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인가 BMG에서 나온 샘플 씨디를 듣던 중에, "Don't drink the water"를 발견했다. 목욕탕스러운, 맑고도 굵은 목소리를 가진 남자 보컬이었는데 으르릉대는(나한텐 그렇게 들렸다) 창법이 아주 독특했다. 이거, 테잎 사서 일단 듣고 곡들 다 괜찮으면 씨디 사야지, 하다가 시간이 흘러 흘러..

산타나의 슈퍼내츄럴 앨범에서 다시 데이브 매튜스를 듣고 반가웠다. 공연 장면을 보니 이 앨범 속지에서의 사진과는 달리 약간 불은데다 뻣뻣한 몸은 또 어찌나 포레스트 검프 같던지. 보고 웃으며, 듣고 즐기며 아무튼 반가웠다. 매장의 씨디 진열장에 꽂힌 그 때까지 한 장도 팔리지 않고 있던 이 앨범을 다시 보며, 다음에 돈 생기면 바로 사야지, 하다가 시간이 흘러 흘러

어느 날, 한 외국인이 씨디 한 장을 골라 카운터 앞에 서는데...아뿔싸...이 앨범이다. 방심했다. 감춰 놨어야 했는데...이봐..친구...이거..파는 거 아니거든...이거, 내가 찜해놓은 거거든...그러고 싶었지만, 그는 손님이고, 나는 종업원이고....더욱 중요한 것은, 내 말을 그 친구가 알아 들을까, 하는 거였고, 아무튼..그렇게 눈 앞에서 이 씨디를 놓치고..시간은 흘러 흘러...아무리 주문을 넣어도 오지 않는 씨디..그렇게 시간은 흘러 흘러...

올 초, 대전의 ㅅ도매상이 극심한 불황으로 본사에 편입되는 바람에,  운좋게도 서울의 도매상에서 물건을 받게 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나는 이게 웬 떡이냐 싶어 얼른 포기했던 이 씨디를 다시 주문서에 곱게 적어 넣었고, 드디어 열흘 만인 오늘 수입 씨디로 받게 되었다. 아...길기도 하였어라...데이브 매튜스의 이 씨디를 갖기 위한 노력의 날들이여....

이제 이것만 손에 넣으면 된다. 스컹크 아난지.
이것도 분위기로 봤을 때,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 같다.

이 앨범 역시 데이브 매튜스 때와 같이 돈이 별로 없을 때, 테잎으로 사 놓은 건데, 좋다고 차 안에서 매일 듣고 다니다 완전히 늘어났다. 그녀가 부르는 she's my heroine을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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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발~* 2004-01-12 1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Faithful 앨범은 벅스뮤직에서 살 수 있네요. 헌데 매튜스 것은 다른 앨범만 있네요...ㅠㅠ 목욕탕과 같은 목소리, 끝내주는 표현~ 다른 노래를 들어보니 도어스 과(내 귀에는)라서, 과연! 하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죠~ 내가 도어스를 좋아하게 되었던 까닭이 바로 내가 당시 좋아한 친구가 도어스 광팬이었기 때문이었어요. 헌데 걔는 도어스를 졸업했고, 난 아직도...ㅠㅠ 왜냐, 열씨미 열씨미 들은 것은 그것밖에 없었기 땜시... ㅎㅎ

icaru 2004-04-24 1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he's my heroine을 좋아하시는 군요...아...she's my heroine하고 낮게 읎조리다가..또다시 같은 구절을 크게 내지는 그런 창법을요... 그리고 깔끔하게 절도있게..끝나는...

soulkitchen 2004-04-24 1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이거 원..님 눈길 머무는 곳 따라 댕길라니까, 선생님한테 청소 검사 맞는 애처럼 가슴이 다 두근거리누만요..이제 그만 눈길을 거두심이...두근,두근,두근..^^;;
 


