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이란 무엇인가? 그후 50년
마이클 머피.루크 오닐 엮음, 이상헌.이한음 옮김 / 지호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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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들 사이에서는 생명의 신비와 연관된 연구를 하면 언젠가는 노벨 생리학 및 의학상 또는 화학상을 탈 수 있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생명에 관한 연구의 분야는 아직도 미지의 영역에 속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석존께서는 제자들에게 "삶(생명)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많은 답이 나왔지만 한마디로 정의를 내려 주었다. "呼吸之間"이라고 말씀하셨다. 부처님의 이 말은 현실에 대한 충실성을 강조한 생명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과학자들은 같은 질문에 "세포의 화학적 반응"이라고 답할지도 모른다. 과학자들이 이렇게 답하는데는 그럴만한 원인이 있는 것이다. 과학자들은 1892년 담배모자이크 바이러스가 발견된 이래 그것이 핵산과 단백질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게되었다. 그리고 세균에 기생하는 바이러스인 박테리아파아지를 대상으로 실험하여 핵산이 유전을 지배하는 물질임을 밝혀내기도 하였다. 이렇게 하여 과학자들은 바이러스, 핵산, 유전자라는 고리가 생명을 구성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것이라는 사실을 밝혀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생명에 대한 탐구는 여기서 멈추지를 않았다.  이차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인 1944년 더블린 고등연구소 연구원인 에르윈 슈뢰딩거가 더블린의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강연을 하였고 그 내용은 책자로 출판되었다. 여기서 슈뢰딩거는 유전자야 말로 생물 세포의 핵심적인 성분이며 유전자를 이해하면 생명현상을 이해할 수 있다는 주장을 펼쳤다. 슈뢰딩거의 이 주장은 물리학에서 아인슈타인의 학설에 버금가는 충격을 생물학과 화학, 그리고 의학에 전해주었다. 그리고 과학자들은 유전자라는 존재에 도전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50년이 지난 1993년 과학자들은 당시 그 현장에 모여 슈뢰딩거의 이론을 토대로 현재 생물학의 문제에 대하여 자신들의 견해를 발표하였다. 이 책은 그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책에는 11편의 발표문이 담겨져있는데 각각의 발표문은 해당분야의 최정상급들 답게 슈뢰딩거가 제시한 것에 대한 압축된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바로 이 점이 이 책을 난해하게하는 원인이다. 수많은 생물학적 용어와 전문적인 해설은 이 분야에 지식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한장 한장이 고통으로 다가온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이 발표자 가운데 유일하게 아는 인물인 제레드 다이아몬드 교수의 발표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제레드 다이아몬드 교수의  언어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서 전개되는 생물학적 전제를 하나의 길잡이로 삼아 책을 읽어나갈 수 밖에 없었다. 다이아몬드 교수는 슈뢰딩거의 학설이 지니는 중요성을 물리학적인 생물학을 분자학적인 생물학으로 진화시켰다는 점을 들고 있다. 그러면서 언어와 인간의 두뇌와의 관계를 통해 외형적인 것이 아니라 유전자의 문제가 인간의 발전에 결정적으로 기여했음을 밝혀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언어적인 측면의 내용을 따라 읽어가다보면 존 메이나드 스미스와 외르츠 자스마리가 발표한 언어와 생명을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스튜어트 카우프만을 읽고 하는 식으로 한 주제와 관련된 주제를 찾아서 읽어가는 방식을 취하였다. 그래도 많은 전문용어와 도표들은 이해를 진척시키는데 장애물이 되었다. 