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벨룽겐의 노래 범우비평판세계문학선 17
허창운 옮김 / 범우사 / 199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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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벨룽겐의 시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메로빙거 시대의 역사가 전제되어야만 한다. 프랑스.독일.이탈리아의 역사가 뭉뚱그려져 있던 시대인 561년 프랑크 왕국의 클로타르가 사망하면서 50여년에 걸친 내전이 벌어진다. 이 내전에는 훈족 아틸라-아첼-와 부르군드의 군트람, 지게베르트와 권력욕의 화신인 그의 아내 브룬힐트, 칠페릭과 그의 사악한 아내 프레데군트 등이 등장하고 지게베르트의 유능한 장군인 지그울프-지그프리드-도 모습을 보인다. 이렇게 완벽한 서사시적 조건을 갖춘 내전은 당시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게 되었고 이 이야기를 골격으로 장대한 서사시가 만들어지게 된다.

원래 프랑크 왕국의 메로빙거 왕조내에서 벌어진 비극적인 골육상쟁이 독일이란 배경으로 옮겨지면서 떡갈나무 숲과 용과 충성,배신등이 첨가되면서 비극적이면서 웅대한 서사시로 재구성되게 된다. 그러면서 프랑크족의 역사가 독일민족의 역사로 각색되고 여기에 독일적인 정신을 집어 넣음으로서 이 서사시는 <민족문학의 가장 숭고한 기념비>로 고착되었던 것이다. 니벨룽겐의 노래는 독일이 단결을 필요로 할때 마다 등장하여 독일국민을 하나로 묶는 정치문학의 선봉에 서기도 하였고, 바그너의 가곡으로 각색되어 나치독일에 의해 독일민족 예술의 정수로 선전되기도 하였다. 그만큼 이 작품은 독일적이며 독일인이 원하는 모든 것을 갖춘 작품인 것이다.

이 서사시는 우리에게 약간 낯선 중세 유럽의 시발점이 되는 메로빙거 왕조 시대가 배경이 되고 있다는 점에서 생소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어 가는데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것은 서사시이기에 문장이 짧게 짧게 하나의 절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흐름을 놓치면 전체의 맥락을 잃어버릴 확률이 크다. 이것이 책 속으로  쉽게 몰두할 수 없게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게르만민족의 이동과 로마제국의 멸망, 그리고 수많은 민족이 로마의 공백을 채우며 국가를 세우고 멸망해가던 시기에 있었던 실제적인 사건들을 이 서사시에서는 어떻게 변형시켰는가를 찾아보는 것도 이 책을 읽는데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실제 역사에서는 권력욕이 무척 강했던 브룬힐트와 그녀의 경쟁자였던 프레데군트로 인해 내전은 쉽게 끝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브룬힐트는 이 내전을 개인의 원한을 갚는 장소로 이용했기 때문이다. 결국 50년에 걸친 내전을 마무리하면서 68살의 브룬힐트는 신하들에게 체포되어 그녀의 평생 정적이었던 프레데군트-그녀는 브룬힐트보다 16년 먼저 사망했다-의 아들인 클로타르 2세에게 넘겨졌다. 그녀는 3일동안 야만적인 고문을 받은 다음 야생마의 꼬리에 매달려 끌려다니다 죽었다. 그녀가 죽음으로서 내전의 당사자들이 모두 없어지게 되어 프랑크왕국은 상처뿐이 평화를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프랑크왕국은 서서히 와해되기 시작하고 결국 동프랑크.서프랑크.이탈리아로 분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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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rdandy 2004-10-23 2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프랑크왕국의 분열은 지그프리트와 브룬힐트가 활동하던 시기로부터 200년 이상 지난 시점의 일이 아닌지요? 그 전에 메로빙-카롤링 교체가 있고, 융성기를 한 번 지난 다음의 일이라 알고 있습니다만...

dohyosae 2004-10-23 2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습니다. 다만 글의 흐름상 그렇게 표현했을 뿐입니다. 지적 감사.
 
치즈와 구더기 - 16세기 한 방앗간 주인의 우주관 현대의 지성 111
카를로 진즈부르그 지음, 김정하.유제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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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락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살아가는 마을 사람들 모두는 투명한 창문을 달고 생활하는 것과 같았다. 누가 무엇을 하는지, 어떤 사람인지를 너무도 서로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사정은 중세시대 뿐 아니라 2천년전에도 그러했다. 오죽했으면 예수도 '...는 고향에서 인정을 받지 못한다'라고 했을까. 이런 투명한 공간과  한정된 시간안에서 벌어지는 메노키오의 이야기는 중세의 격변기에 어떻게 종교적 인간에서 근대적인 인간으로 자각해 가는지를 추적하고 있다.