눈 앞에 이렇게 생긴 여자가 있다. 사람인가 싶게 예쁘다. 이 여자의 외모의 아름다움은 롤링 스톤즈의 믹 재거를 사로잡았다. 지금 그 여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아름답냐고? 물론이다. 닭살 돋게 아름답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내가 이 여자, 마리안느 페이스풀의 목소리를 제일 먼저 들은 건, 메탈리카의 the memory remains를 통해서였다. 그 목소리는 뭐랄까...창녀촌 골목에 다 해어진 런닝 입고 나와 앉아 있는 늙은 창부에게나 어울리는 목소리였다. 늘어진 젖에 매달린 시커멓게 죽은 젖꼭지가 보이거나 말거나, 긴 나무 의자에 다리 한 쪽 세우고 앉아 담배를 뻐끔뻐끔 피는 그런 무성화된 노파 말이다.

그 목소리는, 묘하게 나를 사로잡았다. 당장 그녀의 음반을 사겠다고 물색하고 다녔지만, 당시에는 인터넷 쇼핑몰도 활성화되어 있지 않았고, 내가 단골로 다니던 가게에는 아예 그녀의 음반이 없었다. 스트리밍 서비스라도 잘 되어 있었더라면 그것으로라도 어떻게 견뎠겠지만 물론 그런 것도 당시에는 없었다. 그러다 그녀에 대해서 서서히 잊어 갔는데 어느 날.

영화 글루미 썬데이를 보고, 벅스에서 글루미 썬데이를 찾다가 그녀의 이름을 다시 보게 되었다. 이게 웬 떡이냐. 다른 많은 가수들도 이 곡을 불렀지만 (특히, 뷰욕은 멋있다) 그녀만큼 글루미 썬데이스럽게 글루미 썬데이를 부른 가수는 내가 보기엔 없었다. 그 후엔 수시로 벅스에 들어가 그녀의 노래를 듣곤 했는데, 작년 3월..드디어 마리안느 페이스풀의 Greatest hits 앨범이 발매되어 이제는 더욱 가깝게 그녀의 노래를 들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앨범은 정말 알차서, 한 장 가격에 두 장의 씨디가 담겨 있고 각각에는 열여덟, 열아홉 곡씩..더하면 얼마냐..하여간 그녀의 곡 대부분이 수록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인가. (^^a) 아무튼 여기 이 앨범에서 나는 그녀의 저 아름다웠을 때의 목소리를 처음 듣게 되었다. 그 때의 놀라움이라니. 할머니의 처녀시절 모습과 그 목소리를 접한 듯 낯설고 또 조금 우습기도 했다. 아주 불량스럽게 들리는 늙은 목소리와는 정말 달라도 너무 달랐던 것이다.

이 앨범의 특이한 점은, 나는 이게 참 불만인데, 그런 착한 시절의 간드러진 목소리와 믹 재거에게서 버림받고 술과 담배와 마약과 세월에 절어 확 늙어진 목소리가 한데 섞여 있다는 거다. 예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비틀즈의 예스터데이를 부르다가 금방이라도 가래를 탁 뱉어 낼 것 같은 목소리로 부르는 글루미 썬데이를 생각해 보라. 씨디도 두 장이겠다, 젊은 시절의 목소리와 그 후의 목소리로 갈라 놓았다면 좋았을 텐데, 아쉽다. 그래도 적응하니 이것도 나름대로 괜찮다. 여자의 목소리가 어떻게 늙어가는지...이제는 그게 들린다...

강추 트랙 : CD 1의 gloomy sunday, CD 2의 yesterda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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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발~* 2004-01-11 06: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후... 그대도 페이스풀을...?

This Little Bird
(John D. Loudermilk)

There's a little bird that somebody sends
Down to the earth to live on the wind.
Borne on the wind and he sleeps on the wind
This little bird that somebody sends.

He's light and fragile and feathered sky blue,
So thin and graceful the sun shines through.
This little bird who lives on the wind,
This little bird that somebody sends.

