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의 예술 만화
프랑시스 라까쌩 / 하늘연못 / 199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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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만화가 결코 단순한 그림의 나열이 아님을 보여주는 이 책은 약간 딱딱한 느낌을 준다. 그렇지만 만화를 차례 차례 해부해 나가는 모습은 경탄을 금할 수 없게 만든다. 모두 4부로 구성된 이 책은 3부까지는 만화의 일반적인 면을 보여주지만 마지막 4부의 만화와 영화의 비교는 정말 이 책의 白眉라고 할 수 있다.


만화의 한 장면 한 장면을 영화의 기법과 비교해 가면서 서술하는 마지막 장은 만화라는 분야가 영화라는 장르와 굉장히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준다. 그러면서 이 책의 저자는 우리가 만화라는 장르에 품고 있는 속마음-약간 낮게보는 취향-을 서서히 변모하도록 만든다.  알프레드 히치콕이 자주 사용한 확대화면이나 존 포드의 서부극에서 자주 접하는 모뉴먼트, 안달루시아의 개에 나오는 면도칼로 눈을 도려내는 유명한 장면에 이르기까지 저자는 만화에서의 위치조절과 영화에서의 피사체 각도를 다각적인 비교를 통해 만화는 영화가 탄생하기 이전에 이미 하나의 언어로 존재하고 있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그리고 소리의 형상적 표현으로 만화속의 대화와 음악. 소음을 분석하는 것 역시 만화적 상상력에 집착하는 우리에게 또 다른 현실감을 제공한다.


이 책에서 소개되는 유럽과 미국의 만화들 가운데 고전적인 작품을 선택함으로서 만화로 표현된 예술적 감각의 세계가 아주 오래 전부터 존재하고 있음을 무언중에 암시하고 있다. 다만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소개되는 만화의 문장을 해석이라도 해놓았으면 책의 내용과 만화의 분위기를 비교하며 읽을 수 있었을텐데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만화의 종주국이라고 자부하는 유럽의 만화에 대한 폭넓은 자료와 합당한 대우는 이 책을 읽는 동안 내내 마음을 우울하게 만들었다. 이 책은 우리가 그동안 알고 있었던 만화에 대해 상당부분의 사고방식을 수정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유럽에서 대학의 강좌에 만화가 도입된 것은 1971-1972년 소르본느 대학이 처음이었다. 이후 만화는 대학에서 연구되는 학문으로 정착되면서 만화는 유럽 문화계의 말단에 자리잡을 수 있었다.


이 책은 만화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는 일반적인 책들과는 약간 다르다. 그러므로 읽는 과정이 지루할 수 있지만 만화를 좀 더 깊게 연구하고자하는 사람들이나 만화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접하고자하는 사람들이라면 아주 유용하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된다. 이 책은 두껍기도 하지만 읽고 난 뒤에는 그 두께의 몇 십배 만큼의 사고의 여유와 상상력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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캉디드
볼태르 지음 / 한울(한울아카데미) / 199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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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전야의 프랑스 사회는 매우 긴장된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 중세 이래 사회의 큰 축을 이뤄오던 신분제도는 엄청난 도전을 받고 있었고, 신분제 상층의 성직자들과 귀족들의 타락은 이들이 더 이상 사회의 지도적 주류로 존재할 수 없는 한 이유를 제공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신적인 질서보다는 인간 이성에 기초한 새로운 사회가 시작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새로 대두하기시작한 부르조아지 계급들은 루소나 칸트의 사상을 받아들임으로서 사상으로도 이전의 인간들과는 구분되는 성향을 보이고 있었다. 가진자와 無産者의 대립은 평화적인 타협으로 해결될 수 있었지만 이는 어느 한쪽의 패배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캉디드의 이야기는 유럽에서 시작하여 남아메리카를 거쳐 소아시아로 이어지는 여정속에서 일어난 일을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는 풍자와 조소와 경험이 어우러져 하나의 시대상을 이루고 있다. 당시 사회는 압력솥 속의 공기처럼 언제 터질지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귀족계급과 종교계급의 무감각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는 촉매로 작욕하고 있었다.  캉디드는 구시대의 상징인 유럽에서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긴 끝에  엘도라도로 표현되는 남미로 간다. 여기는 캉디드에게는 새로운 가능성의 땅이라고 한다면 비약일까. 하지만 이 엘도라도의 땅에서 조차 계급적 차이가 존재하는 것을 본 캉디드는 어떤 생각을 하였을까. 그만큼 당시 사회의 계급적 구조는 단단한 성채와 같은 것이었다. 캉디드와 귀네콩트와의 결합이 틀어지는 것 역시 신분의 차이 때문이 아니었던가.


