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악한 전쟁 - 아프가니스탄, 미국 그리고 국제 테러리즘
존 K. 쿨리 지음, 소병일 옮김 / 이지북 / 2001년 10월
평점 :
품절


이 책을 읽으려면 많은 인내심이 필요하다. 이런 책을 번역하기 위해서는 군사적 지식과 외교적 지식이 기본적인 전제가 되어야 한다. 이런 기본적인 지식이 없이 번역을 하다보면 세세한 부분에서 길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각설하고...

이 책은 제목 자체가 냉소적이다. 聖戰Holy War을 빗대어 Unholy Wars라고 했으니 말이다. 이 책의 주인공은 미국 정확히 말하면 중앙정보국CIA이다. 그리고 이 정부기관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공작활동을 벌인 것이 어떻게 부메랑이 되어 자신들의 뒤를 공격했는가를 보여주는 책이라 할 수 있다. 미국은 60년대 월남전에 개입하면서 동남아시아의 소수민족을 자신들의 대리인으로 훈련시켰다. 이렇게 한 것은 다인종으로 구성된 동남아시아에서 미국의 발언권을 확고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런 정책은 월남이 북쪽의 공산주의자들 손에 통일되면서 위기를 맞게된다. 즉 이들 소수민족을 이용한 반공산주의 전략을 더 이상 실행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결과 미국이 훈련시킨 소수민족은 그 지역의 독립적인 세력으로 발전하게된다. 이를 위험하게 여기는 현지 정부는 이들 소수민족을 공격하게되고, 이들은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무장을 할 필요성을 절감한다. 월남전이 한창일때는 미국의 원조가 무상으로 주어졌지만 이제는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무기 자금을 만들기 위해 마약을 재배하게 되고 이 마약은 최대의 소비처인 미국으로 흘러들어가게 된다. 이것이 미국과 동남아시아 황금의 삼각지대-태국.버마.라오스의 국경지역을 연결하는 지역-와 인연을 맺게되는 과정이다.

이 책은 미국이 80년대에 어떻게해서 60년대 월남에서 행했던 실수를 반복하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미국의 사고방식은 장소만 다를 뿐 전혀 변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적에게 대항하기 위해서는 적을 이용한다는 이 단순한 <이이제이以夷制夷>방식은 적이 사라지는 순간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이 된다는 사실을 미국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결국 미국은 자신들이 훈련시킨 이슬람 전사들에 의해 사상초유의 테러를 당하는 수모를 겪게된다.

