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mes and the Giant Peach (Paperback)
로알드 달 지음, 레인 스미스 그림 / Puffin / 199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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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알드 달 책을 원서로 처음 읽었다.

불쌍하고 불쌍한 제임스의 기괴한 여행은 무섭고도 유쾌했다.

 

 

줄거리는 그야말로 기묘하고, 당혹스러웠고 난데없이 등장하는 유머와 말장난에 피식피식 웃음이 나온다.

로알드 달은 어디서 어떻게, 왜 웃음이 터지는지 정말 제대로 아는 사람이다.

말도 안되는 이야기로 가득 찬 어린이 책이 분명하건만, 전혀 유치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이렇게 행복한 결말로 끝나는 마지막 부분에서 왜 눈물이 나오는 건지 도대체 모르겠다.

난 이제 동심이 메말랐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건가. 아니면 내게 동심과 관계없는 무언가 트라우마가 있는 건가.

뉴욕의 아이들이 모두 달려들어 복숭아를 씨만 남기고 다 먹어버리는 그 장면은 마치 <향수>에서 그루누이의 마지막을 떠올리게도 했다.

 

 

예전에 큰애와 함께 <멋진 여우씨>를 한글로 읽었을 때는 로알드 달의 매력을 몰랐는데 원서로 읽으니 정말 잘 알겠다.

아, 나도 제임스와 거대 곤충들처럼 502 마리의 갈매기를 매단 슈퍼 복숭아를 타고 어디로건 멀리, 저 멀리, 날아가 보고 싶다.

 

 

There was not a sound anywhere. Traveling upon the peach was not in the least like traveling in an airplane. The airplane comes clattering and roaring through the sky, and whatever might be lurking secretly up there in the great cloud-mountains goes running for cover at its approach. That is why people who travel in airplanes never see anything.

But the peach...ah, yes...the peach was a soft, stealthy traveler, making no noise at all as it floated along. And several times during that long silent night ride high up over the middle of the ocean in the moonlight, James ans his friends saw things that no one had ever seen before. (87)

 

 

 

이런 장면을 어떻게 상상해내는 걸까.

로알드 달 책은 보통 퀸틴 블레이크 삽화로 되어 있는데, 이 책에는 레인 스미스가 1996년에 그린 삽화가 들어있다.

집에 있는 번역본에서 퀸틴 블레이크 삽화도 살펴봐야겠지만, 레인 스미스 그림이 이야기의 분위기를 잘 살려낸 거 같다.

 

 

 

환상적인 이야기 속에 황당한 리얼리티가 살아있는 동화책이다.

1961년에 쓴 책을 이제서야 읽어본 게 너무 억울하지만, 이제라도 읽었으니 다행이다.

원서 읽기 시작해서 건진 최고의 애들 책을 꼽는다면 하나는 <Bud, Not Buddy>, 그리고 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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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로 읽는 세계사 사계절 1318 교양문고 5
주경철 지음 / 사계절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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띄엄띄엄 읽어서 좀 오래 걸리긴 했지만 재밌게 읽었다.

중세와 근현대로 올수록 흥미진진한 주제가 많았다. 세계사의 줄거리를 어느 정도 파악하고 읽는다면 더 좋을 것 같다.

청소년 대상이라지만 그렇게 쉬운 책은 아니란 생각이 든다.

 

 

이집트 피라미드, 스파르타, 로마, 바이킹, 마녀사냥, 근대의 가정, 군사, 사랑, 음식, 술, 예술 등 문화의 다양한 요소들을 역사의 맥락 속에서 다른 관점으로 볼 수 있게 해준다.

꼭지가 끝날 때마다 소개된 글상자 내용은 충격적인 것도 많았다.

 

책에서 기억해 둘 만한 것들을 적어 본다.

 

 

피라미드를 만들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을 강제로 동원하고 채찍을 휘두르며 일을 시켰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사람들은 농한기에만 나와서 일을 했으며 그것도 강제 노역이 아니라 식량을 지원받았기 때문에, 아주 긍정적으로 해석하면 일종의 '영세민 취로 사업'이라고 보아도 좋다. (40)

 

따라서 피라미드를 최악의 전제정치의 산물로만 볼 수는 없다는 거다.

