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로운 수의 역사
조르쥬 미프라 지음 / 예하 / 2002년 9월
평점 :
절판


얼마전에 신문에 인도에서는 구구단을 외우는 것이 아니라 19단을 외운다는 기사를 보았다. 그 기사를 접하면서 우선 떠올린 것은 인도의 수학전통이었다. 인도의 수학전통은 그 땅의 종교와 아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이 땅에서 생성된 힌두교, 불교, 자아나교와 같은 종교는 인간과 사물을 바라보는 사고가 상당히 개방적이라는 점이다. 이들 종교는 이지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여타 종교-기독교와 이슬람교-와는 달리 확고한 고정점이 없다는 점이다. 그러기에 인도는 자신들에게로 들어온 모든 문화를 자신들의 것으로 흡수하는 괴력을 보여주었다. 이런 사고방식에서 수학은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조건이 되었던 것이다.

인도의 수학이 우리들에게 그리 큰 인상을 남기지 못했던 것은 고래로부터 인도의 수학자는 시인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산술적 문제도 곧잘 시적 운율속에 담아 제시하곤 했다. <사랑의 유희를 하는 동안 목걸이 하나가 깨졌다. 그러자 한 줄의 진주가 달아났다. 그중 여섯번째 진주가 떨어졌ㄷ, 땅에. 다섯번째것은 남았다, 잠자리 위에. 삼분의 일은 젊은 여인이 건졌다. 열번째 것은 연인이 붙들었다. 여섯개의 진주는 줄에 남았다. 독자여, 연인들의 목걸이에는 진주가 몇 개 있었는가?> 이 예문이 수학문제라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그러기에 인도에서는 수학의 건조한 공식을 외우는데도 시가 이용되었다.  이것은 우리가 구구단을 외울때 운율에 따라 외우고 그것이 평생을 기억속에 남아있는 것을 보면 그 시적 효과가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수에 관련된 몇 가지 책을 읽어봤지만-수학의 흐름(김용운), 영에서 무한까지(콘스탄스 레이드), 수의 신비와 마법, 재미있는 이야기 수학, 파이의 역사-이 책이 가장 재미있게 읽혔다는 점이다. 그만큼 수에 대한 다양한 예와 역사를 풍성하게 담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물론 앞에서 언급한 책들 역시 나름대로 유용한 지식과 정보를 제공해준다. 하지만 흥미와 지식 양면에서 이 책은 만족감을 충분히 준다고 본다. 그만큼 저자는 인도인의 혈관 속에 살아있는 수학적 시감각을 우리에게 여과없이 전해주고 있다. 그럼에도 저자는 서문에서 아주 겸손하게 이 책은 인도에서 만들어져 오늘에 이르기까지 전해내려오는 아라비아 숫자에 관한 것이라고 말한다. 저자의 이런 겸손을 100% 믿을바는 못되지만  인도에서 만들어졌다는 아라비아숫자에 대한 그의 자부심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만큼 저자는 인도가 수학의 종주국이란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이 사실은 세상의 모든 것이 자신들의 손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큰소리치는 중국인들 조차 수학에서는 입을 다물고 있다는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그리고 오늘날 세계의 수학계를 주름잡고 있는 다수의 인도인들을 볼 때 그 자부심 역시 헛된 것이 아님을 알게된다.

하지만 이 책은 인도의 수학은 아주 조금밖에 언급하지 않고 있다. 대부분이 우리가 잘 모르는 원시종족들과 역사속의 민족들이 이용한 수학 혹은 수의 방식을 언급하고 있다. 즉 세계는 넓고 그 안에 다양한 인종이 뒤섞여 살고 있지만 기본적인 수를 발견하는 과정은 아주 유사하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인간의 지성은 인종, 색을 떠나 동일한 선상에 위치해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이라 하겠다. 즉 수의 발견에서 인종적, 지리적 차이는 무의미한 것이다. 이들 원시적 수학자들은 삶속에서 기본적인 수를 삶과 연관시키며 창안하였다. 그 예를 하나씩 읽어갈 때마다 인류의 지성이 아주 오랜 옛적부터 환상적인 모험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과학 혹은 수학에서의 환상은 공상이 아니라 언젠가 반드시 실현될 아직 오지 않은 현재라는 사실이란 점이다. 그래서 수를 가까이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세상의 차이란 의미가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수학자들은 어찌보면 인류 역사에 최초로 나타난 평등주의자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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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5-01-17 1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나라 어느 초등학교에서도 19단을 외운답니다.
수학을 전공하는 대학생들과 함께 문제를 푸는 걸 봤는데
아이들의 완승으로 끝나더군요.
이 책 한번 읽어보고 싶네요.^^

dohyosae 2005-01-17 1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방문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스파르타
험프리 미첼 지음, 윤진 옮김 / 신서원 / 2000년 11월
평점 :
품절


