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고문화사 동문선 문예신서 17
D.마이달 외 / 동문선 / 199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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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는 280만명이 채 못되지만 땅의 넓이는 유럽의 스페인. 포르투갈.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벨기에를 합친 것과 같은 나라는? 답은 몽골이다. 우리에게 중세의 몽골과 현대의 몽골 사이에는 커다란 인식의 벽이 존재한다. 중세시대 알려진 세계의 절반을 점령했던 몽골제국의 찬란함은 당시 최고의 문명을 자랑하였다. 물론 한족인 중국을 점령함으로서 얻은 문화적 후광이었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삶의 방식을 지키려고 무던히 노력하였다. 하지만 몽골민족이 세웠던 원제국이 쇠퇴하고 다시 그들의 고향인 초원으로 사라졌을 때 몽골의 존재는 역사속으로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현대의 몽골은 그 흔적을 보존한 나라의 이미지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이런 몽골의 역사와 문화를 서술한 이 책은 몽골을 이해하는데 아주 요긴하게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이 책은 70년대에 저술된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그 뒤에 일어난 현대 몽골의 변화를 담아내지 못하는 약점도 있다. 하지만 몽골 역사학계의 원로인 마이달과 예술계의 거두인 추르뎀이 저술한 이 책은 몽골인이 써내려간 자신들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고 본다.

이 책을 읽어가면서 몽골의 문화적 깊이가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것보다 깊이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 이유는  아시아와 유럽을 아우르는 원제국을 건설하면서 흡수한 아시아. 아랍. 유럽의 전통과 학문이 그들의 역사 속에 녹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이런 지식과 문화를 받아들이면서도 자신들의 정체성- 유목민-을 잃지 않고 있다. 즉 유목민의 특성에 맞는 특성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몽골의 지형적 특성상 매우 중요하다. 스텝지역에서의 삶은 농경지대의 삶과는 매우 다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그러므로 몽골에서 고정적인 역사적 유물을 찾는다는 것은 아주 어렵다. 이들은 제국이 건설되었어도 정주하기 보다는 끊임없이 움직이는 민족이었다. 이런 특성은 몽골 문화의 곳곳에 드러나 있다. 이동식 거주지인 유르트라든가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인 보르츠와 같은것이 그것이다.

몽골의 문화를 간단하게 정의한다면 질박하고 강건하며 실용적이다. 이런 몽골문화의 특징은 고구려의 문화적 특성과 상당히 유사함을 알 수 있다. 몽골인들의 생활에 급격한 변화를 가져온 것은 라마교의 유입이었다. 이 결과 그 전과 그 후의 문화적 양상이 완벽하게 변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변화는 이름에서 감지되는데 라마교 이전에는 자연친화적인 이름이 대다수를 차지한 반면 라마교 유입 이후에는 종교적인 이름과 티벳식 이름이 보이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이후 라마교는 몽골인들의 삶 속에 아주 뿌리깊게 안착함으로서 몽골 역사와 문화에 새로움과 풍요로움을 제공한다. 특히 라마교의 영향으로 담가라고 부르는 불화의 발전을 가져온다. 그리고 몽골의 민족화인 <몽골 즈라구>가 있다. 이 민속화는 당시대의 상세한 묘사로 인해 그 시대의 몽골족의 삶을 파악할 수 있는 아주 귀중한 자료이다.

