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
아민 말루프 지음, 이원희 옮김 / 정신세계사 / 199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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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니라는 인물에 대한 역사적인 사실은 그다지 많지 않다. 그리고 그 많지 않은 기록 가운데 대부분은 부정적인 것이다.  역사상 마니교로 알려진 종교의 창시자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의 조국 페르시아뿐 아니라 서구 기독교 세계에서도 철저하게 무시되고 말살되었다. 역사상 마니교에 대한 서구 기독교세계의 태도는 증오감이라고밖에는 표현할 수 밖에 없을 정도로 무자비한 박해를 가하였다.  이 이야기는 자신의 종교를 전파하면서 '모든 종교를 존중하겠다'고 했지만 자신은 모든 종교로부터 미움을 받은 한 종교인과 종교에 관한 것이다.


아민 말루프는 시종일관 담담하게 마니의 족적을 더듬어 나간다. 역사적 사실에 따르면 마니는 이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부모들에 의해 '몸을 씻는자'라는 뜻의 묵타실라 종파에 가입된 몸이었다. 이곳에서 마니는 명상과 예술적 활동을 하였다. 그가 처음으로 신의 목소리를 들은 것은 12-3살 때였다고 한다. 그 후 24살이 되어 진정한 계시를 들자 지금까지 머물러 있던 묵타실라의 종파를 떠나 자신만의 종교를 구상하게된다. 그는 인도를 여행한 뒤 돌아와 자신의 이론을 설파하게된다. 마니의 종교는 사산왕조의 사푸르 일세의 도움을 받아 급속하게 성장하게 된다. 이 과정은 왕권의 강화를 위한 샤프르 일세의 정치적 계산이 깔린 지원이었다. 권력의 비호를 받는 종교. 마니교는 샤푸르 일세의 죽음과 그 후계자 호르미즈의 짧은 통치 이후 호르미즈의 형제인 바아람 1세의 즉위와 함께 쇠퇴의 길로 들어선다. 바아람은 왕위에 등극하면서 페르시아의 전통적인 종교인 조로아스터교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이 결과 샤푸르 일세 이후 숨을 죽이고 있던 조로아스터교가 다시 부상하게 되고 마니는 베트라파트의 돌기둥에 묶여 26일동안 고통을 받다가 순교하였다. 여기까지가 역사적으로 알려진 마니의 일생이다.


바아람 1세가 마니교를 싫어한 것은 아주 단순한 이유 때문이었다. 바아람은 왜 신의 계시가 제국의 주인인 자신에게 직접 오지 않고 마니와 같이 하찮은 절름발이를 통해서 오는지에 대해 의문을 품었던 것이다. 바아람의 이런 오만은 자신의 정당하지 못한 왕위 계승을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걸림돌인 마니와 결별하기 위한 하나의 수순이었다. 마니는 자신을 사도들의 대미를 장식하는 마지막 예언자라고 칭함으로서 기독교의 박해도 자초하였다. 이런 결과로 마니교는 자신을 변호할 변변한 교리조차 남기지 못하고 말았다. 그래서 현재의 우리는 마니교가 어떤 이유 때문에 박해를 그렇게 극심하게 받아야 했는지 조차 알 수 없게 되었다. 정말로 말 그대로 완벽하게 이 세상에서 마니교는 삭제되어 버렸던 것이다.


마니는 자신의 종교를 '빛의 종교'라고 하였다. 빛의 종교는 그 강력한 인문주의적인 색채로 인하여 당시 많은 지식인들이 이 종교에 호의적으로 보이게 하였다. 마니는 자신의 계시를 글로 남기기 보다는 그림으로 표현하기를 원하였다. 그 강렬한 원색의 그림을 통해 빛과 신과 인간의 관계를 설명하고자 하였다. 마치 그리스도교가 성화나 성상을 통해 글을 모르는 사람들을 가르친 것과 유사한 방식이었다. 이런 마니교의 가르침은 단순하면서도 명쾌한 것이었다. 그래서 많은 하층민들이 마니교에 귀의하였다. 검소함과 교리의 단순함에서 나오는 종교적 윤리는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불어 넣었다. 마니교의 이러한 것은 필연적으로 그리스도교와 충돌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마니교의 이원론적 단순한 교리는 일원론의 교리와 신학으로 어려운 그리스도교의 복잡함과 대비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이원론적 세계관과 모든 것을 포용하고자하는 종교적 신념은 그리스도교도의 증오를 받았다. 마니교와 그리스도교는 당시 세계를 양분하고 있던 종교세력이었는지도 모른다. 한쪽의 세계가 일신론의 불관용이었다면 다른 쪽은 이원론의 관용적인 종교였다. 하지만 그 관용적인 이원론의 모습을 우리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최후의 승자가 그리스도교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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