그럼에도 하나 건질 수 있었던 것은 유전학 분야에서도 닭과 달걀의 논쟁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즉 생명의 기원이 단백질 합성에 필수적인 유전자를 담고 있는 DNA가 먼저인가 아니면 DNA의 단백질 합성에 없어서는 안되는 효소 단백질이 먼저인가하는 문제였다. 그런데 80년대 단백질합성에서 DNA의 보조역할을 한다고 알려진 RNA가 다른 효소의 도움없이 자기 복제를 할 수 있음이 밝혀지면서 이 논쟁은 다른 곳으로 확대되었다. 즉 스스로 촉매작용을 하면서 정보를 저장하고 있는 RNA를 생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유전자의 나선구조를 보면 질서에 충실한듯이 보인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의 질서체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이런 예가 합당할지는 모르지만 마작을 시작할 때 모든 패를 섞고 그 패를 게임을 하는 사람들이 나눠갖은 다음 패를 조합하여 승리를 결정하게 되는 것이다. 즉 섞고, 정리하는 혼돈과 복잡의 과정을 거쳐 정리로 나아가는 것과 같이 생명을 구성하는 유전자의 세계 역시 혼돈과 정리의 과정을 거쳐 하나의 유전적 생명체로서의 질서를 확립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이 책은 쉽게 읽어갈 수 있는 책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이런 책을 어렵사리 정복하고 나면 정말로 무엇인가를 한 것과 같은 포만감을 느낄 수는 있다.  다음에 읽어야할 것은 슈뢰딩거의 "생명은 무엇인가?"인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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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탈의 역사 - 새론서원 617
J.H.패리 지음 / 신서원 / 199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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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료, 담배와 설탕과 노예, 은, 대구와 고래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서구유럽의 혈관 속에 흐르는 돈의 유전자이다. 서구유럽은 이것을 얻기 위해 자신의 영역을 지속적으로 확장하였다. 지중헤에서 대서양으로 그리고 인도양과 태평양으로 자신들이 원하는 부를 위하여 마이다스의 손을 뻗쳐나갔다. 이들 서구 유럽의 제국주의자들이 만지는것은 모든 것이 황금으로 변하였다. 향료를 위해 이슬람권과 투쟁을 하였고, 설탕과 담배를 위해 아프리카의 흑인들을 납치하였다. 그리고 남미의 은을 위해서는 그 땅에 뿌리박고 있던 문명을 말살하는 것도 서슴치않았다. 대구와 고래를 위해 거대한 바다에 흩어져있는 섬들을 점령하고 얼음뿐인 극지까지 자신들의 흔적을 남겼다. 이것은 유럽의 입장에서 본 확장의 역사이다. 하지만 그 시각을 뒤집어 보면 유럽의 확장은 아프리카, 아메리카, 아시아의 고통의 역사가 되는 것이다. 레판토 해전 이후 유럽은 오랜 기간 지속되었던 이슬람 콤플렉스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제 이슬람세계는 서유럽 문명을 위협하는 요소가 아니었다. 이제 이슬람세계는 오히려 유럽의 팽창을 두려운 눈으로 바라보아야만 했다. 유럽의 팽창을 제일 먼저 피부로 경험해야만 했던 곳은 아프리카 대륙이었다. 아프리카는 유럽이 오기 전까지는 아랍세계가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 하지만 아랍세계가 쇠퇴하고 유럽이 팽창하면서 아프리카는 아랍과 유럽 양쪽으로부터 착취당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아프리카의 동쪽은 아랍인이 서쪽은 유럽인이 수탈하게 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대서양 항로의 발견으로 아메리카 대륙이 유럽의 식민지로 화하면서 서인도제도에 이식된 담배와 설탕산업을 위해 아프리카는 막대한 인적자원을 수탈당하였다. 즉 아프리카는 대서양 너머의 아메리카를 유럽인이 경영하는데 있어서 하나의 창고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유럽의 자본, 아프리카의 노동력, 아메리카의 토지가 결합된 전형적인 식민지 경제체제가 탄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유럽의 제국주의는 먹어도 먹어도 만족할 수 없는 에뤼식톤Erysichthon과 같은 존재였다. 이들은 아메리카를 완전히 해부하고 분해하였다. 북에서는 들소를 남에서는 은을 위해 초원을 피로 물들이고, 대지를 신음하게 만들었다. 