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 시에 나오는 나귀, 옛 물건들, 여러 가지 음식들은 거의 다 사소하고 심지어는 처량하기까지 한 것들이다.
그런데도 백석은 이 모든 사물들한테 사랑을 담아 노래했다.
소래섭이 지은 <백석, 외롭고 높고 쓸쓸한>(우리학교, 2014)에서 글 몇 줄 옮겨 본다.
아무래도 안도현 <백석평전>도 읽어봐야 할 것 같다.
누군가는 이 작품에서 백석이 왜 하필 ‘흰 당나귀’를 타고 싶어하는지 궁금해할 수도 있겠습니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발표하기 이전부터 백석은 나귀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는 함흥에 간 지 얼마 안 돼 발표한 「가재미·나귀」라는 수필에서 이렇게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옛날이 헐리지 않은 중리(中里)로 왔다. 예서는 물보다 구름이 더 많이 흐르는 성천강이 가깝고 또 백모관봉(白帽冠峰)의 새하얀 눈도 바라보인다. 이곳의 좌우로 긴 회담들이 맞물고 늘어선 좁은 골목이 나는 좋다. 이 골목의 공기는 하이야니 밤꽃의 내음새가 난다. 이 골목을 나는 나귀를 타고 일없이 왔다 갔다 하고 싶다. 또 예서 한 오 리 되는 학교까지 나귀를 타고 다니고 싶다. 나귀를 한 마리 사기로 했다. 그래 소장 마장을 가 보나 나귀는 나지 않는다. 촌에서 다니는 아이들이 있어서 수소문해도 나귀를 팔겠다는 데는 없다. 얼마 전엔 어느 아이가 재래종의 조선말 한 필을 사면 어떠냐고 한다. 값을 물었더니 한 오 원 주면 된다고 한다. 이 좀말로 할까 하고 머리를 기울여도 보았으나 그래도 나는 그 처량한 당나귀가 좋아서 좀 더 이놈을 구해 보고 있다.
당시에도 나귀는 구하기 어려운 동물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도 백석은 굳이 나귀가 갖고 싶어 시장을 찾기도 하고 주변에 수소문도 해 봤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백석은 나귀를 타고 한가롭게 왔다 갔다 하고 학교에도 다니고 싶어 하지만 나귀를 그런 용도로 부리는 사람은 당시에도 없었습니다. 탈 것이라면 나귀보다 더 나은 것들이 얼마든지 있었으니까요.
예로부터 나귀는 짐을 싣기 위한 동물이었고, 교통수단으로 쓰일 경우에도 주로 신분이 초라한 사람들이 이용했습니다. 어쩌면 그런 이유 때문에 백석은 더 나귀를 타고 싶어 했는지도 모릅니다. 자동차가 오가는 대로부다 좁은 골목이 더 좋다고 말하는 것처럼 백석은 늘 버려지고 소외되고 감추어진 것들에 주목했습니다. 처량한 동물이라서 오히려 백석에게는 나귀가 더욱 소중했습니다. 세상을 버리고 떠나려는 자의 처량한 심정을 알아줄 길잡이로도 나귀는 제격이지요. (121-122)

함윤덕, <기려도>, 조선 16세기
『사슴』 속의 시간은 근대화되기 이전이라는 의미에서 과거일 뿐 특정한 어떤 시기를 가리키지 않습니다. 그는 「목구」라는 시에서 제사에 쓰이는 그릇을 두고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내 손자의 손자와 손자와 나와 할아버지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와…… 수원백씨 정주백촌의 힘세고 꿋꿋하나 어질고 정 많은 호랑이 같은 곰 같은 소 같은 피의 비 같은 밤 같은 달 같은 슬픔을 담는 것 아 슬픔을 담는 것” 이처럼 그가 『사슴』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자자손손 살아왔던 어떤 장소와, 그 장소에서 변암없이 지속적으로 펼쳐지고 있는 삶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백석이 사투리에 특히 관심을 보인 것도 그가 시간보다는 장소에 더 관심이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지요. 사투리는 시간이 아니라 특정한 장소를 부각시킵니다. 또한 전설과 같은 옛 이야기, 연중 행사 때마다 되풀이되는 독특한 풍속 역시 시간보다는 장소의 특수성을 더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사슴』 이후의 시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서 소개한 연작들뿐만 아니라 「산중음」, 「물닭의 소리」, 「서행시초」 등의 연작을 통해서도 그는 그 지역만의 색깔을 시에 담기 위해 애썼습니다. 특히 그의 기행시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지역 특유의 음식들입니다. 그의 기행시에는 빠짐없이 음식이 등장하고, 음식은 그 지역 특유의 ‘맛’을 드러내지요. 1940년 이후 해방 전까지 일제의 강압을 피해 만주에서 생활할 때도 음식과 장소에 대한 그의 집착은 여전했습니다. 이 시기 그는 만주에서 민족의 터전이었던 장소를 탐색하기도 하고, 음식을 통해 고향이라는 장소에 대한 그리움을 피력하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그의 모든 시들은 대부분 어떤 시간이 아니라 어떤 장소에 관한 이야기이며, 음식은 그 장소의 성격을 이야기하기 위한 핵심적인 매개이지요. 그는 자신이 음식과 장소에 관해 깊이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와 지렁이」라는 작품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141-142)