  스파르타 교육이라고 하면 흔히 엄한 규율과 강압적인 방식으로 가르치는 것을 의미한다. 교육에도 스파르타식이라는 이름으로 근대 이후 서구에서 유행했을 정도로 이 나라만큼 작으면서도  역사상 크나큰 흔적을 남긴 국가는 드물었다. 우리는 스파르타라는 고유명칭을 곧잘 접두사처럼 사용한다. 스파르타~라고 명명되면 뒤에 어떤 단어가 붙어도 그것은 인간의 살과 피를 기대하기보다는 규율과 복종의 체제를 연상한다. 과연 스파르타의 진짜 모습은 무엇이었을까. 이 책은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은 1952년에 출판된 것을 2000년에 번역한 것이기에 반세기의 흐름속에 드러난 스파르타에 관한 연구실적이 반영되어 있지 않다는 약점이 있다. 하지만 이 책은 오래되었지만 나름대로 장점도 많이 지니고 있다(이에 대한 보충으로 역자는 뒤에 이후 연구된 스파르타에 관한 서적과 논문의 목록을 첨부하고있다).

저자는 스파르타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을 제고할 수 있도록 당대 스파르타에 대하여 언급한 많은 기록자들의 저서를 인용하면서 당시까지의 연구결과와 접목시켜 스파르타의 올바른 모습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그의 분석은 스파르타에 대해 단편적인 지식으로 알고 있던 여러가지 상식적인 내용이 실제와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를 느끼게 한다.  물론 어떤 면에서는 맞는 이야기이지만. 저자는 고대 그리스의 저술가들이 스파르타에 대해 언급할 때 자신들의 경험으로 이해되지 않는 사실은 모두 스파르타의 법률을 기초한 뤼쿠르고스에게로 돌린다는 점을 예리하게 비판하고 있다. 사실 많은 부분의 정보가 뤼쿠르고스로부터 시작되고 있음을 이 책을 읽으며 알게 되었다. 뤼쿠르고스의 이야기가 사실보다는 전설에 입각해 있다는 사실이 바로 스파르타의 진실에 접근하는데 얼마나 큰 장애물인지를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당대의 철학자인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를 통해서 언급되어 있는 스파르타의 모습을 정확하게 재구성하고 있다. 이들 대사상가들마저도 당시 스파르타에 대한 지식을 잘못 왜곡하고 있는 경우도 있었다. 이 왜곡의 끝자락에는 항상 뤼쿠르고스의 이야기가 있다는 사실 또한 흥미로웠다.

스파르타에 대한 어떤 역사적인 지식을 얻기 위해서 이 책을 선택하려는 독자들은 신중히 생각해 봐야만 한다. 왜냐하면 이 책의 저자인 험프리 미첼교수는 그리스 역사를 전공한 사람이 아니라 경제사가이기 때문이다. 그의 이런 장점은 스파르타의 토지보유제도나 화폐와 같은 공공재정의 장에서 아주 빛을 발하고 있으며, 다른 곳에서도 경제사가로서의 꼼꼼함이 저술의 장점으로 드러나고 있다. 하지만 역사적 흥미의 입장에서는 매우 취약하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스파르타를  통상적으로 헬라스의 일부 혹은 약간 이질적인 헬라스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어나가면서 스파르타는 헬라스가 아니라 스파르타 그 자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스파르타인들은 헬라스에 존재하던 수많은 도시국가들 가운데서 독특하게 그들만의 고유한 제도를 통해 자신들만의 고유성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이들은 헬라스적인 자율성과 이성의 존중보다는 규율과 복종의 가치를 더 귀하게 여긴 집단이었다. 이런 사실은 이들이 7살부터 60살에 이르기까지 군대적 규율속에서 생활했다는 데서 잘 드러난다. 그들의 공동생활과 공동식사가 헬라스 세계에서는 경이의 대상이 되는 관습이었다. 물론 공동적인 것은 30세 이후에는 개인의 가족과 가정을 꾸릴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짐으로서 약간 느슨하게 되지만.

