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제스와 국민당 엘리티스트
정두음 지음 / 도서출판선인(선인문화사)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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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사藍衣社라는 단어를 들을 때마다 드는 생각은 비밀스러움과 공포라는 점이다. 또 암살과 고문, 납치를 일삼는 무지막지한 관제官製 테러조직이란 느낌이 강하게 든다. 이런 남의사의 탄생과 소멸-결코 소멸되지는 않았지만-의 과정을 저자는 독일과 일본의 파시즘과 비교하며 설명하고 있다. 저자는 남의사가 독일보다는 일본의 군국주의로 염색된 파시즘에 더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독일의 파시즘은 오히려 남의사 뒤에 오는 삼민주의청년단三民主義靑年團이 더 강하게 받았다고 보았다. 저자는 남의사가 일본을 모델로 삼았지만 중국적인 요소인 방幇의 영향이 컸다는 점도 밝히고 있다. 저자는 일본의 파시즘 요소가 행行이라는 날줄을 구성했다면 중국적인 요소인 방은 지知라는 씨줄을 구성하여 남의사라는 단체가 성립되었다고 보았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인데 남의사가 생동과 사고의 일치를 요구하는 유교적 덕목인 지행합일知行合一을 목표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남의사의 탄생은 중국이 일본에게 군사적 패배를 당한 청일전쟁淸日戰爭 이후부터 재기된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였다. 중국은 일본이 소수의 우국지사들에 의해 명치유신明治維新이 단행되고 이들에 의해 50년도 안되 근대국가로 탈바꿈한 것에 큰 충격을 받았다. 결국 중국도 일본처럼 소수의 엘리트집단을 양성하여 30년 안에 근대국가로 탈바꿈시키려는 장대한 꿈의 시도였다. 남의사는 우리가 표면적으로 아는 것처럼 테러와 폭력의 집단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런 모습은 일부였다. 남의사는 소수정예小數精銳를 표방하며 대중을 교화하고 지도하려 하였다. 다만 그 방법을 파시즘처럼 대중동원을 통해 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 전통의 범죄집단인 청방靑幇과 유사한 방식으로 하려 하였다. 남의사의 이런 행태는 필연적으로 전통적 범죄조직인 청방과 대립하게 되고 결국 대중적인 지지를 얻는데 실패하고 만다. 우리들이 남의사에 대해 아는 단편적 지식은 바로 이런 행태에 기인基因한 바가 크다. 남의사는 철저하게 개인에게 소속된 단체였다. 그 정점에 장개석이 위치해 있었다. 장개석은 남의사의 잠재력을 알고 있으면서도 독일이나 이탈리아처럼 대중동원을 통한 방식을 선호하지 않았다. 이는 장개석이 자신의 사부였던 손문의 기질을 이어받았기 때문이었다. 손문도 자신의 개인적 능력을 과신한 반면 대중의 능력을 무시하였다. 이는 장개석의 경쟁자였던 모택동이 대중의 능력을 극대화시킨 것과는 대조적이라 할 수 있다.

장개석은 남의사를 자신의 통제하에 두기 위해 끊임없이 유교적 덕목을 강조하였다. 충성, 헌신, 일치와 같은 덕목은 필수였다. 그러나 이런 덕목의 강조도 서안사변西安事變을 통해 크게 흔들리게 된다. 장개석 본인이 서안에 감금되어 있을 때 자신이 공들여 키워왔던 엘리트 그룹들이 자신을 권좌에서 내칠 생각을 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장개석은 서안사변 후에 남의사를 해체하고  삼민주의청년단을 만들게 된다.

