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릉
한국문원편집실 / 한국문원 / 1995년 1월
평점 :
절판


중.고등학생시절 소풍을 간다고 하면 의래 동구릉 혹은 서오릉과 같은 곳이 선택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리고 야트막한 야산과 같은 곳에 붉은 색을 칠한 문과 박석을 깔아 놓은 돌길이 전부인 곳에서 우리들은 사이다에 김밥을 먹고 모여서 반대항 장기자랑을 한 다음 반 별로 단체사진을 한 장 찍는 것으로 소풍을 마감하였다. 솔직히 당시에 아무도 그 무덤이 누구의 것이고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설명해 주지는 않았다. 다만 호기심 있는 학우들만이 릉 입구에 세워진 안내문을 읽으며 대강의 의미를 파악했을 뿐이다. 이렇게 왕릉은 우리의 기억속에 아주 가까이 있으면서도 막상 그 실재를 파악하고자하면 낮설게 느껴지는 이상한  존재였다. 아주 오래전에 여주에 있는 세종대왕의 영릉을 찾아가본 적이 있었다. 그때도  막연히 중.고등학교 때 소풍가서 본 왕릉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그 당시 이슬비가 솔솔 뿌려 관람객이 거의 없어 호젓한 분위기 속에서 영릉을 거닐며 생각보다 아늑하다는 느낌과 왕의 무덤이면서도 간소하고 소박한 모습이라는 생각이 하나 덧붙여졌을 뿐이다. 이렇게 왕릉은 우리 주위에 아주 가깝게 있으면서도 무심한 존재였다. 아마도 그것은 왕릉의 실체를 정확히 몰랐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조선의 왕릉은 원칙적으로 도읍지를 중심으로 100리 안에 조성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기 때문에 거의 서울과 경기도에 산재해 있다. 그리고 조선왕조의 왕릉제도는 태조 이성계의 健元陵을 본으로 삼으면서 전통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고구려. 신라. 고려의 제도가 혼합되어 있다.  즉 조선왕릉은 입구에 홍살문神門이 있고 거기서부터 薄石을 깐 참도參道를 따라 일직선상의 거리에 제사를 지내는 정자각이 있다. 그리고 그 정자각의 동쪽을 따라 참도가 계단에 이어져 있다. 이 계단은 능원으로 이어져있다. 그 능원 위에는 봉분이 위치해 있는데 봉분 앞으로 장대석을 3단으로 쌓아 2단의 넓은 공간을 마련하고 첫째 단에는 석마와 무인석을 둘째 단에는 문인석과 그 가운데 장명등이 있다. 그리고 장명등 안쪽으로 5개의 고석으로 받친 상석이 있다. 상석 뒤로는 봉분 능침 주위로 석양과 석호를 각각 두쌍씩 여덟마리를 좌우로 벌려 놓았다.  상석 좌우에는 끝이 연꽃봉오리 모양으로 된 망주석이 있고  그 가운데에 흙을 둥글게 쌓아 올린 능침이 놓여있다. 능침에는 잔디를 입혔고 아래 쪽으로는 병풍석을 12면으로 둘렀다. 그리고 그 바깥쪽으로는 12면으로 꾸민 난간석을 둘렀다. 그리고 그 뒤로 능침을 감싸듯 앞면이 터진 담장, 즉 곡장을 둘렀다. 이것이 조선시대 왕릉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하지만 이런 일반적인 모습이 시대와 장인의 솜씨에 따라 꾸밈과 조각의 솜씨가 달라지기 때문에 왕릉을 자세히 살펴보면 서로 같은 것 같으면서도 다른 모습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다만 조선 시대 반정으로 왕위에서 쫓겨난 연산주와 광해주의 무덤은 능의 위치에 오르지 못하고 묘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는 점과 대한제국이 세워진 후 즉위한 광무황제와 융희황제의 릉은 왕릉이 아니라 황제의 묘제로 꾸며진 황릉이라는 점이다. 무릇 인간은 아는 것만을 말할 수 있고, 아는 것만을 표현할 수 있다고 했다.  이 말을 역사에 적용하면 아주 신랄한 표현이 된다. 역사는 아는 만큼 말할 수 있고, 역사를 아는 만큼 표현할 수 있다. 사진첩에서 지나간 세월의 뒤켠에 있던 소풍 사진을 꺼내 보았다. 거기에는 검은 제복과 검은 모자를 쓴 한무리의 학생들이 선생님과 함께 어디인가를 향해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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