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
줌파 라히리 지음, 이승수 옮김 / 마음산책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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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예비소집에서 알파벳 쓰기 숙제를 받아오던 순간부터 나는, 영어를 잘 하고 싶었다. 영어가 참, 쓰기 편한 글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글처럼 초중종성이 따로 있지 않아 한 줄로 길게 쓰기도 편하고, 가끔은 줄 위로 치솟거나 줄 아래로 늘어뜨려지는 글자들이 있어 멋스러워 보였다. 대문자와 소문자로 나뉘어져 있는 것도 신기하고, 대문자와 소문자를 구별해서 써야하는 것도 신기했다. 발음은 또 어떤가. 혀가 요상하게 말려 들어가는 r 발음은 세련되어 보였고, 뭔가 약오르게 들리는 뻔데기 발음은 재미있었고, g와 z, p와 f 발음의 차이 같은 것들도 신선했다.

 

그날로부터 삼십 년이 지난 오늘도 나는 영어를 잘 하고 싶다. 삼십 년이면 배우고 익히기 충분했겠구만, 배우는 건 어설프고 익히는 건 귀찮아, 나는 아직도 영어를 잘 하고 싶기만 할 뿐 전혀 잘 하지는 못한다. 아, 잃어버린 삼십 년이여.

 

쭘파 라히리는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1994년 동생과 이탈리아 여행을 하던 중, 이런 마음을 느끼게 된다.

“어느 날 우연히 만났는데 금방 어떤 인연, 애정이 느껴지는 사람. 아직 알아야 할 게 많은데도 오래전부터 알아온 것 같은 느낌. 이탈리아어를 배우지 않으면 날 채울 수 없고 내가 완성되지 않으리라는 걸 알았다. 내 안 빈 공간, 그곳에 이탈리아어를 편히 자리 잡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p.21

 

그래서 그녀는 치열하게 공부를 시작하고 드디어 2015년, <IN OTHER WORDS(IN ALTRE PAROLE)>라는 제목의 이탈리아어로 이 책을 내게 된다. 이미 영어권 작가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그녀에게 영어로 글을 쓴다는 건 “장비를 잘 갖추고 쉽게 산에 오르는 것처럼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했던 것이다. ‘치열하게 공부했다’라고 나는 간단하게 적고 있지만, 그 치열함은 이 책 곳곳에 풀어져 있고, 나를 부끄럽게 한다.

 

“나는 노력을 좋아한다. 다른 언어로 읽는다는 건 성장과 가능성의 끝없는 상태를 내포한다. 배우는 초심자로서의 내 일은 절대 끝나지 않으리라.”p.42

 

내 텅 빈 삼십 년과 그녀의 꽉 찬 이십 년의 차이는, 결국 열정과 노력이었다. 언제나 정답은 일찍 찾는데, 언제나 열쇠는 일찍 꽂는데, 정답이 적힌 답안지는 성적으로 매겨져 돌아오지 않고, 꽂힌 열쇠는 녹이 슬어 돌아가지가 않는다. 다시 자극을 받았으니 달라질 수 있을 것인가 기대해보지만, 사람이란 게 쉬이 달라지는 물건이 아니더라.

 

이 작고 아름다운 책의 백미는 그러나 따로 있으니 바로 제목의 저 한 문장이다. 이 문장은 작가가 사전에 대해 쓴 문장에서 따 온 것이다.

 

“이 사전으로 나는 다른 책들을 읽고, 새로운 언어의 문을 열 수 있다...

사전에는 비밀들이 가득하다.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 p.18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

이 책의 소개를 신문에서 처음 봤던 그 날부터 이 짧은 문장은, 책을 대하는 내 마음을 대변하는 아포리즘으로 자리잡았다. 이 문장이 너무나 멋있고 좋아서 내가 좋아하는 모든 책의 저자들에게 이렇게 얘기하며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은 마음이다.

 

‘당신이 쓰신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큽니다.

