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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소음
줄리언 반스 지음, 송은주 옮김 / 다산책방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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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쇼스타코비치의 왈츠를 좋아했다. 하루 종일, 하루치 삶을 살아내느라 힘들었던 몸을 쇼스타코비치의 왈츠가 흐르는 방안에 부려놓으면, 몸은 고단을 잠시 잊고 마음은 우울을 잠시 잊었었다.

 

춤곡이지만 어딘가 무겁고 어두운 이 곡을 우리는 아주 사랑했다. 우리 둘 중 하나가 무심코 콧노래로 흥얼거리면, 다른 하나가 따라 부르다 결국 CD를 플레이어 위에 얹고, 각자의 일을 하던 그 밤들. 그 밤들이 눈물겹게 그립다.

 

"그가 무엇으로 시대의 소음과 맞설 수 있었을까? 우리 안에 있는 그 음악 -우리 존재의 음악- 누군가에 의해 진짜 음악으로 바뀌는 음악. 시대의 소음을 떠내려 보낼 수 있을 만큼 강하고 진실하고 순수하다면, 수십 년에 걸쳐 역사의 속삼임으로 바뀌는 그런 음악.“ p.181

 

시대의 소음을 견디게 한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이, 어둠의 시간을 지나 우리의 아픔을 어루만져주기까지 그의 삶의 궤적을 나는 한번도 더듬어 본 적이 없었다. 러시아의 작곡가라고만 알고 있어서 문화적으로 풍성했던 러시아, 그러니까 톨스토이나 도스트옙스키와 같은 시대의 인물이겠거니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았던 것이다.

 

“인구 중에서 필요한 만큼은 죽여 없애고 나머지에게는 선전과 공포를 먹이면 그 결과로 낙관주의가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p.105)

“1932년 당이 독립 조직들을 해산하고 모든 문화적 문제를 맡게 되면서..

모든 작곡가는 국가에 고용되었으므로..

작곡가는 탄광 광부처럼 생산량을 늘려야만 했고..

관료들은 다른 범주의 생산량을 평가하듯 음악 생산량을 평가했다.“ (p.42~43 부분)

 

이런 ‘낙관적인’ 소비에트에서 쇼스타코비치는 음악 신동으로 첫 발을 내딛고, 평생 동안 최고 음악가로서의 명예를 누렸지만, 사실은 체포와 숙청의 공포 속에서 불면의 밤을 보내야 했다. 왜냐하면, 그의 오페라 작품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을 관람하던 스탈린 동무가 공연을 끝까지 보지도 않고 자리를 비웠기 때문이었다.

 

그 일이 있은 후, 그는 밤마다 모든 옷을 갖춰 있고, 여행용 가방을 싸 둔 다음, 승강기 옆에서 밤을 지새우곤 했다. 당의 요원들은 언제나 한밤중에 반역자들을 체포하러 왔고, 그는 가족들에게 자신이 끌려 나가는 모습을 보이기가 싫었던 것이다. 그는 친구들에게 “그들이 내 양손을 자른다 해도 나는 입에 펜을 물고서라도 작곡을 계속할 것”이라고 호언했지만 곧 깨닫게 된다.

 

“스탈린의 러시아에는 이 사이에 펜을 물고 작곡을 하는 작곡가 따위는 없었다. 이제부터는 두 가지 종류의 작곡가만 있게 될 것이다. 겁에 질린 채 살아 있는 작곡가들과, 죽은 작곡가들.” p. 75

 

“그는 남은 용기를 모두 자기 음악에, 비겁함은 자신의 삶에 쏟았다.” p.226

 

그래서 그는 살아남았다. 브레히트처럼. 자신을 미워하며.