인간의 뛰어난 능력 가운데 하나는 습득한 재주를 곧 바로 다른 상황이 닥쳤을 때 응용한다는 점이다. 이런 능력은 다른 동물들에게는 찾아볼 수 없는 인간만의 특징이라 할 수있다. 메노키오는 호기심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바를 하나씩 찾아간다. 그의 지식에 대한 탐험은 권력자들의 눈에는 매우 위험한 발상으로 보였을 것이다. 권력의 속성은 대중을 불구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외눈박이의 나라에서는 모두가 외눈이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양쪽 눈을 다 가지고 있다는 것은 권력자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글을 알고 책을 읽으면 머리는 커지게 되어 있다. 그 머리의 커짐과 가슴이 결합되면 거대한 폭발로 나타남을 역사는 언제나 증명하고 있다.

메노키오가 자신의 사상을 형성하는데 있어서 중요하게 생각한 책은 <맨더빌의 기사>라는 책이다. 이 책은 성지순례와 동방 기행이라는 두 가지 주제로 구성된 책으로 관찰과 경험이란 사실적 요소와 허구라는 환상적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 언급하고 넘어가야할 사항은 맨드빌 기사의 이야기는 중세의 유럽인들에게 마르코 폴로의 동방 견문록이 나오기 까지는 유일한 지리백과사전의 역할을 한 책이다. 메노키오는 바로 이 책을 통해 세계를 배운 것이다. 성지를 향해 나아가는 순례자들의 신심깊은 내용과 모험을 향해 나아가는 모험가들의 이야기 속에서 메노키오느 무엇을 느꼈을까. 바로 현실과의 모순이었다.

메노키오가 "왜"라는 의문을 가졌을 때 그는 '임포스터'의 주인공처럼 폭발할 수 밖에 없었다. 그 폭발은 주위를 놀라게 하였고 그 놀람은 종교재판으로 이어지는 것은 당연한 순리였다. 하지만 그의 이론은 정치한 신학자들의 논리와 비교하면 너무 엉성하였다. 그럼에도 메노키오는 자신이 살아온 사회의 일반적인 상황은 정확하게 증언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의 세계관은 어느 정도 보편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메노키오가 처한 사정은  마치 <白馬非馬論>과 유사한 느낌이 든다. 신학자들은 이론적으로 백마가 말이 아님을 증명할 수 있지만, 메노키오에게는 눈 앞에 보이는 백마가 왜 말이 아닌지 의아했을 것이다. 바로 이론과 현실의 차이점 사이에 메노키오의 죄(?)가 놓여있는 것이다.  언뜻 보면 범신론과도 유사한 메노키오의 이론은 정통 신학자들에 의해 이단으로 판정을 받았다. 이 결과 메노키오는 이론상으로 죄를 짓고 이론상으로 죽을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가 추구했던 엉성한 이단의 정신은 현실로 살아있었다는 것. 바로 이 점이 중요한 것이다.

치즈는 제대로 숙성이 되면 속에서 구더기가 생긴다. 그 구더기가 생긴 부분은 약간의 분홍색을 띠게 되는데 그 부분이 치즈의 제일 맛있는 부분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치즈에 구더기가 생기면 그곳을 제일 먼저 먹는다고 한다. <치즈와 구더기>는 메노키오의 창조론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성숙되어 가는 인간의 지성을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이 숙성은 메노키오와 같은 수많은 구더기들이 치즈라는 중세의 체제를 뻥뻥 구멍 뚫음으로서 아주 맛있는 근대를 창조하는 동력이 되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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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1-10 04: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중세의 밤 - 서양 중세 사람들은 밤을 어떻게 보냈을까
장 베르동 지음, 이병욱 옮김 / 이학사 / 199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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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인들에게 밤은 본질적으로 악마의 시간이었다. 여기에는 폭력과 두려움만이 인간 앞에 놓여 있었다. 이 폭력은 환상과 결합하여 더욱더 밤을 두렵게 하였다. 중세 유럽을 지배했던 밤의 이미지는 마녀, 늑대인간, 매춘, 배신이란 단어와 깊게 연결되어 있다. 밤은 정의를 세우기에는 너무도 혼란스런 시간이었다. 중세인들은 이런 두려운 밤을 극복하기 위해 무엇을 하였을까. 그들은 인위적으로 밤의 시간을 낮의 시간으로 바꾸려 하였다. 이것은 빛을 밤의 시간속으로 이동시키는 작업이었다. 사람들은 곳곳에 불을 밝혀 인위적인 불빛을 만들어 밤의 부정적인 이미지와 대결하려 하였다. 이 시도는 일단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이제 밤은 두려움과 폭력의 시간이 아니라 환락의 시간으로 변모하였다. 그리고 자본가들은 밤의 시간을 인위적인 낮으로 바꿈으로서 노동계급의 근로시간을 연장하는데 이용하였다. 중세인들은 밤을 자신들의 힘으로 길들일 수 있다고 믿었다.  이는 각 도시마다 국가마다 야경대를 출범시켜 밤을 완벽하게 권력의 통제하에 두고자한 권력의 시도로 더욱 굳건하게 완성되었다.

