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로드 이야기 이산의 책 19
수잔 휫필드 지음, 김석희 옮김 / 이산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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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만 켄터의 <중세 이야기>가 왕이나 주교 혹은 공주와 같은 역사의 주체를 주인공으로 삼은 이야기라면 수잔 휫필드의 <실크로드 이야기>는 역사속에서 사그라져간 평범한 인간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이야기의 전개 속도는 느리지만 삶에 대한 진솔함이 책의 곳곳에 뭍어나고 있다. 고비사막과 타림 분지의 타클라마칸 사막을 아우르고 있는 실크로드는 이름처럼 그렇게 아름다운 길은 아니었다. 오히려 서유기에 나오는 화염산과 비슷한 이미지를 풍기는 곳이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내내 영화 <龍門客棧>의 황토바람이 떠올랐다. 그 건조한 바람 소리와 황량함은 실크로드의 이미지와는 너무도 상이하지 않은가?

사실 실크로드의 중심지였던 이곳은 20세기 서구 열강의 침입으로 수많은 문화재가 약탈당함으로서 비로소 알려지기 시작한 곳이었다. 그전까지 이곳은 과거의 영광을 간직한 채 역사 속에서 사라져버린 곳이었다. 이곳의 역사가 재구성될 수 있었던 것은 서구의 약탈로 가능한 것이었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은가. 이 결과 이곳은 교역의 중심지 혹은 군사적 요충지로서의 역할이 하나씩 드러나게 되었다. 그러므로서 잃어버린 역사의 한 부분을 복원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실크로드의 전성기는 唐제국의 시기였다. 특히 綠. 褐. 藍 삼색의 唐三彩로 대표되는 당시의 예술품은 서역의 기술이 어떻게 중국적으로 녹아들게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문명교류의 유산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탈라스 전투 이후 당의 지배력이 이 지역에서 쇠퇴하면서 실크로드는 점차 쇠퇴하기 시작한다.

실크로드 이야기는 영광의 이야기라기 보다는 삶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장안으로 돈을 벌기 위해 사막의 길을 건너오는 소그디아의 무용수 이야기는 지금의 시각으로 비춰보아도 결코 시대적인 차이를 느낄 수 없을 정도이다. 과부 아롱의 이야기는 한 여인이 실크로드속에서 어떻게 삶을 영위해 나갔는지를 냉정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런 모습을 통해 실크로드가 문자 그대로의 비단길이 아니라 삶의 땀으로 얼룩진 길이었음을 저자는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 잊혀진 세계를 다시 우리의 눈 앞에 드러내 보였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이 책에 나오는 주인공들의 삶은 충분히 보상받았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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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오파트라와 이집트 이야기
제이콥 애보트 지음, 전상현 옮김 / 무당 / 199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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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20세기가 시작되기 직전인 1899년 <하퍼 앤 브라더스사>에서 역사 시리즈물의 하나로 간행된 책이다. 굳이 품절된 책에 대해서 글을 올리는 것은 1899년에 바라본 클레오파트라를  현재의 시각과 비교해 보아도 그리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1899년의 시점이 클레오파트라를 역사에 가깝게 묘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버지의 영광>이란 뜻을 가진 클레오파트라는 역사상 모두 7명이 존재했고, 우리가 알고 있는 가장 유명한 클레오파트라는 7번째 여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여왕인 클레오파트라 7세를 통해 약 300여년에 걸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모든 것을 파악하려는 우리의 성급함은 시정되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의 이런 성급함은 조선시대의 멸망을 고종황제나 순종황제의 무능이란 수식어로 덮어버리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는 것이라 하겠다. 이 책은 아주 오래전-한국 역사에서 1898년은 수구정책의 집행자였던 대원군이 사망한 해-에 출판되었음에도 매우 일목요연하게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역사를 볼 수 있게 하였다. 이집트의 지리에서부터 왕조의 건국 그리고 수도인 알렉산드리아와 클레오파트라 7세가 여왕으로 즉위하게 되는 과정은 우리에게 이 왕조에 대한 또 하나의 지식을 전해준다. 이 책을 읽으며 클레오파트라에 관한 몇 가지 다른 책을 읽어 보았지만 오랜 세월을 무색케할 정도로 역사적 사실에 충실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다만 아쉬운 점은 미국에서 출판된 오래된 책을 그대로 번역함으로서 지명이라든가 인명이 너무 영어식으로 번역되어 있어 약간 생경한 감을 주는 것이 굳이 흠이라면 흠이랄까... 이집트와 클레오파트라를 시작하는 사람들이라면 한번 읽어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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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字의 역사
아츠지 데츠지 지음, 김언종/박재양 옮김 / 학민사 / 199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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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字는 전 세계 언어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남은 형상문자이다. 한자를 보다보면 그것은 글자가 아니라 그림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것은 아주 당연한 것이리라. 그림의 추상화를 통해 하나의 상징체계로 변화한 한자의 세계는 인간의 추상능력이 어떻게 변화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살아있는 증거처럼 보인다.

한자의 세계는 사물에 대한 주관과 객관을 버무린 추상의 세계이다. 하지만 동양 삼국 가운데 한자에 대한 반감은 우리가 가장 왕성하다고 볼 수 있다. 중국이야 그렇다 치고 일본은 가나라는 문자 자체가 원래 불완전한 모습으로 태어난 관계로 한자가 없다면 그 글자 체계가 성립될 수 없다. 하지만 한국은 한글이란 가장 완전한 체계의 문자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표현이란 차원에서 한자를 경시할 수 있다. 동음이의어와 같은 경우 외국인이 아닌 한 한국인이라면 대화하는 가운데 문맥을 통해 완벽하게 소화해 낼 수 있다. 하지만 언어적 연상의 차원에서는 한자가 필요하지 않을까.