 

“영혼은 셋 중 한 가지 방식으로 파괴될 수 있다. 남들이 당신에게 한 짓으로, 남들이 당신으로 하여금 하게 만든 짓으로, 당신 스스로가 자발적으로 한 짓으로. 셋 중 어느 것이든 한 가지만으로도 충분하다. 세 가지가 다 있다면 그 결과는 거부할 수 없는 것이 되겠지만.” p.239

 

“어쩌면 언젠가는 파시즘과 공산주의가 교과서 속의 말에 불과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때에도 여전히 가치가 있다면-여전히 들어줄 귀가 있다면-그의 음악은......그냥 음악이 될 것이다. 작곡가가 바랄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전부였다.” p.257

 

오늘도 지친 몸을 방에 부려놓으며 쇼스타코비치의 왈츠를 듣는다. 저음역대가 좋은 스피커 대신, 노트북 스피커로 유튜브의 영상을 찾아 들으니 소리가 영 뾰족하고 불편하다. 함께 듣던 CD는 그애가 가져가서 없고, 함께 듣던 그애도 이제 즈이 가족들과 지내느라 여기 없다.

 

고단했던 하루를 얘기하고, 좀 더 나을 내일을 꿈꾸고, 읽고 있는 문장이나 보고 있는 그림을 나누며, 도란도란 하루를 마감했던 동지들이 하나 둘 떠난 둥지를, 아직도 남아 꿋꿋이 지키며 나는 혼자 쇼스타코비치의 왈츠를 듣는다. 그의 어두운 표정과 이 구슬픈 춤곡이 과연 그럴만했구나, 혼자 고개 끄덕이며. 옆에 누군가가 있다면 얘기해 주고 싶어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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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의 아홉 가지 단점
조은수 지음 / 만만한책방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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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동안 네 권의 책을 번갈아 읽었다. <책만 보는 바보>의 표현대로라면 “책과 내 마음이 오가고 있는 공간은, 온 우주를 다 담고 있다 할 만큼 드넓고도 신비로웠다”라 할 만하다.

 

우선 나는, 한 달쯤 전부터 1960년대 케냐의 가난한 시골 일모로그에 몸을 담고 있다. 계속되는 가뭄으로 가축들은 말라죽어 가고, 어른들은 무기력하다. 그 시골마을에 돌연 활기를 불어 넣어준 외지인들은 가난한 그 마을 사람들과 함께, 그들의 처지를 알리고, 항의하기 위해 도시로 길을 떠난다. 그 여정에서 헐떡이다가 (690쪽 중 390쪽까지 왔다) 홍으로부터 받은 두 권의 책 중 한 권을 펴들었다. “하나는 선물이고, 하나는 읽고 반납.”

 

반납해야 할 책을 먼저 시작한다. 아프리카의 살인적인 더위와 굶주림에 지쳐 있다가 1700년대 프랑스 귀족들의 사회로 순간, 옮겨 앉는다. 일모로그 주민의 삶이 생존을 위한 것이라면 이들의 삶은 쾌락을 위한 것이다. 일모로그의 그들은 투쟁을 위해 노래하고, 프랑스의 이들은 사랑을 위해 편지를 쓴다. 이 관능적인 편지글들은 묘한 흡입력으로 단숨에 휘리릭 책장을 넘기게 하나, 쾌락을 좇고 영혼의 타락을 이야기하는 그들에게 점점 지쳐가고, 마침 눈도 침침해 온다. 그래서 잠시 바깥 바람 좀 쐴 겸 주문한 책을 찾으러 삼일문고로 향했다.

 

먼저, 지하에 들러 읽다만 그래픽 노블을 펴든다. 1800년대 지옥과도 같은 런던 뒷골목에서 벌어진 연쇄살인사건을 다룬 이 (만화)책은 크기와 내용과 무게가 어마어마하다. 그 묵직한 내용의 큰 축은 인간 이상의 무엇이 되고 싶은, 가진 자들의 횡포와 잔인함이다. 작은 글씨, 어두운 조명, 거친 그림체, 인간 같지 않은 인간들의 잔인함에 읽어 나가기가 힘이 들지만, 그래도 읽어 나가게 하는 힘이 대단한 책이다. 사장님이 재미가 있느냐 물으시는데, 물론이다. 영화까지 챙겨서 예습까지 다시 하고 간 상태다. 이제, 범행이 밝혀지는 순간만 남았다.