나를 한 뼘 더 키워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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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전 하나로도 행복했던 구멍가게의 날들
이미경 지음 / 남해의봄날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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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다녀갔다. 함께 모여 구슬아이스크림을 만들고, 티비를 조금 보다가, 괴물놀이를 하고, 둘러 앉아 그림을 그리고, 각자 그린 그림으로 이야기를 지어내 해 달라고 하고, 컴퓨터로 좋아하는 동영상들을 하나씩 보고, 이불속에 숨는 놀이를 하고, 다같이 고무 다라이에서 목욕을 하고는 각자 집으로들 돌아갔다. 이렇게 노는 모습을 찍어 친구에게 보여줬더니, “너네 아이들은 뭔가 우리 어린 시절 같다”고 얘기를 한다. 마주보고 깔깔대며 땀 흘리며 노는 아이들을 보니, 정말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고만고만한 몸뚱이와 발 디딜 땅만 있으면 뭐라도 하며 놀 수 있었던 우리 어린 시절.

 

거기에 동전 하나만 있으면 그 풍요로움은 절정으로 치달았다. 50원짜리 ‘오뎅’ 하나 천천히 음미하며 먹고, 짭조롬한 국물 플라스틱 바가지로 배가 터지도록 먹으면 한겨울 추위쯤은 그냥 우스웠고, 10원짜리 ‘쨈’ 사다가 입술에 루주처럼 바르며 놀다가 조금씩 핥아먹으면 그 맛은 또 얼마나 야릇하고 좋았던가. 어쩌다 100원이라는 거금이 생기면 ‘밀크캬라멜’을 사 먹을 수 있는데, 이는 정말 천상의 맛이었다.

 

여러 가족이 함께 산 마당 넓고 펌프 물 시원하던 우리 옛집과, 우리 골목과, 골목에 나와 앉아 있는 동네 어른들 그리고, 전봇대 옆 현주네 점빵. <동전 하나로도 행복했던 구멍가게의 날들>은 그런 고마운 기억들을 일깨워준다. 어린 우리들을 키워준 건 가족의 관심과 사랑과 함께 바로 그런 것들이 아니었겠나 생각하며.

 

“평온하고 따뜻한, 수평을 지향하는 마음을 그림에 담는다. 주제가 되는 이미지를 중앙에 떡 하니 배치해 자리를 잡고 그와 함께하는 사물로 아기자기하게 화면을 구성한다. 날카로운 선의 촘촘한 중첩 속에 하나의 형상이 모습을 드러내고 하얗게 남겨진 배경과 조화를 이뤄 여백의 미와 정중동의 회화 원리를 표현한다. 몸을 낮추고 거센 비바람과 혹한, 그리고 모진 세월에도 견디어 내는 구멍가게는 작지만 단단하게 그린다.” p. 138

 

"수직에서 느껴지는 경쟁과 성공 지향의 이미지와 엄숙함, 숭고함이 나는 낯설다. 그저 동시대의 소박한 일상이나 사람과 희망에 의지하여 오늘도 작업에 임할 뿐이다. 정겨운 구멍가게, 엄마의 품, 반짇고리 같이 잊고 있던 소중한 마음을 되돌아보게 하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 p. 139

 

이 책에는 작가가 20여 년 동안 전국 곳곳의 구멍가게를 찾아다니며 그린 펜화 80여 점이, 작가의 담백한 글과 함께 실려 있다. 오래 곁에 두고 천천히 몇 번이고 다시 보고 싶은 따뜻한 구멍가게의 모습들이, 사계절 자연 풍광과 곁들여져 있기도 하고, 몇 그루 나무와 함께 있기도 하고, 오롯이 홀로 서 있기도 하다. 오롯이 홀로 있는 구멍가게라도 쓸쓸해 보이진 않아, 당장 개구진 꼬마 하나가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고 과자 하나를 들고 뛰어 나올 듯 쓸쓸해 보이지 않고, 여름 한 낮의 구멍가게 앞엔 물이라도 한바가지 뿌려 놔야 될 것 같은 열기가 뿜어져 나오는 듯하기도 하다. 사람은 하나도 볼 수 없지만, 이제 좀 나가도 되겠냐며 그림 한구석에서 쓰윽, 누구라도 나설 것처럼 모든 그림이 섬세하고, 생동감 넘치고, 정답고, 예쁘다.

