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노그래피 - 여자를 소유하는 남자들
안드레아 드워킨 지음 / 동문선 / 1996년 3월
평점 :
절판


사람들이 좋아하는 기호학자 움베르토 에코는 포르노그래피를 구별하는 방법에 대해 아주 적당한 비유를 하였다. 그는 이 기준을 영화 속에서 별 내용 없이 늘어지는 시간이 얼마나 되느냐에 기초를 두고 있다. 만일 A지점에서 B지점으로 갈 경우 등장인물이 여러분이 원하는 것 이상으로 많은 시간을 거리에서 낭비한다면 그 영화는 포르노라는 것이다(이 말은 비디오를 보면서 필요 이상으로 리모콘의 FF 버튼을 누르면 포르노라는 말과 동일한 것이다).   


포르노는 욕망의 철창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철창 안이 범죄의 교습소이듯 포르노를 통해 성의 왜곡을 배우게 된다. 포르노는 우리에게 소세지 메일을 전달해주는 무허가 사서함과 같은 것이다. 그 사서함은 판도라의 상자처럼 희망이 갖혀있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그 상자는 자학과 욕망과 더 큰 자극만이 감춰져있는 불쾌함의 상자인 것이다. 여기에는 희망은 없다. 희망은 미래라는 창문이 열려 있을 때만 가동하는 것이다. 미래의 출구가 닫혀있을 때 거기에는 좌절과 불안 만이 있을 뿐이다. 포르노 배우들의 많은 수가 자살이나 약물과용으로 삶을 마감하는 것을 보면 포르노 그 자체의 속성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포르노를 윤리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문제점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포르노는 윤리를 다루는 영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포르노는 인간의 성감을 자극하는 감각의 영상이다. 많은 연구가들이 포르노를 남자와 여자에게 동시에 보여주었을 때의 반응을 연구하였다.  이때 성적흥분을 느끼는 군은 대부분 남자였고, 여자들은 대체로 혐오감을 느끼는 것이 일반적인 반응이었다. 이는 포르노가 철저하게 남성 우월주의를 바탕으로해서 만들어짐을 알려주는 것이다. 한 집단이 일방적으로 우위를 점하는 상태에서 윤리를 논한다는 것은 아주 위험한 발상이다. 여성이 속된말로 배설을 위한 도구로 전락하고 있는 포르노에서 윤리적 측면이란 의미없는 공염불이다. 이 전락은 남성들에게 성의 왜곡을 심어주며 남녀불평등을 심화시키는 수단으로 이용되며 남녀간의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선동의 영상이라고 할 수 있다.  


포르노의 영상은 정치. 경제. 사회적인 가부장제를 강화시키는 측면이 존재한다. 즉 거대 남근주의는 무의식적으로 남성에 의한 지배를 가속화 시키는 팬들럼이 되는 것이다. 성과 정치의 관계를 연구한 빌헬름 라이히는 정치적 권위주의가 성의 차별성에서 발생함을 알아차렸다. 그는 이 차별성의 근원으로 가정을 꼽았다. 가장 평등해야할 가정이 성의 차별화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임을 밝혔을 때 가정의 해체를 염려한 사람들은 그를 비난했다.


실제로 가정에서부터 성의 차별화는 시작되고 이 차별화는 사회에 나오면서 고착되어 버린다. 포르노는 이런 현상의 한 표현일 뿐이다. 라이히는 러시아 혁명이 성공했을 때 가정의 권위주의가 파괴되고 진정으로 남녀가 평등을 이루는 새로운 시대가 도래할 것으로 믿었다.  그리고 혁명이 성공한 러시아를 방문하여 실제로 그 희망을 보았다. 하지만 스탈린에 의한 혁명의 왜곡이 일어나면서 가정의 권위주의는 해체되지 않고 더욱 강화되기 시작하였다. 러시아 혁명의 왜곡은 여성에게도 불행한 일이었다. 역사상 최초로 여자와 남자의 완전한 평등사회가 도래하려는 순간 좌절되었기 때문이다.


포르노 그래피는 이 세상의 절반을 차지하는 여성에 대한 남성의 차별, 혹은 소유하려는 욕망에 대한 방대한 보고서이다. 남녀의 완전평등을 위해서 결국 인류 최후의 전쟁인 남녀세계대전이 일어나야할까? 아닐 것이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자는 또 다른 형태의 차별을 실시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성의 불평등이 해소되지 않는다면 그 어떤 대안도 공허한 외침에 불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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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리타 2004-09-17 1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포르노를 구분하는 내용이나 남녀의 성차별에 대한 시각들은 한번쯤은 생각해 볼 내용인 것 같습니다. 서평을 잘 쓰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