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기를 휘날리며"라니, 가당찮다. 차라리 솔직하게 "오, 형제여" 내지는 "무엇을 위하여 총구는 불을 뿜나" 정도로 하는 것이 낫겠다. 세계 시장에서 한국영화라는 이미지를 부각시키기 위해 지은 제목이라면 뭐 할 말 없다. 근데 그렇다고 해도 웃기다. 저 "태극기"라는 영문 제목 아래 조그맣게 "태극기는 대한민국의 국기를 말함"이라는 설명이 붙을 것이 아닌가. 거기에 좌,우의 대립으로 일어났던 전쟁이 배경이라고 하니, 아 저건 반공이데올로기로 점철된 극우영화겠구나, 라는 생각을 누군들 하지 않겠는가. 나도 그랬는데.

그러나, 반공영화 아니다. 그리고, 제목에서의 반감은 영화를 보는 동안만은 잊게 된다. (물론 다 보고 나서는 근데 왜, 태극기냐고~하게 되지만) 내가 지금 전장에 있는지 극장에 있는지조차도 분간할 수 없도록 혼을 쏵 빼놓게 잘 만들어진 전투 장면 속에서 뭘 제대로 생각 해보기란, 나같이 평소에도 머리로 생각하기보다는 가슴으로 느끼기 좋아하는 사람(그니까 머리는 나쁜데 감성은 나름대로 풍부한) 사람에겐 애시당초 불가능하다. 피난민들의 행렬, 중공군의 인해전술, 몰살된 마을의 참혹한 모습..이런 말은 좀 거시기하지만 시체 하나하나에까지 들인 정성은 정말 놀랍기만 하다. 국사책의 한 줄 역사가 아니라 이건 정말 전!쟁!이었구나 싶어지는 것이, 갑자기 그 시기를 겪어 온 모든 어른들께 경외감까지 느껴지는 거다. (이쯤 되면 머리의 운동은 완전 멎는다)

하지만, 그 뿐이다. 같이 영화를 봤던 동생은, 주인공들이 인물이 좋으니 감정이입이 몇 배나 잘 된다고 했지만, 그래서 영화를 보고 나와서도 콧물 훌쩍이며 정말 잘 만들었다고 감탄했지만, 나는 초반부터 감정이입에 완전 실패하고 말아,(사실 별로 땡기지 않는 영화였는데, 공짜로 표가 생기는 바람에 그냥 봤던 것이므로 내내 좀 꼬여 있었다) 후반엔 전투 중에 형제가 서로 찾으러 댕기고 하는 장면에서는 왜 이렇게 길게 끄냐 싶으면서 몸이 마구 뒤틀렸다. 두 주인공의 연기도 사람들은 극찬을 하던데, 뭐..내 생각은 그렇다. 그런 영화에서는 누구나 그 정도는 할 거라고. 다만, 두 사람의 외형적 조건이 그 배역에 잘 어울리기는 했다. 해외 시장에서도 영화의 시각적 완성도와 함께, 저 정도 외모의 배우면 거 좀 먹히겠다 싶기도 하고.

아무튼 내 맘에 썩 들지는 않았지만 잘 만들어진 영화임에는 틀림없다. 게다가 이 영화는 삼대가 둘러 앉아, 그 시기를 겪었던 어른들의 생생한 증언과 함께 하면 더욱 좋을 영화다. 주인공 형제들의 얘기는 잊어도 좋다. 개봉영화가 해가 바뀌기도 전에 TV에 방영되는 요즘의 추세로 보건대, 내년 설쯤이면 온 가족이 둘러 앉아 TV에서 볼 수도 있겠다. 그 때가 되면 태극기는 펄럭이지 말고, 가족끼리 둘러 앉아 옛날 이야기하며 보면 딱 좋겠다. 단, 식사시간은 피하는 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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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발~* 2004-02-08 1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식사시간 피해서 봐야하는 영화는 시러...ㅜㅜ 울 딸이 보자고 조르는데 어찌할끄나...

