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이 빈틈 없이 차 있다. 퍼즐 맞추는 것처럼 책 위치를 바꾸면서 이리저리 옮겨봐도 더 이상 꽂을 데가 마땅치 않다. 조그만 개인 연구실이라도 마련하여 튼튼한 2중 슬라이드 책장을 설치하고 책들을 도서관 분류식까진 안되더라도 나름 체계를 잡아 정리하고 싶다는 소박한(?) 꿈이 생겼다.
이제 더 이상 꽂을 데도 없는데, 그래도 사야하고, 사고 싶은 책들이 많다. 베스트셀러나 신간은 아예 거들떠도 보지 않지만 관심사가 넓어짐에 따라 구간 도서 중에서 눈에 밟히는 책들이 한두 권이 아니다. 이래서 책덕후들이 책 사재기에 혈안이 되는가 보다. 아이들한테 들어가는 돈과 생활비를 빼면 남는 돈이 얼마 없어 비싼 책을 사는 것은 엄두가 안난다. 생각해 보면 식구들과 외식 한 번 하려면 보통 4-5만원 정도가 드는데, 5만원 넘는 책을 사면 그만큼 맛있는 음식을 먹고, 좋은 옷 입기가 힘들어진다. 책 한권에 사오 만원이면 꽤 비싼 편이지만, 그런 책들은 대개 두고두고 볼 수 있는 역작들이 많다. 그래서 이런 정도의 책들은 외식비 조금씩 아껴가며 사두려고 한다. 도서관에서 연장해 가며 읽는 것도 한계가 있지 않은가.
사전류도 비싼 것들이 많다. 얼마 전에 만병통치약 님 소개로 알게 된 <한국지명유래집>은 매우 탐나는 아이템이다. 관련 전공자들이 군침 삼키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낱말의 <우리말 유의어 대사전>(전7권)은 아예 머리 속에 입력하고 싶은 사전이다. 내 글이 너무나 졸렬하고 조잡해 보일 때 단어라도 바꿔서 있어보이게 하려면 이런 사전을 뒤져서 쓸만한 낱말을 찾아야 한다. 그러나 88만 2천원(핡).
각 권이 9만 5천원인 단국대동양학연구소 <한한대사전>(1~15)은 그저 꿈일 뿐. 내가 동양고전 연구자가 아님을 다행으로 여기고 있다. 활용도 못 하면서 꽂아두는 건 책에 대한 예의가 아닐 것이다(라고 구차한 핑계를 대본다). 서울대역사연구소 <역사용어사전>이나 큰맘 먹고 겨우 비벼볼 수 있을까? 그렇다고는 해도 15만원이면 4-5인 가족 워터파크 입장료에 필적하는 가격이다: 긴축정책과 맹렬한 부업이 요망된다. 아래 사전들을 검색하다가 줄기에 딸려온 왕건이 감자처럼 검색된(알라딘의 획책이 분명한) <중국사상문화사전>도 숨이 잠깐 멎을 만한 사전이다. 고려대 <한국어대사전>도 추가.
결국 이 페이퍼를 계속 쓰다가는 탐욕과 갈등만 생겨날 뿐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을 듯싶다. "깨지않을 꿈을 꾸도록" 눈을 감는다는 노래가 있던데, 눈 감는다고 책이 나한테 달려오지는 않는다. 책은 꿈에서는 읽을 수 없고 만질 수 없다. 정말이지 꿈에서 책을 읽은 적은 단 한 번도 없는 거 같다.



