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렙 보르헤스 전집 3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 민음사 / 199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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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에 있어서 역사란 자신의 관점에 의해 재구성되는 것이다. 이것은 보르헤스가 과거의 역사를 보여준다는 차원을 넘어 그 사건을 보는 사람에 따라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한 세계이다. 그러면서도 보르헤스는 자신의 작품에 실제인물을 등장시킴으로서 현재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보르헤스만큼 과거의 시공간에 대한 애착이 강한 작가도 없을 것이다. 그의 작품 대부분이 환상적인 이유는 바로 이런 과거에 대한 기억에 기인하는 것이다. 보르헤스에게 있어서 삶은 영원회귀 혹은 현재는 이전 생애의 형태로 보고 있다. 즉 그의 역사는 자신의 관점에서 재구성되지만 반복과 반복이 만나고 중첩되는 형태를 띠게 된다. 이것은 보르헤스가 과거의 인물에 의해 벌어지는 사건이 미래의 다른 인물에 의해 재현되는 것을 작품으로 형상화함으로서 역사가 일회적이 아니라 거듭되는 것으로 본 것이다.

그러나 보르헤스는 역사의 객관적 기술에 대한 가능성을 부정하고 있다. 즉 사상과 마찬가지로 역사 또한 조작되거나 변형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역사는 보르헤스에게서 이야기일 뿐이지 어떤 의미나 특권을 갖게되는 것이 아니다. 보르헤스는 우리들에게 자신의 글을 통해 역사의 객관성이 불가능함을 알려준 것이라 하겠다.

*알렙은 황소라는 뜻이며 소를 형상화한 글자이다. 그리고 숫자로는 1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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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 아랍인
사니아하마디 / 큰산 / 199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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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치른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유대감이라는 보이지 않는 끈이다.  거친 환경이란 어찌보면 숙명과도 같은 것이다. 이 숙명은 인간성의 내부에 깊은 유전자를 각인시켜 놓는다. 혈족과의 유대, 손님에 대한 환대, 명예 그리고 이것과 대극에 있는 복수, 불신 등은 거친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통인자이다.


아랍과 아랍인을 처음 만난 것은 초등학교 시절 '아라비아의 로렌스'란 책을 통해서였다. 아마도 리처드 엘딩턴이 쓴 T. E. 로렌스의 전기를 학생을 위한 축약본으로 편집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 생경함과 기이함으로 해서 책이 너덜해질 때까지 읽은 기억이 난다. 그러나 그때 읽은 책에서 아라비아는 거의 생각이 나지 않고 로렌스의 기억만이 각인되었다. 아랍이란 세계는 지도상에도 언제나 사막의 건조한 색으로 표시된 미지의 세계였다. 그곳에 어떤 사람들이 사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랍인과 아랍은 인종적으로 지리적으로 공식화된 명칭은 아니다. 그러나 편의상으로 이 명칭은 시리아인, 레바논인, 이집트인, 요르단인, 이라크인을 지칭한다. 이렇게 하나의 명칭이 다양한 의미로 해석되는 것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랍인들은 아랍어를 사용하는 사람을 아랍인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아랍어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슬람의 경전이 코란은 아랍어로 기술되어 있다. 그리고 전 세계 이슬람신자들은 아랍어로 된 코란을 읽는다. 아랍인들은 아랍어가 아닌 코란은 코란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알라의 언어는 오직 아랍어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랍인은 신의 언어인 아랍어를 공통으로 사용하는 사람인 것이다. 이것은 문화적인 일치성을 느끼게하는 가장 확실한 징표인 것이다.


이 책에는 아랍인의 모든 것이 기술되어 있다. 아랍세계에서 비교적 개방적인 레바논 출신의 저자는 아랍인의 공통분모를 찾아서 그 호오好惡를 담담하게 기술하고 있다. 우리는 아랍세계를 이스라엘이란 프리즘을 통해 간접적으로 보아왔다. 그 프리즘을 통해 비친 아랍의 세계는 열등함과 패배주의에 짓눌린 세계였다. 하지만 그 세계는 빛이 왜곡되어 무지개를 만들듯 이스라엘이란 굴절을 통해 본 비정상적인 세계였다. 이런 비정상적인 시각은 지금도 변함없이 지속되고 있다. 물론 이 기나긴 과정 속에 간간히 대입되는 아랍세계에 대한 단편적인 상식이 그 왜곡상을 더욱 굳건하게 만들고 있지만...