이들의 착취에 동원된 원주민들의 사망율이 너무 급속히 증가하자 부족한 노동력을 만회하기 위해 유럽의 제국주의자들은 아프리카의 원주민을 대량으로 이식하기까지 하였다. 그들이 식민지확장의 앞에 세워 그토록 강조하던 신의 사랑과 자비는 어디까지나 자신들과 피부색이 같은 인간에게만 적용되는 편리한 종교였다. 유럽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이들은 얼음으로 뒤덮인 북극항로를 개발하기 위해 뛰어든다. 이유는 대구와 고래 때문이었다. 기독교세계는 종교적인 이유로 인해 생선의 소비가 많은 대륙이었다. 이들은 발트해의 청어로 생선을 공급했으나 청어가 감소하면서 어장을 북쪽으로 확장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고래의 지방에서 나오는 기름은 유럽의 밤을 밝히는 원천이었다.  유럽인들에게 버릴 것은 하나도 없었다. 이들은 오로지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하기 위해 거침없이 이웃의 땅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이제 유럽인들의 다음 목표는 아프리카 너머에 있는 인도와 극동이었다. 아랍세계의 방해로 쉽사리 접근할 수 없었던 세계는 바다를 통하여 열리게 되었다. 이제 유럽인들에게 초원의 길로 상징되는 대륙은 의미가 없었다. 이들에게는 오직 바다만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들에게 바다는 전 세계를 연결해주는 보이지 않는 길이었다. 이를 위해 항해도구가 개량되고 개발되었다. 그리고 배도 더욱 커지고 지도 작성에 유난히 탐닉하게 되었다.  르네상스 시기에 유럽은 배, 해도, 대포라는 탐험가의 도구를 완성하고 세계로 진출할 준비를 완료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유럽은 왜 자신의 땅에 만족하지 못하고 침략을 선택한 것일까. 여기에는 기후론, 인구론, 기술적 요인론, 종교적 동인론, 경제적 동인론 등 여러가지 설이 분분하지만 유럽의 타대륙의로의 침략에 대한 일부분만을 설명해 줄 수 밖에 없다는 점이다. 그러나 피해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유럽의 팽창에 대한 여러가지 설은 논쟁의 가치가 없는 것이다. 훔치는 자에게도 정당한 이유가 있다면 이 세상에서 범죄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유럽에서는 도둑질에 대한 순화된 경제적 동인론과 이에 대한 보상심리 비슷한 종교적 동인론을 팽창의 원인으로 삼고 있다. 물론 이것은 유럽의 생각일 뿐 희생당한 대륙의 입장은 아니다. 이 책 역시 이런 유럽의 입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유럽의 침략과 약탈은 모든 입장을 배제하고 냉철하게 바라본다면 한 깡패가 호젓한 도로 양변에 무성하게 피어있는 아름다운 꽃들을 무자비하게 꺽으며 지나간 것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행위는 어떤 이유로든지 수긍할 수 없고 정당화될 수 없는 폭거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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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봉건제 - 새론서원 22
피터 듀스 / 신서원 / 199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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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봉건제는 단순히 무가정권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하면 많은 부분을 지나칠 수 있다. 일본의 봉건제도는 근대국가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이는 봉건제도의 특성을 이해하게되면 근대 일본의 형성과 국가의 성격을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일본은 7세기 중엽 이후 독자적인 국가로 형성되면서 왕권을 강화하고 중앙집권적인 귀족정권을 형성하였다. 왕족과 귀족들은 지방의 장원을 기반으로 하여 문신이 주도권을 잡는 군주정치를 펼쳐나갈 수 있었다. 귀족계급들은 부의 기반은 지방에 두고 자신들은 수도에 거주하면서 대리인을 통해 모든 것을 해결해 나가고 있었다. 이들 대리인들은 지방에서 귀족들의 대리인 자격으로 권위를 구축해나가는 동시에 토지의 겸병을 통해 경제적 부도 확장해 나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10세기 초부터 지방의 실력자들이 중앙정부에 반기를 드는 일이 빈번해지면서 문치주의적 천황정부는 이들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지방의 실력자들에게 도움을 청할 수 밖에 없었다. 