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세계사 범우사상신서 53
마르크 페로 지음, 박광순 옮김 / 범우사 / 199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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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역사책은 아주 구성이 특이하다. 책의 첫머리를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시작하니 말이다. 그리고 남아프리카의 역사의 작은 제목은 '흰' 역사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시작이다. 어떻게 줄루족과 호사족의 '검은'역사가 백인의 역사로 착색되어가는가를 추적하면서 역사의 왜곡-지배자의 입장에서는 합리화-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런 역사는 백인들이 진출한 모든 곳에서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다. 가장 철저하게 이루어진 곳은 카리브해지역이다. 여기서는 백인 정복자들이 원주민을 완전히 말살시킨 다음 설탕산업을 위해 아프리카에서 흑인노예를 대량으로 이식하여 전혀 다른 세계를 만들기도 하였다. 이런 과정은 유럽의 식민지 경영국가-영국.프랑스.스페인-와 미국과 러시아 같은 곳에서 반복되었다는 점이다. 미국은 서부로의 전진을 위해 인디안을 러시아는 남쪽으로의 진출을 위해 코카서스 지역의 소수민족을 억압하고 탄압하였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 탄압의 본질은 완벽하게 감추어져 있다. 인디언과 아르메니아인의 학살은 미국사와 러시아사에서는 찾아 볼 수 없다. 마찬가지로 북아프리카를 경영했던 프랑스와 이탈리아도 이 지역에서 벌인 잔혹한 식민지 경영을 은폐하고있을 뿐이다. 이런 사정은 이 지역에 대한 서구제국의 지속적인 영향력에 의해 정당화되고 있다. 이런 사정은 서구유럽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오스만투르크와 페르시아제국의 영광을 찬양하고 있는 터어키와 이란 역시 쿠르드족을 탄압하고 있다. 즉 세력이 강한 집단은 세력이 약한 집단을 영속시켜 자국의 역사체계 속에 편입시키려는 시도를 끊임없이 하고 있다. 이에 반해 세력이 약한 집단들은 자국 역사의 고유성을 강조하면서 편입을 거부한다. 즉 약소국들은 역사의 다양성을 주장하고 있는 반면 강대국들은 역사의 단일성-자국중심의 단일성을 주장한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미국의 위치, 아프리카에서 영국과 프랑스, 동남아시아에서 일본과 중국의 영향력은 자민족 중심의 역사관으로 발전하고 있다. 그러므로서 다양한 세계사의 관점은 단일한 민족중심적인 편협한 역사관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세계사를 배울 때 가장 먼저 4대문명권을 배운다.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문명, 인더스문명과 황하문명으로 대별되는 세계사의 시작은 여기에서 수많은 문명이 퍼져나가게되고 수많은 민족이 형성된다. 이런 시작의 다양성을 배우다가 고대로 들어서면 그리스와 로마의 서양사와 중국의 동양사로 변질된다. 그리고 그러면서 문명은 자민족 중심의 역사에 꾀맞추는 작업이 진행된다. 토인비의 역사의 연구는 이런 서구사상의 가장 집대성된 저작이라 할 수 있다. 세계를 몇몇 문명권에 꾀맞춤으로서 소수민족 혹은 약소국의 역사는 강대국 혹는 다수민족의 역사 속으로 편입되고 말기 때문이다. 이런 굴절된 시각을 교정하기 위해 이 책은 저술되었다. 하지만 유엔의 5대 상임이사국이 거부권을 포기하지 않고 유지하면서 세계 평화를 논하는 한 진정한 세계사는 결코 존재하지 않을 것이란 절망감이 드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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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서진 사월
이스마일 카다레 지음, 유정희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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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잉글랜드를 방문한 러시아의 도스토예프스키는 그 나라의 슬프고 우울한 분위기에 무력감과 절망감을 느껴야만 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느낀 것은 전통이란 이름에 의해 억눌린 그 사회의 한 단면이었다. 하지만 도스토예프스키가 더 절망해야 했던 것은 그 사실을 그들 본인은 아무도 불편해하지 않고 이해하려하지도 않고 다만 자신들의 전통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이었다.