 

 

그밖에도 아래 내용들을 흥미있게 읽었다.

 

 

크레타섬의 신화인 미노타우로스는 미노스 왕비가 암소 가죽을 덮어쓴 다음 수소와 교미해서 낳은 괴물이란다. 사람고기를 먹는다. 미노스왕은 너그럽기도 하지. 이런 괴물을 살려주는 것도 모자라 미궁 속에 가둬 놓고 먹이까지 공급해 준다.

스파르타는 헤일로타이 계층을 지배하였다. 일 년에 한 번 헤일로타이 마을을 습격하여 인간사냥을 했다네. 헉! 지배층(스파르타)보다 피지배층(헤일로타이)이 10배나 많았다고 한다. 그런데도 찍소리 못했단다.

바이킹은 이미 10세기에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다네? 원주민과 교역하다 쫓겨났다고 한다.

 

기독교의 시대라는 중세에도 그 안을 들여다 보면 이런 사정이 있었다.

 

 

일반 민중들은 마술적 사고에 흠뻑 젖어 있었다. 말하자면 이들에게는 자연 세계와 초자연 세계의 경계가 흐릿해서 신과 악마가 끊임없이 그 사이로 비집고 들어와서 활동하고 있었다. 이는 단순한 '미신' 정도가 아니라 일상생활과 깊이 연관된 '문화'였다. 그리고 사실 기독교 이전의 많은 민중 신앙이 가톨릭 교회 속으로 들어와 있었다. 예컨대, 농사가 잘되라고 신부가 밭 둘레를 돌면서 밭에다가 성수를 뿌리는 행위는 기독교 교리와는 큰 차이가 있는 것이었다. 병에 걸렸을 때 특정 성인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도 기독교 이전의 신앙과 관련이 있었다. 병이란 악마적인 힘이 일으킨 것이며 이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그 힘을 다스릴 수 있는 무당이나 신에게 부탁해야 한다는 사고인데, 아마도 기독교 이전에 한참 '날리던' 지방의 신이 가톨릭 성인으로 변신해서 편입해 들어왔을 가능성이 크다. 또 삶과 죽음이 연결되어 있어서 귀신들이 횡행하는 것으로 사람들은 이해하고 있었다. 무지몽매한 일반 민중들만 이런 식의 사고를 한 것은 아니었다. 프랑스 국왕 루이 11세는 마법의 메달을 달고 살았고 귀족들은 점성술에 빠져 있었다. (177)

 

 

그런가 하면 요즘 한국 현대사에 관심이 많다보니 '마녀사냥' 이야기가 어쩐지 낯설지 않았다.

 

 

인간의 지성은 갈수록 발달하고 사회는 더욱 문명화되는 것일까? 만일 그렇다면 지금쯤 우리는 지상낙원에서 오순도순 살아가고 있을 것이며, 비참한 탄압과 야만적인 전쟁 같은 것은 아예 사라졌을 것이다. 마녀사냥과 같은 현상을 보노라면 우리 마음 속에 집단 광기가 숨어 있는 것은 아닌지 자문하게 된다. 마녀사냥은 그 모습 그대로는 근대 초 유럽의 특이한 현상이지만 유사한 현상은 언제나 있었다. 사회 전체를 근본적으로 위협하는 불순한 세력! 그것은 히틀러에게는 유대인이고, 파시스트들에게는 공산주의자들이며, 남한 정권에게는 북한이 사주하는 불순 세력이고 북한 정권에게는 '남한과 미제의 스파이들'이다. 때로 권력은 일부러 그런 위험 세력을 조작해 내서 사람들을 선동하려 한다. 그런 조작이 너무나도 쉽게 먹혀 들어간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 내면에 '마녀사냥'식의 충동이 잠재해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194-195)

 

 

근대의 가정집 구조에서 확실하게 부부만의 침실 공간을 나누게 된 이후에 사랑도 변했다는 얘기도 재미있었다.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바꿔버린 기차 얘기도 나왔다.

