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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세가 -상 ㅣ 까치동양학 24
사마천 지음 / 까치 / 1994년 7월
평점 :
사마천의 사기는 本紀 12편, 表 10편(연표), 書 8편(제도사), 世家 30편, 列傳 70편으로 모두 130편이라고 自序에서 스스로 밝히고 있다. 이 가운데 세가는 제왕을 받들고 있는 諸侯國의 열국사라고 할 수 있다.
세가는 한마디로 말해서 1인자가 되기 위해 싸웠던 2인자들의 기록이다. 권력의 두번째 자리란 <一人之下 萬人之上 >의 영광스런 자리이지만 최고 권력자와 경쟁자들의 끊임없는 견제를 받는 자리이기도 하다. 여기서는 어떤 경륜을 펼치느냐가 중요한 문제로 떠오른다. 춘추 오패와 전국 칠웅의 세가들은 뛰어난 실력자들이 있었지만 통일이라는 대업을 성취할 수 없었다. 실력이 뛰어난 자들은 교만으로 무너졌고, 자신을 숙일 줄 아는 자들은 그것으로 만족하였기 때문이다. 공자는 자신의 이상을 펼쳐보이기 위해 열국을 轍環했지만 약육강식의 시대에 유가적 이상은 경멸을 받을 뿐이었다. 세가들은 유가적 禮에 의한 교화와 순화보다는 법가나 묵가의 논리를 신임했고, 의리보다는 순발력있는 술수를 선호하였다. 세가들은 삼황오제의 치세를 동경했지만 덕보다는 무력으로 그것을 얻으려 노력하였다. 사마천 역시 세가들의 이런 술수와 계책을 통해 나라가 발전하고 보전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런 사마천이 세가에 공자를 집어넣은 것은 의외이지만 공자가 끼친 사상의 영향력을 고려한 것이었다. 즉 그는 공자를 文의 제왕으로 대접을 해 주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본 유가의 세계는 <대대로 배워도 그 학문을 통달할 수 없으며 평생 하더라도 그 예를 궁구할 수 없다... 넓기는 하지만 요점이 적다>고 회의적인 시각으로 보았다. 그리고 그가 호의적이었던 법가 역시 <친소를 나누지 않고 귀천을 가리지 않으며 한결같이 법에 의해 결단>한다고 비판하고 있다. 그러면서 사마천은 당시 세태가 속으로는 법을 숭상하면서도 겉으로는 유를 내세우고 있는 것을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다. 사마천의 혁신적인 태도는 중국 역사상 최초의 농민반란군 지도자인 진섭을 세가에 과감하게 집어 넣었다는 사실이다. 진섭은 진 말기 농민반란을 주도한 사람으로 왕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를 세가에 집어 넣은 것은 사마천이 농민반란을 어떤 시각에서 보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사마천의 이런 평가는 후대의 역사가 그의 판단이 옳았음을 증명하고 있다. 왕조의 교체기에 빠지지 않고 일어났던 농민봉기는 중국 왕조의 몰락과 창건을 주도하는 기폭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세가들은 춘추전국시대를 살아 오면서 힘만이 생존의 원칙임을 깨닫고 있다. 이를 위해 이들은 많은 문사와 재사들을 끌어들였고, 법을 개정하여 이웃의 백성들을 자신의 영토로 끌어들였다. 사람이 많으면 세수가 증가하고 세수가 증가하면 국력이 상승한다는 아주 원초적인 법칙에 충실하였던 것이다. 문제는 누가 어떻게 이것을 완성시키느냐였다. 세가들의 이러한 노력으로 중국은 춘추전국시대를 통해 논민들의 고통이 뒤따랐지만 엄청난 발전을 이루게 된다. 이 발전은 경제적인 것 뿐만 아니라 사상적인 면에서도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세가들의 야망을 통해 급격하게 이루어진 도약의 발판은 진과 한의 통일에서 엄청난 추진력을 발휘하게 된다. 그러므로 세가의 시대는 중국이란 나라의 틀이 완성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세가들의 모습을 통해 하나의 제국을 향해 나아가는 중국의 모습을 본다는 것은 현재의 중국을 이해하는데도 많은 도움이 된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끼게 된다. 역사는 과거를 반추하여 새로움을 낳는 영원한 母胎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