 

그 날 삼일에서 사 온 세 권의 책 중, 내가 주문한 건 바로 이 책이다.

<톨스토이의 아홉 가지 단점>

서설이 길었지만 이 글은 사실 이 책에 대한 리뷰이다.

일상적인 상황이었다면 그저 ‘조금 재미있다’, 했을 텐데 지금 접한 독서 환경이 이 책을 더없이 귀하고 고마운 책으로 만든 거다.

 

너무 많이 가져서 부끄러웠던 톨스토이는 여든 둘의 나이로 가출을 감행한다.

 

“러시아 곳곳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추위와 배고픔으로 고통 받고, 목숨까지 잃고 있어요. 그런데 이 나라는 귀족들만 배부르게 먹고 화려하게 살고 있소. 이런 세상은 잘못된 거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당하고 있어요. 우리는 이제 함께 잘 사는 새로운 공동체를 세워 나가야 하오.” p.32

 

그래서 톨스토이는 농민들에게 자신의 땅을 나눠주고, 자신이 쓴 책들을 가난한 농민들이 공짜로 읽을 수 있게 유언장을 고친 뒤 집을 떠난다. 저 가난한 케냐의 시골마을을, 저 타락과 향락에 젖은 프랑스의 귀족사회를, 저 지옥 같은 런던의 뒷골목을 헤매다가 만난, 이런 톨스토이라니. 약간의 도덕적 흠은 치열하게 산 흔적 정도로 생각하는 현재의 우리 실정에 비추더라도 톨스토이의 이러한 이념은 고결하다.

 

“난 드디어 집을 나와서 홀로 거렁뱅이가 되었다. 드디어 가장 진실한 내가 된 거야. 그동안 힘들여 쌓아 올린 명성도 재물도 없고, 가족도 없는 벌거벗은 나 혼자가 된 거야.” p.105

 

평생 힘들여 쌓아 올린 명성과, 재물과, 추종자들에 둘러싸인 생활을 버리고 톨스토이는 홀로 되어 생을 마감한다. 우리는 행복한 노년을 위해 건강 관리를 하고, 일을 해서 저축을 하고, 부지런히 친구를 만나러 다니는데, 이 고결한 어른은 그런 것들에서 그렇게 벗어나고자 한 거다. 그러곤 비밀 일기장에 이런 고민을 남긴다.

 

톨스토이의 아홉 가지 단점

첫 번째 단점, 결정을 잘 내리지 못한다.

두 번째 단점, 이치에 어둡다.

세 번째 단점, 마음이 잘 변한다

네 번째 단점,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다섯 번째 단점, 성격이 밝지 못하다.

여섯 번째 단점, 자기 자신을 속인다.

일곱 번째 단점, 거짓말을 한다.

여덟 번째 단점, 조급하게 생각한다.

아홉 번째 단점, 남을 잘 따라한다.

 

“러시아에는 두 개의 권력이 있다고 하잖아요. 하나는 차르 정부와 또 하나는 톨스토이.”

p.83

 

러시아 최고의 권력이라 불렸던 톨스토이의 고민이, 나와 크게 다르지 않으니 뭔가 위로 받는 기분이다. 게다가, 잘 생기고, 세련되고, 작품도 자신보다 훨씬 일찍 인정받았던 투르게네프에게 시기와 질투를 느껴 절교 편지를 보내기까지 했다니, 평범한 계집아이들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나는 투르게네프에게 절교 편지를 보냈다네. 투르게네프가 너무 세속적이라서 절교한다는 편지를. 사실 나는 속으로 너무 질투가 나서 그런 거였는데, 감쪽같이 거짓말을 한 거지.” p.113

 

