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 옹야편을 보니 이런 말이 나오더라.
子曰 質勝文則野 文勝質則史 文質彬彬 然後君子
자왈 질승문즉야 문승질즉사 문질빈빈 연후군자
김원중 역 <논어>에서는 위 문장을 이렇게 해석했다.
바탕이 꾸밈을 이기면 촌스럽고, 꾸밈이 바탕을 이기면 텅빈 듯하다. 꾸밈과 바탕이 고르게 조화를 이루고 난 뒤에야 군자인 것이다. (123)
한편 신창호 역 <한글 논어>에서는 이 부분을 좀더 자세하게 번역했다.
사람의 본바탕이 자라나면서 후천적으로 꾸민 것보다 강조되면 촌스럽다. 꾸민 것이 본바탕보다 강조되면 사람 됨됨이가 텅 빈듯 공허하다. 본바탕과 나중에 꾸민 것이 함께 어울려야 훌륭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곧바로 이어지는 해제에서는
실질적 내용이나 도리, 사실적 바탕만을 강조하고 외형적으로 꾸미거나 문화적으로 수식하는 것을 소홀히 하면 천박한 사람으로 비치기 쉽다. 그렇다고 지나치게 외형을 꾸미거나 문화적 수식만을 강조하고 실질적 내용을 소홀히 하면 알맹이는 없고 수다스런 사람이 된다. 따라서 문화적 꾸밈과 실질적 내용이 잘 어울려 빛을 발휘해야 교육받은 사람으로서 온전한 인성을 갖추게 된다. (184)
라고 덧붙이고 있다.
그런데 이런 '바탕'과 '꾸밈'에 대한 생각은 사람 뿐만 아니라 예술이나 학문에도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
저 유명한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이고, 직관 없는 개념은 공허하다'던 칸트의 말도 결국 비슷한 얘기 아닌가 싶다.
철학이란 학문이 서양에서 좀 더 체계적으로 자리잡은 구석은 있지만 비슷비슷한 생각들은 동양에서도 얼추 발견할 수 있는 거 같다. 철학에 동서양을 나누는 것도 어찌 보면 웃기는 일인 듯싶기도 하고.
정말 그런지 죽기 전이라도 한 번 살펴보는 것이 어떨까 싶어서 동양 고전을 조금씩 읽으려고 한다.
김원중 선생 책은 논어 원문에 충실한 번역으로 문장을 곱씹으며 생각할 여지를 주는 장점이 있고(물론 각주도 충실하다), 신창호 선생 책은 이해하기 쉬운 번역에 친절한 설명까지 곁들였기 때문에 두 권 다 저마다 장점이 있다.
그래서 요즘 이 두 책을 번갈아 조금씩 읽고 있는데, 구절들을 비교하면서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성백효, <논어집주>는 가끔 참고만 한다. 주석이 너무 길고 어려워서 본문에 집중이 잘 안되는 편이다.
옛날에 논어 읽어보겠다고 그걸로 시작했다 끝을 못봤었는데, 이번에는 기어이 완독할 수 있겠다는 느낌적인 느낌이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