He flies so high up in the sky
Out of reach of human eye.
And the only time that he touches the ground
Is when that little bird
Is when that little bird
Is when that little bird dies.

soulkitchen 2004-01-11 1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이거 폼나게 음악 좀 쫘악 깔고 그럼 좋을 텐데요..제가 아직 그걸 못해요 ㅠ,,ㅠ

비발~* 2004-01-11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럼 밑에서 들리는 이 음악은 뭐야요? ㅎㅎ


This Little Bird - M. Faihtful
P.S. 듣고 잡을 때 들으시게 자동연주 안시킵니다~

비발~* 2004-01-11 1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리안느 페이스풀의 Greatest hits 앨범이 알라딘에는 없나보네요...ㅠㅠ

soulkitchen 2004-01-11 16: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희 가게에 있어요. 원하신다면 슈웅~택배 날라갑니다~

비발~* 2004-01-11 2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맘이 넘 감사~ 교보 나가는 날 찾아보고 거기도 없으면 에스오에스 쳐도 되죠?

soulkitchen 2004-01-12 16: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흑...없을 리가 없죠....이런 지방의 작은 레코드 가게에도 있는 앨범인데...^^;

2011-07-16 16: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참 마리안느 페이스폴의 목소리를 적절하게 표현했네요 저는 LP판이 있는데
작은새를 부르는 어렸을때 목소리는 항상 청하했다고나 할까 ...
블로그 주인의 평가와는 다른 목소리 입니다.
 


트립합이라는 장르만 믿고 잠이 쉬 오지 않는 밤에 잠을 청하려 이 음반을 틀었다면 대략 낭패다. 가뜩이나 복잡하고 아픈 머리속을 콕콕 찧어대는 것 같은, 정전기밖에 생길 게 없는데도 자꾸만 부벼오는 사랑해질 것 같지 않은 사람의 거친 살갗과도 같은 느낌이므로 잠을 자긴 틀렸다.

그렇다고 잠을 자서는 안되는 그런 밤에 각성제로써 이 음반을 틀었다고 해도 낭패다. 머리는 생각을 거부하고, 몸은 움직임을 거부하며 그저 넋놓고 상체를 흐느적이며 알콜과 니코틴이나 찾게 될 게 뻔하다.

이런 음악은 공기의 흐름을 타고 들을 것이 아니라 곧바로 뇌속으로 흘러 넣어야 제맛이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꾸욱 눌러 아예 박아 넣은 것 같은 기분으로, 다른 소리는 비집고 들어올 틈을 주지 않는 것이 좋다. 성능 좋은 엠프며 스피커로 두어 평 남짓의 밀폐된 공간에서 방안에 꽉 채워 듣는 것도 좋겠다.

베쓰 기본스는 썩 좋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녀의 기분 나쁘게 금속적인 목소리는 자기의 음악에 더없이 잘 어울린다. 쓸데없이 몇 옥타브나 올라가는 목소리를 악기로, 갈수록 커지는 젖가슴을 소품으로 영혼이 없는 노래를 불러대는 여가수들과는 질적으로 틀려버린다.  뷰욕도, 킴 고든도, 뭐 그리고 니나 사이몬이나 기타 재즈 여가수들도 그래서 좋다.

아무튼 어제 나는 잠이 안 와서 씨디장 앞에서 서성이다 이 씨디를 골랐고, 당연히 쉽게 잠을 이룰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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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를 아니 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기대를 크게 한 것도 아니어서 그저 중간정도만 하면 참고 넘어가줄려고 했는데, 대니 보일..실망이다. 아무래도 트레인스포팅 같은 영화를 다시 만들 수는 없겠는가 보았다. 아, 그래도 몇몇 장면에서는 정말 감탄이 터져 나오긴 했다.

사람을 좀비로 만들어 버리는 바이러스의 창궐로 폐허가 되어버린 텅빈 도시를 그린 장면은, 그 정적에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였다. 영화가 시작한 지 20분도 채 되지 않은 그 장면이 그러나 절정이었고, 그 이후로는 쭈욱 쭈욱 하강곡선만 그리다가,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던 최악의 결말을 남기고 영화는 끝이 난다.