남의사의 대부분은 삼민주의청년단에 가입하게 된다. 삼민주의 청년단은 남의사가 비밀리에 행하던 중국 개조작업을 공식화한다. 그것이 바로 신생활운동新生活運動이다. 이것은 철저히 위에서 아래로 행해지던 관제운동으로 성공하지 못하였다. 당시 공산당은 홍구紅區에서 미래의 젊은이들을 교육시키고 있었다. 국민당이 청년들의 교육에 구래의 유습인 유교적 덕목과 서구식 문화를 강조한  반면 공산당은 당시의 현실적인 항일抗日을 구호로 젊은피를 흡수하였다. 국민당이 공식적으로 일본과 싸우게 된 것은 서안사변 후인 상해사변이 일어나면서부터이다. 이때는 중국의 많은 민중들이 일본과 싸우자고 줄기차게 주장했던 공산당에게 동조적이었다. 반면 국민당은 일본과 항전을 기피하는 집단으로 매도되었다. 이것은 공산당의 줄기찬 선전전宣傳戰의 효과이기도 했지만 장개석이 1932년부터 1938년까지 남의사를 통해 끊임없이 공작해온 것이 실패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장개석은 남의사의 이상을 대만으로 옮기면서 철저하게 시행함으로서 자신을 정점으로 한 거대한 경찰국가의 틀에 묶어놓는데 성공하였다. 이것은 유교적 덕목의 가장 불순한 사상이 성공한 것이었다. 결국 남의사는 어둠의 저편에 자신들의 흔적을 남겼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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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의 비극 - 중국 혁명의 역사 1945~1957 인민 3부작 1
프랑크 디쾨터 지음, 고기탁 옮김 / 열린책들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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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대통령 직에서 하야下野한 미국의 닉슨이 평민의 신분으로 중국을 다시 방문했다. 병색이 완연한 모택동은 정치적으로 몰락한 닉슨을 홀대하지 않고 국가원수로 예우하였다. 83세의 모택동은 자주 측근들에게 염라대왕을 만나러 간다고 농담을 했지만 닉슨과의 만남에서는 예전의 기력을 되찾는듯 보였다. 닉슨과 1시간 40여분의 만남을 마친 모택동은 건배를 제의하였다. 그는 당시 건강 때문에 술을 하지 못하였다. 닉슨은 이런 사정을 알고 술 대신 차茶로 건배를 하였다. 모택동은 찻잔을 들고 닉슨에게 "군자지교담여수君子之交淡如水"란 말을 하였다. 군자의 사귐은 담백하기가 물과 같다는 말이었다. 닉슨과 그의 수행원들은 모택동의 인간적인 매력에 흠뻑 빠졌다. 

당시 모택동은 한창 진행 중인 문화혁명을 통해 이전의 동지들과 전우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한 사람이었지만 그 어디에도 냉혹한 승부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의 언변과 국제정세에 대한 해박함은 이면의 정치적인 모습을 감추기에 충분하였다. 당시 닉슨이 모택동의 어떤 모습을 봤는지 모르지만 그는 모택동의 인간적 매력에 깊이 감복하였다. 

우리는 지금까지 모택동의 모습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서구 지식인들은 모택동의 범죄보다는 장개석의 무능 혹은 부패에 더 가혹한 비판을 가하였다. 서구인들에게 혹은 동양의 추종자들에게 모택동은 전사이며 시인으로 이해되었고 그의 말과 행동은 위대한 지도자의 전형으로 보여졌다. 대신 장개석의 일거수일투족은 구태의연한 동양적 전제군주의 모습을 상기시킬 뿐이었다.

이런 편견은 장개석의 국부천대國府遷臺 후 대륙에서 모택동이 벌인 비극에 지식인들이 관대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는 원인이 되었다. 모택동은 중국 혁명에 뛰어든 이후 목적은 단 하나였다. 혁명의 성공을 통해 대륙의 모든 삶과 정신 자체를 개조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 정신개조精神改造를 위해 끊임없이 투쟁을 해나가야 한다고 믿었다. 모택동은 투쟁을 통해 정신이 완전히 개조되면 육체는 온순해 진다고 믿었다. 이를 위해 모택동은 이보전진 일보후퇴二步前進 一步後退 전략을 구사하여 대륙을 끊임없는 투쟁의 장으로 변모시켰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이런 구상에 가장 먼저 투항한 집단이 지식인들이었다. 이들은 모택동의 백화제방 백가쟁명百花齊放 百家爭鳴 전술에 말려들어 일시에 저항다운 저항도 해보지 못하고 자멸하였다.사회의 상층부를 구성한 두뇌집단이 맥없이 무너지자 하부를 구성한 노동자,농민은 표류하는 낙엽신세로 전락하였다. 이들 농민과 노동자는 이미 지주와 자본가를 청산하는 투쟁과정에서 서로가 서로를 불신하는 전략에 말려들어 모택동의 꼭두각시로 전락한 뒤였다. 철저하게 모택동의 전위로 전락한 노동자와 농민은 이후 문화대혁명에서 지도자에 의해 만들어진 광기를 어떻게 수행하는지 극명하게 보여주게 된다. 모택동은 1949년 대륙을 해방한 후에 문화대혁명까지 철저하게 대륙의 인민들을 자신의 말과 사고 속에서 움직이게 꼭두각시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였다. 결국 1957년까지 모택동은 사회의 계층을 갈갈이 찢어 분열시키고 상호불신을 조장하게 함으로서 무력화 시키고 자신의 수족으로 만드는데 성공하였다. 해방의 비극은 이 과정을 상세하게 추적하고 있는 것이다.