볼테르는 캉디드의 행적을 통해 계몽주의적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즉  '무엇이 문제인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 것이다. 문제점을 파악해야만 그 해결책이 나오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닐까. 여기서 팡그로스로 대변되는 지배계급에 기생하여 살아가는 자들의 사고방식이 도마에 오른다. 이들의 낙관주의적 세계관은 개혁의 걸림돌이 될 수 밖에 없다고 보았다. 캉디드 역시 이 낙관주의의 세례를 받았지만 자신의 실제적 경험을 통해 낙관주의적 세계관이 모순에 가득찬 것을 깨닫게 되면서 팡그로스의 세계와 결별을 하게 된다.  결국 캉디드는 마지막에  <옳은 말씀이십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우리의 밭을 경작해야 합니다.>라고 말하므로서 사변적 인간에서 실천적 인간으로 인생의 나침반이 바뀌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실천적 정신이 결국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음은 불문가지이다.


볼테르가 이 책을 쓴지 몇 년 후 프랑스  남부 오베르뉴 산맥의 제보당에서 괴물이 출현하여 사람들을 해치고 잡아먹는 사건이 벌어진다. 3년에 걸친 괴물 소동으로 대략 40여명이 살해되고 100여명 이상이 부상을 당하였다.  프랑스 남부는 이 소동으로 민심이 소요했고, 나중에는 체제에 대한 불신으로까지 번지게 되었다. 괴물에 의해 흔들리는 인간의 정신은 얼마나 허약한 것인가. 그럼에도 이제 인간들은 더 이상 미신의 굴레 속에 자신의 운명을 맡기는 존재가 아니라 그 운명을 극복하면서 미래를 조명할 수 있는 혜안을 가진 자유의지를 지닌 살아있는 참다운 존재가 되었다.  이 인간적인 상승은 자유.평등.박애의 정신으로 폭발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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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리버 여행기 - 개정판
조나단 스위프트 지음, 신현철 옮김 / 문학수첩 / 199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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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읽고 있는 책 가운데 잘못 이해되고 있는 책이 세권 있다. 허만 멜빌의 <모비딕>,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 그리고 죠나단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이다.  이 세권의 책이 오해의 격랑속으로 휩쓸리게 된 것은 청소년을 위한 책으로 만들면서 아주 비정 과감하게 축약을 한데서 비롯된다. 모비딕의 경우 고래에 대한 저자의 철학적 단상들이 모두 삭제되고 흰고래를 잡는 여정만을 이어 붙임으로서 사변적인 소설이 모험소설로 둔갑하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 역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란 명제에 대한 제국주의적 고찰임에도 이 역시 고도에서 살아남기 식의 모험소설로 각색되었다. 걸리버 여행기는 그동안 거인국과 소인국만이 전부인줄 알고 있었던 사람들도 많았을 것이다. 말의 나라 휴이넘과 천공의 나라 라퓨타, 발니바르비, 럭낵, 글럽던드럽, 야폰 등의 나라 기행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언젠가 '천공의 섬 라퓨타'를 아느냐고 물었을 때 서슴없이 나왔던 대답이 <미야자키 하야오의 만화영화>라는 정답을 들었을 때의 두려움이란...


