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산 - 김훈 장편소설
김훈 지음 / 학고재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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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박해와 흑산도로 귀양간 정약전의 이야기.

건조하고 관조적이며 직설적이고 염세적인 김훈의 문체는 여전하다.

 

정순왕후도 황사영도 박차돌도 마노리도, 그리고 정약전도 다 자기 앞에 주어진 각자의 삶에 절실했겠지.

그들은 모두 존중 받아야 마땅할 인간들이었다. 이들은 비장하고 유머가 없다.

칼의 노래에서처럼 스러져 간 인물의 내면 깊숙한 곳을 들여다보는 듯한 문장들이 책에 있었다.

그래서 이 소설은 천주교 박해라는 사건이 아니라 그 시대 이념의 첨단 위에서 대립한 인간들을 이야기하는 소설이다.

유교와 천주교와 무교의 신봉자들과 동네 노인들은 갖가지 인간 현상들에 대한 나름의 해석들을 내놓는다.

감정에 대한 묘사보다는 행동에 대한 묘사가 대부분이고, 그 행동으로써 인물들의 성격과 감정들을 빗대어 드러냈다.

 

김훈의 글은 이런 종류의 생과 사가 엇갈리는 이야기에 잘 어울리는 문체임은 분명하다.

한가한 감상이나 먹고 싸는 것에 관계없는 사소한 일탈 같은 것들은 끼어들 여지가 없다.

칼의 노래가 그랬고, 남한산성, 현의 노래가 다 그랬다.

그 진중함과 각박함이 어쩔 때는 숨이 막히다가도 자꾸 찾아 읽게 되는 매력이 있다.

단순함과 고요한 관조의 시각이 주는 아름다움 때문이랄까.

 

 

 

몇몇 밑줄 쳐둔 구절들.

 

 

형제들이 한자리에 모였을 때 정약현은 급제해서 출사한 동생들의 高談에 끼어들지 않았고, 가끔씩 고개를 끄덕이며 듣기만 했다. 정약현은 집안의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말할 때는 가끔씩 이야기에 끼어들어서

- 억지로 키우려고 공들이지 말고 스스로 되도록 공들여야 한다. 키워서 길러내는 것은 스스로 됨만 못하다.

는 말을 했다. (166)

 

......오빠, 저문다. 집에 가자.

하던, 그 아침가리 화전밭의 여동생이었다. 박차돌은 여동생의 시체를 지게에 지고 잠두봉 중턱으로 올라갔다. 멀리, 허연 강이 보이는 자리였다. 박차돌은 삽을 휘둘러서 땅을 팠다. 박차돌은 누이동생 박한녀의 시체를 구덩이 밑에 내려놓았다. 염도 없고 관도 없었다. 얼굴을 위로 향하게 하고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해주었다. 고운 흙부터 덮어나가서 모래와 돌멩이로 마무리를 했다. 봉분은 없었다. 묻기를 마치고, 박차돌은 그 자리에 쓰러져서 해가 뜰 때까지 울었다. (240)

 

흑산에 대한 무서움 속에는 흑산 바다 물고기의 생김새와 사는 꼴을 글로 써야 한다는 소망이 자리 잡고 있었다. 물고기의 사는 꼴을 글로 써서 흑산의 두려움을 떨쳐낼 수도 없고 위로할 수도 없을 테지만, 물고기를 글로 써서 두려움이나 기다림이나 그리움이 전혀 생겨나지 않은, 본래 스스로 그러한 세상을 티끌만치나마 인간 쪽으로 끌어당겨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물고기의 사는 꼴을 적은 글은, 詞章이 아니라 다만 물고기이기를, 그리고 물고기들의 언어에 조금씩 다가가는 인간의 언어이기를 정약전은 바랐다. (337)

 

마노리는 황사영 선비한테서 천주교라는 걸 처음 들었을 때도, 본래 그것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쉽고 편안하게 들렸다. 너의 이웃을 사랑하라, 그처럼 분명한 것을 황 선비는 어째서 두려운 비밀처럼 싸안고 소리 죽여 귓속말을 하는 것인지, 마노리는 물어보고 싶었지만 선비에게 먼저 말을 걸 수는 없었다. 주린 사람이 꾸며서 배고파하지 않고 추운 사람이 억지로 떨지 않는 것과 같아서, 그 까닭을 물어봐도, 물어보나 마나 한 말이 될 것이었다. 선비들이란 그렇게 뻔한 것도 공력을 들여서 생각하는 일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이었다. (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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