1945년부터 1957년까지 모택동은 대륙의 인민들을 제국주의 일본과 투쟁하였던 용감한 병정개미에서 자신의 뜻에 고분고분한 일하는 푸른작업복의 일개미로 변모시켰다. 해방의 비극은 바로 이 위대한 사상가이며 전략가인 모택동이 어떻게 한 민족을 절망과 무능의 구렁텅이로 빠뜨렸는지 보여주는 전주곡인 것이다. 

*중국 인명이나 지명에 한문표기도 함께 해주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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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3세 - 전예원세계문학선 316 셰익스피어 전집 16
윌리엄 세익스피어 지음, 신정옥 옮김 / 전예원 / 199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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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1985년 안드레이 콘찰로프스키 감독의 런웨이 트레인runaway train이란 영화를 통해서 흥미를 갖게 되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 존 보이트가 설원을 달리는 폭주기관차에 서서 죽음으로 달려가는 장면에서 '짐승에게도 자비가 있는데 그것도 없는 나는 짐승도 아니다'라는 대사가 자막으로 나오며 세익스피어의 리처드 3세라고 나타난다. 이 말이 의미하는 뜻이 좋아 리처드 3세를 사서 읽으며 이 대사를 찾았다. 대사는 2장의 헨리 6세의 장례식에서 미망인 앤과 리처드가 나누는 대화의 한 구절이다. 번역본에는 난 동정심같은 건 전혀 없소. 그러니 짐승도 아니지.라고 되어있다. 영화속의 장엄한 번역과는 차이가 있는 것에 감흥이 많이 식었음은 물론이다.

이런 차이가 리처드 3세의 진실이 아닌가 싶다. 역사 속의 리처드 3세와 희곡속의 글로스터 공작의 모습은 전혀 다른 모습이다. 희곡 리처드 3세는 철저한 악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만 역사 속의 리처드는 요크가와 랭커스터가의 화합을 위해 노력한 인물이었다. 그는 승리자였음에도 관대했고 정의로웠다. 그 관대함은 배신으로 보답받았고 정의는 불신으로 보상받았다. 그는 화합을 추구했지만 철저하게 배신당하였고 보스워스의 벌판에서 마지막으로 인간 세상의 참 모습을 보아야 했다. 그 결과는 패배였고 죽음이었다. 그는 죽은 뒤에 승리자인 튜더가문의 유일한 상속자인 헨리 튜더에 의해 시신이 능욕당하는 치욕을 겪게 된다. 헨리는 리처드의 시신을 사냥감처럼 말 등에 옷을 벗겨 묶어 끌고가는 만행을 저질렀다. 일국의 왕이었던 사나이가 말 등에 벌거벗은 시신으로 묶여 요크 시내로 들어갔을 때 시민들은 죽은 국왕에 대해 예의를 표했다고 한다.

역사와는 다른 리처드의 모습은 이언 매켈런이 주연한 현대적 형태의 리처드 3세에서 더 그럴듯하게 보인다. 약간 굽은 모습과 한쪽 팔을 쓰지 못하는 기형의 리처드, 교활함과 시기심 그리고 권력에의 의지는 세익스피어가 그리고자 했던 리처드 3세의 변형을 잘 보여준다. 리처드 3세는 아마도 권력에 의해 가장 심하게 왜곡된 역사의 인물인지도 모른다.