20대 초반에 언니의 책으로 <안나 까레니나>와 <전쟁과 평화>를 읽었으나, 기억에 남는 거라곤 안나 까레니나와 브론스키, 레빈 같은 이름들 뿐이다. 그나마 <안나 까레니나>는 읽은 기억과 메모한 흔적이라도 있지, <전쟁과 평화>는 책을 읽기는 했는지, 표지만 보곤 다 읽었다고 생각하는 건지 알 길이 없다. 언젠가는 다시 읽어야겠다고 마음은 먹지만, 읽고 싶은 책들이 산더미라 그 언젠가가 언제가 될런지는 기약이 없다.

 

드넓고도 신비로운 우주를 헤매다 현실로 돌아왔다. 1700년대의 프랑스 귀족 사회는 홍에게로 돌아가고, 런던의 뒷골목은 거기 서점에, 케냐의 시골마을과 아이같은 톨스토이는 내 책상 위에 고이 누워 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이냐, 네가 나를 펼치기 전까지 나는 네게 아무 것도 아니었다, 라 말하며. 이제 네가 나를 속속들이 봤으니 이제 나는 네게 무엇이 되었느냐, 물으며.

 

아이의 얼굴을 하고 찾아 온 대가의 진심어린 목소리에 나는,

거칠고 공정치 못한 세상을 그래도 살만하다 생각하고,

스스로의 졸렬함에 실망해 자책하던 날들을 위무받는다.

 

마침내, 비가 비답게 쏟아진 아름다운 일요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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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생 김지영 오늘의 젊은 작가 13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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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케이트 블란쳇은 어느 시상식장에서 카메라가 자신의 몸을 아래에서 위로 훑어 찍자 카메라를 향해 “Do you do that to the guys?"라고 했다. 다른 프로그램에서 사회자가 올해가 여성의 해라고 말하자 그는 ”Oh for fucks sake, every year is the year of the woman" 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평소 그는 아들들에게 여자를 훑어보면 안된다고 얘기한단다.

 

2-0

 

“2년을 열렬히 연애하고 또 3년을 같이 산, 빗방울처럼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눈송이처럼 서로를 쓰다듬었던, 자신들을 반씩 닮은 예쁜 딸을 낳은 아내가, 아무래도 아내 같지가 않았다.” p.14

 

딸아이 하나를 키우는 전업주부 82년 생 김지영 씨가 어느 날 갑자기 이상해졌다. 마치 다른 사람이 빙의된 무속인처럼, 그는 자신의 친정 엄마가 되었다가, 아이를 낳다 죽은 선배가 되었다가 한다. 그냥 그런 척하는 게 아니라, 말투며 행동이 아예 그 사람이 되어 버린 것이다.

 

3-0

 

설거지를 마치고 방에 들어오니 새벽 두 시가 조금 못된 시간이다. 땀을 어찌나 흘렸던지 브라까지 푹 젖었다. 기름기 많은 제사 음식의 특성상 제사설거지는 뜨거운 물로 하지 않으면 안된다. 라섹수술을 하고 좋은 점 중 한 가지가 제사설거지를 할 때 안경이 흘러내리지 않는다는 것이었으니 뭐, 말 다 했다. 땀으로 찔꺽이던 고무장갑을 벗고 비누로 손을 씻었는데도 고무 냄새가 가시지가 않는다. 그나마, 내 노동은 이게 전부이지만 저 주방에 앉아 뭘 그렇게 치우시는지 늙은 엄마의 일은 아직도 끝이 나지 않았다. 엄마는 어제도 오늘 할 일들을 준비하느라 새벽 3시를 넘기셨었다.

 

2-1

 

“남자애들은 원래 좋아하는 여자한테 더 못되게 굴고, 괴롭히고 그래. 선생님이 잘 얘기할 테니까 이렇게 오해한 채로 짝 바꾸지 말고, 이번 기회에 둘이 더 친해지면 좋겠는데.”