이런 몽골의 역사적 문화적인 발전은 사회주의 혁명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중단되었다.  러시아에 의해 인위적으로 폄하된 몽골의 역사와 문화는 몽골인들의 자존심에 커다란 상처를 입히기도 하였다. 이는 러시아가 한때 몽골의 지배를 받았던 경험에 의한 것이었다. 하지만 몽골은 구소련이 붕괴되자 곧 바로 역사의 복원에 착수하여 그 빛나는 과거를 다시 자신들의 역사속에 편입시켰다. 전통이 살아 있을 때 그 민족의 문화가 복원될 수 있다는 것은 하나의 축복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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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잡기 - 원전총서 원전총서
유흠 지음, 김장환 옮김 / 예문서원 / 199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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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도 인연이 있다면 바로 이 책인 것 같다. 내가 아주 재미있게 읽었던 <世說新語>의 번역자인 김장환 교수가 번역한 책이니 말이다. 읽다보면 뭐라고나 할까 한 전문가의 특징이랄까, 버릇이 보이는듯 하다. 그래서 더욱 편하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번역문과 원문, 역주와 참고가 알차게 정리되어 있는 이 책은 그 자체로 하나의 백과사전과 같은 무게를 느끼게 한다. 세설신어가 <魏晉南北朝>시대의 이야기라면 <西京雜記>는 漢왕조 중에서도 전한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진의 통일로 중국이란 제국의 몸체가 형성되었다면 전한 시대는 이 몸통에 그들만의 살과 피가 형성되는 시기였다. 바로 이런 시기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의 가치는 더욱 뛰어나다 하겠다. 특히 이 책은 정사에서는 언급되지 않는 역사의 뒷이야기를 많이 전하고 있는데 그 사실성으로 인해 사료적 가치까지 지니고 있다. 이런 사실성은 고고학적 발굴의 성과로 더욱 극적으로 드러나는 경우도 있었다. 67년 하북성에서 한의 중산왕 유승 부부의 묘지가 발굴되었을 때 이 책의 22편에 기록된 내용의 장례용품과 똑같은 유물이 발굴됨으로서 이 책의 가치는 더욱더 빛나게 되었다.

이 책 역시 아주 짧은 글로 구성되어 있다. 그럼에도 그 주석의 분량은 원문의 몇 배에 해당할 정도이다. 한자의 세계가 오묘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된다. 서한시대는 우리에게 武帝로 인해 어느 정도 알려진 시대라 할 수 있다. 무제가 순체와 양복이란 장군을 보내 고조선을 정벌했기 때문이다. 어찌보면 이 시대는 우리의 역사와 아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는 시기인지도 모른다. 지금은 헐린 중앙청 건물이 중앙박물관이었던 시절, 가끔 오후에 강의가 없는 시간이면 그곳에 들러 백제,고구려,신라를 이리 저리 돌아다니던 경험이 있다. 이때 금으로 만든 팔찌가 우연히 눈에 들어왔는데, 팔찌에는 무려 7마리의 용이 돋을 새김으로 조각되어있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용을 구별하기 위해 비취옥을 아주 작게 깍아서  용의 눈에 박아 놓은 것이었다. 그 현란한 조각팔지에 잠시 멍했던 기억이 있는데 출토지는 <평양, 낙랑시대>라고만 되어 있었다. 한의 문명은 요동을 건너 한반도에까지 미치고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했다. 하지만 우리의 역사가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우리의 손이 아닌 일본의 사학자들의 손에 의해 발굴됨으로서 안타까운 일이 많이 발생했다는 사실이다. 이 결과 우리는 정확한 역사를 파악할 수 있는 많은 유적의 손실을 감내해야만 했다. 그래서 그 잃어버린 시기의 역사는 이렇게 중국의 사서를 통해 간접적으로 유추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 또한 안타까운 일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이 책을 읽으면서 기록의 중요성을 새삼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사소한 기록이 고고학적 발굴로 인해 사실임이 드러날 때 그 사소한 기록은 그 당시를 밝혀주는 유일한 문서가 되는 것이다. 이런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단재 선생의 <조선 상고사>에서 한마디를 끌어다 적고 글을 마칠까 한다.