이제 비현실적이며 허황된 꿈들은 잊고, 그나마 실현이 가능한 꿈을 꾸도록 하자.
일단 전공 개설서류는 갖고 있으면 언젠가는 들춰보게 된다. 훌륭한 도판까지 있다면 급하게 자료로 스캔받기도 좋다. 전공자들은 개설서를 잘 안 읽는 경향이 있는데, 가끔씩 개설서에 적힌 내용에서 영감(과 반감)을 얻는 경우도 있으므로 무시해선 안되겠다. 한국미술사 개설서 중에는 유홍준의 <한국미술사 강의> 시리즈가 도판도 좋고 내용도 좋다. 근래의 연구성과들을 반영하여 작성한 내용도 (몇 개 발견한 오류를 빼면) 전체적으로 나쁘지 않다. 1권은 중고서점에서 시력이 45라는 '낙타의 눈'으로 찾아내어 구입했는데, 2권과 3권은 아직 찾지 못하였다. 일단은 빌려서 통독하고 밑줄은 사서 치자.
서양미술사의 '넘어서야 할 아버지' 파노프스키의 핵심은 <상징형식으로서의 원근법>에 있다고 하던데, 반드시 소장하여 철저히 정독하고 그 논지를 검토해야겠다.
교양(과 허세)을 위해 철학책도 부지런히 읽어야겠다. 철학책은 천천히 곱씹으며 읽어야하므로 도서관에서 빌려보는 게 어렵다. 밑줄도 치고 메모도 하면서 읽는 게 제맛이니까. 그래서 가성비가 뛰어난 동서문화사 월드북 시리즈 중에서 몇 권 찍어두었다. 베르그송, 마르크스, 스피노자, 베버 등 그 이름만으로도 해발 3천 미터가 넘는 잔구성 암산처럼 느껴진다. 가진 거라곤 달랑 등산화 한 켤레 뿐인데... 한길 그레이트북스 시리즈에도 좋은 책이 많다. 한나 아렌트, 플라톤, 헤겔, 레비-스트로스, 엘리아데 등 서양 사상가와 정약용, 리쩌허우 같은 동양 사상가 책도 꽤 있다. 다만 월드북 시리즈보다 가격이 좀 센 편이어서 구입이 망설여진다.
이런 시리즈들을 전질로 들여놓고 과시할 경제적 능력과 공간은 없더라도 책들을 읽어낼 수 있는 정신적 능력과 뇌용량에는 여유가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독서를 버텨낼 수 있는 강인한 체력과 굳건한 시력도 필요할 것이다. 운동을 해야 눈이 더 나빠지지 않을 거 같다. 좀 움직이면서 살자. 우중충하게 책상에만 붙어있지 말고.

플라톤의 <국가>와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번역본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 같다. 가격도 그나마 합당한 편이어서 올해 안에는 구입할 수 있을 것 같다. 러셀의 <서양철학사>도 언젠가는 사야겠다. 러셀의 명료한 문장을 원문으로 읽는 것도 평생 한 번쯤은 도전해 볼 만하다. 그러나 주제파악을 해야겠지. 호평 일색인 빨간색 힐쉬베르거의 <서양철학사> 상권은 역시 중고서점에서 '낙타의 눈'으로 발견했기 때문에 이제 하권만 구하면 된다. 명성이 자자한 까치글방의 <물질문명과 자본주의>(6권)는 언제 읽을 것이며, <논어> 마치면 읽을 <장자>, <도덕경> 같은 동양 고전은 또 언제 읽을 수 있을까.


북플과 서재를 짬날 때마다 둘러보면 갖고 싶고 읽고 싶은 책들이 불어나게 되는데 이 또한 고민이 아닐 수 없다. 서재에서 본 이오덕 선생 신간도 탐이 나고, <직관 펌프, 생각을 열다>도 궁금하다. 홍명희의 <임꺽정>은 읽다가 말았는데, 파주 출판도시에 있는 사계절에 갔다가 반값 전권을 들었다 놨다를 반복하다 지금 사둔들 읽을 시간도 없고 꽂아둘 공간도 없다는 핑계를 들어 제자리에 조용히 놓아두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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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두꺼운 책들은 꽂아둘 책장이 없다는 것만이 문제일 뿐 죽기 전에는 꼭 사서 읽어 보려고 한다. 아무래도 집을 넓힐 수밖에 없겠는데, 그러려면 어서 빨리 이 부동산 거품이 꺼져야 한다. 책도 맘 놓고 못 사는 이 사단이 어디서 온 것인가. 책이라는 '동산' 소비를 막고 있는 '부동산' 투기꾼 님들은 영원히 나한테 저주받아 마땅하다. 백성들이 저마다 교양을 마음껏 쌓지 못하게끔 꾸준하고 지대한 공헌을 해 오신 분들이 바로 이 분들이니까. 된장, 결국 기승전부동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