이와 비슷한 것으로 지 아이 제인이란 영화에서 시작부에 교관이 훈련병들을 다그치며 하는

I never saw a wild thing
sorry for itself.
A small bird will drop frozen dead from a bough
without ever having felt sorry for itself.

라는 말도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의 시 self-pity라는사실이다. 시가 가정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특수부태 훈련소의 교관 입에서 튀어나온 다는 그 자체도 어찌보면 스테레오 타이프에 대한 왜곡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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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제스 평전 - 현대 중국의 개척자
조너선 펜비 지음, 노만수 옮김 / 민음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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蔣介石, 장개석, 장카이섹, 장제스. 그의 이름 표기 만큼이나 복잡한 인물이었다. 소금장수의 유복자로 태어나 한 국가의 최고통수권자Generalissimo가 되고 결국 최후의 순간 모든 것을 잃어버린 인물. 그에 대한 평가는 과정이 아니라 결과로 집결된다. 그의 경쟁자 모택동 역시 과정이 아니라 결과로 평가되듯...

장개석의 성공과 실패는 중국이라는 거대한 대륙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공간의 포기하는 대신 시간을 소유하고자 한 전략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그는 시간은 자신의 편이라고 생각하였다. 1937년 상해 전투는 장개석의 이런 관점을 잘 보여준다. 일본군이 석 달 안에 중국을 점령할 수 있다고 호언하자 '그렇다면 석 달 만 싸워보자'고 담담하게 말하며 일본과 싸움을 시작하였다. 상해에서 국민당군의 집요한 저항은 일본을 놀라게 했다. 이에 일본은 남경을 점령하면서 중국의 저항의지를 꺽기위해 잔혹한 학살을 저질렀다. 그의 이런 여유로움과 집요한 저항은 무수한 중국의 청년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지만 결국 연합국의 일원으로 인정받고 승리자가 되게 하였다. 

그가 공간보다 시간에 집착했던 이유는 전쟁 후에 발생할 중국의 분할 때문이었다. 연합국 -미국과 영국-은 중국도 독일과 베트남, 한국처럼 양분할 뜻도 있었다. 소련 역시 원자폭탄을 가지고 있던 유일한 강대국 미국과의 직접적인 대결을 회피하기 위해 양자강을 중심으로 중국이 남북으로 분단되는 것도 용인할 의지가 있었다. 장개석은 미국과 소련의 이런 의중을 알고 있었기에 줄기차게 저항하였다. 미국은 태평양 전쟁 동안 중국의 군 지휘권을 빼앗기 위해 노력했지만 장개석은 노련하게 이 제안을 거부하였다. 미국은 중국의 군사 지휘권을 장악하여 자신의 의도대로 중국을 조정하고자 하였다. 장개석은 미국의 원조는 받되 중국에서의 전쟁은 중국인이 수행한다는 대국적인 원칙은 포기하지 않았다. 이 결과 중국에서의 전쟁은 미국이 주도한 것이 아니라 8년 동안 도망 다니기 바빴다고 자조하던 중국이 주도권을 가지고 진행할 수 있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중국 국민당군은 막대한 인적 물적 손실을 입었다. 하지만 중국인들은 일본군과 전쟁을 하면서 '하나는 본전이고 둘 이면 남는다'는 낙관적인 생각을 끝까지 버리지 않았다. 일본의 패망 후에 만주에 진주한 소련에 대한 태도 역시 장개석 다운 선택이었다. 소련의 만주 점령을 희석시키기 위해 모택동의 공산당과 평화협정을 시작하며 하나의 중국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 미국과 소련이 중국을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로 양분하려는 기도를 좌절시켰다. 장개석은 소련의 의중을 알때까지 만주에서 공산당과 전투를 하려하지 않았다. 소련의 의중을 모르고 전쟁을 벌일 경우 만주를 점령한 소련이 그곳을 공산당에게 넘겨준다면 중국은 분할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의 이런 혜안은 정확했고 장개석과 스탈린이 협정을 맺고 소련군이 만주에서 철수를 하자 그때서야 공산당과의 전쟁을 시작하였다. 그 정점이 공산당의 본거지인 연안을 점령한 것이었다. 모택동 역시 미국과 소련이 중국을 분할하려는 의지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과감히 연안을 버리고 장개석과 정면 대결을 선택하였다. 장개석은 분할보다는 하나의 중국을 선택함으로서 자신은 대만으로 쫓겨가게 되었다. 