미국은 80년대까지 중동지역의 절대적 거점은 이스라엘과 이란이었다.  이란은 79년 이슬람 혁명으로 무너지기 까지 이스라엘과 함께 가장 확실한 중동지역의 협력자였다. 하지만 이란이 미국과 적대적인 관계로 변하자 새로운 동맹자를 모색하게 되었다. 이 와중에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이 발생하자 미국은 소련에 반대하는 모든 이슬람 국가와 협력을 하게 된다. 이제 미국은 남아시아의 이슬람 국가와 상호주의적 관계를 유지하게 되는 것이다. 이 결과 파키스탄은 미국에 아프가니스탄 반군 캠프를 제공하는 댓가로 2000년 핵실험을 성공하게 된다. 미국이 뒤늦게 항의했지만 파키스탄의 핵보유는 사실상 국제사회로부터 인정된 상태이다. 미국은 소련의 남진을 저지하는 과정에서 핵보유국을 하나 더 늘려놨을 뿐이다. 미국은 이란이 자신에게 적대적이 되자 이란의 원수인 이라크를 도와주게 된다.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미국은 이라크를 지지함으로서 이슬람 혁명의 불꽃이 더 이상 확산되는 것을 방지하였다. 하지만 이 결과 이라크는 중동지역에서 이스라엘을 제외한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한 국가가 되었다. 이는 미국이 추구하는 중도의 군사적 평등정책과 어긋나는 것이었다. 이 군사력은 결국 쿠웨이트를 침공하게 되는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또한 파키스탄에 설치한 아프가니스탄의 반군 캠프에서는 소련에 대항하기 위해 아랍 세계 각국에서 몰려든 전사들을 훈련시켰다. 이들은 아프가니스탄이란 험한 전장터에서 단련을 받아 아주 용맹한 전사가 되었다.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련이 철수하자 이들 전사들은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 반체제 운동의 선봉에 섰다. 중동의 석유의 안정적 공급을 위해서는 정권의 안정이 절실한 미국에게 자신들이 훈련시킨 전사들은 가장 큰 위협이 된 것이다. 이 책은 미국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원칙없는 지원을 남발한 것에 대한 통렬한 고발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미국인들은 이 책을 읽고 자신들이 지지한 정부의 도덕적 불감증과 무원칙성에 놀랄 지경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자신들에게 되돌아왔음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미국의 어느 누가 정권을 잡는다 해도 미국의 이익을 위한 정책은 결코 포기되지 않을 것이란 사실이다. 바로 그 점이 미국의 정책이 앞으로도 월남, 아프가니스탄, 이라크와 같은 형태로 반복될 수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라 하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니네베 발굴기 대원동서문화총서 12
아놀드 C.브랙만 / 대원사 / 1990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니네베는 고대 앗시리아의 수도였다.  이 도시는 수천년간 인간의 손길을 거부하다가 1846년 레이아드란 영국인에 의해 발견될때까지 25세기동안 정확한 위치조차 알려지지 않았던 의문의 도시였다. 이 책은 고고학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오스틴  헨리 레이아드Austen Henry Layard의 이야기이다. 한 사람이 자신의 일생을 바쳐 탐구해야할 것을 정하고 그것을 위해 일생을 매진하는 모습은 빅토리아 시대의 코스모폴리탄 정신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즉 레이아드의 활동은 영국의 제국주의가 만들어낸 한 유형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권력을 향해 나아가는 성공의 신화 그것이 바로 빅토리아 시대의 코스모폴리탄들이 추구했던 가치였다. 그럼에도 그의 발굴의 여정은 우리에게 많은 감동을 안겨준다. 유럽인들에게 구약성서의 세계는 그리스 신화의 세계와 함께 많은 영감을 주는 원천이었다.  하지만 그리스의 신화 세계는 자신들에게 매우 가까이 있었지만 구약성서의 세계는 레이아드가 발견할 때 까지는 알 수 없었다. 그렇기에 유럽인들은 레이아드가 니느베를 발굴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열광하였다. 이제  구약성서에 나오는 이야기는 열정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의 환상이 아니라 역사적인 실제였기 때문이었다. 에덴동산, 노아의 방주는 결코 허황된 것이 아니었다.  후에 쉴리만이 트로이를 발견했을 때 왜 유럽인들이 열광했을까?  그들은 쉴리만이 흙 속에서 발견한 황금덩어리에 열광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역사에 대해 환호성을 올렸던 것이다. 전설과 신화의 세계라고 믿었던 한 이야기가 실재로 그 장소에서 오래 전에 있었다는 그 자체에 열광을 했던 것이다. 이는 단순히 고고학적 발굴이 아니라 동양에 대응되는 서양이라는 역사의 깊이에 대한 찬사였던 것이다.

레이아드와 쉴리만의 발견으로 유럽인들은 구약의 세계와 그리스 신화의 세계가 다 존재하는 것으로 판명되자 서양에 대한 동양의 우월감이 노골적으로 확대되기 시작하였다. 이전까지 서양의 동양에 대한 관점은 질투와 시기에 의한 의도적인 무시였다. 하지만 고고학적 발굴에 의해 역사의 한 부분이 드러나면서 성서에 입각한 인종적인 우월감으로 바뀌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레이아드가 발굴한 니느베의 유적이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 여기에서 발굴된 유물 가운데 점토판의 가치 때문이었다. 이 점토판은 설형문자가 기록된  왕들의 이름-앗수르바니팔, 산헤립, 살만네살-이름이 실제로 확인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시대는 호메로스의 시대보다 천 년이나 더 위로 거슬러 올라가는 시대였다. 유럽인들에게 중동에서 시행되는 고고학은 단순한 유적의 탐색이 아니라 종교를 향한 열정으로 인식되었다.