밤의 시간이 인위적인 힘으로 낮으로 변하게 되면서 중세인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인위적인 밤을 만들어 편안한 밤 시간을 갖고자 노력하였다. 두려움과 불편함으로 대표되던 밤의 모습이 안락함으로 변모해가기 시작한 것이다. 사람들은 좀더 푹신한 침대와 좀더 안락한 침실을 요구하게 되었다. 이런 중세인들의 사고방식의 변환은 밤이 더 이상 자신들을 옭죄는 방해물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제 밤은 낮과 마찬가지로 중세인들에게 자연스런 현상으로 다가왔고, 밤은 악마의 시간이 아니라 낮의 연장이란 사실을 이해하였다.

이제 밤은 중세인들에게 준비하는 시간으로 점차 변모해 가게 된다. 밤은 새벽의 앞에 오는 시간이며, 이 시간은 정화의 시간이고 기다림의 시간으로 이해되었다. 중세인들은 잠자리에 들기 전에 편안한 죽음이 자신에게 오기를 기도했다. 그러면서 밤은 중세인들에게 점차적으로 종교적 성숙의 시간으로 변모해가기 시작하였다. 하루를 반성하고 새로운 마음으로 다음날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의 시간으로 밤은 유용한 것이었다. 밤이 충전의 시간으로 변모하게 되는 것은 중세인들이 이룩한 가장 위대한 발명중의 하나라고 할것이다.

중세인들은 자신들이 밤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완전하게 정복했다고 믿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자신감은 중세인들이 아랍의 도움으로 이룩한 과학의 발전에 힘입은바가 크다. 점점 시대가 발전하면서 유럽의 밤은 밝아졌다. 가스등이 횃불을 대체하고 전기가 가스등을 대체하는 역사의 진보 속에서 이제 밤이 악마의 시간이라고 믿은 사람은 없다. 하지만 인위적으로 조정된 밤의 시간은 언제나 과학의 소멸로 인해 제자리로 되돌아갈 위험요소를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중요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현대의 우리가 중세인들을 통해 배워야할 밤의 교훈은 정신적이며 종교적인 성찰로 가득찬 밤의 세계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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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의 신화
쟈크 브로스 지음, 주향은 옮김 / 이학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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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운 겨울날 전나무 숲으로 들어가본 경험이 있는지. 전나무의 쭉쭉 뻗은 숲으로 들어가면 사각 사각 밟히는 '마른 바늘들'의 촉각은 고슴도치위를 걷는다면 이런 기분일까. 그뿐만이 아니다.  전나무 숲으로 들어가면 갑자기 아늑한 느낌이 온 몸을 감싸며 강열한 樹脂의 내음이 오감을 자극한다.

나무의 신화를 읽으면 이런 기분이 드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북구 신화의 생명수인 '이그드라실'로부터 시작되는 나무 이야기는 우주의 나무로 그리고 하늘과 연결되는 신비의 사다리로 변해간다. 그리고 마침내 그 나무를 통해 신의 목소리가 '도도네'에서 울려오기 시작하고, 디오니소스의 포도나무로 연결되어 인간이 신과 교통하기 위해 벌인 비밀의 의식으로 나무의 역사는 연장된다. 나무의 일생을 통해 죽음과 부활의 의미가 첨가되고, 마침내는 구원의 십자나무로까지 나무는 확장되면서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 얼마나 멋진 구성인가. 생명의 나무에서 시작하여 구원의 십자나무로 돌아가는 나무의 영원회귀는 이 책의 숨어있는 주제이다.