그의 군사적 능력은 대단치 않았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말하듯 능력보다는 충성심을 우선으로 한 용인술을 펼쳤다. 이는 능력만 있다면 실수도 적당히 용인한 모택동과 다른 점이었다. 장개석은 현실을 장악하려 했지만 모택동은 미래를 움켜쥐려 했다. 모택동의 입장에서 천하를 차지한 뒤에 무슨 짓을 하더라도 그것은 제왕의 의지이기 때문에 과정은 용인될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장개석은 현실을 장악해야 미래를 가질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런 점에서 장개석은 모택동에 뒤졌지만 모택동 역시 장개석이 그토록 집착했던 하나의 중국이란 화두에 반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장개석의 이런 심중을 최대한 이용하여 중국을 차지하였던 것이다. 

장개석이 어느 정도 무능하고 부패한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단점의 뒤에는 결코 분할 될 수 없다는 중국이라는 화두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는 현재의 중국도 인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결국 역사는 멀리 보는 자가 승리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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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콘과 도끼 1 - 해석 위주의 러시아 문화사 한국문화사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748
제임스 빌링턴 지음, 류한수 옮김 / 한국문화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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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콘과 도끼를 읽으면서 느낀 것은 스페인이었다. 스페인의 돈키호테가 무모함과 침울함 그리고 깊이를 알 수 없는 신심信心으로 도배되어 있다면 그 반대편에 위치한 러시아의 바보 이반은 대체 무엇일까 하는 점이었다. 두 나라 모두 유럽의 변방에 위치해 있었다. 스페인은 피레네 산맥 너머 저쪽은 아프리카라는 비아냥을 받아야 했고 러시아는 유럽에 있으면서도 유럽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래서일까 두 나라는 유럽이 갖지 못한 광기와 신심을 보유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유럽의 중심에 위치한 로마가 예수 그리스도와 베드로를 가졌다면 서쪽 끝의 스페인은 예수의 형제인 야고보를 가졌고, 동쪽의 러시아는 베드로의 동생인 안드레아를 가졌다. 스페인은 야고보를 선택하므로서 영원히 서자庶子의 위치에 머물러야만 했다. 하지만 러시아는 안드레이를 선택함으로서 다른 로마, 제3의 로마의 후계자가 되었다. 

이콘과 도끼 1편은 바로 이 야만의 러시아가 광기에서 신심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서술하고 있다. 러시아는 끊임없이 자신이 러시아이면서 유럽이기를 바랬다. 그 이중성은 종교를 상징하는 이콘과 러시아의 심성을 대표하는 도끼로 표현했다. 도끼는 언제나 광할한 동쪽을 향해 거침없이 나가고자 하였다. 이 도끼는 유럽의 관점에서 보면 야만이었다. 세련되지 않고 거친 러시아는 유럽이 되기 위해서는 교화되어야만 했다. 그 교화의 과정이 이콘인 것이다. 하지만 러시아는 이콘을 선택하면서도 도끼를 포기하지 않았다. 러시아의 대표적 건축물인 양파돔의 건물이 바로 그 타협점의 산물인 것이다. 러시아는 유럽이 성령의 불꽃을 어둠 구석 구석까지 퍼지는 빛으로 볼 때, 타오르는 주님의 열정으로 보았다. 그 열정의 표현이 양파돔인 것이다. 

이 책은 너무 방대하여 어떻게 읽고 요약하기가 심히 곤란하다. 결국 느낀 소감을 간략하게 적는 것으로 마무리해야 하는 것으로 내 자신의 무능을 고백하는 수밖에 없다. 저자의 전체를 관통하는 러시아에 대한 해박한 지식은 읽다 보면 주석을 따라가는 것 조차 벅찰 때가 있다. 하지만 독서라는 것이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 책을 완전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독서를 해야한다는 사실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요즘 다시 이 책을 뒤적거리며 이곳 저곳을 드러다 보다 다시 간략하게 소감을 적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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