우연히 살아남은 한 쌍의 젊은 남녀와, 부녀가 우연히 잡힌 라디오 방송을 듣고 생존자들을 찾아 떠나는 것까진 뻔하긴 했지만 괜찮았다. 끝이 좋으면 다 좋은 거 아닌가. 게다가 그 아버지가 시체에서 떨어진 핏방울이 눈에 떨어져 죽는 장면은 얼마나 멋졌는가.

 그러나 생존자들이 많을 거라고 생각했던 그 곳에는 아홉 명의 군인 남자들만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렇게 얘기한다. 여자가 우리의 미래다. 여자 둘을 넘겨라. 그러자 그들과 일행이었던 남자가 훽 돌아버린다. 절대 그럴 수 없다며. 그리고 그는 갑자기 슈퍼맨이 되어서뤼 좀비와 그 인간들 사이에 껴 인간들을 몰살시키고(이게 무슨 미친 짓이란 말인가. 하마터면 그들은 몽땅 다 죽을 뻔했다) 지들끼리 운 좋게도 살아남아서 영국 외의 다른 나라의 구조를 기다린다. 그동안 좀비들은? 먹을 게 없어서 굶어 죽는다. ㅡㅡ;

이런 영화는 정말이지 마음에 안 든다. 그 주인공 남자가 그 상황에서 꼭 그 여자들을 군인들로부터 구해냈어야 했는가 말이다. 그렇다면 그 영화가 헐리우드의 고만고만한 러브스토리 피워올리는 액션영화 혹은 재난영화와 뭐가 다르단 말인가. 나라면, 그들을 모두 그 요새에 남게 했겠다. 그러고는 거기 모든 군인과 그녀들을 상관케해서 아이를 갖게 하겠다. 몇 개월 후. 다른 나라들에서 그들을 찾았을 때, 그들은 짐승처럼 살고 있으며 기형아를 조산하여 키우고 있는 차라리 좀비만도 못한 한 무리의 인간을 찾을 수 있게 했을 거다. 나는 해피엔딩이 싫다. 생각할수록 찝찝한 영화가 좋지..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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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lkitchen 2004-01-06 1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해피 엔딩이 싫거나 말거나, 찝찝한 영화가 좋거나 말거나..넌 이제 영화 보지 마라. 이 영화엔 두 가지 결말이 있던 거였단다.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 가기 전에 충격적인 또 하나의 엔딩이 준비되어 있던 거였단다. 극장에선 그랬다니까, 아마도 DVD에선 장면을 선택하는 게 있거나, 극장에서처럼 크레딧이 나오는 중에 다시 영화화면으로 돌아가거나 했겠지. 근데 나는 그 사실을 영화를 다 보고 DVD를 반납하고 난 오늘에야 알게 됐다. 배드엔딩이 따로 있다니 갑자기 영화가 너무 괜찮았던 것 같으니, 이걸 다시 빌려 봐야 하나...

icaru 2004-04-24 1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영화 비디오로 봤거든요...군에서 휴가 나온 남동생이...군에서부터 벌써 보리라 다짐 두었던 영화라믄서..해서 봤는데...

그 아버지가 시체에서 떨어진 핏방울이 눈에 떨어져 죽는 장면은 얼마나 멋졌는가.

저도 이 장면이 가장 남는걸요.....

아...그리고 비디오에는 베드엔딩이 있습니다...주인공 남자가 꼴까닥 하는거죠...뭐 벌써 보셨으리라.^^..이건 스포일드 아니죠?
 


아빠는 3공 때 동장이셨다. 새마을 지도자셨고, 민주공화당 당원이셨다. 새마을 마크가 중앙에 달린 초록색 모자와, 썩어가는 돼지빛깔의 유니폼을 입고, 골목에 블럭을 깔고, 마을 할머니, 할아버지들 모시고 춤추는 최전성기 때의 사진이 앨범 하나에 가득이다. 5공 때는 동네의 빌어먹을 자식들을 삼청교육대에 많이도 보냈노라고 자랑 삼아 얘기하신 적도 있다.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TV 앞에서 어린 손주랑 채녈 싸움이나 하며, 같이 늙어가는 마누라 괜한 흠잡아 닦달이나 하며 소일하고 계신다. 세월이 참 많이도 흐른 것이다.

