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중세 문명 현대의 지성 65
자크 르 고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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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서양 중세에 관한 책으로 요한 호이징가의 <중세의 가을>을 읽었을 때가 생각난다.제목이 그래서였을까, 아니면 책의 내용 때문이었을까. 어떤 쓸쓸함과 비장함이 느껴졌었다. 그래서 호이징가의 책을 읽어나가는 속도가 아주 느렸던 기억이 있다. 그런 반면 쟈크 르 고프의 <서양 중세 문명>은 호이징가와는 다른 느낌, 밝은 느낌과 경쾌함이 있었다. 이런 이유로 이 책은 아주 쉽게  읽어 나갈 수 있었다.

이 책이 쉽게 읽힐 수 있었던 이유는 저자가 중세의 거의 모든 주제들을 아주 짧막하게 기술하고 있다는 점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 책은 저자가 지금까지 저술했던 방대한 자신의 책들을 축약해서 합본해 놓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방대한 저술의 핵심만을 알기 쉽게 우리에게 알려줌으로서 깊이보다는 재미를 느끼게 하려는 것이 저자의 의도가 아니었을까. 그러면서도 그 압축된 지면 속에서 중세의 모든 것을 한번씩은 집고 넘어가는 섬세함이 놀라울 뿐이다. 이 책은 중세를 알고자하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입문서이면서 참고서이고 자료집이 될 수 있을 정도로  내용이 넓은 책이다. 이 책을 읽으며 그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중세의 기술문명을 인터넷 상에서 검색해보고 그 엄청난 중세의 기술문명을 효과적이면서도 알기 쉽게 압축한 저자의 박학함과 정밀함은 감탄스러울 정도이다.

중세는 전통과 다가오는 새로움 사이에서 자신의 진로를 모색하던 고민의 시기이면서 무엇인가를 분출하는 시대였다. 물론 중세의 이런 역동성은 교회나 세속의 권력에 의해 꺽이기도 하고, 어떤때는 이를 넘어서기도 하면서 근대를 잉태하고 있었다. 중세가 잉태한 근대는 중세가 암흑이라는 사견과 결합한 사생아가 아니었다. 중세가 잉태한 근대는 고대로부터 이어져온 전통의 집합체이면서 전달체였다. 중세는 고대와 근대 사이에 독립적으로 구성되었던 인위적인 시대가 아니었다. 중세에는 고대의 전통이 근대에는 중세의 전통이 삶의 일부로 스며들어 있었다. 그 전통의 이어짐을 얼마나 이해하느냐에 따라 역사의 이해도는 결정되는 것이다. 중세를 역사의 단절된 시각으로 바라볼 때 중세의 정확한 모습은 드러나지 않는다. 사실 중세는 각 부분을 구성하는 지체들이 결합하여 하나의 거대한 몸체를 이뤄나가는 종합적인 시대인 것이다. 이런 역사적 모습을 통해 중세시대에 대한 우리의 편견이 다시 한번 재평가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 편견의 파편 속에는 바로 근대 유럽이 아니 현재의 유럽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과 함께 인간의 내면을 통해 중세를 고찰한 호이징가의 <중세의 가을>도 읽어 본다면 더 깊은 느낌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르 고프의 장기적 중세란 중세의 시기가 르네상스로 종결된 것이 아니란 것이다. 중세적인 요소들이 그 이후에도 계속 존재했왔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영국에서 중세적인 요소가 완전히 없어진 것은 1930년대이다. 그리고 프랑스에서도 혁명을 통해 사회가 변혁될 때까지 중세적 요소는 존재하고 있었다. 독일의 경우도 일차대전의 패배 전까지 중세적 요소가 사회의 한 요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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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의 순례자 시튼 (반양장) - 동물기의 작가 시튼이 쓴 자서전, 보급판
어니스트 톰슨 시튼 지음, 작은우주 옮김 / 달팽이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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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인생을 읽는 다는 것은 행운일수도 있고, 고통일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 사람에 대한 고정관념을 부셔버릴 수 있다면 그것은 행운이다. 하지만 그 고정관념이 지속적으로 유지된다면 그것은 고통일수도 있다. 이런 의미에서 시튼의 자서전은 나에게 행운이었다.

