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디워칭: 신비로운 인체의 모든 것
데즈먼드 모리스 / 범양사 / 198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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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에서부터 다리에 이르는 순서대로 인체의 모든 부분을 자세하게 설명한 이 책을 보면 마치 사진으로 읽는 구약성서의 <雅歌書>와 같은 느낌을 준다.  목차의 순서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시선을 따름으로서  남성인 저자가 여성을 보는 시선과 일치시키고 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인간의 신체 각 부분을 하나씩 훑어 내려가면서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설명을 보완해 주는 풍부한 도판은 부차적인 자료구실도 한다. 책을 읽다보면 인간의 몸은 철학자들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小宇宙>라는 사실을 절감하게 된다. 각각의 부분은 독립적으로 구성되어 있으면서 그 독립적 구성은 전체의 완벽한 부분으로 기능하고 있다. 전체속의 부분과 부분 속의 전체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는 몸은 그 자체로 신비인 것이다. 인체를 육체적인 면으로만 본다면 완벽한 <기계적 우주관>의 정수라고 할 수 있다. 이 완벽한 기계적인 기관에 신의 입김인 영혼이 들어 앉음으로서 정신과 육체가 조화된 완벽한 우주를 구성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데스몬드 모리스는 영혼의 인간을 파악하지 않는다. 생물학적인 인간을 파헤침으로서 오히려 정신적 인간의 모습을 부각시킨다.


데스몬드 모리스는 인간 신체의 각 부분을 설명하면서 각 부분을 사회성과 연관시키고 있다. 이는 저자가 <털없는 원숭이> 이래로 추구했던 몸의 움직임과 내적 욕구의 반영 사이의 관계를 다시 한번 파헤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을 읽다보면 우리 인간은 선사시대의 인간이나 지금의 인간이나 별 차이가 없으며, 기본적인 행동 역시 그때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모리스는 이를 위해 그의 다른 책인 <맨워칭>에서 원시부족의 행태와 현대인의 행태 행위의 유사성을 비교함으로서 실증해 보이기도 하였다. 그는 선사시대와 현재를 살펴보면 그 과정의 명칭만이 바뀌어 있음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예를 들면,  사냥충동은 노동윤리로, 먹는 차례는 계급투쟁으로, 짝짓기는 결혼으로,  부족의 동일성은 문화유산으로,  타종족과의 족외혼은 근친성교금지로 표현되고 있다고 본다. 이런 유사성은 오지의 원시부족에서 맨하탄의 뉴욕커에 이르기까지 동일하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런 것으로 볼 때 인류는 인종.성별에 의해 차별되는 존재가 아니라 동일한 존재라는 것을 저자는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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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허영의 역사
마리아 아쑨타 체파리 리돌피 외 / 혜안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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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0년경의 유럽 각 지역별 인구는 잉글랜드가 5백만명, 프랑스가 1천5백만명, 독일이 1천2백만명, 이탈리아가 1천만명 정도였다. 이 당시 시에나는 대도시에 포함되지 않았다. 당시 이탈리아에 있던 대도시는 파두아, 나폴리,크레모나, 브레시아, 볼로냐, 베로나, 베르가모, 루카 뿐이었다. 이들 도시는 5만에서 12만의 인구를 유지하고 있었다. 당시 시에나 막 도시로 성장하려는 문턱에 있는 상태였다. 