노예는 노동착취만 당한 것이 아니라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에서와 같이 백인들을 가르치기도 했다는 거다.

독일 나치에 대항한 청소년 집단, '에델바이스해적단'과 '스윙클럽'은 이름부터 남다르지 않은가. 단순한 동네 깡패들만은 아니었을 거다. 아이들은 어쨌든 본능적으로 파쇼에 저항했던 거다.

마지막 디즈니 만화에 대한 비판은 새겨들어야 할 논리였다. 암 생각 없이 좋다꼬 디즈니 애니매이션 보던 내가 다 한심해진다.

 

 

한 호흡으로 순식간에 읽을 책은 아니다.

서른 다섯 꼭지마다 많은 생각거리를 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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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순간의 역사 한홍구의 현대사 특강 2
한홍구 지음 / 한겨레출판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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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홍구 교수의 2009년 특강을 정리한 책이다.

1980년 5·18 민주화항쟁 이후 현대사를 파악하는데 아주 좋은 텍스트이다.

 

 

우리나라의 민주화가 광주항쟁에서부터 시작했다고 보고 있는데, 그 때 도청에 끝까지 남아 계엄군에 희생 당했던 사람들에 대한 미안함과 함께 하지 못했던 죄책감이 80년대 운동권의 성장과 민주화 운동의 발판이 되었다는 거다.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을 거쳐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정권과 인물들에 대한 평가가 자세하게 나온다.

노무현보단 김대중을 더 높이 평가하는 분위기였다. 참여정부는 너무 기대를 저버린 면이 많았다는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어렸을 때 나는 참 세상 돌아가는 일에 너무 관심이 없었다는 걸 알았다. 창피하다.

마지막에 나온 보수야당과 진보정당에 대한 비판과 충고는 여전히 유효하다.

야당이 보수여당 따라서 부자 만들기 당 하지 말고 기층 민중에게 다가가야 한다는 충고,

진보정당은 자기들만의 경직된 언어에서 벗어나서 대중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충고.

 

 

 

진보진영이 대중성도 부족하고 말이 어렵고 재미없어요. 촛불 때 다 들통이 났잖아요. 운동권이 마이크를 잡으면 분위기가 싸해졌잖아요. 왜? 세 마디만 들어보면 알거든요. "신자유주의의 구조적 위기" 이렇게 나오면 딱 운동권입니다. 제가 운동하면서 민망해본 적이 없는데 현장에서 그분들이 마이크 잡았을 때는 낯이 뜨거울 만큼 민망했어요.

정파나 대중성 부족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현재 진보가 갖고 있는 이미지예요. 진보 하면 칙칙하잖아요. 운동권인지 아닌지 보면 대충 압니다. 사실 저도 이런 옷 입고 다니면 안 되는데…… 진보도 옷 잘 입고 모양도 잘 가꾸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동구가 왜 무너졌다고 생각하세요? 뭐 때문에 무너졌습니까? '블루진' 때문에 무너진 것 아닙니까? 마이클 잭슨이 들어가서 공연한 지역부터 차례차례 무너졌어요. 팝과 코카콜라, 블루진. 젊은이들이 따라 하고 싶어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걸 못 만들어내면서 어떻게 우리 편이 되라고 하겠어요? 나는 진보도 그런 고민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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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

왜 그랬을까. 왜 다짜고짜 패고 죽였을까. 사람을 잡아족쳐야 되는 개쯤으로 생각했던 것인가.

강풀 웹툰 <26년>이 복수에 집중했다면 봄날은 광주의 비극적 상황을 재현하는데 집중하고 있다.

불과 30여년 전 이 땅은 야만과 무법이었다.

 

 

 

2권

본격적인 살육이 벌어지고 민중들은 저항에 나선다.