바로 이런 상황을 통해서 지방의 실력자들은 정치적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이들 지방 실력자들은 무력과 경제력 그리고 새로 얻게된 정치력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이해득실에 따라 이합집산을 거듭하면서 점점 더 강력한 무가세력을 형성하게 되었다. 결국 이들의 강력한 세력은 천황이 주도하는 중앙정권의 권위에 도전하게 되고 결국은 천황과의 권력투쟁에서 승리하게되면서 바쿠후幕府체제를 성립하게 된다. 가마쿠라鎌倉바쿠후, 무로마찌室町바쿠후체제는 실권자인 바쿠후의 우두머리를 정점으로하는 지방분권적인 통치체제였다. 이는 결과적으로 바쿠후체제의 중앙집권적인 정치질서를 저해하는 요소로 작용하게 되었다. 바쿠후체제는 유력한 인물의 지지도에 무가집단이 집결하는 성격이기 때문에 무사집단의 단결과 협조가 전제되지 않는한 절대적인 안정을 유지하기 어려운 점이 있었다. 그리고 바쿠후의 이런 취약성은 지방에 산재한 장원이 독자적으로 독립하는 한 원인을 제공하였다. 즉 바쿠후 체제에 협조하는 대가로 지방의 유력자들이 장원을 소유하면서 독립적인 세력으로 성장하였던 것이다. 지방에 세력을 형성한 무가집단은 이제 더이상 장원의 지대를 중앙에 납부하지 않고 자신의 소유로 하였다. 이렇게해서 탄생한 지방의 다이묘大名들은  바쿠후체제를 유지하는 세력이면서 지방분권적인 정치질서의 핵심으로 성장하게 된다. 이때 형성된 일본의 지방분권적인 분위기는 지금도 유효하게 작동하고 있어서 혹자는 일본이 종국에는 40여개의 국가로 분할될 것이라고 장담하기도 한다. 이렇게 14세기부터 가속화되기 시작한 지방분권적 통치형태는 16세기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혼란이 수습되면서 과도기적 중앙집권체제로 서서히 변모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전쟁으로 인해 이 과정은 약간의 차질을 빚게되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중앙집권화된 봉건국가로 재정비되게 된다. 이것은 일본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도쿠가와에 의해 통일된 일본은 역사상 처음으로 단일한 지배자에 의해 단일한 영토가 통치되었기 때문이다. 이 결과 일본은 비로소 근대국가로 나아갈 수 있는 기본적 토대를 닦았다고 할 수 있다.

서구의 역사학자들이 일본의 봉건제를 주목한 것은 명치유신 이후 급속하게 산업화한 일본의 발전동력의 원인을 탐구하는 가운데서 였다. 서양의 학자들은 일본의 급속한 발전이 서양식 모델인 장원제를 기반으로 하였기 때문이라는 성급한 결론을 내렸는데 이는 서양과 일본의 봉건제 사이에 나타난 차이점을 무시하고 도출한 결과이기에 설득력은 없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메이지 유신을 지도한 세력들은 지방의 봉건세력이 아니라 하급무사출신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이 충성한 대상은 자신의 영지 안에 있던 다이묘가 아니라 국가의 상징인 천황이었다. 일본이 급속한 산업화를 통해 근대국가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천황제도 사무라이 정신도 아닌 도쿠가와에 의해 시행된 중앙집권적인 봉건제도의 공이었다. 그럼에도 피터 듀스는 일본의 근대화가 성공한 이유가 봉건제 밑바닥에 잠재해있는 사무라이 정신이라고 단정하고 있는데 이는 니토베 이나조가 <무사도란 무엇인가>에서 주장한 "호전적인 일본의 정신"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란 점에서 흥미롭다. 왜냐하면 서양인들이 이만큼 철저하게 동양인을 분석한 예는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일본이 1905년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서양 제국주의자들이 동양에서 발견한 자신들의 대리인에 대한 호의 때문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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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릉
