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의 지식인들 동문선 문예신서 136
자크 르 고프 지음, 최애리 옮김 / 동문선 / 1999년 4월
평점 :
절판


유럽에서 근대가 시작될 무렵인 14세기경 파리 소르본느 대학의 장서가 1338권이었다면 믿을 수 있을까. 하지만 이 정도의 장서는 당시 일반인들이나 지식인들이 보기에는 엄청난 량이었다. 이것은 책 한 권 한 권을 필사해야만 했던 중세의 사정으로 볼 때 당연한 것이었다. 인쇄술이 발명되기 이전까지 책이란 아주 귀중한 것이었다. 양피지를 잘라 필사하고 테두리를 장식한 책은 지식과 부의 상징이기도 했다. 그러기에 근대 부르주아들이 자신의 집에 서재를 만들고 책으로 장식한 것은 지식에 대한 욕구뿐만이 아니라 신분 상승의 표시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만큼 중세시대에는 지식인과 책은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중세의 지식인이 탄생하는데 큰 기여를 한 것은 교회였다. 당시 교회는 성직자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을 설립하였고 여기서 성직자를 양성하였다. 성직자를 양성하는 교육은 라틴어와 간단한 신학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배운 사람들이 다 성직자의 길을 택한 것은 아니었다. 성직자의 길을 포기한 일부는 자신이 배운 지식을 바탕으로 사람을 가르치는 일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바로 이들이 유럽 지식인의 씨앗이 되었던 셈이다. 이들은 당시 유일한 공통 언어였던 라틴어를 읽고 쓸 줄 안다는 점에서 일반인들보다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이른바 <화이트칼라>가 처음 등장한 것이었다. 이들은 종래의 노동자들과는 다르게 자신의 육체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머리를 이용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자신의 재능을 펼치기 위해서는 도시라는 장소가 필수적이었다. 마침 이들이 등장한 시점에 유럽은 도시가 팽창하였다. 이들은 도시로 몰려와 자신의 지식을 팔았고 일부는 왕실에 들어가 왕의 하급관리로서 재능을 발휘하기도 하였다. 당시 국민국가를 준비하던 각 국의 왕들은 이런 하급관리가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었다. 이 결과 왕들은 따로 대학을 세우려고 하였다. 이로 인해 당시 교육기관을 독점하고 있던 교회와의 충돌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하지만 대학은 여전히 성직자를 양성하는 것이 주된 임무였다. 13세기에 들어오면서 이 대학에 순수한 학문을 공부하기 위해 입학하는 일반인들이 늘기 시작하면서 대학에서 성직자와 일반인들의 갈등이 일어나게 된다. 일반인들은 성직자 교육을 중심으로 짜여진 대학의 교과과정에 불만이 많았다. 하지만 교회는 대학을 자신들이 운영하고 있는 한 이 교과과정을 변경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유럽에서는 교회가 아닌 왕들이 건립한 대학이 등장하게 된다. 여기서는 신학이 중심이 아니라 하급관리로서 필요한 과목을 중점적으로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교회가 세운 대학이나 왕이 건립한 대학의 공통점은 교수와 학생들의 자율권이 전혀 없었다는 점이다. 즉 여기서는 필요한 사람을 양성하는 임무만이 있었다. 특히 왕이나 제후가 세운 대학에서 이런 점이 더 심했다는 사실이다. 이 결과 학생과 교수들은 왕과 제후의 간섭에서 벗어난 자율적인 대학을 구성하기위해 조합을 구성하게 된다. 하지만 조합이 완전하게 되기 위해서는 자체적인 규칙이 존재해야만 했다. 대학이 독립적인 존재가 되는 것을 왕이나 제후는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이 교육기관은 자신들이 필요한 봉사자를 양성하는 곳이지 지식을 위한 지식만을 공부하는 곳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대학은 왕과 제후와 대립하게 되자 교회에 손을 벌렸다. 지적 산업을 독점하고 있던 교회는 이 손길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 결과 대학의 지식인들은 왕과 제후의 손길을 벗어나는 데는 성공했지만 다시 교회의 질서 속에 편입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이런 사실은 당시 대학의 총장은 항상 고위성직자의 몫이었다는 데서도 잘 드러난다. 이 결과 대학과 지식인들은 교회의 간섭과 교회적인 가치를 가르치는데 동의해야만 했다. 그러나 대학은 총장과 교회의 지도를 제외한다면 모든 것이 자유로운 상태였다. 이는 요건만 성숙된다면 대학 자체가 언제나 교회로부터 독립할 수 있는 잠재적 역량이 갖추어진 것을 의미했다. 이 결과 대학의 지식인 사회는 자신들만의 독특한 문화를 만들어 냄으로서 지식인=특권계급이라는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이렇게 되는 데는 중세 말기의 새로운 조류가 큰 도움이 되었다. 이른바 르네상스라고 하는 인문주의적 정신은 대학과 지식인이 독립된 존재로 나아가는데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이들의 독립에는 커다란 장애가 있었다. 바로 돈이었다. 경제력이 없는 대학은 결코 살아남을 수 없는 것이었다. 재정의 악화로 대학은 교회의 종이 아니라 국가의 하인이 되기로 결정하게 된다. 즉 새로 대두하는 국민국가의 지식인 공급처로 자신을 스스로 규정하면서 생존의 길을 모색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결과 대학과 지식인 사회는 국민국가에서 권력의 한쪽 끝을 잡을 수 있게 되었고 자신들만의 영역을 구축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이 택한 방법은 그 옛날 자신들이 그토록 벗어나고자 하였던 교회의 방식을 따른 것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이 속한 사회와 제도의 변화를 고려하지 않았다. 이들은 정치권력의 이론을 제공함으로서 자신들의 특권을 향유하기를 원했다. 이들 대학의 지식인들은 르네상스의 원동력이 되었던 인문주의자들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집단이었다. 대학의 지식인들이 혈통적으로는 귀족과 관계없는 사람들인 반면에 인문주의자들은 태생적으로 귀족이었다. 그러므로 인문주의자들의 활동무대는 궁전이었다. 이들은 궁전에서 텍스트를 연구하고 재담을 나누며 자신들은 결코 지식을 파는 사람이 아님을 강조하였다. 대학의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생계를 위해서 교과서를 펴냈지만, 인문주의자들은 이렇게 하는 것은 노동자가 일을 하는 것과 같이 천박한 것으로 경멸했다. 인문주의자들은 처음부터 가난과는 거리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반면 대학의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지식을 팔고 이를 살 사람이 있어야만 살아갈 수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중세의 그림에서 고독한 인문주의자, 학생들에게 둘러싸인 교수의 이미지가 얼마나 공허한 것인지를 알 수 있다.

 

끝으로 중세의 지식인을 양산하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집단이 교회란 사실이다. 교회는 자신의 사명인 모든 사람에게 열린 기회를 준다는 입장 아래 교육을 개방함으로서 일반 농민의 자식들이 기초적인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하였고 다시 전문적인 교육을 받게 하는데 일조하였다. 물론 이 교육이 성직자를 양성하는 교육이었을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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