비로그인 2004-02-09 0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 꿈틀꿈틀하는 것들 나오고 그러면 죠그셔틀로 계속 틀어보는데...친구네집에서 그러고 있다가 리모콘으로 등짝 딱 ~ 소리 나게 맞았네요. 제 취향이 SF, 괴기, 호러, 컬트, 스릴러, 공포...대충 이렇습니다요. 키키키...심약한 우리의 비발샘. 영화가 끝나고 극장불이 켜졌을 때 하나가 비발샘에게 '엄마, 가자, 에이 씨씨해~!' 그러면서 비발샘의 어깨에 손을 얹는 순간, 조용히 옆으로 쓰러지는 우리의 비발샘 ~ 쿠하하하...

비로그인 2004-02-09 0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 멋진 감상평 잘 보았습니다. 추석까지 기다려 보죠. 뭐, 그 안에 분명 이 영화, 잊어버릴 듯...

soulkitchen 2004-02-09 1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비발샘, 보세요. 괜찮아요. 전쟁의 참혹함에 대해 잘 모르는(그저, 게임같이만 생각하는) 아이들이 한 번쯤 보면 좋을 영화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징그러운 장면 몇 안 되요. 살점 몇 번 튀고, 썩은 살에 구더기 들끓고, 깨진 머리에서 골인지 뭔지 비져 나오고, 시체가 정말 시체 같다는 거 말고는..@,@ 글구, 복돌성..거참..저는 살아있는 육체가 헐떡이는 영화는 미치게 좋아하는데, 이젠 죽은 몸이 꾸불텅대는 건 못 보겠더라구요..으..혹시, 성.."네크로맨틱" 보셨어요? 시간(屍姦)하는 사람들 얘기..제가 그거 보고 완전 그쪽에서 시선을 접었더랬어요...에구...어제 간만에 사람들하고 술먹어(맨날 혼자 먹다가) 너무 오버하는 바람에 시방까지도 죽겠수..

비로그인 2004-02-09 1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긍게 난 할리우드 공포가 젤 싫은데 얼마든지 그런 잔인하고 엽기적인 장면을 배제하더라도 우리 내부안에 잠재된 공포를 끌어내올 수 있어요. 꼭 그딴 식으로 자극적인 장면에만 치중해야 하느냐, 라는 게 의심스럽더만요. '네크로맨틱'은 못 봤네요. 시간...으...보통 간뗑이가 부은 게 아니구만. 아무튼, 쏠키님, 속을 푸셔야 할텐데. 근처에 해장국집 같은 거 있으면 뜨끈한 국물 사드세요. 얼큰한 전주 콩나물국밥 한 그릇 때리면 속이 개운해져요...뿌시락뿌시락 김도 넣고...나두 오늘 새벽까지 꼬창에 멸치찍어 맥주 마시다 잤네요. 얼굴이 밀가루 반죽에 이스트 넣은 것 마냥 팅팅 부었는데...나가려고 단화 찾아봐도 당최 안 보여요. 복돌이 이 자식이 또 어데다 물어다놨는지. 1시간째 이러고 동동거리네요.

soulkitchen 2004-02-09 1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구, 복돌이 자식. 다 나았구만. 다시 장난치는 거 보니..전주콩나물국밥 말만 들어도 속이 션해지는 것 겉은 것이..쩝..배고프다..엇..우리 밥 시켜먹는 집에도 전주콩나물국밥이 있어서 지금 그거 시켜놓고 기다리고 있어요. 언젠가 전주서 먹었던 그 맛 같기야 하겠습니까만..쓰읍..

비발~* 2004-02-09 1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안에 잠재된 공포..." 히야~ 그나저나 신발을 찾았는지? 혹시 못 나간 거 아닌감? 쏠키는 속 풀었는지? 헐헐. 난 집에 왔는데 쏠키는 어디쯤 (가고) 있을라나? 자라자는 어디있을지 짐작가지만서두~

마태우스 2004-02-13 0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영화평을 잘쓰는 분을 지금까지 몰랐다니! 아니, 지금이라도 알게 되어 다행인지도^^ 잽싸게 즐겨찾기 등록했습니다. 자주 오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