 

나는 이 책을, 신문에서 보고, 인터넷으로 구입했다. 이 책이 내 손에 들어오기까지 어떤 정다운 눈맞춤도 대화도 없었다. 그게 슬펐다. 엄마에게 이 책 좀 보시라고, 이런 가게들이 기억 나시냐고, 정말 잘 그리지 않았냐고 자랑하며 나는, 좁고 긴 직사각형 모양의 가게, 바닥에서 천장끝까지 책이 빼곡이 꽂혀 있던 중앙서적의, 골라든 책마다 한마디씩 해 주시던 아저씨가 유독 그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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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기, 괴물
임철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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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만 일어서야 한다. 작별 인사를 하듯 그는 맞은편 실루엣을 잠시 응시한다. 거기 시간의 덩어리 하나, 세월의 불룩한 자루 하나가 홀로 방치된 채 소리 없이 녹아내리고 있다. 그 누추한 자루 속에 담긴 한 생애의 모든 시간, 추억, 풍경 들 그리고 이야기들도 함께 지워지고 있다. 그렇다. 아무도 모르는 사이, 작고 이름 없는 세계 하나가 지상에서 영원히 사라진 것이다.” p.152 <세상의 모든 저녁>

 

이 아름다운 글귀의 실상은 이러하다. 한 독거노인이 혼자 밥을 차려 먹다가 커다란 냄비 속에 머리를 박고, 심장마비로 죽어버렸다. 일주일이 지나도록 그의 시신은 누구에게도 발견되지 못한다. 이미 몸을 떠난 그의 영혼만이 자신의 주검을 안타깝게 지켜보며 누구든 와 주기를 바라지만, 그가 이승을 떠나야 할 때까지 누구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는 점점 참혹해져 가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자꾸만 울 뿐이다.

 

“맞은편 노인은 이미 거의 형체를 잃었다. 햇볕 아래 눈사람처럼 소리도 없이 흐물흐물 뭉개져 흘러내리고 있다. 피부는 시루떡처럼 검붉게 부풀어 오르고, 극도로 팽창한 복부의 압력에 러닝셔츠는 터지기 직전이다. 방바닥 어디에나 희멀겋게 살진 벌레들이 구물구물 기어 다닌다. 모두 곧 쉬파리로 변신할 놈들이다.” p. 148 <세상의 모든 저녁>

 

한 노인은 자신의 참혹한 주검 앞에서 이승을 떠나지도 못하고 울고 있고(세상의 모든 저녁), 또 한 노인은 언제 홀로 죽음을 맞을지 모를 자신의 처지를 직시하고, 아무도 몰래 죽을 수 있을 곳을 찾아 떠난다(흔적).

 

“당신은 철저히 혼자였다. 이제 당신을 두렵게 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 어떻게 죽어야 이 초라한 흔적을 지상에 남기지 않을 것인가. 바로 그것이 당신을 두렵게 했다.” p.39 <흔적>

 

내내 우울하게 했던 이 소설집을 읽으며 나는 늙음과, 죽음과, 사라져간 것들과, 사라져간 것들을 불러내는 소설가와, 아픈 상처를 핥듯 자꾸만 아픈 이야기들을 읽는 나와, 무너져가는 작은 세계들을 생각했다.

 

나는 늙음을 겪지는 못했지만 늙음의 모든 단계를 보고 있다. 나는 죽음을 겪지는 못했지만 죽음이 생각보다 가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사라져간 것들을 불러내지는 못하지만, 사라져간 것들을 불러내는 소설가의 글을 감사히 읽을 줄을 안다.