어렸을 적 집 가까이에 있었던 성당에서 살육의 결과들만을 보았을 뿐, 항쟁의 동기와 전개과정을 이렇게 현장감 넘치게 들어보긴 처음이다. 책에서도 인용되는 민중항쟁의 기록이 세계기록유산이라던데 어디서 들춰라도 봐야겠다.

80년 광주는 생지옥이었구나.

 

 

 

3권

살육의 시간이 지나고 본격적인 저항이 시작된다. 막연하게만 알고 있었던 광주항쟁의 과정과 전말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그저 국지전이 아니었다. 십만이 넘는 민중들의 거대한 항쟁이었다. 착검에 이어 발포가 시작되는 시점까지 이어진다.

무기력한 언론 기자들의 모습, 절망하면서 군중의 힘과 에너지에 감격하는 사람들, 비겁한 도지사, 열정에 찬 젊은이들, 나약한 사람들, 번민하는 군인들, 악마같은 군인들의 군상들이 교차되고 있다.

새벽까지 책장을 넘기게 한다. 분통이 터져서. 억울하고 기가 막혀서.

 

 

 

4권

5월 21일 13시 엄청나게 몰려든 시민들에게 결국 발포. 4권에서 이때의 상황을 보여준다.

임신8개월 임산부도 조준사격으로 머리를 쏘아 죽인다. 광주 모든 병원에는 시신과 부상자로 넘친다.

결국 인근 지역에서 총기와 폭약을 탈취한 시민군이 계엄군에 맞서게 되고,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계엄군은 철수한다.

시민대책위원단이 꾸려지고 투사회보를 발간하던 윤상현 등은 계엄군과 협상 하는 이들 위원회의 안일한 인식에 절망하지만 항쟁이 시작된 이후 붙잡히고 흩어진 사회운동가와 단체들이 시민을 대표할 수 있는 명분이 없음을 한탄한다.

 

 

 

5권

그들이 끝까지 남아 죽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다.

무석이 미순을 남겨두고 죽은 건 안타깝다. 그것까진 안타까워서 개연성이 있었지만, 마지막에 무석이 아버지와 전화로 화해하는 설정은 (군에서 통신을 차단하여 실제 그렇게 하지 못했으리라는 걸 감안하지 않더라도) 좀 작위적이 아닌가 싶다.

나약하고 사변적이며 총칼 앞에 나서지 못하던 신부들과 대조적으로 짧지만 강렬했던 까까머리 청년의 죽음이 기억에 남는다. 자기한테 일이 생기면 나주 다보사에 알려달라고 할 때 자기를 승려라고 하던데 스님들은 자신을 '중'이라고 부르는 게 보통이다.

그러나 간결하고 거침없이 망설이지 않고 신념을 위해 목숨마저 내던지며 중생을 구하러 달려 나가던 그 장면은 최고의 장면이었다. 정말로 광주민주화항쟁 때 죽은 승려가 있나 궁금해서 '광주사태사망조서'를 국가기록원에서 다운받아보려 했으나 '요청하신 페이지에 사용권한이 없습니다'라고 하더라.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사람 중에 혹 승려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이 까까머리 청년 이야기는 분명 작가의 상상이었을 듯하다.

 

 

 

다큐소설로서 광주항쟁의 전모를 이해하기에 좋다. 하지만 좀더 압축하여 썼다면 어땠을 까 하는 생각도 든다.

간간이 나오는 '~마다에' '다름 아니다' 등 일본식 말투가 쓰인 것은 사소한 단점이긴 하지만 좀 거슬렸다.

 

 

 

 

 

#

<봄날> 다섯 권 다섯 글자 요약:

닥치고 필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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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산 - 김훈 장편소설
김훈 지음 / 학고재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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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박해와 흑산도로 귀양간 정약전의 이야기.

건조하고 관조적이며 직설적이고 염세적인 김훈의 문체는 여전하다.

 

정순왕후도 황사영도 박차돌도 마노리도, 그리고 정약전도 다 자기 앞에 주어진 각자의 삶에 절실했겠지.

그들은 모두 존중 받아야 마땅할 인간들이었다. 이들은 비장하고 유머가 없다.