스파르타인은 태어나서 구성원으로서 적합한지를 심사받은 이후부터 매 단계마다 자신에 맡는 집단에 소속되어야만 했고 17세 이후에는 전투에 참여할 준비를 하고 있어야만 하였다.  그리고 24살 이후에는 전투 대열의 맨 앞에 설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우리는 스파르타가 아테네와 전 헬라스의 맹주자리를 놓고 벌인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승리한 것이 강철과 같은 규율과 복종이라고 알고있다. 그것은 어느 정도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런 타율적인 체제는 자신의 경쟁자가 소멸된 순간 철저하게 붕괴되는 길을 걸었다. 그만큼 스파르타의 체제는 구성원들을 훈련시킨 본연의 이유인 전쟁이 사라지면서  힘을 잃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결과 스파르타의 미덕-이것 자체도 헬라인들이 자신들이 의견을 통일을 보지 못하고 혼란된 상태일때만 부러워한-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구적인 것인가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 전역이 로마에 의해 정복되었을 때 로마인들은 자신들과 유사한 기질을 가지고 있는 스파르타인들을 잘대해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로마인들은 스파르타인들의 발상지로 여행을 가는 것을 좋아하였다. 아마도 이 과정에서 스파르타의 신화가 확립된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볼 수 있다. 관광지의 상품은 언제나 과장된 것이기에...

이 책은 스파르타의 신화를 벗겨내고 실체에 가깝게 접근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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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바꾼 씨앗 5 가지
헨리 홉하우스 / 세종(세종서적) / 199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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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여기서 말하는 다섯가지 씨앗이란  키니네, 설탕, 차, 면화, 감자를 말한다. 그리고 저자는 각 씨앗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붙이고 있다. 열대림을 개척한 키니네, 카리브해를 검게 물들인 설탕,. 아편 연기에 스러진 차향, 남북을 갈라놓은 면화, 신대륙 이주를 부추긴 감자라는 부제를 통해서 이 씨앗이 파생시킨 역사적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키니네는 말라리아- 이 질병의 이름은 이탈리아어에서 유래하였다. 나쁜이란 말라와 공기의 아리아가 합성된 말이다-의 치료제로 모기가 창궐하는 곳에서는 쉽게 보는 질병이었다. 우리의 기록에도 학질이란 명칭으로 자주 등장하는 병이 바로 말라리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학을 뗀다라는 말의 주범이기도 하다. 하지만 말라리아의 본고장은 열대지방이라 할 수 있다. 서구 유럽이 지리상의 발견 이후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와 동남아시아로 진출하면서 가장 먼저 만난 질병이 말라리아였다. 3일열이라고 불릴만큼 주기적으로 열이나고 온 몸이 떨리는 이 질병은 목숨까지 잃을 정도로 위력이 대단하였다. 하지만 키니네가 말라리아 치료제로 약효가 인정되자 세계는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노동력의 대이동을 경험하게 되었다. 이 노동력의 이동으로 인하여 미개척지가 급속히 개발되는 효과를 가져왔지만 그에 따른 서구 제국주의의 침투 또한 용이하게 되었다.

키니네가 백인 제국주의자들의 미개척지로의 이동을 가능하게 한 것이라면 설탕은 아프리카 흑인들의 아메리카 대륙으로의 강제적 이동을 촉발한 주범이라 할 수 있다. 스페인 사람들에 의해 아메리카 대륙이 발견되고 원주민들이 조직적으로 학살된 이후 노동력이 부족해진 스페인 사람들은 궁여지책으로 아프리카의 흑인을 이 지역에 대량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이른바 노예무역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바로 그 촉매가 사탕수수에서 나오는 검은 설탕과 그에따른 부수적인 산물인 럼주였다. 설탕, 흑인, 럼주에 의한 대서양을 사이에둔 아프리카, 유럽, 아메리카의 삼각무역은 유럽 제국주의의 자본축적을 가능하게한 시작이었다.  이 자본의 축적으로 유럽은 다른 대륙보다 먼저 산업혁명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 밑바닥에 카리브해에 강제로 이주한 흑인들의 피와 눈물과 땀이 깔려있는 것이다.