그런 아빠 밑에서 자란 나의 어릴 적 가장 큰 걱정은 북한"괴뢰군"이 쳐들어오면 어떻게 하나 하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왜 그리 북괴와 관련한 흉흉한 소문이 많았던지, 금강산 댐 사태에 이르렀을 때는 정말이지 당장에라도 전쟁이 날 것처럼 떠들어 댔었고, 아빠와 아빠의 큰 딸인 큰언니는 공식적인 규탄 대회에 참석하느라 바빴고, 나는 부랴부랴 집 안팎을 돌아다니며 전쟁이 날 경우 숨을 곳 찾기에 골몰했었다.

영화 실미도에 대해 알기 전까지, 그러니까 실미도 사건에 대해 제대로 알기 전까지 나는 김신조 사건이나 간첩단의 버스자폭사건 같은 것이 내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80년대 초반에 일어난 일인 줄로만 알았다. 십 몇 년 전의 일임에도 위쪽에서 방귀만 뀌었다 하면 당장에라도 똥을 뿌지직 싸 낼 것처럼 호들갑을 떨어대며 제2, 제3의 김신조 운운하던 어른들 덕이었다. 지금 생각하니 새삼 고맙다. 날 언제나 긴장과 불안 속에 살게 해 줘서.. 제길..

 “아무리 그래도 무장공비는 너무 심한 거 아냐?” 본격적으로 눈물이 흐르기 시작한 것은 강성진이 이렇게 말을 하면서 죽어갈 그 때부터였다. 뭐, 그 전에 설경구가 아버지의 월북으로 어머니는 평생 앉아서 잠을 잔다는 그 이야기를 할 때 찔끔 울기는 했지만, 전반적으로 신파스러운 오버된 연기와 억지스러운 감정의 조장에 은근히 심사가 꼬이고 있던 중이었다. 그냥, 사건을 있는 그대로만 다큐멘터리 식으로 엮어 놓아도 충분히 감동적인 영화가 되어줄 소재를 참 이렇게도 80년대스럽게 만드나 싶어졌던 것이다.

영화가 중반으로 접어들 때부터 줄창 울어대던 동생도 맘에 안 들었다. 고만 좀 울라고 옆구리 쿡쿡 찌르다, 하긴 나도 영화가 끝날 무렵엔 엉엉 울고 말았다. 울면서도 이런 별로 마음에 들지도 않는 영화에 울고 있다니 싶어졌지만, 영화의 장면에 대한 눈물이 아니라 당시 그 실미도 대원들에 대한 눈물이다, 라고 생각하고 맘껏 울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들이 정말 슬펐고, 우리들의 무지가 정말이지 미안해졌다. 무슨 이런 개 같은 나라의 개 같은 국민이 다 있나, 아무리 그래도 정말 무장공비는 너무 심한 것 아닌가 이 말씀이다.

그렇게 한참을 울고 나왔는데, 옆자리 쫄로리 셋 앉은 여자들의 눈이 우리의 탱탱 붓고 벌건 눈에 비해 너무 말개서 무안했다. 아무리 영화가, 자기들끼리 너무 비장해서 우리가 비집고 들어가 몰입할 구석을 조금도 주지 않아도 그렇지 억울하게 죽어간 실존 인물들을 조의하는 마음에서라도 조금은 울어주는 게 예의가 아닌가...뭐...아님 말고...ㅡㅡ; 흠 아무튼, 나로 말하면 그렇게 개죽음한 그들을 무장공비라고 십수 년을 믿어 온 게 미안해서, 그리고 아무리 무장공비였대도 거 시원하게 잘 죽었네,라고 말했던 게 미안해서 울었다. 그러나 좀 울어보라고 준비해 둔 다음과 같은 장면, 그러니까 그들이 피로 자신의 이름을 버스 구석구석 써가는 장면이나, 허준호가 사탕을 떨어뜨리는 장면은 실제 그들이 그랬다고 해도 역시 신파조였다.  실미도와 강우석이라….아무래도 너무 안 어울리는 궁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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