이탈리아에서는  도시들이 점점 세력을 확대해 나가고 있었다. 도시는 신선한 자유의 공기를 미끼로 농촌지역의 사람들을 끌어 들이고 있었다.  도시인구의 증가는 도시국가의 재정상태에도 큰 도움이 되었지만 늘어나는 인구와 미약한 기반시설로 인해 도시는 거대한 오물이 넘치는 장소로 변해가고 있었다.  도시국가의 통치자들은 도시의 정비와 확대를 위해 돈이 필요하게 되었고, 세수의 확대를 위해 인두세, 주택세, 시장세 등과 같은 기존의 세금항목에 허영과 사치에 관한 법률을 추가하여 세수확대에 주력하였다. 이 법률은 윤리적인 차원을 규정하는 도덕적 벌률이었음에도  사실은 경제적인 것이 주 목적이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법령의 규정은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자세하게 벌금을 물릴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것은 벌금부과에 따른  불필요한 잡음을 없애려는 세심함이기도 했다. 이런 통치자들의 세심함이 후대의 사람들에게 당시의 풍속을 연구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를 제공했다는 것은 희극적인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렇다면 도시의 주민들은 지배자의 벌금  규정을 어떻게 피해갔을까? 고금을 통해 가장 손쉬운 방법은 관리들을 매수하는 방법이었다. 옛부터 황금으로 두드리면 안열리는 문이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자치도시정부는 관리들을 도시민들이 매수하는 것을 막기위해 고발자에게 벌금 액수의 반을 주는 법률을 통과시키기도 했지만 시에나의 경우 법률이 끝없이 추가되고 개정되는 것을 보면 사치를 박멸하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음을 짐작케 한다. 왜냐하면 벌금의 반을 받는 것보다 뇌물을 주고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 더 이익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이 책은 중세 이탈리아를 법률을 통해 바라보는 사회사라고 할 수 있다. 우리도 국사 시간에 고대 고조선에 8조의 법조항이 존재했고 그 가운데 3조목이 전해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사람들은 이 3조항을 가지고 당시 사회의 한 단면을 유추해 본다.  사람을 죽인자는 사형이라는 조항에서는 법의 준엄함과 통치체제의 완벽함을, 물건을 훔친자는 곡물로 배상한다는 조항에서는 사유재산제도를, 사람을 상해한자는 노예로 삼는다는 조항에서는 신분이 구분되는 사회라는 것을 알 수있다고 배웠다. 이 책은 바로 이런 법률적 규정의 조항을 통해서 유추해 보는 이탈리아 사회사인 것이다.  이 결과 우리는 한 사회의 모습을 재구성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법률의 금지조향을 통해 당시 사람들이 어떤 음식을 먹고, 무슨 옷을 입었으며, 신발은 어떤 것을 신었는지 알게되며, 집의 구조 역시 알게되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알게되는 사회의 모습은 살과 피가 제거된 뼈대의 모습일지라도  당시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모습을 보는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사실 이 문헌이 바라보고 있는 시대는 도시국가의  마지막 전성기였다.  얼마 뒤에 시작되는 대항해 시대에 의해 대서양시대가 개막되면서 지중해시대는 막을 내리게 되는 것이다. 이후 이탈리아의 도시국가에는 두번 다시 이러한 영광이 돌아오지 않는다. 이 책은 그 마지막 화려함의 보고서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의 백미는 뒤쪽에 붙어있는 돈나이오 법령집과 세금품목서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세금 품목서는 도시의 법령이 시에나 시민의 의식주를 완벽하게 규정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에게 생소한 이탈리아 중세사를 이해하는데 아주 중요한 자료집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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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유목제국사
르네 그루쎄 / 사계절 / 199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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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목민족에 대한 책을 처음 접한 것은 1984년 민음사에서 <대우학술총서. 번역 1>로 나왔던 <遊牧民族帝國史>였다. 이 책은 특이하게 벨기에인으로 미국에 이주한 록 콴텐이 1979년에 서술한 책이었다.  이 책은 서구에서 르네 그루쎄가 39년에 발간한 유라시아 유목 제국사 이후 서구어로 기술된 최초의 유라시아 유목민족 개설서였다. 물론 번역의 순서를 따지자면 르네 그루쎄가 번역된 다음 록 콴텐의 저서가 번역되어야 하지만 한국의 뒤죽박죽 특성상 이런 차례는 항상 무시되는 것은 일상적이기에 새로울 것이 없다. 록 콴텐의 저서에서 자주 언급되는 르네 그루쎄의 저서를 서점에서 접하게 된 것은 98년이었다. 강한 호기심을 가지고 그 두꺼운 책을 단숨에 독파한 기억이 새롭다. 유라시아 유목민의 역사는 대단히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다. 민족과 지리의 방대함은 이 지역의 개설서가 나오기 힘들게하는 원인 가운데 하나이다.