이 책은 이러한 우리의 시각을 교정하는데 큰 도움을 줄 것이다. 아랍에 대해서는 9.11 이후 많은 책들이 나와 있지만 이 책은 아랍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바꾸는데 크게 기여할 것이다. 그만큼 이 책은 나온지 오래 되었지만 그 가치는 아직도 생생하다. 특히 책의 말미에 저자가 글을 쓰는데 참고한 책의 목록이 나온데 그 목록 자체가 또한 번역이 되어야할 목록이라고 생각된다. 그 목록 가운데 눈에 익은 저자는 버나드 루이스와 로렌스 뿐임을 발견하였을 때 또 한번 아랍이란 세계는 우리와 너무도 동떨어진 세계로 남아있구나하는 한탄과 지식의 짧음을 아쉬워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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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역사 대우학술총서 구간 - 문학/인문(번역) 73
줄리아 크리스테바 지음, 김영 옮김 / 민음사 / 199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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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하네스 로쯔는 '사랑의 세 단계'라는 책에서 사랑을 에로스, 필리아, 아가페의 단계로 나누고 육체에서 정신을 거쳐 신적 사랑으로 향하는 인간의 과정을 철학적으로 설파하고 있다. 에로스가  감각적이며 본능적인 사랑이라면 필리아는 정신적이며 인격적인 사랑이다. 그리고 사랑의 최종단계인 아가페는 신적이며 은총적인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단계는 각각 독립적이지만 각 단계는 내적으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으며 각 단계의 사랑이 고양될 때 다음 단계로의 상승이 있게 되는 것이다. 로쯔는 여기서 우리 인간이 신의 형상Imago Dei으로 창조되었기에 사랑 역시 아가페적인 사랑으로 성장하는 것이 본래의 인간성을 찾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


로쯔가 사랑을 신학적인 측면에서 고찰하였다면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사랑의 역사는 심리학적인 고찰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두 책을 읽다보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문자와 정신이란 말이 있다. 문자가 외적인 것이라면 정신은 내적인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정신 혹은 문자가 아니다. 문자가 실천을 통해 정신적인 상태로 고조될 때 문자는 정신의 표현이 되는 것이고 정신은 문자의 내면화로 승화되는 것이다. 이 두 과정이 결합되지 못할 때 문자와 정신은 서로 분리되어 따로 놀게 되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신학이 윤리학으로 심리학이 신학으로 전도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사랑의 역사는 점점 다면화되고 있다. 사랑이 정형화된 시대에서 점점 무정형의 시대로 옮겨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시대에 사랑이란 단어 자체가 '낡은 잡지의 겉표지 처럼 통속적'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사랑의 의미 자체가 변질되는 것은 아니다. 의미가 변질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의 관점이 변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 변해가는 사랑의 심리학적 변화를 제대로 보는 것이 바로 이 책의 제목과 같은 사랑의 이해가 아닐까.


** 정말로 읽어도 읽어도 그 박학함의 세계는 정말.... 철학, 시, 종교, 소설을 종횡으로 무진하게 이동해가는 저자의 글솜씨를 감상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뿌듯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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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니
아민 말루프 지음, 이원희 옮김 / 정신세계사 / 199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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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니라는 인물에 대한 역사적인 사실은 그다지 많지 않다. 그리고 그 많지 않은 기록 가운데 대부분은 부정적인 것이다.  역사상 마니교로 알려진 종교의 창시자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의 조국 페르시아뿐 아니라 서구 기독교 세계에서도 철저하게 무시되고 말살되었다. 역사상 마니교에 대한 서구 기독교세계의 태도는 증오감이라고밖에는 표현할 수 밖에 없을 정도로 무자비한 박해를 가하였다.  이 이야기는 자신의 종교를 전파하면서 '모든 종교를 존중하겠다'고 했지만 자신은 모든 종교로부터 미움을 받은 한 종교인과 종교에 관한 것이다.


아민 말루프는 시종일관 담담하게 마니의 족적을 더듬어 나간다. 역사적 사실에 따르면 마니는 이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부모들에 의해 '몸을 씻는자'라는 뜻의 묵타실라 종파에 가입된 몸이었다. 이곳에서 마니는 명상과 예술적 활동을 하였다. 그가 처음으로 신의 목소리를 들은 것은 12-3살 때였다고 한다. 그 후 24살이 되어 진정한 계시를 들자 지금까지 머물러 있던 묵타실라의 종파를 떠나 자신만의 종교를 구상하게된다. 그는 인도를 여행한 뒤 돌아와 자신의 이론을 설파하게된다. 마니의 종교는 사산왕조의 사푸르 일세의 도움을 받아 급속하게 성장하게 된다. 이 과정은 왕권의 강화를 위한 샤프르 일세의 정치적 계산이 깔린 지원이었다. 권력의 비호를 받는 종교. 마니교는 샤푸르 일세의 죽음과 그 후계자 호르미즈의 짧은 통치 이후 호르미즈의 형제인 바아람 1세의 즉위와 함께 쇠퇴의 길로 들어선다. 바아람은 왕위에 등극하면서 페르시아의 전통적인 종교인 조로아스터교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이 결과 샤푸르 일세 이후 숨을 죽이고 있던 조로아스터교가 다시 부상하게 되고 마니는 베트라파트의 돌기둥에 묶여 26일동안 고통을 받다가 순교하였다. 여기까지가 역사적으로 알려진 마니의 일생이다.