 

“헐겁게 반쯤 벌어진 입. 이마와 입 주위의 굵고 깊게 팬 주름. 듬성한 머리. 목덜미의 검버섯들........지금, 하나의 생애가 저기 앉아 있다. 아무도 모르는, 오직 그 혼자만의 시간들이 저 망가진 소파 위에 고여 있다.” p.300 <물 위의 생>

 

그 소설가 덕에 “아무도 모르는, 그 혼자만의 시간”들을 들여다 볼 수 있음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나는 젊은 옹기장이(세상의 모든 저녁)의 삶과, 뗏사공(물 위의 생)들의 이야기를 이 소설집을 통해 듣는다. 또한 강의 물길에 존재하는 여울들의 아름다운 이름을 소리내어 읽어 보기도 한다.

 

“바귀미여울, 범여울, 새범여울, 왕바우서리, 웃바우, 열두절, 황새여울, 된꼬까리, 상산암, 제남문......각 여울마다 특징도 천차만별이었다. 물길이 돌연 치솟는 여울, 쑥 가라앉는 여울, 오르내리기를 열두 번 하는 여울도 있었다. 바위도 마찬가지였다. 물을 빨아들이는 바위, 뱉어내는 바위, 소용돌이치는 바위, 물길이 역류하는 바위도 있었다.” p.332 <물 위의 생>

 

“임철우는 한국 현대사의 가장 참혹한 시간들을 현재 순간으로 되불러 오는 자, ‘기억의 발굴자’였다.” (김형중, 해설 중) 큰언니의 책장에서 작가의 전작 <봄날>을 진작 봐왔지만, 꺼내 읽을 생각도 하지 못한 건 무겁고 아플 거라고 생각해서였다. 내 짐작은 틀리지 않아, 임철우의 책은 무겁고 아팠지만, 또한 고맙고 따뜻했다.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을 사라져간 초라한 삶들, 지상에서 자꾸만 사라져 가는 “작고 이름 없는 세계”들을 이렇듯 따뜻하게 어루만져 주니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며 알라딘의 복돌성이 찍은 할머니의 손 사진을 생각했다. 찍은 이는 진작 서재를 떠났지만, 나는 이 사진을 간직하며 그가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어쩌면 이미 돌아와 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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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깜언 창비청소년문학 64
김중미 지음 / 창비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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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계절이 그렇지만 특히 봄은, 처박혀 책읽기에 더없이 좋은 계절이다. 볕은 적당히 따뜻하고 (그래서 실내는 춥지도 덥지도 않고), 빛은 적당히 강하고 (그래서 실내는 자연광으로 책읽기에 충분하고), 거리는 적당히 조용하다. 모처럼 아무 약속도 없는 주말 오전, 나는 눈을 뜨자마자 밥 한 술을 입에 떠넣고 침대 아래 햇빛이 가장 잘 들어오는 방구석에 방석을 깔고 쪼그리고 앉아 <모두 깜언>을 읽기 시작한다.

 

소쩍새 울면 참깨 심고, 꾀꼬리 울면 고추 모 심고, 뻐꾸기 울면 콩 심고, 보리 베고, 모 심고, 피 뽑고 그러다 보만 여름 가고, 가을 오고, 겨울 오고, 그러만 이 할머이는 칠십을 훌쩍 넘겨서 팔십이 될 거고. 그 전에 하느님이 불러 가실 수도 있고 그런 거야. 그러니 뭐가 반갑겄냐? 살날이 창창한 너나 꾀꼬리 소리 들으면 좋지. p.31

 

꾀꼬리 소리가 좋다는 아이에게 할머니가 하는 말이다. 계절의 오고감이 이렇듯 명료하고 아름답게 그려질 수 있구나, 싶어 옮겨 적어 본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 여자아이는 구순구개열, '언청이'라 불리는 기형을 갖고 태어난 아이이다. 엄마가 성병에 걸리면 언청이를 낳는다는 동네 사람들의 수군거림에, 아이의 아빠는 엄마의 과거를 의심하여 학대하고, 견디다 못한 아이의 엄마는 아이를 버리고 집을 나간다. 아이의 아빠도 집을 나갔다가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교통사고로 세상을 뜬다.