어린 시절 재미있게 읽었던 시튼의 동물기를 오랜 시간이 흐른뒤 다시 읽다보면 글의 행간에 언뜻 언뜻 비치는 잔인성에 깜짝 놀란다. 특히 <카람포의 이리왕 로보>의 이야기에서 시종일관 늑대에게 증오심을 비치는 글을 읽다보면 로보와 브랑카가 인간의 삶에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가하는 의문이 들기도 하였다. 그리고 아름다운 양의 뿔을 얻기 위해 추적하는 사냥꾼의 이야기에서는 감동보다는 차라리 치유불능적인 인간의 아집에 고개를 절레 절레 흔들수 밖에 없었다. 확실히 시튼의 동물기는 시간의 변화에 따라 읽으면 감흥에 약간의 차이를 느낄 수 있다는 점이다.

시튼의 자서전에서 인상이 깊었던 것은 자신의 가문에 관한 이야기를 아주 장황하게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결론은 자신의 핏줄에는 영국의 귀족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인데 이것은 시튼의 인생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으로 인식된다는 것이다. 그는 미국인이었지만 심정적으로는 식민지의 본고장이자 자신의 선조들의 터전인 대영제국의 사람임을 고백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에게있어서 자신의 신분을 확인하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절차였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자연에 대한 관찰능력은 이런 것과는 상관없이 매우 탁월하다는 것이다. 특히 자신이 조사한 조류의 깃털을 하나 하나 세어서 기록하는 모습을 볼 때 그 치밀함에 경외감마저 들 정도였다. 그는 자연과 지속적인 교류를 이루기 위해 야생에서 생활하는 것을 즐겼고, 그 생활의 일부분이 사냥이었던 것이다. 그에게 사냥은 스포츠이자 오락이었고, 삶의 한 방식이었다. 이런 취미는 일생을 통해 지속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그가 대영제국의 베이든 파월 경이 만든 보이스카웃의 미국판이 우드크래프트 연맹의 창설자가 되었다는 것은 아주 당연한 것이었다.

베이든 파월은 보이스카웃을 통해 미래의 백인 제국주의자들을 양성하려하였고, 시튼은 우드크래프트 연맹 운동을 통해 거대한 미국을 이끌어나갈 미래의 지도자를 양성하려 하였던 것이다. 대서양을 사이에 둔 미국과 영국에서 시행된 이 제도는 아주 탁월한 것임이 드러났고 그 운동은 약간의 변형을 거치면서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다만 아쉬운 점은 시튼이 우드크래프트 연맹을 창설하면서 인디안의 처우 개선보다는 인디안적인 생활방식을 전파하는데만 전념하였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백인들에게 인디안의 삶을 경험시킴으로서 그들의 삶을 이해하려는 운동은 아니었다. 단지 인디안 삶의 방식을 빌어와 백인을 위해 민들어놓은  백인들의 놀이였던 것이다. 이런 점이 시튼의 한계가 아니었는지. 물론 당시 미국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에게 넓은 대지와 숲은 이땅의 주인인 인디안이나 자신들의 노동력을 대신해줄 흑인의 것이 아닌 백인들을 위해 하느님이 준배해 놓은 세계였던 것이다. 시튼 역시 이 땅의 풍요로움을 누리고 즐기는 백인 가운데 하나였던 것이다. 책을 읽으며 이런 결론에 도달한 나의 행운에 고통을 느껴야만 했다는 사실이 부담으로 다가오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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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그리고 화교 - 보이지 않는 제국, 화교 네트워크의 역사
스털링 시그레이브 지음, 원경주 옮김 / 프리미엄북스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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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여행을 떠나려면 어떤 언어를 배워서 가는것이 좋을까? 수많은 대답이 있겠지만 나는 중국어를 배워 가겠다. 대략 13억의 인구를 가진 중국은 해외에 대략 5천 5백만명의 화교들이 퍼져 있다고 한다. 이들의 숫자는 대략 인구 5천명 이상의 마을에는 중국인이 반드시 거주한다는 전설 아닌 전설을 형성하는데 기여했다. 이는 그만큼 중국 화교들의 적응력이 뛰어남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하겠다.

화교들이 적응력이 뛰어나야만 했던 이유는 가난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화교들은 정치. 종교적인 이유로 고국을 떠난 사람들이 아니었다. 이들은 순전히 경제적인 이유로 고국을 떠나야 했던 사람들이기에 외국에 정착하더라도 최하층의 생활을 영위해 나갈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이유로 이들은 단체적으로 뭉치고 자신들의 <조그만 중국>을 만들어 고립된 생활을 해 나갈 수밖에 없었다. 이는 유대인들이 사회에 적극적으로 동화되어 정치.경제.문화적으로 그 사회에 기여한 것과는 아주 대조적인 모습이라 하겠다. 이는 유대인들이 조국이 없어진 상황에서 자신이 위치해 있는 그곳을 자신의 조국으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의미이지만, 화교들에게는 자신의 조국은 언제나 떠나온 그곳이었다. 이는 중국인이나 한국인들이 명절이되면 고향을 찾아 대이동을 하는 것과 유사한 사고방식이라 하겠다.