짝궁이 나를 좋아한다고? 괴롭히는 게 좋아한다는 뜻이라고? (....)

좋아한다면 더 다정하고 친절하게 대해야 한다. 친구에게도, 가족에게도,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나 고양이에게도 그래야 하는 거다. 그게 여덟 살 김지영 씨도 알고 있는 상식이다. 그 아이의 괴롭힘 때문에 학교생활이 너무 힘들었다. 그리고 이제껏 당해 온 것도 억울한데, 친구를 오해하는 나쁜 아이가 되기까지 했다. 김지영 씨는 고개를 저었다. p42.

 

초등학생 김지영 씨, 남자 짝에게 오래 괴롭힘을 당해 오다 드디어 선생님께서 그 사실을 알았는데, 선생님께서는 저렇게 얘기를 하신다. 그게 다 너를 좋아해서 그런 거라고.

 

3-1

 

여름 제사에 단술을 왜 자꾸 하는 거예요? 이 무거운 걸 불 위에 올렸다 내렸다...

느 증조할머니가 당신 제사에 다른 건 몰라도 단술은 꼭 올리 달라 했다카잖아.

엄마한테 직접 카신 거라?

야는 머카노..나는 느 증조 할머니 얼굴도 못 봤는데. 할머니가 카싰지.

그라마 나는 못 들어서 못 하겠소, 카지.

‘그믐 제사 몸써리 난다, 나는 보름에 죽을란다’ 캤던 양반이, 그래서 진짜 보름에 떠난 양반이, 그렇게 자손들 위한다믄 나 죽거든 아예 제살랑은 지낼 생각 말고 시원한 물이나 한 사발 떠 놔라 카실 일이지..

 

2-2

 

김지영 씨는 그날 아버지에게 무척 많이 혼났다. 왜 그렇게 멀리 학원을 다니느냐, 왜 아무하고나 말 섞고 다니느냐, 왜 치마는 그렇게 짧냐......그렇게 배우고 컸다. 조심하라고, 옷을 잘 챙겨 입고, 몸가짐을 단정히 하라고, 위험한 길, 위험한 시간, 위험한 사람은 알아서 피하라고, 못 알아보고 못 피한 사람이 잘못이라고. p.68

 

고등학생 김지영 씨, 뒤따라 붙는 치한을 낯선 여자의 도움으로 따돌렸는데, 놀란 마음을 위로는 받지 못할망정 아빠로부터 꾸중을 듣는다.

 

3-2

 

엄마들은 10시에 모여 커피를 한 잔씩 하고, 둘러 앉는다. 젊은 엄마들은 꼬지, 동그랑땡, 우엉전 같이 비교적 쉬운 걸 부치고, 늙은 엄마들은 오징어 튀김, 배추전, 부추전, 무전 따위를 부친다. 닭 한 마리를 통째로 간장에 졸이고, 조기를 굽고, 콩나물과 숙주나물, 도라지, 고사리, 시금치를 다듬고, 탕국을 끓이고, 수육을 삶는다.

그러다가, 끼니 때가 되면 전 부치는 기름 냄새와 연기 때문에 눈이 다 맵다고 거실에 앉아서 투덜대는 아빠들에게 밥을 차려 내간다.

제사상을 받으시는 분들은 모두 그 아빠들의 조상들이다. 젊은 엄마들은 심지어 그들 중 누구의 얼굴도 알지 못한다.

 

 

2-3

 

“나 원래 첫 손님으로 여자 안 태우는데, 딱 보니까 면접가는 거 같아서 태워 준 거야.”

태워 준다고? 김지영 씨는 순간 택시비를 안 받겠다는 뜻인 줄 알았다가 뒤늦게야 제대로 이해했다. 영업 중인 빈 택시 잡아 돈 내고 타면서 고마워하기라도 하라는 건가. 배려라고 생각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무례를 저지르는 사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항의를 해야 할지도 가늠이 되지 않았고, 괜한 말싸움을 하기도 싫어 김지영 씨는 그냥 눈을 감아 버렸다. p.101

 

아..성별이 가장 큰 직책이고, 가장 강한 무기이고, 가장 높은 벼슬인 아저씨들.