<안정복이 동사강목을 짓다가 개연히 내란의 잦음과 외적의 출몰이 東國의 古史를 흔적도 없게 하였음을 슬퍼하였으나, 나로서 보건데 조선사는 내란이나 외적의 전쟁에서보다, 곧 조선사를 서술하던 그 사람들의 손에 의해 더 없어졌다고 본다. 어찌하여 그러한가 하면 역사란 머리에 쓴 말과 시간적 계속과 공간적 발전으로 되어 오는 사회 활동 상태의 기록이므로 때時. 곳地. 사람人 세가지는 역사를 구성하는 세 가지 큰 원소가 되는 것인데 이 원소들이 올바르게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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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는 시간의 딸 동서 미스터리 북스 48
조세핀 테이 지음, 문용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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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중세시대에 관심이 많다보니 그와 관련된 서적이라면 종류를 가리지않고 읽어대는 습성이 있다. 이 책도 그 와중에서 아주 일찍 발견해낸 책이다. 사실 이 책은 1977년 발행되기 시작한 <동서추리문고>시리즈의 123번째 작품이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장미전쟁에 대해서 아주 많은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조세핀 테이 여사의 작품인 <시간의 딸>은 잉글랜드의 중세시대 역사를 어느 정도 알고 있어야 재미있게 읽을 수가 있다. 그리고 장미전쟁에 개입한 귀족가문의 인척관계를 안다면 더더욱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솔직히 이 작품은 숨겨진 역사를 찾아가는 그 과정속에서 역사적 상식과 사실의 간격이 얼마나 큰지를 우리에게 보여준다고 하겠다. 우리는 많은 역사적 허구를 진실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 허구를 한겹씩 벗겨낼 때 역사에 대한 혜안이 생기는 것이 아닐까. 이런 경우를 소설을 통해서 얻는 것은 상당히 드믄일이다. 오히려 소설을 통해서는 가정의 역사가 주입되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색다르다 할 수 있다.

<시간의 딸>은 잉글랜드의 중세시대의 마지막장을 담고 있는 추리소설이다. 잉글랜드의 중세는 백년전쟁의 영광이 스러져가면서 귀족들의 내란인 장미전쟁을 통해 막을 내리게 된다. 바로 그 황혼의 이야기를 역사적인 자료를 통해서 우리는 만날 수 있다.  우리에게 장미전쟁은 흰장미와 붉은장미로 상징되는 낭만적 이미지가 강하게 풍긴다. 하지만 그 내막을 보면 결코 그렇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잉글랜드를 누가 장악하느냐에 따라 한 집안(가문)의 미래가 달려있던 전쟁이었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많은 귀족들이 양측으로 갈려져 혈투를 벌였을까?  그것은 로얄 패밀리인 두 집안의 얼키고 설킨 혼인으로 인한 불가피한 것이었다. 장미전쟁의 시발점인 에드워드 3세는 적자 14명에 서자 4명을 포함하여 무려 18명의 자식을 두었다. 그들이 형성한 혼맥은 잉글랜드 지배계급의 권력구도와 같은 것이었다.  그러므로 어쩔수 없이 장미전쟁의 양상은 일반 농민들은 제외된 채 귀족들만의 전쟁이 되었던 것이다.