요나가 신의 말씀을 이행하러 간 도시 니느베를 레이아드가 발견하였을 때 유럽인들이 느꼈던 전율감을 상상할 수 있다면 고고학이란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자신들이 믿는 종교에 대한 확신감은 그 종교에 대한 우월감으로 그리고 그 종교를 믿는 자신들이 가져야하는 세계에 대한 사명감으로 발전하면서 유럽의 제국주의는 힘차게 팽창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스티븐 스필버그가 감독한 인디애나 존스 1편 성괘를 찾아서를 부담없이 보며 즐긴다. 우리는 그 영화를 보면서 스쳐지나가는 영상을 모두 기억한다. 그리고 그 영상이 고고학적 지식과 결합될 때 하나의 그림이 그려지게 된다. 그 지워지지 않는 기억의 형상은 에드워드 사이드가 지적한 문화적 제국주의에 함몰된 우리의 모습인지도 모른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로그인 2004-12-29 2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경에서는 '니느웨' 라고 하죠 ^^

좋은 글 감사합니다.

dohyosae 2004-12-30 0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중세의 지식인들 동문선 문예신서 136
자크 르 고프 지음, 최애리 옮김 / 동문선 / 1999년 4월
평점 :
절판


유럽에서 근대가 시작될 무렵인 14세기경 파리 소르본느 대학의 장서가 1338권이었다면 믿을 수 있을까. 하지만 이 정도의 장서는 당시 일반인들이나 지식인들이 보기에는 엄청난 량이었다. 이것은 책 한 권 한 권을 필사해야만 했던 중세의 사정으로 볼 때 당연한 것이었다. 인쇄술이 발명되기 이전까지 책이란 아주 귀중한 것이었다. 양피지를 잘라 필사하고 테두리를 장식한 책은 지식과 부의 상징이기도 했다. 그러기에 근대 부르주아들이 자신의 집에 서재를 만들고 책으로 장식한 것은 지식에 대한 욕구뿐만이 아니라 신분 상승의 표시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만큼 중세시대에는 지식인과 책은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중세의 지식인이 탄생하는데 큰 기여를 한 것은 교회였다. 당시 교회는 성직자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을 설립하였고 여기서 성직자를 양성하였다. 성직자를 양성하는 교육은 라틴어와 간단한 신학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배운 사람들이 다 성직자의 길을 택한 것은 아니었다. 성직자의 길을 포기한 일부는 자신이 배운 지식을 바탕으로 사람을 가르치는 일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바로 이들이 유럽 지식인의 씨앗이 되었던 셈이다. 이들은 당시 유일한 공통 언어였던 라틴어를 읽고 쓸 줄 안다는 점에서 일반인들보다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이른바 <화이트칼라>가 처음 등장한 것이었다. 이들은 종래의 노동자들과는 다르게 자신의 육체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머리를 이용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자신의 재능을 펼치기 위해서는 도시라는 장소가 필수적이었다. 마침 이들이 등장한 시점에 유럽은 도시가 팽창하였다. 이들은 도시로 몰려와 자신의 지식을 팔았고 일부는 왕실에 들어가 왕의 하급관리로서 재능을 발휘하기도 하였다. 당시 국민국가를 준비하던 각 국의 왕들은 이런 하급관리가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었다. 이 결과 왕들은 따로 대학을 세우려고 하였다. 이로 인해 당시 교육기관을 독점하고 있던 교회와의 충돌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하지만 대학은 여전히 성직자를 양성하는 것이 주된 임무였다. 13세기에 들어오면서 이 대학에 순수한 학문을 공부하기 위해 입학하는 일반인들이 늘기 시작하면서 대학에서 성직자와 일반인들의 갈등이 일어나게 된다. 일반인들은 성직자 교육을 중심으로 짜여진 대학의 교과과정에 불만이 많았다. 