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께, 황석영의 <손님>을 다 읽고 왠지 몸서리 쳐지는 몸을 추스르며 뭔가를 쓰기 위해 책상 앞에 앉았다. 앉았는데 어떤 것도 쓸 수는 없고, 대신 머리만 깨져라 아파왔다. 무서울 정도로 괴괴한 가운데 어느집 보일러 돌아가는 소리가 거짓말처럼 또렷이 들려왔다. 추웠다. 추워서 책상위의 책이며 연습장 따위를 주섬주섬 챙겨 이불 속으로 기어들었다.
전날 읽은 황순원문학상 수상작품집은 한 편, 한 편이 끝날 때마다 작은 탄식 같은 것이 흘러나왔었다. 특히, 성석제의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는 열 번 잘게 웃고 그 웃음 뒤에 그만큼의 슬픔을 조금씩 담아 두었다가 한 번 크게 울, 문학평론가 하응백 교수의 말처럼 "문장의 재미와 삶의 곡진한 슬픔이 공존하는 소설" 이었다. (나는 이 말을 포스트 잍에 적어 다이어리의 맨 첫 장, 짐 모리슨의 사진 위에 붙여 놓았다.)
특별히 입맛에 맞는 과자를 종합선물세트의 여러 과자 중에서 발견하게 되면, 이전에 먹은 과자가 아무리 질이 좋고 이후에 먹을 과자가 아무리 맛있는 것이라도 그저 '괜찮네' 정도로 뭉뚱그려지고 유독 그 과자 맛만이 입 안에 오래 남는 것처럼, 성석제의 작품이 너무 인상적이어서 다른 작가들의 작품이 크게 되새겨지지 않은 것일 뿐 모두 탄식이 터져나올 만큼 좋은 소설들이었다. 그 좋음은 사실 책을 읽기도 전에 표지의 사진만으로도 느껴졌었다. 그 분(박완서)의 웃음은 아무래도 외할머니의 그것을 닮았다.
그런가 하면 황석영의 옆모습은 아들과 대판 싸우고 석 달 전 집을 나가 아직도 소식이 없는 아랫집 나리 할아버지를 닮았다. 굿판에서 나리 할머니가 춤을 추면 그 곁에서 장고인가 북을 쳤다는. (어디서 뭘 하며 사는지 그런 건 전혀 궁금해 하지도 않고 나는 그저 주차할 자리가 생긴 것만 좋아라 했다.) 그 나리 할아버지같이 생긴 '장길산'의 아버지가, 마누라의 춤사위도 북채의 휘두름도 없이 불러낸 '귀기의 허깨비들'이 책과 함께 덮히면서, 비명에 간 망령들로 시끄럽던 방 안이 갑자기 괴괴해졌고, 그래서 한기가 밀려들었던 것이다.
살인을 한 적도, 교사(敎唆)를 한 적도 없으며 누군가를 죽일 만큼 미워한 적도 없었지만, 어쩌면 내게도 원한까지는 아니라도 섭섭한 맘 한 자락 감고 있는 귀신이 있어, 저 작가의 영매술에 묻어 여기까지 온 것이나 아닐까, 무서웠다. 무섭고 추웠다. 추위는 추위라도 아주 낯선 추위였다. 무언가 방 안으로 스며들었음이 분명했다.
작은 몸피에 한 갈래로 대충 묶인 징그럽게 검고 긴 머리, 저것은..그날의 이모다. 나는 대학교 1학년 때부터 졸업한 후 1년까지, 5년 동안 해마다 여름이면 외가에 자두를 따러 갔었다. 밭은 꽤 넓은데 일할 사람이라곤 할머니 뿐이어서 웬만한 힘쓰는 일은 모두 내 차지였었다. 꽉 찬 망태를 천막 아래 한 곳에 모아 붓고, 꽉 찬 궤짝을 리어카에 싣고, 꽉 찬 리어카를 농협까지 끄는 그런 일들. TV채널은 두 개 뿐이고, 음악은 전혀 들을 수 없고, 뒷간의 나무 판때기는 불안했지만 대체로 살기 좋은 날들이었다. 저...이모만 없었다면.
미친 사람이 까닭없이 웃는 것은 행복한 과거를 추억하는 중이기 때문이다. 미친 사람이 묻는 말에 대답을 하지 않는 것은 그 추억이 너무도 감미로워 그를 온통 잠식해 버렸기 때문이다. 듣기는 하지만, 들은 내용을 되새기진 않는다. 추억을 거슬러, 거슬러 그들은 이미 아이의 감성을 가진 때로 돌아가 있다. 의미도 모르는 험한 욕을 하고, 칼이나 가위 같은 흉기를 장난감처럼 가지고 논다. 그들은 아이이기 때문에 그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한다....그리고 그시기의 나는 저 순수한 사람의 그런 순수함을 알지 못했다.
5년째 되던 해, 비가 왔었던가...대낮인데도 밭에 나가지 않고 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책을 읽고 있었는데, 이모가 불쑥 방 안으로 들어왔다. 외가에 있은 지 며칠이 지난 후였는데, 이모를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손에는 큰 가위를 들고, 입가엔 이상한 웃음을 머금은 그녀. 기름이 떡이 진 징그럽게 길고 검은 머리를 들이밀더니 좀 짤라줘, 간지러워 죽겠어 한다. 나는...너무 놀라서, 무섭고 불결하고 징그러워서, 자리를 박차고 맨발로 도망을 쳤었다.
그해 겨울, 이모는 죽었다. 사람이 그렇게 죽을 수도 있다는 걸 그때야 알았다. 예쁘고 상냥한 여자였다. 예쁘고 상냥했는데...그녀는 아무래도 세상 밖으로는 나갈 자신이 없었나 보았다. 자기 속으로만 자기를 키우다가 그렇게 자기 속으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리 와. 나는 이모의 머리에서 삭아내릴 것 같은 고무줄을 끄르고, 머리를 빗기 시작했다.그리고, 사진 속에서 본 가장 예뻤던 때의 머리로 잘라 주었다. 깜찍한 귀밑 단발머리를 찰랑거리며 고마움의 웃음을 한 번 지어보이던 그녀가 방 저쪽 구석을 향해 고갯짓을 했다. 왜? 하고 돌아보니, 거기에 옷 밖으로 보이는 상체가 온통 자줏빛으로 퉁퉁 부어오른 여자가 슬픈 얼굴을 하고 앉아 있다. 아아....오늘은 여기까지만....작은엄마는 다음에 오세요...무섭고 슬프단 말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