차는 근대 이전까지 도자기와 함께 아시아의 대표적인 수출품이었다.  차와 도자기는 유럽의 은을 중국으로 유입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차와 도자기는 아주 이상적인 결합체였다. 차를 수출할 때 배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바닥짐 대용으로 도자기를 이용하였다. 이 선단이 유럽에 도착하면 차와 바닥짐으로 이용한 도자기를 함께 처분할 수 있었다. 그리고 돌아올 때는 유럽의 상품을 싣고 바닥짐 대신 모래를 싣고 왔다. 중국으로서는 이런 거래에서 손해볼 소지가 전혀 없었다. 당시 유럽은 아시아와의 무역에서 만년 적자를 기록하고 있었다. 유럽은 이런 무역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아편을 차와 도자기의 대체품으로 활용하였다. 이제 중국으로 오는 유럽의 배는 아편을 싣고 와서 중국상인들이 그랬던것처럼 도자기를 바닥짐으로 싣고 유럽으로 향했다. 이 결과 중국의 재정은 급속히 악화되고 말았다. 이제 반대로 중국의 은이 유럽으로 흘러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을 저지하기 위해 아편전쟁이 일어나고 아시아 제국은 서구 제국주의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된다.

목화는 섬유 가운데 가장 완벽한 조건을 갖춘 소재라고 볼 수 있다. 가볍고, 흡수성이 좋으며 게다가 보온성까지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 목화의 가장 큰 재배지는 북아메리카 남부였다. 대체로 북위 37도선 이남지역에서 목화는 담배와 함께 아메리카 남부의 부를 축적하게하는데 가장 큰 공헌을 했다. 하지만 남부는 조방농업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그것은 남부가 노예를 기반으로 둔 사회였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남부는 거대한 부를 흡수한 만큼 기계화되지 못하고 있었다. 남부의 모든 것은 노예들의 손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손이 많이가는 면화산업 역시 노예들의 손을 거치지 않으면 불가능하였다. 하지만 유럽에서 조면기가 개발되고 아메리카 북부에서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면화로 만든 수입품에 관세를 부여하는 문제로 남과 북은 대립하게 되었다. 지주로 구성된 남부의 입장에서는 관세의 부과가 이롭고, 노동자들이 중심이 된 사회를 구성하고 있던 북부의 입장에서는 관세의 폐지가 유리하기 때문이었다. 이 결과 남과 북은 전쟁에 돌입하게 되고, 북의 승리로 아메리카 사회는 농업주도의 사회에서 공업주도의 사회로 급변하게 되었다.

감자는 스페인 사람들에 의해 남아메리카에서 유럽으로 전래된 식물이다. 이 식물이 처음 전래되었을 때 유럽인들은 자신들이 조만간 이 식물에 의존하게 될지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하였다. 감자는 유럽인들의 주식이 되었고, 그 의존도가 특히 아일랜드에서는 높았다. 아일랜드는 그 지리적 위치에 따라 물고기는 풍부하였지만 식량은 전량 이웃인 잉글랜드를 통해 수입하고 있었다. 하지만 감자가 이 섬에 전래되면서 주민들의 식생활이 변모하게될 만큼 감자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졌다. 이 결과 감자의 작황에 따라 아일랜드는 큰 영향을 받게 되었다. 결국 1845년 감자잎마름병에 의한  4-5년간의 대기근이 닥치자 아일랜드는 파국에 직면하게 되었다. 영국은 고의적으로 아일랜드에 원조를 지체함으로서 비극은 더욱 심화되었다. 이 결과 아일랜드의 9백만 인구 가운데 약 5백만명 이상이 일차세계대전 이전까지 아메리카로 이주하였던 것이다. 아일랜드의 비국은 대체작물이 없는 농업방식, 영국에 의존하는 식량정책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역사에 뚜렷하게 보여주었다. 아일랜드의 사례는 식량의 자급화라는 문제에서 지금도 고려해봐야만할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씨앗을 통해 광범위한 세계사의 흐름 속에서 이들이 파생시킨 파급효과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이 씨앗의 의미는 과거에 한정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미래는 이 씨앗들에 의해 더 크게 좌우될 수 도 있다.  그 가공할 씨앗의 영향력을 이 책은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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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빈의 일요일
조르주 뒤비 지음, 최생열 옮김 / 동문선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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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드레 모로아는 그의 저서 <프랑스사>에서 부빈전투에 대해 아주 간단하게 기술하고 있다. <1214년 부빈Bouvines에서 그는 당시로서는 대단히 신기한 일이었으나 2만명의 시민으로 구성된 보병대의 지원을 받아 반동적인 봉건부대와 외국침략군을 격파했다. 이 승리가 카페 왕조의 왕권을 공고하게 만들었다. 이 승리는 자신들의 통일을 의식하게 된 한 국가의 해방이라는 점에서 온 프랑스인의 환호와 환영을 받게 되었다.>