하지만 교회는 대학을 자신들이 운영하고 있는 한 이 교과과정을 변경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유럽에서는 교회가 아닌 왕들이 건립한 대학이 등장하게 된다. 여기서는 신학이 중심이 아니라 하급관리로서 필요한 과목을 중점적으로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교회가 세운 대학이나 왕이 건립한 대학의 공통점은 교수와 학생들의 자율권이 전혀 없었다는 점이다. 즉 여기서는 필요한 사람을 양성하는 임무만이 있었다. 특히 왕이나 제후가 세운 대학에서 이런 점이 더 심했다는 사실이다. 이 결과 학생과 교수들은 왕과 제후의 간섭에서 벗어난 자율적인 대학을 구성하기위해 조합을 구성하게 된다. 하지만 조합이 완전하게 되기 위해서는 자체적인 규칙이 존재해야만 했다. 대학이 독립적인 존재가 되는 것을 왕이나 제후는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이 교육기관은 자신들이 필요한 봉사자를 양성하는 곳이지 지식을 위한 지식만을 공부하는 곳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대학은 왕과 제후와 대립하게 되자 교회에 손을 벌렸다. 지적 산업을 독점하고 있던 교회는 이 손길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 결과 대학의 지식인들은 왕과 제후의 손길을 벗어나는 데는 성공했지만 다시 교회의 질서 속에 편입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이런 사실은 당시 대학의 총장은 항상 고위성직자의 몫이었다는 데서도 잘 드러난다. 이 결과 대학과 지식인들은 교회의 간섭과 교회적인 가치를 가르치는데 동의해야만 했다. 그러나 대학은 총장과 교회의 지도를 제외한다면 모든 것이 자유로운 상태였다. 이는 요건만 성숙된다면 대학 자체가 언제나 교회로부터 독립할 수 있는 잠재적 역량이 갖추어진 것을 의미했다. 이 결과 대학의 지식인 사회는 자신들만의 독특한 문화를 만들어 냄으로서 지식인=특권계급이라는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이렇게 되는 데는 중세 말기의 새로운 조류가 큰 도움이 되었다. 이른바 르네상스라고 하는 인문주의적 정신은 대학과 지식인이 독립된 존재로 나아가는데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이들의 독립에는 커다란 장애가 있었다. 바로 돈이었다. 경제력이 없는 대학은 결코 살아남을 수 없는 것이었다. 재정의 악화로 대학은 교회의 종이 아니라 국가의 하인이 되기로 결정하게 된다. 즉 새로 대두하는 국민국가의 지식인 공급처로 자신을 스스로 규정하면서 생존의 길을 모색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결과 대학과 지식인 사회는 국민국가에서 권력의 한쪽 끝을 잡을 수 있게 되었고 자신들만의 영역을 구축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이 택한 방법은 그 옛날 자신들이 그토록 벗어나고자 하였던 교회의 방식을 따른 것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이 속한 사회와 제도의 변화를 고려하지 않았다. 이들은 정치권력의 이론을 제공함으로서 자신들의 특권을 향유하기를 원했다. 이들 대학의 지식인들은 르네상스의 원동력이 되었던 인문주의자들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집단이었다. 대학의 지식인들이 혈통적으로는 귀족과 관계없는 사람들인 반면에 인문주의자들은 태생적으로 귀족이었다. 그러므로 인문주의자들의 활동무대는 궁전이었다. 이들은 궁전에서 텍스트를 연구하고 재담을 나누며 자신들은 결코 지식을 파는 사람이 아님을 강조하였다. 대학의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생계를 위해서 교과서를 펴냈지만, 인문주의자들은 이렇게 하는 것은 노동자가 일을 하는 것과 같이 천박한 것으로 경멸했다. 인문주의자들은 처음부터 가난과는 거리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반면 대학의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지식을 팔고 이를 살 사람이 있어야만 살아갈 수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중세의 그림에서 고독한 인문주의자, 학생들에게 둘러싸인 교수의 이미지가 얼마나 공허한 것인지를 알 수 있다.

