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봉건제 - 새론서원 22
피터 듀스 / 신서원 / 199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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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봉건제는 단순히 무가정권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하면 많은 부분을 지나칠 수 있다. 일본의 봉건제도는 근대국가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이는 봉건제도의 특성을 이해하게되면 근대 일본의 형성과 국가의 성격을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일본은 7세기 중엽 이후 독자적인 국가로 형성되면서 왕권을 강화하고 중앙집권적인 귀족정권을 형성하였다. 왕족과 귀족들은 지방의 장원을 기반으로 하여 문신이 주도권을 잡는 군주정치를 펼쳐나갈 수 있었다. 귀족계급들은 부의 기반은 지방에 두고 자신들은 수도에 거주하면서 대리인을 통해 모든 것을 해결해 나가고 있었다. 이들 대리인들은 지방에서 귀족들의 대리인 자격으로 권위를 구축해나가는 동시에 토지의 겸병을 통해 경제적 부도 확장해 나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10세기 초부터 지방의 실력자들이 중앙정부에 반기를 드는 일이 빈번해지면서 문치주의적 천황정부는 이들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지방의 실력자들에게 도움을 청할 수 밖에 없었다. 바로 이런 상황을 통해서 지방의 실력자들은 정치적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이들 지방 실력자들은 무력과 경제력 그리고 새로 얻게된 정치력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이해득실에 따라 이합집산을 거듭하면서 점점 더 강력한 무가세력을 형성하게 되었다. 결국 이들의 강력한 세력은 천황이 주도하는 중앙정권의 권위에 도전하게 되고 결국은 천황과의 권력투쟁에서 승리하게되면서 바쿠후幕府체제를 성립하게 된다. 가마쿠라鎌倉바쿠후, 무로마찌室町바쿠후체제는 실권자인 바쿠후의 우두머리를 정점으로하는 지방분권적인 통치체제였다. 이는 결과적으로 바쿠후체제의 중앙집권적인 정치질서를 저해하는 요소로 작용하게 되었다. 바쿠후체제는 유력한 인물의 지지도에 무가집단이 집결하는 성격이기 때문에 무사집단의 단결과 협조가 전제되지 않는한 절대적인 안정을 유지하기 어려운 점이 있었다. 그리고 바쿠후의 이런 취약성은 지방에 산재한 장원이 독자적으로 독립하는 한 원인을 제공하였다. 즉 바쿠후 체제에 협조하는 대가로 지방의 유력자들이 장원을 소유하면서 독립적인 세력으로 성장하였던 것이다. 지방에 세력을 형성한 무가집단은 이제 더이상 장원의 지대를 중앙에 납부하지 않고 자신의 소유로 하였다. 이렇게해서 탄생한 지방의 다이묘大名들은  바쿠후체제를 유지하는 세력이면서 지방분권적인 정치질서의 핵심으로 성장하게 된다. 이때 형성된 일본의 지방분권적인 분위기는 지금도 유효하게 작동하고 있어서 혹자는 일본이 종국에는 40여개의 국가로 분할될 것이라고 장담하기도 한다. 이렇게 14세기부터 가속화되기 시작한 지방분권적 통치형태는 16세기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혼란이 수습되면서 과도기적 중앙집권체제로 서서히 변모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전쟁으로 인해 이 과정은 약간의 차질을 빚게되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중앙집권화된 봉건국가로 재정비되게 된다. 이것은 일본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도쿠가와에 의해 통일된 일본은 역사상 처음으로 단일한 지배자에 의해 단일한 영토가 통치되었기 때문이다. 이 결과 일본은 비로소 근대국가로 나아갈 수 있는 기본적 토대를 닦았다고 할 수 있다.

서구의 역사학자들이 일본의 봉건제를 주목한 것은 명치유신 이후 급속하게 산업화한 일본의 발전동력의 원인을 탐구하는 가운데서 였다. 서양의 학자들은 일본의 급속한 발전이 서양식 모델인 장원제를 기반으로 하였기 때문이라는 성급한 결론을 내렸는데 이는 서양과 일본의 봉건제 사이에 나타난 차이점을 무시하고 도출한 결과이기에 설득력은 없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메이지 유신을 지도한 세력들은 지방의 봉건세력이 아니라 하급무사출신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이 충성한 대상은 자신의 영지 안에 있던 다이묘가 아니라 국가의 상징인 천황이었다. 일본이 급속한 산업화를 통해 근대국가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천황제도 사무라이 정신도 아닌 도쿠가와에 의해 시행된 중앙집권적인 봉건제도의 공이었다. 그럼에도 피터 듀스는 일본의 근대화가 성공한 이유가 봉건제 밑바닥에 잠재해있는 사무라이 정신이라고 단정하고 있는데 이는 니토베 이나조가 <무사도란 무엇인가>에서 주장한 "호전적인 일본의 정신"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란 점에서 흥미롭다. 왜냐하면 서양인들이 이만큼 철저하게 동양인을 분석한 예는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일본이 1905년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서양 제국주의자들이 동양에서 발견한 자신들의 대리인에 대한 호의 때문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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