참고로 「목구木具」 전문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목구木具
五代나 나린다는 크나큰 집 다 찌그러진 들지고방 어득시근한 구석에서 쌀독과 말쿠지와 숫돌과 신뚝과 그리고 녯적과 또 열두 데석님과 친하니 살으면서
한 해에 멫 번 매연 지난 먼 조상들의 최방등 제사에는 컴컴한 고방 구석을 나와서 대멀머리에 외얏맹건을 지르터맨 늙은 제관의 손에 정갈히 몸을 씻고 교우 우에 모신 신주 앞에 환한 촛불 밑에 피나무 소담한 제상 위에 떡 보탕 식혜 산적 나물지짐 반봉 과일 들을 공손하니 받들고 먼 후손들의 공경스러운 절과 잔을 굽어보고 또 애끊는 통곡과 축을 귀에 하고 그리고 합문 뒤에는 흠향 오는 구신들과 호호히 접하는 것
구신과 사람과 넋과 목숨과 있는 것과 없는 것과 한 줌 흙과 한 점 살과 먼 녯조상과 먼 훗자손의 거룩한 아득한 슬픔을 담는 것
내 손자의 손자와 손자와 나와 할아버지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와…… 수원백씨水原白氏 정주백촌定州白村의 힘세고 꿋꿋하나 어질고 정 많은 호랑이 같은 곰 같은 소 같은 피의 비 같은 밤 같은 달 같은 슬픔을 담는 것 아 슬픔을 담는 것
(『정본백석시집』, 문학동네, 131쪽)
국수를 생각하는 마음
백석은 여러 음식들 중에서도 특히 국수에 애착을 느꼈던 듯합니다. 「국수」 외에도 백석 시에는 국수가 자주 등장하고, 심지어 그의 시 중에는 ‘메밀국수 연작’이라고 불릴 만한 것도 있습니다. 원제는 「산중음」 연작으로 함경도를 여행한 후에 발표한 기행시인데, 연작 네 편 중 세 편에 메밀국수가 등장하지요. 이 연작 중에서도 특히 울림이 큰 것이 「산숙」이라는 작품입니다.
산숙
여인숙이라도 국숫집이다
메밀가루 포대가 그득하니 쌓인 윗간은 들믄들믄 더웁기도 하다
나는 낡은 국수분틀과 그즈런히 나가 누워서
구석에 데굴데굴하는 목침들을 베어 보며
이 산골에 들어와서 이 목침들에 새까마니 때를 올리고 간 사람들을 생각한다
그 사람들의 얼굴과 생업과 마음들을 생각해 본다
그는 여행 중에 국숫집을 겸하는 여인숙에 묵었던 모양입니다. 백석은 국수를 만드는 분들과 함께 누어 때 묻은 목침들을 바라보며 그 방에서 묵었을 수많은 사람들을 떠올리지요. 끝없이 이어지는 국수 가닥처럼 그의 생각은 그 방에 묵었을 사람들의 얼굴과 생업과 마음들로 이어집니다.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이어지는 국수 가닥처럼, 얼굴과 생업과 마음도 긴 역사를 관통해 지속됩니다. 어쩌면 역사를 지탱하는 것은 그렇게 가느다랗고 사소한 것들일 것입니다. 산골 벽지를 오가며 좁은 여인숙 방의 목침에 때를 남긴 사람들,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는 이름 모를 사람들이야말로 역사의 주인공들입니다. 천하를 호령하던 영웅도 언젠가는 죽고 휘황찬란한 건축물도 끝내는 퇴색하지만, 얼굴과 생업과 마음만은 유구한 세월이 지나도록 이어져 내려가지요. 사소하지만 질긴 것들의 생명력, 백석이 국수에 그토록 애착을 보였던 것도 바로 그것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151-152)
백석은 과거의 풍물을 골동품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과거의 풍물을 골동품으로 여기는 것은 그것에 담긴 과거의 역사와 문화보다는 그것이 얼마나 희귀한지를 따지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골동품의 가치를 숫자로 표시되는 가격에서만 찾으려 하는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반면 「북방에서」를 보면 백석은 민족의 기원과 역사에 관해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반도 주변에 거주했던 옛 종족의 이름을 나열하는 것을 보면 그가 우리 역사에 관해 깊은 지식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민족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깊은 지식과 애정이 그를 과거의 풍물들로 이끌었습니다. 그에게 사투리와 과거의 풍물들은 골동품이 아니라 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찾기 위한 흔적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1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