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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리버 여행기 - 개정판
조나단 스위프트 지음, 신현철 옮김 / 문학수첩 / 1992년 7월
평점 :
우리가 읽고 있는 책 가운데 잘못 이해되고 있는 책이 세권 있다. 허만 멜빌의 <모비딕>,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 그리고 죠나단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이다. 이 세권의 책이 오해의 격랑속으로 휩쓸리게 된 것은 청소년을 위한 책으로 만들면서 아주 비정 과감하게 축약을 한데서 비롯된다. 모비딕의 경우 고래에 대한 저자의 철학적 단상들이 모두 삭제되고 흰고래를 잡는 여정만을 이어 붙임으로서 사변적인 소설이 모험소설로 둔갑하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 역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란 명제에 대한 제국주의적 고찰임에도 이 역시 고도에서 살아남기 식의 모험소설로 각색되었다. 걸리버 여행기는 그동안 거인국과 소인국만이 전부인줄 알고 있었던 사람들도 많았을 것이다. 말의 나라 휴이넘과 천공의 나라 라퓨타, 발니바르비, 럭낵, 글럽던드럽, 야폰 등의 나라 기행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언젠가 '천공의 섬 라퓨타'를 아느냐고 물었을 때 서슴없이 나왔던 대답이 <미야자키 하야오의 만화영화>라는 정답을 들었을 때의 두려움이란...
걸리버 여행기는 누구나 어린 시절의 분홍빛 꿈을 가지고 대하는 책 가운데 하나이다. 거인의 나라와 소인의 나라는 디즈니랜드의 환상의 나라와 같은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이 분홍빛 꿈은 천공의 나라로 넘어가면서 초록빛 악몽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어린 시절의 환상이 날아가는 것이다. 왜 이리 갑자기 내용이 돌변하는가는 예외로 치더라도 내용의 변화 또한 심각하게 바뀌기 때문이다. 이 천공의 나라에 나오는 수많은 풍자는 당시 영국 사회의 가십기사를 알아야 이해할 수 있기에 더욱 알 수 없을 뿐이다. 이는 마치 마이클 마이어스가 만든 <오스틴>시리즈가 우리의 눈 밖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가지고 시종일관 지껄여대기 때문에 재미가 없는 이치와 같은 것이 아닐까. 이 세계를 겨우 겨우 넘어가면 초록빛 악몽은 잿빛 악몽으로 변한다. 말들이 지배하는 휴이넘이 나오기 때문이다. 이 세계는 찰튼 헤스턴이 주연한 <혹성탈출>이란 영화의 세계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휴이넘의 세계에서 피지배자는 인간이 아니라 야후라는 것이 다를 뿐이다.
이 악몽의 세계를 벗어나면 이것은 대단한 풍자의 세계라는 사실을 느끼게 된다. 거인이 버티고 있는 가운데서도 그를 제거하려 음모를 꾸미는 소인국 릴리퍼트의 이야기는 국민의 눈과 정치라는 등식으로 환언하면 선명한 그 무엇이 그려지지 않겠는가. 휴이넘과 야후의 세계는 월터 스코트 경은 <...그것은 자기 지성과 본능을 스스로 노예화시켜 타락한 인간이다. 야만적인 쾌락과 잔인함과 탐욕에 빠진 사람은 야후와 비슷하게 되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이중적 본질에 대한 스위프트의 가혹한 풍자를 접하면서 인간은 스스로 정화될 가능성은 없는가라는 회한에 휩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걸리버가 그렇게 비판했던 인간의 이성과 지성에 믿어보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왜 지식의 검색창으로 YaHoo란 이름을 사용했을까. 이것으로도 또 하나의 길거리 사변철학이 생성될 수 도 있지 않을까?
*카를로 콜로디의 <피노키오> 역시 우리에게 잘못 알려진 동화책의 목록에 첨가되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