한국문원편집실 / 한국문원 / 199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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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등학생시절 소풍을 간다고 하면 의래 동구릉 혹은 서오릉과 같은 곳이 선택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리고 야트막한 야산과 같은 곳에 붉은 색을 칠한 문과 박석을 깔아 놓은 돌길이 전부인 곳에서 우리들은 사이다에 김밥을 먹고 모여서 반대항 장기자랑을 한 다음 반 별로 단체사진을 한 장 찍는 것으로 소풍을 마감하였다. 솔직히 당시에 아무도 그 무덤이 누구의 것이고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설명해 주지는 않았다. 다만 호기심 있는 학우들만이 릉 입구에 세워진 안내문을 읽으며 대강의 의미를 파악했을 뿐이다. 이렇게 왕릉은 우리의 기억속에 아주 가까이 있으면서도 막상 그 실재를 파악하고자하면 낮설게 느껴지는 이상한  존재였다. 아주 오래전에 여주에 있는 세종대왕의 영릉을 찾아가본 적이 있었다. 그때도  막연히 중.고등학교 때 소풍가서 본 왕릉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그 당시 이슬비가 솔솔 뿌려 관람객이 거의 없어 호젓한 분위기 속에서 영릉을 거닐며 생각보다 아늑하다는 느낌과 왕의 무덤이면서도 간소하고 소박한 모습이라는 생각이 하나 덧붙여졌을 뿐이다. 이렇게 왕릉은 우리 주위에 아주 가깝게 있으면서도 무심한 존재였다. 아마도 그것은 왕릉의 실체를 정확히 몰랐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조선의 왕릉은 원칙적으로 도읍지를 중심으로 100리 안에 조성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기 때문에 거의 서울과 경기도에 산재해 있다. 그리고 조선왕조의 왕릉제도는 태조 이성계의 健元陵을 본으로 삼으면서 전통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고구려. 신라. 고려의 제도가 혼합되어 있다.  즉 조선왕릉은 입구에 홍살문神門이 있고 거기서부터 薄石을 깐 참도參道를 따라 일직선상의 거리에 제사를 지내는 정자각이 있다. 그리고 그 정자각의 동쪽을 따라 참도가 계단에 이어져 있다. 이 계단은 능원으로 이어져있다. 그 능원 위에는 봉분이 위치해 있는데 봉분 앞으로 장대석을 3단으로 쌓아 2단의 넓은 공간을 마련하고 첫째 단에는 석마와 무인석을 둘째 단에는 문인석과 그 가운데 장명등이 있다. 그리고 장명등 안쪽으로 5개의 고석으로 받친 상석이 있다. 상석 뒤로는 봉분 능침 주위로 석양과 석호를 각각 두쌍씩 여덟마리를 좌우로 벌려 놓았다.  상석 좌우에는 끝이 연꽃봉오리 모양으로 된 망주석이 있고  그 가운데에 흙을 둥글게 쌓아 올린 능침이 놓여있다. 능침에는 잔디를 입혔고 아래 쪽으로는 병풍석을 12면으로 둘렀다. 그리고 그 바깥쪽으로는 12면으로 꾸민 난간석을 둘렀다. 그리고 그 뒤로 능침을 감싸듯 앞면이 터진 담장, 즉 곡장을 둘렀다. 이것이 조선시대 왕릉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하지만 이런 일반적인 모습이 시대와 장인의 솜씨에 따라 꾸밈과 조각의 솜씨가 달라지기 때문에 왕릉을 자세히 살펴보면 서로 같은 것 같으면서도 다른 모습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다만 조선 시대 반정으로 왕위에서 쫓겨난 연산주와 광해주의 무덤은 능의 위치에 오르지 못하고 묘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는 점과 대한제국이 세워진 후 즉위한 광무황제와 융희황제의 릉은 왕릉이 아니라 황제의 묘제로 꾸며진 황릉이라는 점이다. 무릇 인간은 아는 것만을 말할 수 있고, 아는 것만을 표현할 수 있다고 했다.  이 말을 역사에 적용하면 아주 신랄한 표현이 된다. 역사는 아는 만큼 말할 수 있고, 역사를 아는 만큼 표현할 수 있다. 사진첩에서 지나간 세월의 뒤켠에 있던 소풍 사진을 꺼내 보았다. 거기에는 검은 제복과 검은 모자를 쓴 한무리의 학생들이 선생님과 함께 어디인가를 향해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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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중세사
미야쟈키 이치사다 / 신서원 / 199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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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과 서양의 중세사에 관심이 있는 나로서는 제목이 중세사만 붙으면 무조건 사서 읽어봐야 직성이 풀리는 관계로 이 책도 구입하게 되었다. 서양의 중세사에 비해 동양의 중세사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한국사의 중세사격인 고려 역시 역사의 무대에서 그리 크게 조명되지 않는다.