그러기에 화교들은 어느 나라에서든지 영원한 이방인으로 삶을 영위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만의 기준을 가지고 영원히 이방인으로 살고자 한다. 바로 이런 이유로 인해 동남아시아에서는 심심치않게 화교들에 대한 박해가 일어나곤했다. 원주민들의 화교에 대한 박해는 동화되지 않은 이방인에 대한 불만의 표출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화교들은 쉽사리 자신들이 살고 있는 사회속으로 동화되어 녹아들려고 하지 않고 있다. 대신 화교들은 자본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정치적 보호자를 선택할 뿐이다. 이런 선택은 정치의 변화과정에서 재빠르게 살아남을 수 있는 순발력을 제공해 주지만 뿌리를 내리고 살아갈 수 있는 지속성을 제공해주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화교들이 이런 방식을 택하고 있는 것은  중화적 사고방식에 바탕을 두고 있는 귀소본능 때문이 아닐까.

그렇다면 실제로 화교들이 자신들이 살고 있는 나라에 얼마나 많은 기여를 하고 있을까. 많은 통계수치와 동남아시아의 상황을 보면 그렇게 많은 기여를 하고 있는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그 많은 돈은 어디로 흘러들어가는 것일까. 바로 자신들의 선조가 태어난 땅으로 흘러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화교의 경제는 동남아시아의 원주민들에게는 때때로 증오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90년대 이후 중국은 세계의 공장 혹은 세계의 굴뚝으로 불리우며 승승장구하고 있다. 하지만 중국의 약점은 의외로 간단한 곳에 있다. 바로 인구인 것이다. 중국은 세계에서 4번째로 땅이 넓은 나라이지만 인구는 가장 많은 나라이다. 이런 상황은 멜서스의 이론이 아니더라도 중국의 성장에 한계를 가져오게하는 이유가 될 것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중국의 해결책은 무엇일까. 우리들은 수많은 인간의 무리들이 국경을 넘어 오는 모습을 상상한다는 것은 악몽일수도 있다. 90년대 구미의 학자들이 중국의 미래를 예측하는 토론을 하는 가운데 가장 최악의 시나리오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중국의 정치.경제.사회의 개혁이 실패하면서 사회적 질서체제가 붕괴되고 굶주림에 못이긴 13억의 인구가 동.서.남.북의 국경을 넘어 세계로 세계로 확산되는 것이었다. 각국의 공항과 항구에는 밀려드는 중국의 난민으로 인해 일대 혼란에 빠진다는 이 시나리오는 다행히 실행되지 않았다. 다만 지금은 합법적인 방식을 통해 조금씩 조금씩 중국의 인구는 세계로 확산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 이후의 상황은 희망일지 악몽일지는 모른다. 왜냐하면 지금도 진행중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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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도스섬 공방전 시오노 나나미의 저작들 5
시오노 나나미 지음, 최은석 옮김 / 한길사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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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성요한기사단> 혹은 <말타 기사단>이라고 불리우는 단체의 이야기이다. 이 기사단의 창설에서부터 몰락과 재건의 과정을 시오노 나나미는 여성의 따스한 눈길로 쫓아가고 있다. 움베르토 에코가 <푸코의 추>에서 <성당 기사단>을 시종일관 냉소적인 눈으로 바라보는 것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모성적인 필체와 시각 때문일까. 성요한 기사단의 모습이 역사적인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애틋하게 보이는 것은 나만의 착각일까.

성지 예루살렘에서 로도스섬으로 쫓겨온 기사단의 운명은 처음부터 예견된 것이었다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로도스섬은 점차 세력을 확대해 나가던 투르크 제국에게는 자신들의 목 옆에 튀어나온 칼이었다. 이 칼은 반드시 제거되어야만 하는 것이었고, 그 과업은 떠오르는 강자 술레이만에게 맡겨졌던 것이다. 그리고 그에 대항하는 임무는 필립 릴라당Philippe Villiers de L'Isle-Adam에게 맏겨졌다. 한쪽은 승자로 한쪽은 패자로 기록될 이 전투에서 양쪽은 필사적으로 싸웠다. 이 로도스 공성전은 <성벽을 버터로 만들었다 하더라도 나는 지킬 것이다>라고 호언했던 사자왕 리차드와 <성벽이 철로 되어 있다하더라도 무너뜨리겠다>고 맞받아친 존엄왕 필립과의 언쟁처럼 진행되었다. 한쪽은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성벽을 쌓았고, 다른 한쪽은 어떤 것이라도 무너뜨릴 신념을 가지고 전투에 임했던 것이다.

