고 니가 올라서면 니는 키가 안 자라서 안 된다 카이."

그러나 아우는 나를 엉뚱한 쪽으로 몰려 하고 있었다.

"엄마가 곧 올 긴데."

"엄니 오자면 아직 채로 멀었다."

"내 등때기가 빠개질 긴데."

"안 빠개진다."

"내 숨통이 막힐 긴데."

"안 막힌다."

"내 허리가 부러질 긴데."

"안 부러진다."

"내가 죽을 긴데."

"니 자꾸 안달 굴래?"

"다락 속에 있는 거 축내면 엄마가 당장 알 긴데."

"축 안 내고 보기만 한다."

"보기만 해도 엄마가 알 긴데."

"건드리지도 않는다."

"니 죽고 싶나?"

.

.

<아이와 반편의 대화>

"거짓말하면 똥구멍에 털 난다 카던데요."

"똥구멍에 털 나는 거는 걱정 마라. 내가 뽑아 줄 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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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4-02-07 0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다락 속에 있는 게 곶감인가...? 쿠헐헐...똥구멍 털...깨누만요...

soulkitchen 2004-02-07 0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고 싶던 책이라도 느낌표!에서 선정됐다면 꺼려지는 건 무슨 심뽈까. 이 책도 그런 걸, 동생네 미술학원의 학모가 선물로 줬대서 좋아라~봤다. 아이가 화자인 소설은, 그 애들이 아무리 영악해도 아니 영악해서 더 짠하고 가슴이 먹먹하다. 이 책을 보는 동안에도 내내 그랬다. 근데 이 부분은 너무 웃겨서, 책이라곤 통 읽지 않는 동생에게 읽어주기까지 했더니, 동생은 후에 내가 심부름만 시키면, 내 다리가 뿌개질 낀데, 내가 죽을 낀데. 그래서 내 복장을 터지게 만들었다.

비로그인 2004-02-07 0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사실 '느낌표'가 책의 기형적인 유통경로를 만들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순문학쪽으로 많이 치우쳐 있고 내용도 대부분 '반항하지 말고 착하게 살아라'라는 듯한 혐의가 느껴지더만요. 괜챦은 비문학 관련책들은 많이 사장되기도 하고 또 알게 모르게 방송 쪽에 로비를 하는 출판사들이 많았던 모양이에요. 학부모들은 무조건 방송 타면 좋은 책인줄 아는데 좀 의아한 책들도 있었어요. 특히 '가시고기'같은 류는 성공을 위해 모성을 버린다, 라는 극한 상황까지 여성성을 왜곡하던데요. 솔직히 '느낌표'가 국민의 독서량을 늘리는데에 작은 기여를 하긴 했지만 인문학적인 기초토대가 부실한 한국사회에서 방송으로 독서열풍을 부추긴다는 것은 왠지 근본적인 독서풍토를 바꾸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책 잘 읽기로 소문난 프랑스 사람들도 요새 텔레비전 위에 책 올려놓고 먼지만 쌓아두지 점점 세계적인 추세로는 독서량이 감소하는 현상이란 말입니다. 물론, 우리나라에 비하면 월등히 높지만 말에요. 그리고 사실 여성작가들의 성장소설엔 반감이 드는 건 사실인데요. 오버, 가 주종을 이룬다는 겁니다. 그 어린 나이에 생에 탐구를 하면 얼마나 한다고 쇠스랑이 발등을 찍던 그 해, 난 모든 인생을 알아버렸다, 라는 투로 이야기를 하는 겁니까? 전 [흰 뱀을 찾아서]의 작가 - 갑자기 이름을 까먹었네 - 의 작품을 가슴 아릿하면서도 아주 재미있게 읽었는데 유년시절의 기억을 딱 그만한 아이들의 보편적인 정서에 맞추어 썼더라구요.

비로그인 2004-02-07 0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쏠키님, 어서 주무세요. 피곤하실텐데...전 오늘 중요한 일과가 있어요, 이제 자빠집니다. 잘 자여 ~

soulkitchen 2004-02-07 0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나 더, 김지하 <모로 누운 돌부처> 중에서

또 공수 형님인가, 판수 형님인가, 키 작달막하고 등 잔뜩 굽고 리젠트 머리에 포마드가 번쩍번쩍, 단벌 흰 와이셔츠 바람에 웬 책 한 권은 노상 옆구리에 끼고 다니며 웩웩하고 된목에 쇳소리로 맨날 입만 벌리면 그저 똑같은 소리, 하잘 것 없는 동네 아이들 말싸움에 공연히 끼어들어 책을 공중에 냅다 흔들어대며

"민주주의가 말이여, 헌법이 있는디 말이여, 엄연한 삼권분립인디, 국민의 신성한 권리를 갖다가 선거란 것이 있는디, 느그들이 머슬 으째야?"

그래 조무리개들이 그 형님만 보면

"쩌그 헌법 간다야"

"쩌그 민주주의 온다야"


soulkitchen 2004-02-07 0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이쿠 성님, 얼른 주무세요. 글고, 흰 뱀을 찾아서 저 책 여기서 찾아보니 품절 됐다는데, 제가 도서관이랑 동네 서점에 있는지 함 가 보구요, 없으면 성님한테 좀 빌릴 텡게 긴장하고 계쇼

비발~* 2004-02-07 06: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흠 쩨법 흥미진진한 대화들을 눈내리는 야심한 밤에 주고 받았구나~ 바로 그런 것이 쫄깃쫄깃 꼬막맛이제~

2004-02-07 06: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04-02-08 0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심포항이라고 이젠 거즘 폐어촌이 된 곳이 있는데요. 그 곳 꼬막칼국수 맛이 죽여줍니다. 꼬막집 앞에 봄바람이 불면 청보리밭이 물결처럼 흔들리고요. 그 뒤론 비릿하고 누런 바닷물이 간질간질 밀려오는데 지금은 새만금 때문에 새꼬막 다 죽었네요. 사람들도 많이 떠났고요. 근데...크하하하...쩌그 민주주의 온다야...에겨겨겨...그 얼라들 참, 무쉰 쪼글쪼글 노인네들 마냥 귀엽고만요. 근데 쏠키님, 오늘 '태극기...'잘 보셨남요? 사람들 다 재밌다고 하더만 전 왜 '삘'이 안 오죠?

soulkitchen 2004-02-08 15: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겨울꼬막 맛이시..염상구가 그랬던가...좌우당간, 그 말이 왤케 야시럽게 들리던지..아, 복돌성, 꼬막칼국수 정말 맛나겠어요. 저는 밖으로 잘 나댕기지도 않고, 여럿이 하는 술자리 같은 것도, 밖에서 음식 사 먹는 것도 거의 안 해봐서 어디 음식 좋은 집, 술맛 좋은 집, 분위기 좋은 집 그런 거 잘 모르는데...이야기만 들어도 좋아라우. 우리 사투리 진짜 좋아요. 갱상도고 전라도고, 최근에 이문구때문에 충청도 사투리도 또 좋아하게 생겼네..특히 쪼끄만 것들이 능청스레 사투리 쓰는 거 보믄 이뻐 죽겠어요.

2004-02-09 20:5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