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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의 대기근 - 중국 참극의 역사 1958~1962, 2011년 새뮤얼 존슨상 수상작 ㅣ 인민 3부작 2
프랑크 디쾨터 지음, 최파일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4월
평점 :
1959년 여산廬山에서 개최된 중앙정치국 확대회의는 모택동 스스로 '신선회神仙會'라고 이름을 지었다. 모택동은 산 위에서 신선들처럼 한바탕 쉰 다음 생각이 일치되면 하산하여 대약진大躍進운동을 계속하자는 의미에서 이렇게 이름을 지었다. 그는 회의에 앞서 '경험을 교훈삼아 난제를 해결하고 사실만 이야기하자'고 호소했다. 그리고 덧붙여 '허풍떨지말고, 현장조사를 철저히 하라'고 하였다. 모택동은 조사를 소흘히 한 사람은 발언권이 없다고까지 강조하고, 좌경화도 경고하였다. 하지만 여산 회의는 모택동이 강조한 호소 그 어느 것도 지켜지고 강조되지 않은 말 그대로 신선들의 유희로 끝나고 말았다.
여산회의는 1958년부터 1962년초까지 지속되었던 대약진 운동의 문제점을 비판을 빙자하여 대약진 운동에 부정적인 집단을 숙청한 회의였다. 이 여산회의를 기점으로 대약진 운동은 비극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여산회의를 통해 대약진 운동에 비판적이었던 팽덕회를 실각시킴으로서 그 어느 누구도 모택동의 권위에 도전할 수 없었다. 이후 벌어진 이들은 책임회피, 거짓 보고, 태만과 폭력으로 버무려진 대재앙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이에 대해 진실을 말하지 못하였다.
모택동은 대약진운동을 군사적 행위에 비교하였다. 자신들이 항일과 국공내전에서 승리한 원동력은 상명하복의 통제속에 이루어진 것이란 자부심 속에서 대약진 운동 역시 군사작전의 개념으로 이해하였던 것이다. 이는 군사작전에서 가장 중요시 여기는 성과의 문제와 직결되었다. 모든 당 간부들은 이 점을 분명히 이해하고 있었다. 이 결과 모든 조직과 방식은 군대식으로 일사분란하게 처리되었다. 권위에 대한 도전은 하극상이었고, 작업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는 것은 작전의 실패였다. 하극상과 작전의 실패자는 군법에 의해 처단되듯 불평불만과 작업할당량의 미비는 비판과 처벌로 이어졌다. 당간부들 역시 북경의 당중앙으로부터 내려오는 모든 지시 사항을 군사적 행위의 관점에서 받아들였다. 이들 역시 상부로부터 내려오는 노르마Норма로부터 자유롭지가 못했던 것이다.
모택동이 대약진 운동을 계획한 것은 1957년 소련 공산당 서기장 니키타 후르시쵸프가 15년 이내에 미국을 모든 부문에서 따라잡을 것이란 선언을 하면서부터였다. 모택동은 스탈린을 존경하고 두려워했지만 후르시쵸프는 아니었다. 오히려 모택동은 스탈린 사후 자신이 공산주의 세계의 진정한 지도자라고 생각하였다. 이런 과신 속에서 후르시쵸프의 선언은 모택동에게 불쾌한 동시에 도전이었던 것이다. 이에 모택동은 동구권과 제3세계에 대한 지원을 늘리는 동시에 중국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근대적 공산주의 사회를 만들기로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중국이 당시 처한 현실이었다. 서방과의 관계는 단절되어 있었고 오로지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만이 중국의 젖줄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모택동이 취할 수 있는 길은 기계보다 인력에 의존하는 노동집약적 산업화방안이었다. 넘쳐나는 것이 사람인 중국의 입장에서 이는 모택동이 유달리 심취했던 반맑스주의적 평등주의에 입각한 산업화였다. 사적 소유를 파괴하기 위한 모택동의 대안은 농촌과 도시에서는 인민공사가 설립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중국 전체 생산량의 80% 이상을 대도시 인민공사가 올림으로서 전체 인구의 90%을 차지하는 농촌의 인민공사가 무력화되었다는 점이었다. 이 결과 대재앙이 농촌을 타격하였다.
이때의 상황을 이 책은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디쾨터는 중국의 제한적인 자료를 이용하여 대약진 운동 당시의 비극을 유려한 필체로 담담히 그러나 때로는 신랄하게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그 어느 누구도 모택동의 지도력에 비판을 가하지 못하였다. 유일한 비판자였던 팽덕회는 실각하여 농촌으로 하방下放되었기에 농촌의 비극은 그 어느 누구도 건드리지 못하였다. 이런 무소불위의 권위 아래 중국은 20세기 최대의 비극을 경험하였다. 이때 모택동은 농촌의 비극은 일을 하지 않는 불평분자들이 많기 때문이라는 명료한 답을 제시하며 일을 하지 않으면 먹지도 마라는 선문답을 남겼다. 이 말은 당나라 백장 회해선사百丈 懷海禪師가 남긴 말이다.
1987년 중국공산당 13차 대회에서 '사회주의 초급단계론'을 채택하였다. 이것은 1958년 여산에서 모택동이 시작한 대약진 운동이 대단원의 막을 내림을 의미하였다. 사회주의 초급단계론에 따르면 중국은 사회주의 초급단계에 있기 때문에 대담한 경제계획을 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대약진 운동에 대한 평은 문화혁명시절 팽덕회가 면회온 조카에게 '사회주의가 뭔지도 모르고, 경험도 없는 주제에 꼴값만 떨었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말을 했다는 것으로 대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