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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생 김지영 ㅣ 오늘의 젊은 작가 13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16년 10월
평점 :
1.
케이트 블란쳇은 어느 시상식장에서 카메라가 자신의 몸을 아래에서 위로 훑어 찍자 카메라를 향해 “Do you do that to the guys?"라고 했다. 다른 프로그램에서 사회자가 올해가 여성의 해라고 말하자 그는 ”Oh for fucks sake, every year is the year of the woman" 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평소 그는 아들들에게 여자를 훑어보면 안된다고 얘기한단다.
2-0
“2년을 열렬히 연애하고 또 3년을 같이 산, 빗방울처럼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눈송이처럼 서로를 쓰다듬었던, 자신들을 반씩 닮은 예쁜 딸을 낳은 아내가, 아무래도 아내 같지가 않았다.” p.14
딸아이 하나를 키우는 전업주부 82년 생 김지영 씨가 어느 날 갑자기 이상해졌다. 마치 다른 사람이 빙의된 무속인처럼, 그는 자신의 친정 엄마가 되었다가, 아이를 낳다 죽은 선배가 되었다가 한다. 그냥 그런 척하는 게 아니라, 말투며 행동이 아예 그 사람이 되어 버린 것이다.
3-0
설거지를 마치고 방에 들어오니 새벽 두 시가 조금 못된 시간이다. 땀을 어찌나 흘렸던지 브라까지 푹 젖었다. 기름기 많은 제사 음식의 특성상 제사설거지는 뜨거운 물로 하지 않으면 안된다. 라섹수술을 하고 좋은 점 중 한 가지가 제사설거지를 할 때 안경이 흘러내리지 않는다는 것이었으니 뭐, 말 다 했다. 땀으로 찔꺽이던 고무장갑을 벗고 비누로 손을 씻었는데도 고무 냄새가 가시지가 않는다. 그나마, 내 노동은 이게 전부이지만 저 주방에 앉아 뭘 그렇게 치우시는지 늙은 엄마의 일은 아직도 끝이 나지 않았다. 엄마는 어제도 오늘 할 일들을 준비하느라 새벽 3시를 넘기셨었다.
2-1
“남자애들은 원래 좋아하는 여자한테 더 못되게 굴고, 괴롭히고 그래. 선생님이 잘 얘기할 테니까 이렇게 오해한 채로 짝 바꾸지 말고, 이번 기회에 둘이 더 친해지면 좋겠는데.”
짝궁이 나를 좋아한다고? 괴롭히는 게 좋아한다는 뜻이라고? (....)
좋아한다면 더 다정하고 친절하게 대해야 한다. 친구에게도, 가족에게도,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나 고양이에게도 그래야 하는 거다. 그게 여덟 살 김지영 씨도 알고 있는 상식이다. 그 아이의 괴롭힘 때문에 학교생활이 너무 힘들었다. 그리고 이제껏 당해 온 것도 억울한데, 친구를 오해하는 나쁜 아이가 되기까지 했다. 김지영 씨는 고개를 저었다. p42.
초등학생 김지영 씨, 남자 짝에게 오래 괴롭힘을 당해 오다 드디어 선생님께서 그 사실을 알았는데, 선생님께서는 저렇게 얘기를 하신다. 그게 다 너를 좋아해서 그런 거라고.
3-1
여름 제사에 단술을 왜 자꾸 하는 거예요? 이 무거운 걸 불 위에 올렸다 내렸다...
느 증조할머니가 당신 제사에 다른 건 몰라도 단술은 꼭 올리 달라 했다카잖아.
엄마한테 직접 카신 거라?
야는 머카노..나는 느 증조 할머니 얼굴도 못 봤는데. 할머니가 카싰지.
그라마 나는 못 들어서 못 하겠소, 카지.
‘그믐 제사 몸써리 난다, 나는 보름에 죽을란다’ 캤던 양반이, 그래서 진짜 보름에 떠난 양반이, 그렇게 자손들 위한다믄 나 죽거든 아예 제살랑은 지낼 생각 말고 시원한 물이나 한 사발 떠 놔라 카실 일이지..
2-2
김지영 씨는 그날 아버지에게 무척 많이 혼났다. 왜 그렇게 멀리 학원을 다니느냐, 왜 아무하고나 말 섞고 다니느냐, 왜 치마는 그렇게 짧냐......그렇게 배우고 컸다. 조심하라고, 옷을 잘 챙겨 입고, 몸가짐을 단정히 하라고, 위험한 길, 위험한 시간, 위험한 사람은 알아서 피하라고, 못 알아보고 못 피한 사람이 잘못이라고. p.68
고등학생 김지영 씨, 뒤따라 붙는 치한을 낯선 여자의 도움으로 따돌렸는데, 놀란 마음을 위로는 받지 못할망정 아빠로부터 꾸중을 듣는다.