칼의 노래에서처럼 스러져 간 인물의 내면 깊숙한 곳을 들여다보는 듯한 문장들이 책에 있었다.

그래서 이 소설은 천주교 박해라는 사건이 아니라 그 시대 이념의 첨단 위에서 대립한 인간들을 이야기하는 소설이다.

유교와 천주교와 무교의 신봉자들과 동네 노인들은 갖가지 인간 현상들에 대한 나름의 해석들을 내놓는다.

감정에 대한 묘사보다는 행동에 대한 묘사가 대부분이고, 그 행동으로써 인물들의 성격과 감정들을 빗대어 드러냈다.

 

김훈의 글은 이런 종류의 생과 사가 엇갈리는 이야기에 잘 어울리는 문체임은 분명하다.

한가한 감상이나 먹고 싸는 것에 관계없는 사소한 일탈 같은 것들은 끼어들 여지가 없다.

칼의 노래가 그랬고, 남한산성, 현의 노래가 다 그랬다.

그 진중함과 각박함이 어쩔 때는 숨이 막히다가도 자꾸 찾아 읽게 되는 매력이 있다.

단순함과 고요한 관조의 시각이 주는 아름다움 때문이랄까.

 

 

 

몇몇 밑줄 쳐둔 구절들.

 

 

형제들이 한자리에 모였을 때 정약현은 급제해서 출사한 동생들의 高談에 끼어들지 않았고, 가끔씩 고개를 끄덕이며 듣기만 했다. 정약현은 집안의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말할 때는 가끔씩 이야기에 끼어들어서

- 억지로 키우려고 공들이지 말고 스스로 되도록 공들여야 한다. 키워서 길러내는 것은 스스로 됨만 못하다.

는 말을 했다. (166)

 

......오빠, 저문다. 집에 가자.

하던, 그 아침가리 화전밭의 여동생이었다. 박차돌은 여동생의 시체를 지게에 지고 잠두봉 중턱으로 올라갔다. 멀리, 허연 강이 보이는 자리였다. 박차돌은 삽을 휘둘러서 땅을 팠다. 박차돌은 누이동생 박한녀의 시체를 구덩이 밑에 내려놓았다. 염도 없고 관도 없었다. 얼굴을 위로 향하게 하고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해주었다. 고운 흙부터 덮어나가서 모래와 돌멩이로 마무리를 했다. 봉분은 없었다. 묻기를 마치고, 박차돌은 그 자리에 쓰러져서 해가 뜰 때까지 울었다. (240)

 

흑산에 대한 무서움 속에는 흑산 바다 물고기의 생김새와 사는 꼴을 글로 써야 한다는 소망이 자리 잡고 있었다. 물고기의 사는 꼴을 글로 써서 흑산의 두려움을 떨쳐낼 수도 없고 위로할 수도 없을 테지만, 물고기를 글로 써서 두려움이나 기다림이나 그리움이 전혀 생겨나지 않은, 본래 스스로 그러한 세상을 티끌만치나마 인간 쪽으로 끌어당겨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물고기의 사는 꼴을 적은 글은, 詞章이 아니라 다만 물고기이기를, 그리고 물고기들의 언어에 조금씩 다가가는 인간의 언어이기를 정약전은 바랐다. (337)

 

마노리는 황사영 선비한테서 천주교라는 걸 처음 들었을 때도, 본래 그것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쉽고 편안하게 들렸다. 너의 이웃을 사랑하라, 그처럼 분명한 것을 황 선비는 어째서 두려운 비밀처럼 싸안고 소리 죽여 귓속말을 하는 것인지, 마노리는 물어보고 싶었지만 선비에게 먼저 말을 걸 수는 없었다. 주린 사람이 꾸며서 배고파하지 않고 추운 사람이 억지로 떨지 않는 것과 같아서, 그 까닭을 물어봐도, 물어보나 마나 한 말이 될 것이었다. 선비들이란 그렇게 뻔한 것도 공력을 들여서 생각하는 일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이었다. (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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