 

3-3

 

제사는 자시가 시작되는 11시에 지낸다. 엄마들은 접시에 음식을 담고 아들들이 그 접시를 제사상으로 옮긴다. 제사가 끝나면 다시 둘러 앉아 음복을 하고, 제삿밥을 먹는다. 그 시중도 물론 모두 엄마들 차지다. 아빠들은 절 몇 번 하고, 이미 지쳤다.

이제 남은 설거지는 늙은 딸 몫이다. 그게 3-0의 상황이고, 그 상황은 이미 종료다.

 

2-4

 

아기는 새벽 4시에 태어났다. 아기가 너무 예뻐서 김지영 씨는 진통할 때보다 더 많이 울었다. 하지만 예쁜 아기는 안아 주지 않으면 밤이고 낮이고 울기만 했고, 김지영 씨는 아기를 안은 채 집안일도 하고, 화장실도 가고, 잠도 자야 했다. 아기에게 두 시간에 한 번씩 젖을 먹이면서, 그래서 두 시간 이상 잠을 자지 못하면서, 예전보다 더 깨끗하게 집을 청소하고, 아기의 옷과 수건들을 빨고, 젖이 잘 나오도록 자신의 밥도 열심히 챙겨 먹으며 김지영 씨는 태어나 가장 많이 울었다. 무엇보다 몸이 아팠다. p.148

 

이 이후로, 아이를 키우며 김지영 씨는 몸보다 마음이 더 아플 것이다. 그리고 김지영 씨는 그 아픔을 이겨 낼 것이다. 실제로 82년 생 여자 중에 가장 많은 이름이라는 김지영 씨, 내 엄마이기도 자매들이기도 한 김지영 씨, 지나 온 시간들을 다시 돌아보게 한 김지영 씨, 읽고 있던 <피의 꽃잎들>을 잠시 덮게 한 김지영 씨, 아닌 건 아니라고, 아픈 건 아프다고 말하라는 김지영 씨.

 

3-4

 

다음 주도 제사고, 그 다음 주도 제사다.

 

 

4

 

나는 페미니스트라기보다는 휴머니스트다.

아니 나는 ‘무슨 주의자’ 라기도 우스운 그냥 조금 어리석은 사람이다.

그렇지만,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 일들에 대해, 으레 그래 왔던 일들에 대해, 그래서 별 생각없이 지나치던 일들에 대해 ‘그건 아니다’ 라고 말하는 용기를 가진 이들에게, 감사함을 표할 줄 알고, 그들의 용기에 박수쳐 줄 줄 아는 조금은 바른 눈을 뜨고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들은 참으로 아름답고 귀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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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
줌파 라히리 지음, 이승수 옮김 / 마음산책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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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예비소집에서 알파벳 쓰기 숙제를 받아오던 순간부터 나는, 영어를 잘 하고 싶었다. 영어가 참, 쓰기 편한 글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글처럼 초중종성이 따로 있지 않아 한 줄로 길게 쓰기도 편하고, 가끔은 줄 위로 치솟거나 줄 아래로 늘어뜨려지는 글자들이 있어 멋스러워 보였다. 대문자와 소문자로 나뉘어져 있는 것도 신기하고, 대문자와 소문자를 구별해서 써야하는 것도 신기했다. 발음은 또 어떤가. 혀가 요상하게 말려 들어가는 r 발음은 세련되어 보였고, 뭔가 약오르게 들리는 뻔데기 발음은 재미있었고, g와 z, p와 f 발음의 차이 같은 것들도 신선했다.