이스마일 카다레의 <부서진 사월>을 읽으면서 이 생각이 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조르그 베리샤나 알리 비낙, 마르크 우카시에르의 세계는 베시안 보릅시와 디안 보릅시의 세계와 다른 점은 없다. 있다면 그 세계를 이해하는 마음과 눈일 뿐이다. 한쪽의 관습법세계와 다른 한쪽의 실정법 세계는 각자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지켜지는 법칙이다.  그러나 베시안의 입장에서 본다면 관습법의 세계는 자신이 이론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하더라도 원칙적으로 불법의 세계이며 야만의 세계일 뿐이다. 하지만 마르크 우카시에르의 입장에서 본다면 오히려 베시안의 세계가 불완전한 세계인 것이다. 그에게 도시의 인간들은 명예도 피의 값도 계산할 줄 모르는 존재들일 뿐이다. 그는 이 세계가 영원히 지속되어야만 한다고 믿는다. 실제로 관습법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마르크 우카시에르의 사고방식은 정당성을 부여받는다. 그 정당성은 알리 비낙과 그 수행원들에서 잘 드러난다. 관습법을 해석해주는 알리 비낙은 측량기사와 의사를 대동하고 다닌다. 그것은 실정법이 그렇기 때문이다. 관습법의 세계에서는 오직 알리 비낙의 말 만이 법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실정법은 측량기사와 의사를 대동하게 함으로서 실정법의 권위를 세우려 한다. 하지만 토지의 경계선 문제라든가 피의 복수의 자리에 가서도 측량기사와 의사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 그들에게 기하학적인 측량과 해부학적인 의학은 부차적인 것일 뿐이다. 자신들의 증인들 앞에서 명예의 맹서를 하므로서 이루어지는 것을 왜 부질없는 측량과 의학적 소견으로 해결해야만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 세계는 이방인들의 눈으로 볼 때 불합리한 세계이다. 복수와 휴전, 그리고 한 달간의 유예기간이 끝나면 다시 시작되는 피의 보복을 재판과 그에 따른 형벌로 이해하는 우리의 사고방식은 결코 섞일 수 없다.

몬테네그로와 코소보의 산악지역으로 이어지는 알바니아 북부의 황량함을 배경으로 전개되는 카눈의 세계는 무지함이란 단어로 평가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세계의 불가사의함에 점차 함몰되어가는 디안 보릅시의 모습을 보면서 불안해 하는 베시안 보릅시의 모습은 바로 우리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전통을 현대적 의미로 재생하려 하는 베시안 보릅시의 이론은 죽음을 담고 다니는 북부지역의 인간 군상들에 의해 하나씩 해체되어 간다. 나는 피의 복수를 한 사람입니다라는 표시인 검은 상장을 팔에 달고 다니는 인간들에게 전통의 해체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전통은 해체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베시안과 같은 인간들이 해체하는 것은 전통이 아니라 자신들이 이해하고 있는 허구의 전통이다. 그 허구가 깨져버리면 남는 것은 그곳을 떠나는 길밖에 없는 것이다. 자신들이 그렇게 이해하고 생각한다는 인간들을 버려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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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ska09 2009-08-05 2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이해되지 않는 소설을 덮으며, 갸우뚱 거렸던 어려움들을 리뷰를 통해 도움 얻습니다.
