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의 비극 - 중국 혁명의 역사 1945~1957 인민 3부작 1
프랑크 디쾨터 지음, 고기탁 옮김 / 열린책들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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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대통령 직에서 하야下野한 미국의 닉슨이 평민의 신분으로 중국을 다시 방문했다. 병색이 완연한 모택동은 정치적으로 몰락한 닉슨을 홀대하지 않고 국가원수로 예우하였다. 83세의 모택동은 자주 측근들에게 염라대왕을 만나러 간다고 농담을 했지만 닉슨과의 만남에서는 예전의 기력을 되찾는듯 보였다. 닉슨과 1시간 40여분의 만남을 마친 모택동은 건배를 제의하였다. 그는 당시 건강 때문에 술을 하지 못하였다. 닉슨은 이런 사정을 알고 술 대신 차茶로 건배를 하였다. 모택동은 찻잔을 들고 닉슨에게 "군자지교담여수君子之交淡如水"란 말을 하였다. 군자의 사귐은 담백하기가 물과 같다는 말이었다. 닉슨과 그의 수행원들은 모택동의 인간적인 매력에 흠뻑 빠졌다. 

당시 모택동은 한창 진행 중인 문화혁명을 통해 이전의 동지들과 전우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한 사람이었지만 그 어디에도 냉혹한 승부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의 언변과 국제정세에 대한 해박함은 이면의 정치적인 모습을 감추기에 충분하였다. 당시 닉슨이 모택동의 어떤 모습을 봤는지 모르지만 그는 모택동의 인간적 매력에 깊이 감복하였다. 

우리는 지금까지 모택동의 모습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서구 지식인들은 모택동의 범죄보다는 장개석의 무능 혹은 부패에 더 가혹한 비판을 가하였다. 서구인들에게 혹은 동양의 추종자들에게 모택동은 전사이며 시인으로 이해되었고 그의 말과 행동은 위대한 지도자의 전형으로 보여졌다. 대신 장개석의 일거수일투족은 구태의연한 동양적 전제군주의 모습을 상기시킬 뿐이었다.

이런 편견은 장개석의 국부천대國府遷臺 후 대륙에서 모택동이 벌인 비극에 지식인들이 관대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는 원인이 되었다. 모택동은 중국 혁명에 뛰어든 이후 목적은 단 하나였다. 혁명의 성공을 통해 대륙의 모든 삶과 정신 자체를 개조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 정신개조精神改造를 위해 끊임없이 투쟁을 해나가야 한다고 믿었다. 모택동은 투쟁을 통해 정신이 완전히 개조되면 육체는 온순해 진다고 믿었다. 이를 위해 모택동은 이보전진 일보후퇴二步前進 一步後退 전략을 구사하여 대륙을 끊임없는 투쟁의 장으로 변모시켰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이런 구상에 가장 먼저 투항한 집단이 지식인들이었다. 이들은 모택동의 백화제방 백가쟁명百花齊放 百家爭鳴 전술에 말려들어 일시에 저항다운 저항도 해보지 못하고 자멸하였다.사회의 상층부를 구성한 두뇌집단이 맥없이 무너지자 하부를 구성한 노동자,농민은 표류하는 낙엽신세로 전락하였다. 이들 농민과 노동자는 이미 지주와 자본가를 청산하는 투쟁과정에서 서로가 서로를 불신하는 전략에 말려들어 모택동의 꼭두각시로 전락한 뒤였다. 철저하게 모택동의 전위로 전락한 노동자와 농민은 이후 문화대혁명에서 지도자에 의해 만들어진 광기를 어떻게 수행하는지 극명하게 보여주게 된다. 모택동은 1949년 대륙을 해방한 후에 문화대혁명까지 철저하게 대륙의 인민들을 자신의 말과 사고 속에서 움직이게 꼭두각시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였다. 결국 1957년까지 모택동은 사회의 계층을 갈갈이 찢어 분열시키고 상호불신을 조장하게 함으로서 무력화 시키고 자신의 수족으로 만드는데 성공하였다. 해방의 비극은 이 과정을 상세하게 추적하고 있는 것이다.

1945년부터 1957년까지 모택동은 대륙의 인민들을 제국주의 일본과 투쟁하였던 용감한 병정개미에서 자신의 뜻에 고분고분한 일하는 푸른작업복의 일개미로 변모시켰다. 해방의 비극은 바로 이 위대한 사상가이며 전략가인 모택동이 어떻게 한 민족을 절망과 무능의 구렁텅이로 빠뜨렸는지 보여주는 전주곡인 것이다. 

*중국 인명이나 지명에 한문표기도 함께 해주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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