중국의 중세는 일반적으로 삼국시대를 시작으로 하여 당 이후의 5대 10국이 송에 의해 멸망하는 때를 끝으로 삼는다. 대략 740년을 아우르는 중국의 중세시대는 우리의 역사에서는 삼국시대에서 통일신라시대에 해당한다. 이 시기의 중국은 가장 혼란스런 시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시기를 통일한 국가는 삼국을 통일한 진이 동서로 분열되면서 대략 155년, 수가 3대 38년, 당이 20대 290년 도합 483년간의 시기가 숫자상으로는 안정된 시기로 분류될 수 있다. 하지만 진의 경우 서진 52년을 제외한 동진의 대부분은 영가의 난으로 지새워야만 했다. 그리고 수 역시 단기간의 왕조로서 고구려 원정이라는 과중한 역을 수행하던 과정에서 멸망하였고, 당은 안사의 난을 겪은 7대 현종 이후 엄청난 소용돌이 속에서 지새워야만 했다. 그러므로 통일 왕조 기간 동안 평화스런 시기는 대략 170여년을 조금 넘는 수준이라고 보면 된다. 역사학자들이 이 시기에 당이 제국을 통일시킨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고 볼 정도로 이 시기는 혼란의 시기였다. 북으로부터 유목민족이 중원으로 침입해 자리를 잡고, 한족의 왕조는 장강 넘어 남으로 천도하여 겨우 명맥을 유지하는 시기였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오히려 중국의 판도를 넓혀주는 역할을 했다. 한족이 강남으로 이주하면서 강남의 제민족이 한족의 지배를 받게되면서 비로소 중국의 문명이 황하와 장강 사이의 중원을 벗어나 남으로 확대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북의 유목민족이 중원에 들어와 한화과정을 통해 중국민족과 통합되면서 새외이북으로 중국의 영향력이 커지게 되었다. 이 시대는 박한제 교수의 용어를 빌자면 <胡漢體制>라 불러야할 정도로 중국인이 오랑캐라고 부르는 유목민족의 영향력이 증대하는 시기이기도 하였다. 즉 유목민적인 호방함과 검소함이 한족의 세련된 문명과 접촉함으로서 더욱 개방적인 문화를 낳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 결과 중국의 중세는어느 시대보다 대외교역에 활발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면서 적극적으로 중국의 문화가 서쪽과 남쪽으로 영역을 확장해 나가는 시기이기도 했다. 서쪽으로의 확장은 751년 당군이 탈라스에서 압바스왕조의 군대에게 패함으로서 파미르고원蔥嶺에서 저지당하였다. 이것이 중국 역사상 한족이 가장 서쪽으로 진출한 것이었다.

저자인 미야자키 이치사다는 <역사학상 중세사의 연구는 가장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그것은 중세사의 의의가 이해되면 역사 전체가 판명되기 때문이다>라고 자신있게 말하고 있다. 사실 중세는 고대와 근세의 사이에 있는 역사이며 용어 또한 가운데의 역사라는 의미이다. 그렇기 때문에 미야자키 교수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고대에서 중세로의 변화 과정을 추적하고, 중세에서 근세로의 발전 과정에서 알 수 있듯 중세는 고대와 근세의 교집합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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