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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시인들의 객담
이형식 편역 / 궁리 / 2003년 3월
평점 :
절판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민간에서 유행하는 이야기의 본질은 해학과 풍자라는 점이다. 중세유럽의 세계는 귀족과 성직자라는 지배계급과 농민계급이라는 피지배계급으로 구분되는 세계였다. 상위 10%에 해당하는 지배계급이 90%의 피지배계급을 지배하는 상황에서 발생하는 부조리한 사태는 농민들의 이야깃거리로 안성맞춤인 재료라 하겠다. 사실 이런 이야기는 데카메론도 있고 캔터베리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이 객담은 이들 이야기 이전의 시기인 12세기 말에서 14세기 초에 프랑스 북부지역-일드프랑스, 플랑드르, 노르망디, 피카르디-에서 유행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책은 Fabliaux라는 제목에서 보듯 우화fabula에 맞닿아 있다. 그런 관계로 내용 자체가 난폭스럽고 외설스러우며 정제되지 않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 거칠음 속에서 지배계급에 대한 조소가 담겨있고, 기층민중의 어리석음에 대한 풍자도 서슴없이 기술하고 있다. 이런 종류의 다듬어지지 않은 내용을 통해 당시 상황을 유추해 볼 수도 있다는 점에서 중세사의 한 부분을 이루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객담에서 가장 많이 취급되고 있는 부류는 성직자계급이란 점이다. 사실 교회는 11세기를 기점으로 일대 쇄신을 가하면서 성직자들의 帶妻를 금지하고 독신을 고수하게 하였다. 하지만 이 제도는 민중들의 지지를 받았지만 성직자들의 반발에 직면하였다. 바로 이런 과도기에 객담의 주제로 성직자들의 여성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은 일반 기층민들이 성직자들을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자료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플랑드르 지역의 양모산업의 발달로 중세시대 후기로 들어가면서 기존의 계급질서와는 다른 계급이 태동하게되는데 그것은 상인계급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경제력을 기반으로 급속하게 새로운 세력으로 떠오르게 되는데 이들은 지배계급도 아니고 그렇다고 농민과 같은 피지배계급도 아닌 제3의 신분이었다. 이들에 대한 농민들의 혜안은 이들이 숭배하는 경제력을 새로운 권력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중세의 시대는 이제 기사의 시대에서 상인의 시대로 넘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은 몰락한 소귀족들이 자신들의 딸을 새로 태동하는 상인계급과 결혼시키려하는 이야기에서 잘 드러난다. 상인계급은 귀족과 혼인함으로서 혈통을 세탁할 수 있었고, 몰락한 귀족은 혈통을 제공하는 대신 경제력을 보장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은 중세 후기로 가면서 더욱 심해지는데 이는 귀족계급의 분화에 따른 필연적인 결과였다. 이런 점은 성직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귀족의 자제들은 고위성직을 차지하고 그렇지 못한 하위 성직자들은 가난한 본당에서 생활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성지계급 내에서의 빈부의 격차는 성직자의 대처와 함께 중세의 농민들이 종교를 가볍게 여기는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객담은 무자비하게 대상을 분해하고 파괴시켜버린다. 이런 어찌보면 언어의 폭력에 가까운 이런 이야기가 모든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었다는 사실은 지배계급이 감정의 배출구로서 이런 것을 어느 정도 허용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즉 중세의 지배계급들은 축제와 종교와 이런 객담을 통해 기층민의 분노와 절망을 적절히 토해낼 수 있는 안전판을 마련해 놓았던 것이다. 우리는 이런 사례로 <바보제>라는 축제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날은 가장 큰 바보를 뽑아 그를 하룻동안 교황이나 왕으로 대접해 주었다. 그리고 그 하루가 끝날 무렵 그에게 음식물 찌꺼기를 던지며 마감했다. 이는 마치 종교의 속죄양과 같은 느낌을 갖게한다.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덮어 씌우고 그를 학대하고 조롱함으로서 울분을 풀어제끼는 이런 형태의 축제는 가장 인기있는 것 가운데 하나였다.
이 객담의 세계를 읽다보면 풍자와 해학은 인간의 시름을 달래주는 가장 확실한 묘약임을 알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