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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즈와 구더기 - 16세기 한 방앗간 주인의 우주관 ㅣ 현대의 지성 111
카를로 진즈부르그 지음, 김정하.유제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11월
평점 :
촌락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살아가는 마을 사람들 모두는 투명한 창문을 달고 생활하는 것과 같았다. 누가 무엇을 하는지, 어떤 사람인지를 너무도 서로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사정은 중세시대 뿐 아니라 2천년전에도 그러했다. 오죽했으면 예수도 '...는 고향에서 인정을 받지 못한다'라고 했을까. 이런 투명한 공간과 한정된 시간안에서 벌어지는 메노키오의 이야기는 중세의 격변기에 어떻게 종교적 인간에서 근대적인 인간으로 자각해 가는지를 추적하고 있다.
인간의 뛰어난 능력 가운데 하나는 습득한 재주를 곧 바로 다른 상황이 닥쳤을 때 응용한다는 점이다. 이런 능력은 다른 동물들에게는 찾아볼 수 없는 인간만의 특징이라 할 수있다. 메노키오는 호기심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바를 하나씩 찾아간다. 그의 지식에 대한 탐험은 권력자들의 눈에는 매우 위험한 발상으로 보였을 것이다. 권력의 속성은 대중을 불구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외눈박이의 나라에서는 모두가 외눈이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양쪽 눈을 다 가지고 있다는 것은 권력자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글을 알고 책을 읽으면 머리는 커지게 되어 있다. 그 머리의 커짐과 가슴이 결합되면 거대한 폭발로 나타남을 역사는 언제나 증명하고 있다.
메노키오가 자신의 사상을 형성하는데 있어서 중요하게 생각한 책은 <맨더빌의 기사>라는 책이다. 이 책은 성지순례와 동방 기행이라는 두 가지 주제로 구성된 책으로 관찰과 경험이란 사실적 요소와 허구라는 환상적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 언급하고 넘어가야할 사항은 맨드빌 기사의 이야기는 중세의 유럽인들에게 마르코 폴로의 동방 견문록이 나오기 까지는 유일한 지리백과사전의 역할을 한 책이다. 메노키오는 바로 이 책을 통해 세계를 배운 것이다. 성지를 향해 나아가는 순례자들의 신심깊은 내용과 모험을 향해 나아가는 모험가들의 이야기 속에서 메노키오느 무엇을 느꼈을까. 바로 현실과의 모순이었다.
메노키오가 "왜"라는 의문을 가졌을 때 그는 '임포스터'의 주인공처럼 폭발할 수 밖에 없었다. 그 폭발은 주위를 놀라게 하였고 그 놀람은 종교재판으로 이어지는 것은 당연한 순리였다. 하지만 그의 이론은 정치한 신학자들의 논리와 비교하면 너무 엉성하였다. 그럼에도 메노키오는 자신이 살아온 사회의 일반적인 상황은 정확하게 증언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의 세계관은 어느 정도 보편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메노키오가 처한 사정은 마치 <白馬非馬論>과 유사한 느낌이 든다. 신학자들은 이론적으로 백마가 말이 아님을 증명할 수 있지만, 메노키오에게는 눈 앞에 보이는 백마가 왜 말이 아닌지 의아했을 것이다. 바로 이론과 현실의 차이점 사이에 메노키오의 죄(?)가 놓여있는 것이다. 언뜻 보면 범신론과도 유사한 메노키오의 이론은 정통 신학자들에 의해 이단으로 판정을 받았다. 이 결과 메노키오는 이론상으로 죄를 짓고 이론상으로 죽을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가 추구했던 엉성한 이단의 정신은 현실로 살아있었다는 것. 바로 이 점이 중요한 것이다.
치즈는 제대로 숙성이 되면 속에서 구더기가 생긴다. 그 구더기가 생긴 부분은 약간의 분홍색을 띠게 되는데 그 부분이 치즈의 제일 맛있는 부분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치즈에 구더기가 생기면 그곳을 제일 먼저 먹는다고 한다. <치즈와 구더기>는 메노키오의 창조론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성숙되어 가는 인간의 지성을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이 숙성은 메노키오와 같은 수많은 구더기들이 치즈라는 중세의 체제를 뻥뻥 구멍 뚫음으로서 아주 맛있는 근대를 창조하는 동력이 되었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