가문과 가문이 뒤엉킨 전쟁에서 자비란 어찌보면 사치스러운 것인지도 모른다.  랭카스터나 요크가의 왕들은 집권을 하면서 자비보다는 냉혹함을 보여주었는데 그것은 공고한 왕권을 확립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 다만 요크가의 마지막 왕이었던 리차드 3세만이 적에게도 관용을 베풀어 그동안의 관례를 깨버렸을 뿐이다. 하지만 그는 결코 그 관용의 덕을 보지 못하였다. 오히려 그 관용으로 인해 자신의 목숨은 물론 요크가문까지도 역사의 패배자가 되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런점에서 보면 정치에서 관용이나 화합이란 밖을 의식한 미사여구일뿐이란 사실임이 고래로부터 증명된 셈이다. 그래도 그것을 믿었던 한 사람인 리차드 3세는  결국 역사라는 거대한 어머니의 잃어버린 <시간의 딸>이 되었을 뿐이다.  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떠나는 모험에 프루스트가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귀족들 스스로의 분란으로 몰락을 자초한 다음 그 뒤를 이어 권력을 잡은 사람이 절대왕권시대를 개막하는 헨리 튜더였다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역사의 팁 하나 : 잉글랜드 귀족들의 성 앞에 붙는 Fitz-란 단어는 왕의 서자의 성앞에 붙이는 명칭이라고 한다. 이런 예는 영국 왕실의 역사에서 FitzRoy, FitzHenry, FitzJohn등으로 나와있다. 현대의 경우에는 John F. Kennedy의 성에서 F가 Fitzgerald로 되어 있다. 아일랜드계인 케네디가의 역사적 흔적을 알 수 있는 단어라 하겠다. 단 이 접두사를 붙일 때는 부친의 성이 아니라 이름에 붙이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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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받는 몸의 역사
자크 르 고프 외 엮음, 장석훈 옮김 / 지호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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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중세의 역사에서 신체는 항상 애물단지였다. 육체는 언제나 정신을 담는 그릇의 위치에 고정되어 있었다. 정신을 보호하고 훼손시키지 않는 방어벽으로서의 신체관은 중세 특유의 사고방식을 낳았다. 즉 육체의 고행을 통해 정신을 극단적으로 끌어올리는 방식은 중세뿐만이 아니라 현대에도 그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렇게 하는 근거는  육체란 썩어 없어질 존재이고 정신은 영원불멸이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도출되는 결론은 아주 자명한 것이다. 정신만이 온전하다면 육체는 훼손되어도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양의 치료법은 동양의 의학이 추구하는 몸과 기의 조화를 통한 정신적인 요소보다 육체의 한 부분을 통해 악의 기운을 끌어내는 절개의 방식을 취하게 된 것이다. 이는 서양의 의술이 해부학적으로 발전하게 되는 가장 큰 원인이 되었다.  육체에 대한 유럽의 관점은 데카르트의 합리론이 나오면서 어느 정도 수정이 되지만 육체에 대한 정신의 우위는 결코 해소되지 않았다. 이는 유럽의 정신사에서 그 이후에도 육체적 고행을 강조하는 <얀세니즘>이 교회의 단죄를 받은 것만을 봐도 그 뿌리가 아주 깊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육체가 어떻게하여 정신을 담는 그릇의 위치에서 정당한 대접을 받을 수 있었을까. 그 과정을 우리는 이 책을 읽으며 유추할 수 밖에는 없다. 현대의 의학에 있어서 육체를 훼손하는 치료법은 이제 거의 사라졌다고 볼 수있다. 오히려 서양의 의학도 동양의 조화를 통한 치유법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는 육체와 정신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사실의 진정한 이해가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인간이 인간에게 저지르는 육체 훼손의 역사를 알 수 있다. 이것은 단순히 야만적이라고 치부할 수만은 없다. 이런 방식이 당시에는 최고의 기술이었다는 사실 또한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하지만 문제는 그들의 사고방식에 있음을 알게 된다면 이 책을 어느 정도 편안하게 읽어 내려갈 수 있지 않을까.  또한 육체의 문제는 정치적인 문제와도 연관되어 있다는 점이다. 서구사회는 일찍부터 격리라는 방식을 통해 자신들과 육체적으로 다른 인간들을 일정지역에 격리 시켰는데 이는 푸코가 감시와 처벌이나 광기의 역사에서 택했던 주제와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

이 책을 읽어가면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시대를 통해 질병에 대한 대처방식이 개선될 때마다 인간의 육체에 대한 이해도 역시 진보하고 있다는 점이다. 결국 이런 진보가 어우러져 하나의 완벽한 인간관을 형성할 때 우리 몸의 고통은 끝나는 것이고  긍국적인 해방에 이르는 것은 아닐까?

*사족: 이제 육체가 정신의 그릇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물론 일부 종교적 광신론자들에게 있어 이 문제는 지금도 매우 심각한 것이고 유효할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현대의 모습 역시 과도한 성형에 의해 육신은 여전히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닌지. 즉 의식이 개화되었지만 인간의 욕망이라는 변수가 개입하게 되면 육체는 계속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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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의 심리 - 인간의 마음을 탐구하는 총서 11 인간의 마음을 탐구하는 총서 11
콜린 윌슨 지음 / 선영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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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콜린 윌슨을 처음 만난 것은 <아웃사이더>를 통해서였다. 오래전 <가로>가 아니라 <세로>로 인쇄된 윌슨의 아웃사이더는 내게 커다란 충격이었다. 얼마나 충격이 컸는지는 한동안 그 흉내를 내며 노트에 글을 끄적였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콜린 윌슨은 아웃사이더 이후 충격적인 작품은 나오고 있지 않다. 아마도 초기에 너무 자신의 재능을 한 작품에 다 소진한 때문은 아닌지...