걸리버 여행기는 누구나 어린 시절의 분홍빛 꿈을 가지고 대하는 책 가운데 하나이다. 거인의 나라와 소인의 나라는 디즈니랜드의 환상의 나라와 같은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이 분홍빛 꿈은 천공의 나라로 넘어가면서 초록빛 악몽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어린 시절의 환상이 날아가는 것이다. 왜 이리 갑자기 내용이 돌변하는가는 예외로 치더라도 내용의 변화 또한 심각하게 바뀌기 때문이다. 이 천공의 나라에 나오는 수많은 풍자는 당시 영국 사회의 가십기사를 알아야 이해할 수 있기에 더욱 알 수 없을 뿐이다. 이는 마치 마이클 마이어스가 만든 <오스틴>시리즈가 우리의 눈 밖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가지고 시종일관 지껄여대기 때문에 재미가 없는 이치와 같은 것이 아닐까. 이 세계를 겨우 겨우 넘어가면 초록빛 악몽은 잿빛 악몽으로 변한다. 말들이 지배하는  휴이넘이 나오기 때문이다. 이  세계는 찰튼 헤스턴이 주연한 <혹성탈출>이란 영화의 세계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휴이넘의 세계에서 피지배자는  인간이 아니라 야후라는 것이  다를 뿐이다. 


이 악몽의 세계를 벗어나면 이것은 대단한 풍자의 세계라는 사실을 느끼게 된다.  거인이 버티고 있는 가운데서도 그를 제거하려 음모를 꾸미는 소인국 릴리퍼트의 이야기는 국민의 눈과 정치라는 등식으로 환언하면 선명한 그 무엇이 그려지지 않겠는가.  휴이넘과 야후의 세계는 월터 스코트 경은 <...그것은 자기 지성과 본능을 스스로 노예화시켜 타락한 인간이다. 야만적인 쾌락과 잔인함과 탐욕에 빠진 사람은 야후와 비슷하게 되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이중적 본질에 대한 스위프트의 가혹한 풍자를 접하면서 인간은 스스로 정화될 가능성은 없는가라는 회한에 휩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걸리버가 그렇게 비판했던 인간의 이성과 지성에 믿어보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왜 지식의 검색창으로 YaHoo란 이름을 사용했을까. 이것으로도 또 하나의 길거리 사변철학이 생성될 수 도 있지 않을까?


*카를로 콜로디의 <피노키오> 역시 우리에게 잘못 알려진 동화책의 목록에 첨가되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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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blue 2004-10-26 1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 전에 지킬박사와 하이드씨를 읽었습니다.
잘못 알려진 것에 얼마나 익숙해져있는지 새삼 깨달았지요.
걸리버 여행기도 제대로 읽어야 할텐데 말입니다.

dohyosae 2004-10-26 1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블리카시오 페카툼publicatio peccatum이란 용어가 있습니다. 굳이 번역하자면 <공적인 죄>라고나 할까요. 이것은 시골 할머니가 도시에 처음 와서 무단횡단하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이를 수정할 방법은 아는것이지요.
 
이슬람의 영웅 살라딘과 신의 전사들
제임스 레스턴 지음, 이현주 옮김 / 민음사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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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 神이 개입하는 순간 그것은 살육이 아니라 신념으로 변모하게 된다. 즉 신의 이름으로 모든 전쟁 행위에 대한 정당한 면죄부를 부여받게 된다는 말이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살육이 하나의 신념으로 묘사되는 모순을 무수히 보아왔고 지금도 도처에서 신념을 위한 전쟁이 지속되고 있다.  전쟁은 클라우제비츠의 말 대로 <외교의 연장선상>에서 벌어지는 또 다른 외교인 것이다. 즉 자국의 이익을 위해 전쟁이 벌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정치적인 개념은  <병사들이여...수 천년의 역사가 우리를 내려다 보고 있다. 프랑스, 만세!>라든지 <신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라는 구호에 겹싸여 자국의 이익이 아닌 성스러운 전쟁, 신념의 전쟁으로 변모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십자군 전쟁은 가장 극명하게 신과 신이 싸운 전쟁이었다.  다만 신의 대리자로서 인간들이 그 과업을 수행했지만 항상 전투의 선두에는 신이 있었다. 초승달의 알라와 십자가의 하느님은 언제나 자신의 병사들을 격려하고 위안하였다. 병사들에게 <죽어라! 죽어라!> 신은 이렇게 외치면서 또 말한다. <나를 위해 죽는 자는 오늘 바로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라고... 이런 구호 속에서 수많은 아랍과 유럽의 젊은이들이 자신의 신을 위해 죽어갔다. 그들의 죽음은 거친 사막의 건조한 바람 속에서 말라 비틀어져 대지의 공기속으로 사라졌다. 그렇지만 그 젊은이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신의 목소리는 오늘날에도 사막의 바람 속에서  메아리  치고 있다.