 

그날로부터 삼십 년이 지난 오늘도 나는 영어를 잘 하고 싶다. 삼십 년이면 배우고 익히기 충분했겠구만, 배우는 건 어설프고 익히는 건 귀찮아, 나는 아직도 영어를 잘 하고 싶기만 할 뿐 전혀 잘 하지는 못한다. 아, 잃어버린 삼십 년이여.

 

쭘파 라히리는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1994년 동생과 이탈리아 여행을 하던 중, 이런 마음을 느끼게 된다.

“어느 날 우연히 만났는데 금방 어떤 인연, 애정이 느껴지는 사람. 아직 알아야 할 게 많은데도 오래전부터 알아온 것 같은 느낌. 이탈리아어를 배우지 않으면 날 채울 수 없고 내가 완성되지 않으리라는 걸 알았다. 내 안 빈 공간, 그곳에 이탈리아어를 편히 자리 잡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p.21

 

그래서 그녀는 치열하게 공부를 시작하고 드디어 2015년, <IN OTHER WORDS(IN ALTRE PAROLE)>라는 제목의 이탈리아어로 이 책을 내게 된다. 이미 영어권 작가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그녀에게 영어로 글을 쓴다는 건 “장비를 잘 갖추고 쉽게 산에 오르는 것처럼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했던 것이다. ‘치열하게 공부했다’라고 나는 간단하게 적고 있지만, 그 치열함은 이 책 곳곳에 풀어져 있고, 나를 부끄럽게 한다.

 

“나는 노력을 좋아한다. 다른 언어로 읽는다는 건 성장과 가능성의 끝없는 상태를 내포한다. 배우는 초심자로서의 내 일은 절대 끝나지 않으리라.”p.42

 

내 텅 빈 삼십 년과 그녀의 꽉 찬 이십 년의 차이는, 결국 열정과 노력이었다. 언제나 정답은 일찍 찾는데, 언제나 열쇠는 일찍 꽂는데, 정답이 적힌 답안지는 성적으로 매겨져 돌아오지 않고, 꽂힌 열쇠는 녹이 슬어 돌아가지가 않는다. 다시 자극을 받았으니 달라질 수 있을 것인가 기대해보지만, 사람이란 게 쉬이 달라지는 물건이 아니더라.

 

이 작고 아름다운 책의 백미는 그러나 따로 있으니 바로 제목의 저 한 문장이다. 이 문장은 작가가 사전에 대해 쓴 문장에서 따 온 것이다.

 

“이 사전으로 나는 다른 책들을 읽고, 새로운 언어의 문을 열 수 있다...

사전에는 비밀들이 가득하다.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 p.18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

이 책의 소개를 신문에서 처음 봤던 그 날부터 이 짧은 문장은, 책을 대하는 내 마음을 대변하는 아포리즘으로 자리잡았다. 이 문장이 너무나 멋있고 좋아서 내가 좋아하는 모든 책의 저자들에게 이렇게 얘기하며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은 마음이다.

 

‘당신이 쓰신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큽니다.

나를 한 뼘 더 키워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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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전 하나로도 행복했던 구멍가게의 날들
이미경 지음 / 남해의봄날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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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다녀갔다. 함께 모여 구슬아이스크림을 만들고, 티비를 조금 보다가, 괴물놀이를 하고, 둘러 앉아 그림을 그리고, 각자 그린 그림으로 이야기를 지어내 해 달라고 하고, 컴퓨터로 좋아하는 동영상들을 하나씩 보고, 이불속에 숨는 놀이를 하고, 다같이 고무 다라이에서 목욕을 하고는 각자 집으로들 돌아갔다. 이렇게 노는 모습을 찍어 친구에게 보여줬더니, “너네 아이들은 뭔가 우리 어린 시절 같다”고 얘기를 한다. 마주보고 깔깔대며 땀 흘리며 노는 아이들을 보니, 정말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고만고만한 몸뚱이와 발 디딜 땅만 있으면 뭐라도 하며 놀 수 있었던 우리 어린 시절.