르네 그루쎄의 책은 이차세계대전 전에 나온 책임에도 불구하고 79년에 나온 록 콴텐의 책과 비교해 보아도 조금도 손색이 없을 정도이다. 그만큼 이 분야에 있어서 연구가 지난함을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유목민족의 역사를 개괄하려면 스키타이, 흉노, 선비, 돌궐, 위구르, 거란, 여진의 역사를 아우르고 몽골제국의 역사를 섭렵한 다음 중앙아시아와 만주의 역사로 마무리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분야에 있어서 개괄서는 필연적일 수 밖에 없다. 르네 그루쎄의 이 책은 바로 이 분야의 개괄서이며 기본 자료가 되는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프랑스에 많은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르네 그루쎄의 책이 39년에 나오고 록 콴텐의 책이 79년에 나왔다. 이제 40년주기로 유목민족제국사가 출간된다면 2019년에는 어떤 책이 우리를 즐겁게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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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노그래피 - 여자를 소유하는 남자들
안드레아 드워킨 지음 / 동문선 / 199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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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좋아하는 기호학자 움베르토 에코는 포르노그래피를 구별하는 방법에 대해 아주 적당한 비유를 하였다. 그는 이 기준을 영화 속에서 별 내용 없이 늘어지는 시간이 얼마나 되느냐에 기초를 두고 있다. 만일 A지점에서 B지점으로 갈 경우 등장인물이 여러분이 원하는 것 이상으로 많은 시간을 거리에서 낭비한다면 그 영화는 포르노라는 것이다(이 말은 비디오를 보면서 필요 이상으로 리모콘의 FF 버튼을 누르면 포르노라는 말과 동일한 것이다).   


포르노는 욕망의 철창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철창 안이 범죄의 교습소이듯 포르노를 통해 성의 왜곡을 배우게 된다. 포르노는 우리에게 소세지 메일을 전달해주는 무허가 사서함과 같은 것이다. 그 사서함은 판도라의 상자처럼 희망이 갖혀있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그 상자는 자학과 욕망과 더 큰 자극만이 감춰져있는 불쾌함의 상자인 것이다. 여기에는 희망은 없다. 희망은 미래라는 창문이 열려 있을 때만 가동하는 것이다. 미래의 출구가 닫혀있을 때 거기에는 좌절과 불안 만이 있을 뿐이다. 포르노 배우들의 많은 수가 자살이나 약물과용으로 삶을 마감하는 것을 보면 포르노 그 자체의 속성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포르노를 윤리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문제점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포르노는 윤리를 다루는 영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포르노는 인간의 성감을 자극하는 감각의 영상이다. 많은 연구가들이 포르노를 남자와 여자에게 동시에 보여주었을 때의 반응을 연구하였다.  이때 성적흥분을 느끼는 군은 대부분 남자였고, 여자들은 대체로 혐오감을 느끼는 것이 일반적인 반응이었다. 이는 포르노가 철저하게 남성 우월주의를 바탕으로해서 만들어짐을 알려주는 것이다. 한 집단이 일방적으로 우위를 점하는 상태에서 윤리를 논한다는 것은 아주 위험한 발상이다. 여성이 속된말로 배설을 위한 도구로 전락하고 있는 포르노에서 윤리적 측면이란 의미없는 공염불이다. 이 전락은 남성들에게 성의 왜곡을 심어주며 남녀불평등을 심화시키는 수단으로 이용되며 남녀간의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선동의 영상이라고 할 수 있다.  


포르노의 영상은 정치. 경제. 사회적인 가부장제를 강화시키는 측면이 존재한다. 즉 거대 남근주의는 무의식적으로 남성에 의한 지배를 가속화 시키는 팬들럼이 되는 것이다. 성과 정치의 관계를 연구한 빌헬름 라이히는 정치적 권위주의가 성의 차별성에서 발생함을 알아차렸다. 그는 이 차별성의 근원으로 가정을 꼽았다. 가장 평등해야할 가정이 성의 차별화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임을 밝혔을 때 가정의 해체를 염려한 사람들은 그를 비난했다.