<신의 종>이란 겸손한 이름을 가진 쿠르드족 출신의 살라딘과 <사자의 심장>이란 별명을 가진 노르만인과 프랑스인의 혼혈이었던 리차드는 각각 알라와 하느님의 종으로 자신의 역할을 완수하기 위해 역사의 전쟁 속에 뛰어 들었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이 믿는 신념과 신앙에  따라 전쟁을 지휘하고 전투를 수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두 사람은 기독교의 전쟁관과 이슬람의 전쟁관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살라딘이나 리차드 두 사람 모두 이 전쟁에서 승리한다면 자신이 믿는 신의 위대성이 드러날 것이란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과정은 두 사람이 아주 판이했다. 리차드는 신의 영광을 위해 많은 이교도를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하는 것이 최고의 가치인것으로 이해했지만 살라딘은 자신이 믿는 신 앞에 무릎을 꿇게하는 것이 진정한 영광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았다. 이런 두 사람의 차이는 무차별 학살과 관용이란 모습으로 역사에 나타난다.

이런 신념과 함께 죽음에 임하는 두 사람의 태도 또한  아주 대조적이다. 살라딘은 1192년 십자군과 <라믈레 조약>을 맺는데 이로 인해 십자군은 팔레스티나에서 모든 영토를 상실하고 티레에서 야파에 이르는 좁은 해안협곡지역만을 힘겹게 지킬 수 있게 되었다. 이로서 1099년 예루살렘이 프랑크인들에게 함락된지 93년만에 아랍의 손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이 과업을 완수한 살라딘은 6개월 후에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그의 죽음은 왕의 죽음이라기 보다는 고행자와 같은 죽음이었다. 그의 영원한 맛수였던 리차드는 살라딘이 죽은지 6년후에 찾아왔다. 리차드의 죽음은 자신의 영지인  샌강 근처에 구축한 샤토 가이야르 근처인 샬뤼에서 그의 신하인 리모주 자작이 로마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황금 장식품을 발견한데서부터 시작되었다. 리차드는 당연히 모든 재물은 국왕의 소유이기에 그것은 자신의 것이라고 양도를 요구했다. 그러나 리모주 자작은 그 유물이 자신의 영지에서 출토되었다는 이유로 이를 거부하였다.  이 사소한 말싸움이 최악의 상황인 전쟁으로 발전되었다. 결국 샬뤼성을 포위공격하던 리차드는 화살에 맞아 그 상처가 덧나 진중에서 숨지고 말았다. 연대기 작가들은 리차드의 시신이 부풀어 올라 관뚜껑을 날려버렸다는 이야기를 첨가함으로서 그의 죽음이 결코 왕답지 못했다는 점을 은근히 강조하였다.  리차드는 끝없는 만용과 욕심으로  결국 명예롭지 못한 죽음을 맞이하였다.