 
세계 사형 백과
카를 브루노 레더 / 하서출판사 / 199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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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이 주목을 받느냐 받지 못하느냐는 운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것은 福不福이기 때문이다. 1991년 카를 부르노 레더의 Todesstrafe-Ursprung, Geschiche, Opfer란 저서가 세계 사형백과라는 책으로 출간되었다. 91년이란 시기는 88 올림픽이 끝나고 세상이 변한 것 같으면서도 아직은 변하지 않은 그런 시절이었다. 그때 사형백과사전이란 책이 나온 것이다. 이것은 어쩌면 그 당시  체제를 속이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는지도 모른다. 독일어를 그대로 번역하면 <사형-기원.역사.희생자>라는 아주 자극적인 제목의 책을 순식간에 잡학사전으로 변형시켜 출판해야만 했던 그 시절.  오히려 이런 제목이 밋밋했을지도 모른다.  그 시절은 죽음과 인생이 아주 가까이 있었던 시절이기에 사람들은 백과사전에는 만족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것을 읽었을 때의 느낌은 <아... 출판은 이래서 어렵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 책은 인간의 잔혹함에 대한 하나의 고발장이었던 것이다.  그 시절 우리는 우리에게 혹은 이웃에게 서로 서로 많은 빚을 지고 살아가던 시절이었다. 지금은 그 빚을 탕감하라고 아우성 치지만... 서로에게 빚이 있는 시절 사형백과사전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하였다. 古代(高大가 아니다)  인간에게 가장 두려운 형벌은 추방이었다. 씨족 혹은 부족으로 살아가던 시절 그 혈연의 태줄이 끊긴 순간 개인은 죽은 목숨이었다. 우리는 성서에서 카인이 에덴의 동쪽으로 추방되었다는 사실을 너무나 쉽게 이해한다. 하지만 그것은 카인에게 죽으라는 소리와 같은 것이었다. 추방이 피의 복수로 그리고 다양한 인간의 살해방법으로 발전하는 과정은 가히 인류의 정신사적 발전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우리는 인간이 머리의 두뇌 용량이 바카스 병에서 코카콜라병의 용량으로 진화하면서 변한 것은 자비심이 잔인성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절망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절망하지는 말자. 스페인 내란시 공화파가 인민전선파에게 혹은 그 반대로 사람을 죽일 때 머리에 상자를 씌워 절벽에서 떠밀었던 사실을 기억하자.  왜 그렇게했느냐고? 의식이 끝까지 남아 자신이 죽는 것을 느끼게하려던 인간의 잔인성 때문이었다. 지금 우리가 살아있는 시절이 혹은 장소가 문명화된 장소라고 자부심을 갖지는 말자. 오히려 자비심이 사라진 짐승의 우리 속에서 이빨을 드러내며 서로에 대한 증오심을 드러내는 공간은 아닌지...

사람이 인간을 죽이는 역사를 읽어내려간다는 것은 어쩌면 모순일 수도 있다. 인간은 육체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 정신으로 인해 아주 신성한 존재로까지 승화될 수 있는 존재이다. 그러기에 인간은 해탈하여 부처가 될 수 있고, 자신을 닦아 治國을 할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또 인간은 신의 숨결-루아-를 받아 흙에서 창조되었지만 이 지상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창조한 존재를 찬양할 줄 아는 존재인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죽일 때 그것은 이 모든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이 부정은 세계의 질서를 부정하는 시초가 되는 것이다. 이 책은 사형제도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하여 그 부당함을 지적하고 있는 책이다. 나는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이런 생각을 하였다. 이 책의 논조를 지지하지만 내게 내가 법에 호소하여 어떤 존재를 사형시키게 해달라고 탄원하게 된다면 어떤 생각을 할까. 만약 그것은 실현되지 않는 미래의 일이기 때문에 제외해야한다라고 당신이 말한다면 당신은 사형을 지지하는 사람일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눈 앞에 닥친 현실을 유보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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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문명 - 석기시대의 비밀
리처드 러글리 지음 / 마루(금호문화)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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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신화에 보면 우리 인간의 역사를 황금의 시대. 은의 시대. 철의 시대로 나누고 있다. 황금의 시대는 정말로 인간이 행복했던 시대이다. 철의 시대란 전쟁과 살육으로 인간이 고통을 받고 있는 시대이다. 어린 시절 이 이야기를 읽고 한가지 의문이 있었다. 왜 옛날이 좋은 시대이고 지금이 나쁜 시대인가. 학교에서는 지금이 옛날보다 더 살기 좋은 시대라고 우리에게 가르치지 않는가? 이런 의문은 신화나 전설에는 어김 없이 등장하였다. 옛 시절은 전쟁도 없고 인간이 행복했던 시절이었고 현재는 고통의 시대라는 것이다.  성경에서도 에덴 동산이 사라지고 가시덩쿨이 자라는 땅을 일구는 인간의 모습을 이야기할 때 앞으로의 미래는 더 살기 편한 세상으로 변한다는 과학자들의 예언과는 반대로 더 나쁜 쪽으로 흘러가는 것은 아닌지...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황금시절과 철의 시절이란 단어가 단순히 상징적인 단어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이 단어 속에는 우리가 파악하고 있는 역사의 개념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들어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역사속에서 선사시대는 대략 95%를 차지하고 있다. 글로 기록된 역사는 겨우 5%도 안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5%의 기록을 신봉하며 나머지 95%의 역사를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 이 책의 저자인 리차드 러글리는 <선사시대가 역사시대의 序文이 아니라 오히려 역사시대가 선사시대의 後記>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말은 황금시대로부터 철의 시대로 전락한 우리의 처지에서 보면 100% 합당한 지적이라 할 수 있다. 우리에게 역사적 진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걸어다니던 사람들이 마차를 타고 다시 기차로 갈아탄 다음 최종적으로 비행기를 타는 것이 진보일까. 혹은 한명 혹은 10명 미만의 사람이 죽어가던 전쟁이 수천명 혹은 수백만명이 죽어가게끔 발전한 전쟁의 기술이 진보일까. 아니면 무통분만의 기술, 혹은 드릴로 두개골을 정교하게 뚫고 뇌수술을 하는 것이 진보일까. 아니면 DNA를 조작해서 새로운 인간을 만들어내는 것이 진보일까.