프랑스인들이 존엄왕 필립Philippe Auguste으로 부르는 필립 2세가 즉위한 12세기 후반은 프랑스가 유럽에서 2류왕가의 대접을 받고 있던 시기였다. 잉글랜드의 플란타지네트 왕가의 앙쥬제국과 독일제국 사이에  위치한 필립 2세의 가장 큰 문제는 앙쥬가와의 대결이었다. 자신의 신하이면서 자신보다 더 넓은 땅을 가지고 있던 헨리 2세와의 장기간에 걸친 투쟁은 곧 카페 왕가의 존립문제와 직결된 것이었다. 솔직히 역사학자들은 플란타지네트 왕가의 헨리 2세와 토마스 베케트의 대립, 아들인 리차드와의 대립, 그리고 리차드와 동생인 존과의 대립만 없었다면 잉글랜드의 프랑스 정복은 시간문제였을 것으로 보고있다.

특히 필립 2세는 사자왕 리차드가 사망한 뒤 앙쥬 제국의 통치를 이어간 실지왕 존의 시대에 봉건적인 주종관계를 이용한 법률관계를 이용하여 존으로부터 노르망디, 메인, 앙쥬, 뚜렌, 포아투의 영지를 몰수할 수 있었다. 이 결과 프랑스는 절체절명 위기의 순간에 기사회생할 수 있었다. 역사학자들은 부빈의 전투 이전에 이미 이 지역을 필립 2세가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존왕으로부터 몰수한 순간 프랑스가 탄생했다고 믿고 있다. 부빈의 전투는 그 사실을 확인한 하나의 절차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프랑스인들이 부빈의 전투에 열광하는 것은 국가의 재탄생이란 역사적 사실에 하나의 상징이 필요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이 부빈의 전투는 평범한 전투가 아니라 신의 의지와 프랑스의 영광이 합치된 전쟁으로 승화시켰던 것이다. 당시 필립 2세에 대적했던 잉글랜드 왕 존, 신성로마황제 오토, 플랑드르 백작 페르난두, 블로뉴 백작 르노의 연합군은 교회와 부르조아의 지지를 받고있던 필립 2세와 격돌하게 되었다. 그리고 저녁 무렵 프랑스의 승리가 확정되었고, 이 소식이 프랑스 전역에 퍼지게 되었다. 파리에서는 일주일간 주야로 시민들이 거리로 몰려나와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고, 교회는 프랑스 전역에서 감사의 미사를 드렸다. 왕도 자신에게 대역죄를 저지른 죄인에게마저 대사면령을 내릴 정도로 이 승리의 파장은 컸다. 역사가들은 이 승리로 인해 프랑스는 왕가의 왕국에서 <국민공동체>라는 개념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중세 시대에 전투는 많은 제약을 받았다. 일반적으로 신에게 봉헌된 일요일은 전쟁이 원칙적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이를 어길 경우에는 교회의 제재도 각오해야만 했다. 그러나 신앙을 수호하기 위해서는 이런 규정은 종종 무시되었다. 부빈의 전투가 일요일에 일어난 것은 카페 왕가와 침략군의 구도를 신앙의 수호로 변형시키는 계기로 작용되었다. 프랑스는 후일 로마 교황청에 의해 <교회의 딸>이란 칭호를 얻을 만큼 로마 가톨릭의 중요한 지지세력이었다. 즉 카페 왕가는 신앙의 수호자로 침략자는 파괴자로 묘사됨으로서 부빈의 전투가 단순히 체제 수호가 아니라 신앙을 수호하는 성전임을 은연중에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고의 맥락은 프랑스가 위기에 처할 때 마다 부빈의 전투가 새롭게 부각되었다는 사실에서 잘 알 수 있다. 즉 부빈은 역사적 사실에서 프랑스의 단결이 요구될 때 마다 새롭게 각색되어 등장하는 하나의 신화적 구호로 승화되었던 것이다. 동일한 사실이 시간을 두고 반복되면서 어떻게 변형되어 신화로 되어가는 가를  조르주 뒤비는 책 뒤에 관계 사료를 첨가함으로서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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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 기독교와 동서문명
김호동 지음 / 까치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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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세기경 초기 기독교의 교리 형성과정에서 이단으로 몰리게 된 네스토리우스의 주장은 더 이상 서구 세계에 설 자리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 결과 네스토리우스의 추종자들이 선택한 것은 서구의 지배에서 벗어난 곳을 찾게 되었다는 점이다. 당시 로마제국은 지중해를 內海로 한 대제국을 건설하고 있었기에 네스토리우스 교도들은 로마와 강력한 라이벌 관계에 있던 페르시아지역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이 결과 지금의 시리아와 이란 지역으로 이주한 이들은 비로소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이 지역에는 예로부터 페르시아의 국교로 지정된 강력한 조로아스터교가 있었다. 네스토리우스교도들은 정착과정에서 이들 기존의 종교로부터 극심한 박해를 받았다. 이들이 박해를 받은 이유는 서구세계와 연결되어있다는 의혹 때문이었다. 이를 불식하기 위해 네스토리우스교는 424년 페르시아교회의 완전 독립을 선언하였다.