3-2
엄마들은 10시에 모여 커피를 한 잔씩 하고, 둘러 앉는다. 젊은 엄마들은 꼬지, 동그랑땡, 우엉전 같이 비교적 쉬운 걸 부치고, 늙은 엄마들은 오징어 튀김, 배추전, 부추전, 무전 따위를 부친다. 닭 한 마리를 통째로 간장에 졸이고, 조기를 굽고, 콩나물과 숙주나물, 도라지, 고사리, 시금치를 다듬고, 탕국을 끓이고, 수육을 삶는다.
그러다가, 끼니 때가 되면 전 부치는 기름 냄새와 연기 때문에 눈이 다 맵다고 거실에 앉아서 투덜대는 아빠들에게 밥을 차려 내간다.
제사상을 받으시는 분들은 모두 그 아빠들의 조상들이다. 젊은 엄마들은 심지어 그들 중 누구의 얼굴도 알지 못한다.
2-3
“나 원래 첫 손님으로 여자 안 태우는데, 딱 보니까 면접가는 거 같아서 태워 준 거야.”
태워 준다고? 김지영 씨는 순간 택시비를 안 받겠다는 뜻인 줄 알았다가 뒤늦게야 제대로 이해했다. 영업 중인 빈 택시 잡아 돈 내고 타면서 고마워하기라도 하라는 건가. 배려라고 생각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무례를 저지르는 사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항의를 해야 할지도 가늠이 되지 않았고, 괜한 말싸움을 하기도 싫어 김지영 씨는 그냥 눈을 감아 버렸다. p.101
아..성별이 가장 큰 직책이고, 가장 강한 무기이고, 가장 높은 벼슬인 아저씨들.
3-3
제사는 자시가 시작되는 11시에 지낸다. 엄마들은 접시에 음식을 담고 아들들이 그 접시를 제사상으로 옮긴다. 제사가 끝나면 다시 둘러 앉아 음복을 하고, 제삿밥을 먹는다. 그 시중도 물론 모두 엄마들 차지다. 아빠들은 절 몇 번 하고, 이미 지쳤다.
이제 남은 설거지는 늙은 딸 몫이다. 그게 3-0의 상황이고, 그 상황은 이미 종료다.
2-4
아기는 새벽 4시에 태어났다. 아기가 너무 예뻐서 김지영 씨는 진통할 때보다 더 많이 울었다. 하지만 예쁜 아기는 안아 주지 않으면 밤이고 낮이고 울기만 했고, 김지영 씨는 아기를 안은 채 집안일도 하고, 화장실도 가고, 잠도 자야 했다. 아기에게 두 시간에 한 번씩 젖을 먹이면서, 그래서 두 시간 이상 잠을 자지 못하면서, 예전보다 더 깨끗하게 집을 청소하고, 아기의 옷과 수건들을 빨고, 젖이 잘 나오도록 자신의 밥도 열심히 챙겨 먹으며 김지영 씨는 태어나 가장 많이 울었다. 무엇보다 몸이 아팠다. p.148
이 이후로, 아이를 키우며 김지영 씨는 몸보다 마음이 더 아플 것이다. 그리고 김지영 씨는 그 아픔을 이겨 낼 것이다. 실제로 82년 생 여자 중에 가장 많은 이름이라는 김지영 씨, 내 엄마이기도 자매들이기도 한 김지영 씨, 지나 온 시간들을 다시 돌아보게 한 김지영 씨, 읽고 있던 <피의 꽃잎들>을 잠시 덮게 한 김지영 씨, 아닌 건 아니라고, 아픈 건 아프다고 말하라는 김지영 씨.
3-4
다음 주도 제사고, 그 다음 주도 제사다.
4
나는 페미니스트라기보다는 휴머니스트다.
아니 나는 ‘무슨 주의자’ 라기도 우스운 그냥 조금 어리석은 사람이다.
그렇지만,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 일들에 대해, 으레 그래 왔던 일들에 대해, 그래서 별 생각없이 지나치던 일들에 대해 ‘그건 아니다’ 라고 말하는 용기를 가진 이들에게, 감사함을 표할 줄 알고, 그들의 용기에 박수쳐 줄 줄 아는 조금은 바른 눈을 뜨고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들은 참으로 아름답고 귀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