실제로 가정에서부터 성의 차별화는 시작되고 이 차별화는 사회에 나오면서 고착되어 버린다. 포르노는 이런 현상의 한 표현일 뿐이다. 라이히는 러시아 혁명이 성공했을 때 가정의 권위주의가 파괴되고 진정으로 남녀가 평등을 이루는 새로운 시대가 도래할 것으로 믿었다.  그리고 혁명이 성공한 러시아를 방문하여 실제로 그 희망을 보았다. 하지만 스탈린에 의한 혁명의 왜곡이 일어나면서 가정의 권위주의는 해체되지 않고 더욱 강화되기 시작하였다. 러시아 혁명의 왜곡은 여성에게도 불행한 일이었다. 역사상 최초로 여자와 남자의 완전한 평등사회가 도래하려는 순간 좌절되었기 때문이다.


포르노 그래피는 이 세상의 절반을 차지하는 여성에 대한 남성의 차별, 혹은 소유하려는 욕망에 대한 방대한 보고서이다. 남녀의 완전평등을 위해서 결국 인류 최후의 전쟁인 남녀세계대전이 일어나야할까? 아닐 것이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자는 또 다른 형태의 차별을 실시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성의 불평등이 해소되지 않는다면 그 어떤 대안도 공허한 외침에 불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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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리타 2004-09-17 1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포르노를 구분하는 내용이나 남녀의 성차별에 대한 시각들은 한번쯤은 생각해 볼 내용인 것 같습니다. 서평을 잘 쓰신 것 같습니다.
 
먹거리의 역사 - 상 까치글방 194
마귈론 투생-사마 지음, 이덕환 옮김 / 까치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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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은 생각나지 않지만 오래 전 영국의 배우 <올리버 리드>가 주연한 영화의 한 장면이 생각난다. 약간 더러운 손으로 기름진 닭을 뜯어 먹는 장면, 수염과 손에 뭍은 번들번들한 기름기, 한편에 다소곳이 앉아있는 여인. 닭을 다 먹고 난 올리버 리드가 천천히 의자를 뒤로 밀며 일어나 기름기가 범벅이 된 손을 옷에 문지르며 여인에게 다가간다. 그때 "먹는 것"과 "하는 것"의 경계가 정말 모호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먹거리의 역사는 한마디로 인간 욕망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식물처럼 햇빛,물,공기만으로 살아갈 수 없다. 인간은 자신의 몸을 움직일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그것이 바로 음식이다. 인간만큼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면서 타인을 멸시하는 種이 이 세상에 더 존재할까?  인간의 역사는 식욕이 보장되는 시기에는 성욕도 증가하여 인구가 늘어난다. 그러나 식량이 부족하면 성욕도 함께 감퇴한다.


원시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끊임없이 식욕을 충족시키려 노력했다. 이런 인간의 식욕을 이용해 권력자에게 아부하는 자들까지 생겨났으니, 易牙는 미식가였던 제환공의 환심을 사기 위해 자신의 아들을 삶아 바치기까지 하였다. 


 인간들 처럼 다양한 먹거리를 섭취하고 배고픔을 해결하기 보다 맛으로 음식을 먹는 동물은 없다. 미식은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특성이다.  먹는 것은 존재의 한 방식이다. 먹지 않으면 존재 자체가 소멸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먹는 것은 존재의 질과도 연관이 될 수 있을까? 이는 어떻게 먹느냐는 어떻게 사느냐와도 밀접하게 연관이 될 수 있다는 것일까? 삶의 시작은 우연성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먹는 것은 선택이다. 선택이란 자신의 의지인 것이다. 의지와 존재는 같을 수 있을까?


두 권이나 되는 먹거리의 역사를 재미있게 읽고 생각나는 질문이었다. 여러분, 오늘은 무얼 먹었습니까? 혹은 존재의 질은 어떠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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