그리고 7세기경 페르시아가 이슬람세력에 점령된 후에도 네스토리우스교는 이곳을 근거지로 삼아 인도. 몽골. 중국 등지로 포교활동을 계속하였다. 이슬람의 확장이 네스토리우스교를 더욱 동쪽으로 확장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이 결과 네스토리우스교는 유목민의 종료로 자리 잡을 수 있게 되었다. 네스토리우스교는 초원의 길에 위치한 오아시스 도시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소규모 공동체였다. 그러기에 네스토리우스교 공동체는 강력한 외부의 힘에 아주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이런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네스토리우스교는 자신들을 보호해줄 강력한 후원자를 얻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들은 거대한 이슬람 제국의 거대한 바다에 외롭게 고립되어 있는 섬과 같은 처지였다. 그러기에 이슬람의 도움은 기대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들은 초원의 유목민족을 자신들의 보호자로 선택하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들 유목민족이 강력한 제국을 건설할 때는 네스토리우스교는 교세를 확장할 수 있었지만, 반대의 경우에는 극심한 박해를 받아야만 했다.

이런 네스토리우스교의 특성이 서구에 기독교 왕국 혹은 프리스트 존의 전설로 알려지게 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된다. 네스토리우스교는 5세기 이후 단절되었던 서구 세계와 접촉을 갖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 접촉을 통해서 네스토리우스교는 가톨릭이라는 강력한 경쟁자가 초원으로 흘러 들어오는 것을 방어해야만 하는 모순에 접하게 되었다. 당시 네스토리우스교를 접했던 수많은 서구의 수도사와 상인들은 그들의 종교가 서구의 기독교와는 상당히 이질적인 것이라는 점을 기술하고 있다. 즉 이런 이질감은 네스토리우스교가 기독교의 한 갈래이면서도 서구의 어떤 도움도 받을 수 없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리고 14세기 경 초원지역을 휩쓸었던 페스트의 위력과 자신들의 옹호자였던 몽골족 지배자들의 이슬람교와 라마교로의 개종은 이들에게 치명적인 타격이 되었다. 하지만 이들에게 최후의 일격은 이슬람 세계의 위대한 정복자이며 잔인한 티무르 이 랭-영어권에서는 터멀레인-에 의해 시행되었다. 이 결과 네스토리우스교는 초원의 길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그리고 중국에서도 유목제국인 원이 소멸하고 한족 중심의 명이 건국되면서 원에 의해 우대를 받던 외래 종교들이 극심한 박해를 받으며 약화되었다. 이 결과 중국과 몽골 지역에서 네스토리우스교의 흔적은 간간히 발굴되는 십자가 유물만이 그들의 사라진 역사를 말해줄 뿐이다.

네스토리우스교의 흥망과 쇠퇴는 한 종교가 지역사회에 동화를 거부하고 권력에만 의지할 때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예라 하겠다. 이 책은 또한 종교적 열정에 의해 가속화된 서구의 동방에 대한 관심의 의미가 무엇인지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은 어떻게 보면 한 종교의 운명을 추적한 책이지만 르네 그루쎄의 <유라시아 유목 제국사>의 또 다른 면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정수일 교수로부터 촉발된 <씰크로드학>이 이제는 한 단계 더 발전된 형태로 세부화되어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이 책은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네스토리우스교의 교리는 정통 기독교회가 <그리스도는 하나의 인격으로서 동시에 신이자 인간>이라는 것에 반하여 <그리스도 안에는 신성과 인성이라는 분리된 두 가지 인격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네스토리우스파들은 성모 마리아를 신을 낳은 어머니로 보지 않는다. 이들의 이런 주장은 431년 에페소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단죄되고, 451년 칼체돈 공의회에서 재차 이단으로 단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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