 

아버지의 사망 소식이 전해졌을 때, 할머니는 울지 않았다. 그러나 한밤중이면 할머니 울음소리가 들렸다. 남몰래 일어나 우는 게 아니라 자면서 울었다. 할머니 울음소리는 가을밤 컹컹 우는 너구리 울음소리 같았다. 무서워 할머니를 흔들어 깨우면 할머니는 자기가 울었다는 걸 알아채지 못했다. p.39

 

아비를 잃은 아이 앞에서, 아들을 잃은 어미는 울지 못했지만, 슬픔이 늙은 어미의 잠을 잠식해, 어미는 자면서 울었던가 보다. 아들을 잃은 어미의 슬픔이란 얼마나 큰 것인지 나는 짐작조차 못한다. 그저 살아 생전 어떤 어미도 그런 아픔을 맛보지 않기를 바랄 뿐이지만 세상 일이란 게 어디 내 뜻대로 흘러가는가.

 

아빠의 죽음도 엄마의 재혼도 그저 딴 세상 일 같기만 한 아이, 유정은 부모의 빈자리를 살갑게 채워주는 할머니와 작은아빠, 베트남인 작은엄마와 잘 지내지만, 할머니의 꿈 속 울음 같은 유정의 상처는 키우던 개가 낳은 무녀리를 대하는 가족들을 보며 터져 나온다.

 

"무녀리구만. 유정아. 너 그가이 제 어미한테 가져다줘라. 그거 못 살아. 넣으 주믄 아마 제 어미가 먹든가 알아서 할 거야. 개나 돼지나 그런 무녀리 한 마리씩 낳을 때가 있어. 그건 사람이 아무리 정성스레 키워도 못살아." p.75

 

뜬금없게도 그 순간, 언청이로 태어난 나를 그냥 굶어 죽으라고 윗목에 내벼려 뒀다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래서 유정은 그 무녀리 강아지를 살리고 싶었지만, 강아지는 젖병조차 빨지 못할 정도로 약하다.

 

문득 입천장이 갈라지고 코와 입의 경게가 없어 엄마 젖도 우유병도 빨지 못했다던 내 아기 때가 떠올랐다. 나는 내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아마도 나 역시 이렇게 젖 한 방울 제대로 넘기지 못했을 거라는 사실쯤은 상상이 갔다. p.78

 

유정의 곰삭은 상처가 죽은 무녀리 강아지를 통해 터져 나오듯, 이 책은 가난한 농촌의 상처, 학대받는 결혼이민자의 상처, 차별당하는 다문화 가정 아이들의 상처를 깜찍하고, 따뜻하고, 신랄하게 그려내고 있다. 아니, 하지만 상처만 있다면 그게 어디 세상인가.

 

가슴 간질간질한 아이들의 풋사랑이 있고, 그 아이들의 꾸는 다채로운 꿈이 있고, 어려운 가운데 다시 세워지는 농촌의 희망이 또한 아름답게 그려져 있다.

 

강화는 역사적으로 많은 부침을 겪은 곳이다. 청동기 시대와 고려 시대의 유적뿐 아니라 근현대사의 질곡이 곳곳에 남아 있고 그곳마다 이야기들이 숨어 있다. 농촌과 어촌의 삶이 공존하고, 수도권에 자리한 탓에 도시 문화가 유입되면서 사람들이 잇속에 밝고 도시에 대한 상대적 박탈감과 열등감 또한 높다. 그런 강화가 내 삶의 자리로 들어오는데 십 년이 넘게 걸렸다. 그리고 13년이 되어서야 농촌 이야기를 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p.329

 

작가 김중미는 작가의 말에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그의 따뜻하고 통찰력 있는 시선 덕에, 오늘, 게으른 내가, 그들의 이야기를 뉘늦게 읽으며 울고 웃고 했다. 세상은 넓고,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하는 이름난 곳들은 차고 넘치지만, 세상은 그만큼 깊고, 우리가 알고 보듬어야 하는 사람들도 이렇게 차고 넘친다는 것을 나는 차츰차츰 알아간다. 이렇게 좋은 책들로 인해.