살인의 심리는 같은 출판사에서 1991년 6월 10일 <살인의 철학>이란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이 책은 살인에 관한 사례집으로 콜린 윌슨이 큰 관심을 보이고 있는 주제 가운데 하나이다. 여기서 윌슨은 살인을 하나의 행위로 보지않고 그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의식을 탐구하려 하고 있다. 저자는 서문에서 서구의 살인유형의 변천사라는 말을 하고 있는데 이 말은 정확한 지적이라 할 수 있다.

살인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구약성서에 기록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구약성서는 살인에 대한 최초의 사례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기록된 살인은 <적을 완벽하게 몰살>하는 방식이 자주 등장하고 있다. 이는 신에 대한 제사의 성격이 전쟁에 깊게 자리잡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즉 적과 적의 재산을 모조리 죽이고 태우는 전쟁의 양상은 현재의 시각으로 볼 때 잔혹한 학살로 치부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왕 사울이 전리품을 숨기므로해서 다윗에게 왕 자리를 빼앗기게 되는 이야기를 볼 때 그 전쟁 양상이 인간이 아닌 신의 영광을 위한 성전의 효시였음을 알 수 있다. 로마 역시 카르타고를 점령하였을 때 남자들은 죽이고 여자와 아이들은 노예로 팔아 넘겼다. 그리고 카르타고를 완전히 파괴하고 그곳에 소금을 뿌리고 땅을 갈아엎어 두번 다시 이 경쟁자의 제국이 부활되는 것을 막았다. 이런것으로 볼 때 초기의 살인은 저주 이전에 어떤 주술적인 의미도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신념의 살인이 점차 개인의 이익을 위한 살인으로 변질되어 가는 과정을 윌슨은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 시발점이 된 것이 바로 산업혁명이었던 것이다. 봉건경제체제가  산업화에 따라 붕괴됨으로서 토지를 잃은 농민들이 도시로 진입하여 도시의 슬럼화를 가속시키면서  가난과 실직이 만연하게 된 것이다.  산업화로 비대해진 도시는 범죄의 종합선물셋트로 변모하기 시작하였다. 이 결과 죄의 집행이 더욱 가혹해지는 처벌의 악순환이 시작되고 범죄는  더욱 잔인한 방식으로 발전해가는 방아쇠가 되었다. 이제 범죄자들은 돈만 빼앗은 것이 아니라 증거의 인멸을 위해 살인도 서슴치 않았던 것이다. 바로 여기까지가 현대와 구별이 되는 구식 살인의 시대인 것이다.

윌슨은 현대 범죄의 효시를 영국에서는 <잭 더 리퍼: 면도칼 잭>의 사건으로부터 시작되고, 미국의 경우에는 1894년 보험살인을 시도한 해리 하워드 홈즈의 살인을 그 효시로 보고 있다.  이 두 경우 살인은 자신과 이웃한 평범한 사람도 범죄자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였다. 이제 범죄자는 어떤 외적인 표시-문신.상처-로 구분되는 시대가 지나갔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제 살인범은 살인 그 자체를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방식은 이전에는 결코 상상할 수 없는 방식이었다. 재미로 사람을 죽인다는 그 자체가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놀라움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잘 알고 있었다. 자신들 내부에도 이런 성향이 조금은 있다는 사실을. 다만 엄격한 도덕적 잣대가 이를 억제할 뿐이란 사실을. 하지만 이 엄격한 도덕적 잣대가 어떤 계기로 사라지게 되면 자신도 언제든지 살인을 즐기는 괴물로 변모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제 이 살인의 방식은 근대의 산물인 철도와 현대의 산물인 비행기를 통해 전세계로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이제 현대는 우리 모두 피해자이면서 가해자가 되는 범죄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한다면 너무 희망이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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