숲은 유럽인들에게는 어쩌면 잃어버린 과거의 기억일지도 모른다. 과거 유럽은 피레네 산맥에서 아르덴의 숲을 지나 독일의 흑림지대를 거쳐 폴란드와 우크라이나로 이어지는 거대한 삼림지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하지만 인간들이 이 땅에 거주하면서 무분별한 벌채로 그 거대한 숲은 사라지고 말았다. 다만 남아있는 것은 "Es war einmal im Wald...옛날 아주 먼 옛날 숲속에서..."로 시작되는 민담의 구절이나 숲에 대한 히미한 기억 뿐이다. 이 히미한 기억조차 그리스도교가 전파되면서 모두 기독교적인 색채를 덧칠하게 되면서 유럽에서 숲의 신화는 거의 사라지고 말았다. 그렇기에 유럽인들에게 숲은 더 신비함으로 다가오는지도 모른다. 이런 히미한 기억의 저편에는 유럽인들이 기를 쓰고 가꾸는 숲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나무의 신화는 신화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숲의 신화가 어떻게 그리스도교적인 신앙으로 바뀌어 가는 가를 추적한 책인 것이다. 물론 읽는 사람들의 시각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이것은 자유로운 열린 사고가 종교에 의해 닫힌 사고로 이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고의 변화는 대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바꾸게 한다. 이제 유럽인들은 숲을 신화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종교가 그랬던것처럼 자신들의 지친 심신을 위로해 주는 위안물이랄까 뭐 그런 것으로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숲은 그 자리에 오래 전 부터 그대로 있어 왔다는 것이다.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시각과 사고방식만이 세월을 따라 변했을 뿐이다. 새삼 인간의 유한함과 왜소함이 돋보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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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 이웃문화
신영훈 지음 / 문학수첩 / 199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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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를 읽고 이와 관련된 서적을 찾다가 구입한 책이다. 각 항목에 대하여 대목 신영훈선생의 구수한 해설과 김대벽 선생의 사진이 어우러져 하나의 문화 도록이라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이다.  


예로부터 한.중.일 삼국은 문화의 공유에 있어서 상당히 근친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가면 그 비슷함은 단어뿐이란 사실을 느끼게 된다.  세 나라가 공유한 문화가 그 지역의 인성과 풍토에 따라 변화를 이루면서 각 나라의 특징이 되었다는 사실은 그저 놀랍기만 하다. 강남의 귤이 장강을 건너면 탱자가 된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동양 삼국의 문화에 아주 적합한 비유라고 생각된다. 중국에서 한반도로 다시 일본 열도로 건너가면서 하나의 문화형식이 다양한 패턴으로 변형되는 것을 보면 문화라는 것이 그리 간단한 이론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님을 느끼게 된다.


한.중.일 삼국의 미세한 차이가 점점 확대되어 민족성으로 고착되고 문화적 시각으로도 고정되는 것을 볼 때 문화의 세세한 차이란 정말 대단한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한 예로 창살에 바르는 창호지를 우리는 창살이 바깥으로 향하게 하고 안에 창호지를 붙이는데 반해 일본은 반대로 창살이 안쪽으로 향하고 창호지를 밖에서 바르는 방식을 취하고 있는데서 양 민족간의 심미적인 차이를 느끼게 한다. 또 지붕의 모양을 볼 때도 이런 차이는 완연하게 드러난다. 중국과 일본식 지붕은 처마와 용마루가 수평을 이루도록 하는 방식을 취하는데 우리는 처마 네 귀퉁이 추녀 좌우로 부챗살을 펴듯 하여 자연스런 균형을 이루게한다. 이런 차이는 모든 부분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같은듯 다르고, 다른듯 유사한 삼국의 문화적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 차이를 제대로 이해할 때 문화적 자각, 혹은 각성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언젠가 만화가 김혜린이 자신의 그림에 대한 솔직한 자아비판을 한 적이 있다. 자신이 어린 시절 보아온 만화-대부분이 일본만화를 복사한 작품-가 가장 한국적인 것으로 알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 그것에 대해 변명은 하지 않겠다는 말을 함으로서 문화적 왜곡현상이 얼마나 깊은 상처를 남길 수 있는가를 보여주었다.  문화는 삶이 될 때 진정한 가치로 다가오는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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