이 전투는 기사도적인 결말로 종결되었다. 상대의 자존심을 최대로 배려해준 이 전투의 결말은 유럽의 완벽한 패배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정말로 저자가 이 책에서 언급하고 싶었던 것은 패배와 승리의 이야기가 아니라 <진정으로 강한 적은 나의 명예>라는 것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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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
리처드 오버리 지음, 류한수 옮김 / 지식의풍경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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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차세계대전 중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은 동쪽의 러시아 전선이었다. 드넓은 평원에서 펼쳐진 양군간의 전투는 어느 한쪽이 완벽하게 절멸되어야만 하는 제로섬zero sum게임과 비슷한 것이었다. 히틀러는 < 독일민족의 순결함을 볼세비키의 더러운 손길로부터 지키기 위한 성전>으로, 스탈린은 어머니인 대지,러시아를 침입한 침략자를 격퇴하기 위한 <조국전쟁>으로 승화시키며 수많은 젊은이들을 죽음의 강물로 밀어 넣었다. 

이제까지 이차세계대전에 관한 戰史는 서구의 시각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것은 전쟁의 가장 큰 당사자였던 소련의 체제에 기인한 점이 많았다. 그래서 지금까지 이차세계대전의 일반적인 기록은 영국의 분투와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전쟁의 분수령이었다고 인식되고 있었다. 이것은 어찌보면 반쪽만의 진실이었던 것이다. 온전한 전쟁의 역사가 기록되기 위해서는 소련의 역사적 사실이 드러나야만 했던 것이다. 이 책은 그동안 가려져왔던 소련의 전쟁에 대한 모든 것을 담고 있는 책이다. 물론 5년에 걸친 전쟁을 5백여쪽이 약간 넘는 책에 기록한다는 것은 무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부분 부분이 또 다른 역사를 구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러시아 전선의 전쟁상황을 알고자하는 사람들에게 개설서의 역할을 충실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차세계대전 당시 서부전선의 전쟁은 프랑스가 항복하고 사실상 서쪽에서의 전쟁은 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개시될 때까지 소강상태를 맞이하고 있었다. 대신 영국과 독일은 유럽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북아프리카에서 더운 전쟁을 하고 있었다. 반면 이 시기에 유럽의 동쪽인 러시아에서는 엄청난 살륙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차세계대전이 1939년 9월 1일 시작되어 1945년 5월 1일 끝났다고 볼 때 러시아 전선에서의 전쟁은 41년 7월 중순부터 종전까지 지속되었다고 볼 때 독.소전쟁이 바로 유럽의 운명을 결정지은 중요한 전투였다고 감히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러시아에서 이 전쟁은 <위대한 지도자 스탈린의 영도하>에 승리한 전쟁으로 기록되면서 러시아 인민들의 불굴의 투쟁은 한 사람의 영광으로 미화되어 버렷다. 물론 이런 역사관은 후르시쵸프의 스탈린 격하운동 이후 약간씩 변해갔지만 90년대 소련이 완전히 붕괴되기까지 하나의 기조를 이뤄왔다. 반면 독일은 전쟁 초기 승승장구할 때는 <총통의 의지와 탁월한 천재적 직관>에 의한 승리로 떠들어 댔지만 패전 이후 이 전쟁은 한 인간의 무모한 도박에 의해 야기된 있어서는 안될 비극으로만 설명되었다. 이 결과 러시아 전선에서 싸우다 죽어간 수많은 독일 병사들의 죽음 자체가 희극이 되고 말았다.

이런 편견을 약간이나마 수정하고 싶다면 이 책은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시각을 교정하게되면 겹쳐져있던 상이 바르게 보이고, 또는 히미하던 물체가 뚜렷하게 존재하게 된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약간 허망한 생각이 든다. 유럽을 단일한 게르만민족의 영토로 재편하고자 했던 독일은 전 영토의 1/3에 해당하는 프러시아와 오데르-나이세강 이동의 영토를 빼앗기고 자신들의 꿈을 접어야만 했던 반면, 영구혁명론자인 트로츠키를 추방하고 살해한 일국혁명주의자 스탈린은 본의아니게 유럽의 1/3을 지배하는 거대한 제국의 맹주가 되었으니 말이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이런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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