역사의 진보가 물질적인 발전의 형태로 단정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물질적인 진보는 퇴화의 과정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인간의 자유에 관한 역사적 사실을 살펴보아도 우리는 약간의 혼란이 생겨날 수 있다. 현대의 우리는 중세시대의 농노보다는 훨씬 자유롭다. 하지만 우리의 이런 자유도 석기시대를 살아가던 우리 조상들의 자유에 비하면 초라하게 보일것이다. 이 책은 우리가 시작점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왔는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여기까지 올 수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책이다. 저자는 우리 인류가 여기까지 올 수 있던 힘은 석기시대의 튼튼한 기초가 있었기에 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역사의 진보는 결코 양적인 팽창보다는 질적인 확대에 의해 진보를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그 질적 팽창은 현재의 독점물이 아니라는 점을 이 책은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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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 MBC 느낌표 선정도서, 보급판
일연 지음, 김원중 옮김 / 을유문화사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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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를 읽을 때 마다 혹은 어떤 사실을 찾으려고 이 책을 뒤적일 때 마다 오래전 국사시간에 배웠던 사자성구 비슷한 말이 생각난다. <순도조려 난타벽제 아도기라順道肇麗 難陀闢濟 阿道基羅>. 이 잃어버리지도 않는 구절을 생각할 때 마다 일연스님의 글은 참 유려하기도 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한다. 순도가 고구려의 미몽을 깨뜨리고 마란난타가 백제의 심성을 열고 아도가 신라의 기틀을 잡았다는 이 말에 삼국의 불교전래의 사정과 그 후의 영향도 알 수 있지 않은가.  솔직히 학생시절 삼국유사는 단지 단군신화가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마지못해 읽는 우리의 역사서였다. 그래서 단군신화의 모습을 확인하기 위해 앞부분을 읽고는 책장 구석에 처박아 두었을 뿐이다. 더 이상 단군신화 뒤로 나아갈 수 없었던 것은 어쩌면 그 신화 때문이 아니었을까. 나이가 들어 의식적으로 뒤에서부터 읽어본 삼국유사는 정말로 흥미있고 재미있는 우리의 숨은 역사였다. 각 장의 제목도 간결하면서도 아주 의미있게 붙임으로서 그 장이 이야기하고자하는 특색을 고스란히 드러내주고 있다. 물론 스님의 관점에서 저술하였기 때문에 불교적인 부분이 많이 차지하고 있지만 이는 당시 우리 고대 사회가 불교를 숭상하는 사회였기에 아무런 문제는 없다고 본다. 그러기에 이 책에서는 우리의 고대사의 정신적인 부분이 많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우리의 역사를 단군왕검에게 까지 끌어 올림으로서 우리의 역사도 중국의 역사와 대등함을 은근히 과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비록 당시 고려가 몽골이 세운 원의 간섭을 받고 있었지만 우리 역사의 유구함을 기록하면서 절대로 오랑캐의 무력에 굴복하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고대사는 문헌의 망실과 일제의 왜곡으로 처참하게 일그러져 있어 정확한 실체를 알기가 무척 어렵다. 이런 가슴아픈 사정은 그나마 삼국유사가 있음으로해서 어느 정도 위로를 받을 수 있다. 엉킨 실타래를 풀 때는 항상 처음을 찾아야 한다. 삼국유사는 이런 처음을 찾아가는 우리의 실타래인지도 모른다. 테세우스가 아드리아네의 실타래를 잡고 미궁을 헤쳐나왔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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