바아람 1세가 마니교를 싫어한 것은 아주 단순한 이유 때문이었다. 바아람은 왜 신의 계시가 제국의 주인인 자신에게 직접 오지 않고 마니와 같이 하찮은 절름발이를 통해서 오는지에 대해 의문을 품었던 것이다. 바아람의 이런 오만은 자신의 정당하지 못한 왕위 계승을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걸림돌인 마니와 결별하기 위한 하나의 수순이었다. 마니는 자신을 사도들의 대미를 장식하는 마지막 예언자라고 칭함으로서 기독교의 박해도 자초하였다. 이런 결과로 마니교는 자신을 변호할 변변한 교리조차 남기지 못하고 말았다. 그래서 현재의 우리는 마니교가 어떤 이유 때문에 박해를 그렇게 극심하게 받아야 했는지 조차 알 수 없게 되었다. 정말로 말 그대로 완벽하게 이 세상에서 마니교는 삭제되어 버렸던 것이다.


마니는 자신의 종교를 '빛의 종교'라고 하였다. 빛의 종교는 그 강력한 인문주의적인 색채로 인하여 당시 많은 지식인들이 이 종교에 호의적으로 보이게 하였다. 마니는 자신의 계시를 글로 남기기 보다는 그림으로 표현하기를 원하였다. 그 강렬한 원색의 그림을 통해 빛과 신과 인간의 관계를 설명하고자 하였다. 마치 그리스도교가 성화나 성상을 통해 글을 모르는 사람들을 가르친 것과 유사한 방식이었다. 이런 마니교의 가르침은 단순하면서도 명쾌한 것이었다. 그래서 많은 하층민들이 마니교에 귀의하였다. 검소함과 교리의 단순함에서 나오는 종교적 윤리는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불어 넣었다. 마니교의 이러한 것은 필연적으로 그리스도교와 충돌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마니교의 이원론적 단순한 교리는 일원론의 교리와 신학으로 어려운 그리스도교의 복잡함과 대비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이원론적 세계관과 모든 것을 포용하고자하는 종교적 신념은 그리스도교도의 증오를 받았다. 마니교와 그리스도교는 당시 세계를 양분하고 있던 종교세력이었는지도 모른다. 한쪽의 세계가 일신론의 불관용이었다면 다른 쪽은 이원론의 관용적인 종교였다. 하지만 그 관용적인 이원론의 모습을 우리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최후의 승자가 그리스도교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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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징 기호 표지
조르주 나타프 지음, 김정란 옮김 / 열화당 / 199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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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징.기호. 표지는 누구나 한번쯤은 관심을 가져봄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가끔 어린이들이 어떤 대상에 대해 묘사할 때 어른들의 장황함보다 더 간결하게 핵심을 표현하는 것을 보면서 감탄할 때가 있다. 그 순수함의 세계는 오염된 어른의 세계는 두번 다시 접근할 수 없는 세계라는 점에서 서글프게도 한다. 그 순수함의 원형을 만나는 곳이 바로 상징의 세계인 것이다.


조르쥬 나타프는  이 책에서 구구한 설명 대신 많은 그림을 우리에게 보여줌으로서 상징의 세계로 자연스럽게 들어가도록 도와준다. 이것은 어쩌면 상징을 이해하는데 아주 적합한 방식일지도 모른다. 상징은 구구하게 설명하다보면 그 자체상을 왜곡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상징은 인간 정신의 발달사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이 최초로 본 것을 어떻게 자신의 마음속의 심상과 일치시키느냐가 상징화과정이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서 思想이 생겨나는 것이다.  상징은 우리가 익히 아는 신호와는 구별된다. 신호란 마음이 바깥의 대상과 접촉하면서 생기는 조건반사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이는 상징이 직접적으로 의미하는 것은 개념이지 사물 그 자체는 아닌 것이다 한 예로 '우리는 제네바로 간다'라는 영화 제목에서 제네바가 의미하는 것은 도시 그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제네바는 황석영이나 이만희 감독이 추구한 삼포와 유사한 개념인 것이다.


상징의 세계는 초월의 세계이다. 이 세계는 시공간을 뚫고 지나가는 무의식의 세계이며 순간적인 자각의 세계이다. 부처님과 마하가섭 사이에 있었던 '연꽃 사건'은 자각과 초월의 순간을 서정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적사건이다. 상징이란 간단하게 말한다면 다음과 같은 것이 아닐까?


                                      吾不知其名 字之曰道 强爲之名曰大 大曰逝 逝曰遠 遠曰反


                                                                                                   - 老子 25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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