 

작은아빠가 그랬다. 힘이 약한 존재들은 그렇게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거라고. 짝을 찾지 못한 할 살배기 까치들도 가을이 되면 자기들끼리 무리를 지어 매서운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며 겨울을 난다고. 언제나 혼자보다 여럿이 나은 법이라고. p.322

 

'깜언'은 베트남어로 '감사하다'란 뜻이라고 한다. 반나절 빛 잘 드는 방구석에서 이 책을 읽고, 해질녘 잠시 나가 머리를 자르고, 해진 후 집을 나서 슬슬 밤나들이를 했다. 맞은편에 앉아 종알종알 학교 친구들 이야기를 하는 아이의 표정은 밝고, 종일 침침하던 눈은 그 아이 표정만큼 밝아졌다. 내 게으른 하루와, 모든 사소한 일상과, 모든 사람들의 존재가 새삼 감사했다. 밤이 이미 깊다. 깊게 잠이 든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이렇게 속삭여주고 싶다.

 

"깜언, 모두 깜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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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이다
김탁환 지음 / 북스피어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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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풀의 만화 <이웃사람>은 이렇게 시작한다.

"죽은 딸이 일주일째 집으로 돌아오고 있다."

이 문장이 그저 소름끼치기만 했던 때가 있었다. 아이의 엄마는 아이를 잃게 된 죄책감과 두려움 때문에, 죽고 나서도 매일 집으로 돌아오는 아이에게 한 번도 따뜻한 인사를 건네지 못한다. 그저 두려움에 떨며 아이가 방으로 들어가는 기척을 느끼기만 한다. 아이는 자신을 돌아봐주지 않는 엄마의 모습을 슬프게 보며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는다. 무섭고도 슬픈 첫 문장, 첫 장면이었다.

 

만화보다 더 무섭고 슬픈 현실을 접하기 전까지, 저 문장은 그저 소름끼치고 인상적인 첫 문장이기만 했는데, 이제는 간절한 문장이 되어 버렸다. 아직도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죽은 아들, 딸들 때문에. 이제는 인양된 세월호와 함께 돌아올 수 있기를...그 아이들...

 

김탁환의 소설 <거짓말이다>를 읽던 밤들이 생각난다. 나는 평생 울 울음을 이미 다 울어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울음들이 남아서 이 책을 읽는 며칠동안 잠을 갉아 먹고, 몸을 무겁게 하고, 머리를 아프게 했다.

 

˝종후야! 올라가자. 나랑 같이 가자.˝
선내로 진입한 잠수사들이 실종자를 찾으면 대부분 이렇게 말을 건넸습니다. 그 말이 가슴에 머물든 입술을 통해 나오든, 실종자를 찾은 후엔 그 실종자와 함께 어둠을 뚫고 좁은 배 안을 빠져 나와야 하니까요. 잠수사들은 철석같이 믿었습니다. 실종자가 돕지 않는다면, 결코 그곳에서 모시고 나올 수 없다고.(...) 떠오르던 종후가 멈췄습니다. 쓰러진 침대 뒤쪽에 실종자가 더 있는 겁니다. 저는 틈 사이로 팔을 더 깊숙이 집어넣었습니다. 손으로 더듬으며 그곳 상황을 머리로 그렸습니다. 침대 뒤 그 좁은 공간에 남학생 세 명이 원을 그리듯 어깨동무를 하고 뭉쳐 있는 겁니다. 종후까지 네 아이가 서로 부둥켜안고 마지막 순간을 맞았을 겁니다. 엇갈려 붙은 어깨와 손을 더듬는데 다시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 p.81

 

이 소설은, 세월호 선내에서 실종자들을 수습한 민간잠수사들의 이야기로, 업무상과실치사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한 잠수사를 위한 탄원서 형식과, 르포 형식이 번갈아 서술되고 있다. 탄원서에는 실종자들의 수습과정이, 르포 형식에는 외부적 상황들이 때로는 인터뷰 형식으로, 때로는 신문 기사나 인터넷 댓글의 형식으로 나와 있다.