 

끝으로 중세의 지식인을 양산하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집단이 교회란 사실이다. 교회는 자신의 사명인 모든 사람에게 열린 기회를 준다는 입장 아래 교육을 개방함으로서 일반 농민의 자식들이 기초적인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하였고 다시 전문적인 교육을 받게 하는데 일조하였다. 물론 이 교육이 성직자를 양성하는 교육이었을지라도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기세가 -상 까치동양학 24
사마천 지음 / 까치 / 1994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마천의 사기는 本紀 12편, 表 10편(연표), 書 8편(제도사), 世家 30편, 列傳 70편으로 모두 130편이라고 自序에서 스스로 밝히고 있다. 이 가운데 세가는 제왕을 받들고 있는 諸侯國의 열국사라고 할 수 있다.

세가는 한마디로 말해서 1인자가 되기 위해 싸웠던 2인자들의 기록이다. 권력의 두번째 자리란 <一人之下 萬人之上 >의 영광스런 자리이지만 최고 권력자와 경쟁자들의 끊임없는 견제를 받는 자리이기도 하다. 여기서는 어떤 경륜을 펼치느냐가 중요한 문제로 떠오른다. 춘추 오패와 전국 칠웅의 세가들은 뛰어난 실력자들이 있었지만 통일이라는 대업을 성취할 수 없었다. 실력이 뛰어난 자들은 교만으로 무너졌고, 자신을 숙일 줄 아는 자들은 그것으로 만족하였기 때문이다.  공자는 자신의 이상을 펼쳐보이기 위해 열국을 轍環했지만 약육강식의 시대에 유가적 이상은 경멸을 받을 뿐이었다. 세가들은 유가적 禮에 의한 교화와 순화보다는 법가나 묵가의 논리를 신임했고, 의리보다는 순발력있는 술수를 선호하였다. 세가들은 삼황오제의 치세를 동경했지만 덕보다는 무력으로 그것을 얻으려 노력하였다. 사마천 역시 세가들의 이런 술수와 계책을 통해 나라가 발전하고 보전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런 사마천이 세가에 공자를 집어넣은 것은 의외이지만 공자가 끼친 사상의 영향력을 고려한 것이었다. 즉 그는 공자를 文의 제왕으로 대접을 해 주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본 유가의 세계는 <대대로 배워도 그 학문을 통달할 수 없으며 평생 하더라도 그 예를 궁구할 수 없다... 넓기는 하지만 요점이 적다>고 회의적인 시각으로 보았다. 그리고 그가 호의적이었던 법가 역시 <친소를 나누지 않고 귀천을 가리지 않으며 한결같이 법에 의해 결단>한다고 비판하고 있다. 그러면서 사마천은 당시 세태가 속으로는 법을 숭상하면서도 겉으로는 유를 내세우고 있는 것을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다. 사마천의 혁신적인 태도는 중국 역사상 최초의 농민반란군 지도자인 진섭을 세가에 과감하게 집어 넣었다는 사실이다. 진섭은 진 말기 농민반란을 주도한 사람으로 왕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를 세가에 집어 넣은 것은 사마천이 농민반란을 어떤 시각에서 보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사마천의 이런 평가는 후대의 역사가 그의 판단이 옳았음을 증명하고 있다. 왕조의 교체기에 빠지지 않고 일어났던 농민봉기는 중국 왕조의 몰락과 창건을 주도하는 기폭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세가들은 춘추전국시대를 살아 오면서 힘만이 생존의 원칙임을 깨닫고 있다. 이를 위해 이들은 많은 문사와 재사들을 끌어들였고, 법을 개정하여 이웃의 백성들을 자신의 영토로 끌어들였다. 사람이 많으면 세수가 증가하고 세수가 증가하면 국력이 상승한다는 아주 원초적인 법칙에 충실하였던 것이다. 문제는 누가 어떻게 이것을 완성시키느냐였다. 세가들의 이러한 노력으로 중국은 춘추전국시대를 통해 논민들의 고통이 뒤따랐지만 엄청난 발전을 이루게 된다. 이 발전은 경제적인 것 뿐만 아니라 사상적인 면에서도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세가들의 야망을 통해 급격하게 이루어진 도약의 발판은 진과 한의 통일에서 엄청난 추진력을 발휘하게 된다. 그러므로 세가의 시대는 중국이란 나라의 틀이 완성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세가들의 모습을 통해 하나의 제국을 향해 나아가는 중국의 모습을 본다는 것은 현재의 중국을 이해하는데도 많은 도움이 된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끼게 된다. 역사는 과거를 반추하여 새로움을 낳는 영원한 母胎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중세 이야기 - 위대한 8인의 꿈
노만 F. 캔터 지음, 이종경 외 옮김 / 새물결 / 2001년 4월
평점 :
품절