 

거기에 동전 하나만 있으면 그 풍요로움은 절정으로 치달았다. 50원짜리 ‘오뎅’ 하나 천천히 음미하며 먹고, 짭조롬한 국물 플라스틱 바가지로 배가 터지도록 먹으면 한겨울 추위쯤은 그냥 우스웠고, 10원짜리 ‘쨈’ 사다가 입술에 루주처럼 바르며 놀다가 조금씩 핥아먹으면 그 맛은 또 얼마나 야릇하고 좋았던가. 어쩌다 100원이라는 거금이 생기면 ‘밀크캬라멜’을 사 먹을 수 있는데, 이는 정말 천상의 맛이었다.

 

여러 가족이 함께 산 마당 넓고 펌프 물 시원하던 우리 옛집과, 우리 골목과, 골목에 나와 앉아 있는 동네 어른들 그리고, 전봇대 옆 현주네 점빵. <동전 하나로도 행복했던 구멍가게의 날들>은 그런 고마운 기억들을 일깨워준다. 어린 우리들을 키워준 건 가족의 관심과 사랑과 함께 바로 그런 것들이 아니었겠나 생각하며.

 

“평온하고 따뜻한, 수평을 지향하는 마음을 그림에 담는다. 주제가 되는 이미지를 중앙에 떡 하니 배치해 자리를 잡고 그와 함께하는 사물로 아기자기하게 화면을 구성한다. 날카로운 선의 촘촘한 중첩 속에 하나의 형상이 모습을 드러내고 하얗게 남겨진 배경과 조화를 이뤄 여백의 미와 정중동의 회화 원리를 표현한다. 몸을 낮추고 거센 비바람과 혹한, 그리고 모진 세월에도 견디어 내는 구멍가게는 작지만 단단하게 그린다.” p. 138

 

"수직에서 느껴지는 경쟁과 성공 지향의 이미지와 엄숙함, 숭고함이 나는 낯설다. 그저 동시대의 소박한 일상이나 사람과 희망에 의지하여 오늘도 작업에 임할 뿐이다. 정겨운 구멍가게, 엄마의 품, 반짇고리 같이 잊고 있던 소중한 마음을 되돌아보게 하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 p. 139

 

이 책에는 작가가 20여 년 동안 전국 곳곳의 구멍가게를 찾아다니며 그린 펜화 80여 점이, 작가의 담백한 글과 함께 실려 있다. 오래 곁에 두고 천천히 몇 번이고 다시 보고 싶은 따뜻한 구멍가게의 모습들이, 사계절 자연 풍광과 곁들여져 있기도 하고, 몇 그루 나무와 함께 있기도 하고, 오롯이 홀로 서 있기도 하다. 오롯이 홀로 있는 구멍가게라도 쓸쓸해 보이진 않아, 당장 개구진 꼬마 하나가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고 과자 하나를 들고 뛰어 나올 듯 쓸쓸해 보이지 않고, 여름 한 낮의 구멍가게 앞엔 물이라도 한바가지 뿌려 놔야 될 것 같은 열기가 뿜어져 나오는 듯하기도 하다. 사람은 하나도 볼 수 없지만, 이제 좀 나가도 되겠냐며 그림 한구석에서 쓰윽, 누구라도 나설 것처럼 모든 그림이 섬세하고, 생동감 넘치고, 정답고, 예쁘다.

 

나는 이 책을, 신문에서 보고, 인터넷으로 구입했다. 이 책이 내 손에 들어오기까지 어떤 정다운 눈맞춤도 대화도 없었다. 그게 슬펐다. 엄마에게 이 책 좀 보시라고, 이런 가게들이 기억 나시냐고, 정말 잘 그리지 않았냐고 자랑하며 나는, 좁고 긴 직사각형 모양의 가게, 바닥에서 천장끝까지 책이 빼곡이 꽂혀 있던 중앙서적의, 골라든 책마다 한마디씩 해 주시던 아저씨가 유독 그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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