살라딘과 리차드는 같은 시대를 살아가면서 너무도 대조적인 삶을 살았던 인물이었다.  당대는 모르지만 후대에 리차드가 서구의 영웅으로 미화된 반면 살라딘이 추구한 관용과 용기는 상대적으로 낮게 평가되었다.  오히려 살라딘의 참모습은 리차드의 무모함에 맞설 용기가 없는 소심한 인물로 폄하되었다.  이 책을 읽다보면 이런 서구의 시각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느낄 수 있다.  살라딘의 숨겨진 모습이 드러나면 드러날 수록 리차드의 과장된 모습이 확실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리처드의 본 모습은 살라딘의 관용과 금욕적인 모습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이를 통해 우리는 누가 진정한 왕의 자격을 지니고 있었는가를 조용히 판단할 수 있다. 그리고 서구의 시각에서 바라본 영웅의 모습이 얼마나 허무하고 보잘것 없는 것인가를 또한 느끼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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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1
진수 / 신원문화사 / 199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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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삼국지하면 소설만 떠오르는 사람들에게 꼭 알려주고 싶은 책이다.  소설이 아닌 실제의 역사를 기록한 책은 실제적인 감동을 덜할지 모르지만 내부의 지속적인 떨림은 더 오래 갈 것이다.  고대 중국에서 역사를 기록하는 방식은 紀年體 방식과 編年體방식이 있었다. 역사서의 대표적인 사기가 기년체방식이라면 공자의 춘추는 편년체 방식을 취하고 있다. 기년체와 편년체방식은 각각 일장일단이 있지만 어느 것이 특별히 낫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전체를 관통하는 역사의 실체를 보려면 편년체방식의 역사서를 보면 되는 것이고, 산 속의 나무 종류를 보려면 기년체를 참조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陳壽가 편찬한 <正史 三國志>는 편년체 방식을 취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각국-魏.吳.蜀-의 역사속에서 중복되는 부분이 많이 있다. 하지만 그 중복되는 부분이 묘미라고나 할까. 그 입장의 미묘한 차이는 편년체 역사를 읽는 재미의 하나라 하겠다. 모두 일곱권으로 이루어진 진수의 삼국지는 曺魏를 정통으로 삼아 쓴 역사서이다. 물론 이런 사고방식은 위를 찬탈한 진에서 사관으로 봉직한 진수에게는 불가피한 일이었음은 불문가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위에 4권, 오에 2권, 촉에 1권의 분량으로 번역된 책을 보면 왜 위를 이어받은 晋이 삼국을 통일할 수 밖에 없었는지를 알 수 있게하는 일차적인 바로미터라 하겠다. 그만큼 각국의 인재의 숫자가 차이가 났다는 사실은 각 국의 격차가 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바로 이 차이가 곧 바로 국력의 차이로 이어져 나라의 흥망에 까지 영향을 미친 것이다. 새삼 냉혹한 역사의 현실을 느끼는 듯 하다. 진수는 이 방대한 역사를 저술하면서 글을 최대한 아끼며 그 압축된 문장 속에 한 인물 혹은 역사의 사실을 후세에게 정확하게 전하려 노력하였다. 이것은 역사를 저술한 진수 스스로가 감정과 편견을 버리고 진실만을 전하려 노력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된다.

진수의 삼국지는 <만약에..>라는 가정을 용납하지 않는 냉엄한 역사서이다. 이 점이 요즘 범람하는 소설삼국지와 다른 점이라 하겠다. 그만큼 이 책은 건조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건조함으로 인해 상상력이 풍부해지는 것이 아닐지. 상상력의 원천은 항상 근본에 있다는 사실을 느끼게 된다.  정사 삼국지를 읽으면서 역사는 감정이 아니라 냉혹한 현실이란 사실을 느끼게 된다. 만약이란 가정의 역사는 무척 매혹적이다. 그러나 그 매혹은 이솝 우화의 배고픈 여우와 같은 것이라 하겠다. 배고플 때는 좁은 구멍으로 들어갈 수 있지만 그 안의 음식을 배부르게 먹으면 다시 나올 수 없다는 사실과 같은 것이다. 현실은 마른 여우라면 가정은 배부른 여우라고 할 수 있다. 

**기년체는 인물중심으로 역사를 기술한다. 여기에는 본기. 세가. 표. 서 등이 기록된다.  편년체는 년.월. 일별로 사건을 기록하는 체제를 말한다. 이외에도 紀事本末體와 綱目體가 있는데 기사본말체는 사건의 순서대로 역사를 기록하는 것이고 강목체는 대강과 세목으로 나누어 역사를 기술하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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