 

방금 기물이 쏟아졌지만 이젠 벽 자체가 무너질 수도 있습니다. 그때는 목과 뒤통수를 얻어맞는 정도가 아니라 제 목숨까지 위태로울 겁니다. 벌을 서듯 양팔을 든 꼴이었습니다. 목에서부터 어깨를 타고 팔꿈치와 손목과 손끝까지 떨림이 퍼졌습니다. 비수로 관절 마디마디를 저미는 듯 아렸습니다. 그런 저를 향해, 희끄무레한 물체가 아주 천천히, 인사라도 건네려는 듯 곧장 다가왔습니다. 선내로 들어선 후 직선의 움직임은 처음이었습니다. 저는 그대로 서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실종자였습니다.
잠수사인 제가 실종자를 찾은 게 아니라, 실종자가 저를 찾아 다가온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입니다. - p.121

 

바디팩만 있다면, 민간잠수사가 선내에서 실종자를 발견하자마자 그 안에 모실 수 있습니다. 바디팩에 담아 옮기는 것이 민간잠수사가 끌어안고 움직이는 것보다 훨씬 안전합니다. 여러 번 건의했지만 바디팩은 지급되지 않았습니다. 바디팩 삼백 개도 주지 못할 만큼 이 나라가 가난한가 그런 생각도 솔직히 했습니다. - p.134

 

-미안합니다.
그 잠수사는 분명히 내게 미안하다고 했어. 생각들을 해봐. 잠수사가 내게, 나아가 유가족에게 미안할 게 무엇이 있겠어? 그들은 이 불편한 바지선에서 먹고 자며 실종자를 찾기 위해 잠수하는 사람들이야. (...) 나는 수학여행을 떠난 아들을 맹골수도에서 잃은 국민이고, 내 앞에 앉은 사내들은 억울하게 숨진 내 아들을 찾고자 매일 잠수하는 국민이라고. 국민과 국민이 만난 거야. 유가족과 잠수사가 서로 사과를 주고받아선 안 돼. 오히려 우린 함께 국민을 우롱하고 상처를 입힌 자들을 찾고 그들에게 공개 사과를 받아야 해. - p.181

 

 

추악한 소문들이 유가족에게만 덧씌워진 것은 아닙니다. 잠수사에 대한 악담도 인터넷에 가득했습니다. 몸값을 올리기 위해 시신을 발견하고도 일부러 선내에 두고 꺼내 오지 않았다는 댓글을 읽었을 땐 피가 거꾸로 솟는 듯했습니다. - p.264

 

 

이 책을 읽는 내내 내 마음이 그랬다.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그동안 너무 알지 못했던 것에 대한 미안함이 슬픔과 분노로 솟구쳤다.

작품의 모델이 된 김관홍 잠수사는 2016년 6월 숨진 채 발견됐다. 그의 죽음에 작가는 이렇게 쓰고 있다.

 

"소설 쓰는 기술이나마 지녔으니 다행인 걸까. 현실은 소설보다 훨씬 참혹하다. (...) 김관홍 잠수사라면, 이 여름부터 맹골수도에서 세월호가 인양될 때까지, 동거차도 감시 천막 앞 돌 리본 옆에 두 눈 끄게 뜨고 서 있을 것이다.

 

뜨겁게 읽고 차갑게 분노하라."

 

그리고 영화감독 변영주는 또 이렇게 말한다. 변영주의 목소리에 내 목소리까지 얹어 나도 말한다.

"부디 읽어 주세요."

 

다시, 강물의 만화 <이웃사람>은 살인범의 목소리로 이렇게 끝이 난다.

"죽은 여학생이 일주일째 지하실에서 올라오고 있다."

그들, 계속 살아오라고, 죽인 자들 앞에 계속 이렇게 살아와 억울한 죽음에 대한 진상을 낱낱이 밝히게 하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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