한때 중세의 신비주의에 대해 관심을 가졌던 적이 있었다. 특히 좋아했던 피오레의 요하킴은 정말 그 사상의 신선함에 나를 즐겁게 하였다. 그리고  그를 통해 신비주의가 허공에 그려진 환상이 아니라 인간 정신이 어디까지 상승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며 다른 의미로는 정치적인 것임을 알았다. 신비주의는 결코 보이지 않는 환상을 ?는 것이 아니었다. 맨발의 요한이나 아빌라의 데레사, 빙엔의 힐데가르트와 같은 인물은 중세의 가장 훌륭한 신비주의자이면서도 가장 강력한 교회의 개혁자였다는 사실이다. 이걸 볼 때 신비주의는 환상추적이 아니라 현실의 직시이며 그 결과 필연적으로 개혁이 뒤따른 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책을 통해 요크의 로버트 그로스테스트와 베드퍼드 공 존을 만난 것은 행운 이었다. 랭카스터 왕가의 복잡한 족보 속에서 베드퍼드 공 존의 모습을 찾아 본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중세의 족보학은 문장학만큼이나 흥미를 돋워준다. 한 사람의 혈통이 어떻게 흘러나가고 어디서부터 흘러 들어왔는지를 파악한다는 것은 한 인간의 가정사를 아는 것과 함께 왕실의 역사를 그리고 더 나아가 중세의 역사를 이해하는 실마리가 되기 때문이다. 베드포드 공 존은 랭카서터 왕가의 황혼을 지켜봐야만 했던 인물이다. 그는 대륙에서 잉글랜드의 세력이 축소되는 상황에서 약간 정신병적인 기질이 있던 조카 헨리 6세를 대신하여 프랑스와의 전쟁을 관장하고 있었다. 그는 대륙에서 자신들의 이웃이자 적인 프랑스가 강력한 왕권을 중심으로 새로운 중앙집권적 근대국가로 태어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 사실은 잉글랜드 역시 변모해야한다는 것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최악이었다. 왕은 불안정했고, 자금은 부족하고 있는 것은 의지 하나뿐이었다. 지금은 한적한 중소도시이지만 중세의 요크는 링컨과 함께 북부 잉글랜드의 종교.군사적으로 중요한 도시였다. 그리고 요크와 링컨은 사상적으로는 매우 진보적이었지만 정책적으로는 국수적이기도 하였다. 후일 헨리 8세가 교황청과 불화를 격고 있을 때 링컨의 주교는 <왜 우리가 로마의 명령을 따라야합니까>라고 직언을 하며 로마와 결별할 것을 촉구하기도 하였다. 이런 곳에서 그로스테스트의 생각을 통해 잉글랜드가 어떻게 영국적 경험론의 세계로 빠져드는지를 알 수 있게 한다. 이외에도 여기에는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없는 인물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책을 읽다보면 이런 인물들이 역사의 전면에 나타나있는 주인공적인 인물들에게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쳤고, 그들의 사상이 새로운 사상을 낳게하는 기반이 되었음을 느낄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이들은 언제나 역사의 한 순간 결단을 내려야만 했던 사람들이다. 이들의 결단은 성공보다는 실패가 더 많았다. 하지만 이들의 실패는 훗날을 위한 밑거름이 되었다는 사실 또한 분명하다. 저자인 노만 캔터는  이들의 실패를 이상주의자가 가졌던 특징이고, 인류의 구성원이면 누구나가 치루어야할 댓가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중세의 시대를 통해서 우리에게 제시된 고민의 대부분은 언제나 반복되고 있다는 점이다. 마치 보르헤스가 자신의 작품에서 역사의 반복을 논했던 것처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