이 책은 일본사람이 저자이기 때문에 한자에 대한 경외심이 담겨있다. 가나 자체가 한자의 부분을 취해 만든 것이기에 한자는 일본인에게 자신들이 사용하는 글자의 근원을 찾아가는 것과 마찬가지이리라. 그렇다면 한자의 미래는 어떠할까. 컴퓨터 시대를 맞이하여 한자는 대단히 유리한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저장 용량에서 한자를 따라갈 문자는 없다. 하나의 글자가 여러 가지로 표현되는 한자의 위력은 불편함보다는 정보의 위치에서 엄청난 위력을 보일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한자는 디지털 시대에 필요불가결한 문자가 아닐까.

*중국의 간자체는 초서체를 변형한 것이다. 이는 전서.예서.해서.행서.초서로 이어지는 한자의 간략화 과정의 최종단계이다. 이것은 한자가 가진 장점이면서 약점일 수도 있다. 한글의 최종단계는 어디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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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븐 바투타 여행기 1
이븐 바투타 지음, 정수일 역주 / 창비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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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븐 바투타가 여행기를 기록한 시기의 이슬람 세계는 서쪽으로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동쪽으로는 중앙아시아에서 동남 아시아에 이르는 지역까지, 북으로는 서유럽의 관문인 세르비아에서 남으로는 동아프리카의 탄자니아에 이르는 방대한 지역이었다.

이 방대한 지역은 다양한 민족과 문화가 이슬람이란 종교를 축으로 얽혀져있는 또 다른 세계였다. 이븐 바투타는 이 다양한 지역을 여행하면서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하였다. 그의 붓을 통해 묘사되는 세계는 다양함과 조화가 어우러지는 세계였다. 이븐 바투타는 이런 모습을 통해서 알라의 위대하심을 간접적으로 전하고 있다. 하루 다섯번씩 일정한 시간이 되면 모스크의 첨탑에서 무에진이 <알라 아크바르...>로 시작되는 기도문을 낭송하면 제국의 모든 무슬림들은 메카를 향해 기도를 드리는 일체감을 통해 이븐 바투타는 제국의 영속성에 대한 자부심을 지녔을 만도 하다. 그의 이런 무슬림적 자부심은 곳곳에 관대함과 관용이란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다. 이븐 바투타는 국수주의적인 편협함에 사로잡힌 여행객은 결코 아니었다. 원의 지배하에 있던 중국에 입국하여 칸발리크의 시장에서 개와 돼지의 고기를 파는 모습을 보면서도 시종일관 그 문화적 차이의 다양함에 무게를 두는 시각을 견지하고 있을 뿐이다.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는 아주 차분한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차분한 시각으로 곳곳의 무슬림들의 삶을 기록하고 있는 이 작품은 당시대의 글로 쓴 다큐멘터리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이다. 이븐 바투타의 붓끝은 마치 헬드핸드카메라의 기록처럼 여정을 따라 조용히 움직이고 있다. 아랍어에 과문한 나로서는 그의 문체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알길이 없지만 아랍어의 음악적 요소를 상상하건데 정말로 아름다운 글로 씌어져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비스밀라Bismill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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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에서 배우지 못한 세계지리
케네스 C.데이브스 지음 / 고려원(고려원미디어) / 199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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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베르토 에코는 1:1 지도를 만들 수 없는 이유를 일대일 축척이므로 제국의 영토와 일치해야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물론 이것 이외에도 여러가지의 예를 들어 정확한 지도를 만들 수 업슨 이유를 설명하고 있지만 여기에 적힌 첫번째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한 지도는 불명확한 것이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지도라는 것은 언제나 진실보다는 거짓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3차원의 공간을 2차원의 평면에 완벽하게 표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도는 처음 만들어질 때부터 이용하는 자의 구미에 맞게 제작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지도는 거짓을 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15세기에 그려진 지도 가운데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지도는 조선에 만든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이다. 이 지도를 보면 종래의 지도와는 달리 중국과 우리나라가 아주 대등한 크기로 그려져 있음을 보게 된다.  이것은 이 지도가 중국 중심의 천하관에 대한 우리 조상들의 조선에 대한 자부심을 담아 그렸기 때문이다. 케네스 데이비스는 이런 지도의 왜곡을 잘 알고 있는듯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미국이나 유럽을 중심으로 이해되던 지리를 좀더 폭이 넓은 방향에서 보고자 하고 있다. 이것은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우연히 소장하게 된 1932년도판 Appleton's Modern School Atlas를 보면 지도 전체가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편집되어있고, 아프리카는 한쪽, 아시아는 일곱쪽만 할당되어 있다. 그리고 나머지는 모두 백인들 세계에 할애하고 있다. 이런 지도로 세계를 조망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그럼에도 케네스 데이비스의 책은 세계의 지리를 공평하게 묘사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즉 지도의 크기에 의해 나라이 인격이 결정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언젠가 일본인과 부족한 한자지식을 가지고 힘겹게 필담을 나눈 적이 있었다. 이때 나와 상대방은 동양 삼국에 대하여 약간의 오해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한국인이 생각하는 동양의 세나라는 한국. 중국. 일본이지만, 일본인이 보는 동양의 세나라는 불행하게도 중국. 인도. 일본이었던 것이다. 이런 사소한 차이를 통해 바로 우리 이웃과도 얼마나 많은 지리적 지식의 간극이 있는가를 알 수 있었다. 이런 차이점을 알아차릴 때 독도와 다케시마의 문제점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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