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황제 어떻게 살았나 - 절대권력 뒤에 숨겨진 황제들의 본모습
쟝위싱 지음, 허유영 옮김 / 지문사 / 2003년 1월
평점 :
절판


궁궐을 가보면 踏道라는 것이 있다.  궁궐의 월대를 올라가는 층계 가운데에 온갖 조각을 하여 놓은 곳이 있는데 그곳이 답도이다. 이 답도는 옛날 황제들의 삶을 단편적으로 엿볼 수 있는 유물이라 하겠다. 이 답도는 지상과 천상을 연결해주는 무지개와 같은 것으로 도교적인 발상에서 나온 것이라 한다. 이 답도의 위는 옥상황제가 거처하는 선경이고 그 아래는 인간의 속계인 것이다. 황제는 이 답도를 통해 매일 인간의 세계로 내려와 정사를 살피고 밤이면 다시 선계로 올라가는 상징적인 행동을 반복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황제는 이름만 인간이었을 뿐 모든 것은 하늘의 예법을 따랐던 것이다. 특히 중국의 황제는 天子라고 부르면서 스스로 하늘의 아들임을 선언하였다. 그렇게함으로서 중국의 황제는 철저하게 인간적인 풍모를 상실하였다. 중국의 황제는 궁궐이라는 물리적인 장벽 이외에도 환관이라는 인위적인 장벽에도 둘러 싸여 철저하게 자신의 백성과 격리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동진의 간문제가 민정시찰을 나갔다가 들에 누렇게 익은 곡식을 보고 그것이 무엇이냐고 신하에게 물었다는 고사는 황제가 얼마나 세속과 동떨어진 세상에서 살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한 예에 불과하다.

백성과 유리된 황제의 모습은 왕조만의 특징은 아니다. 그렇지만 오늘날과 차이가 벌어지는 민도와 정보와 같은 체계가 미비한 시절에 이런 단점은 지배자의 신비감을 더해주어 권위를 세우는데는 도움이 되는 측면이 있지만 민심의 동향을 파악하는데는 무용지물이라는 것 역시 사실이었다. 이런 경향은 왕조의 쇠퇴기에 더욱 심화되어 왕조의 몰락을 가속시키는 동인으로 작용했다.

중국의 황제는 인간세상의 사람들이 아니었기에 모든 것을 주변의 환관이나 시녀에 의지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황제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모든 행동 하나도 자신의 의지대로 할 수 없었다는 점은 엄청난 모순이라 하겠다. 실제로 황제는 궁궐에서조차 가마를 타고 이동하였다. 그리고 층계를 오를때도 가마를 이용했지만 그렇지 못할때는 양 옆의 환관의 도움을 받아 이동하였다. 이런 관습으로 인해 창업자가 왕조를 건국한 뒤 2세대로 지나지 않아 황제의 호방함은 급속하게 사라지고 제도화된 격식만이 남게되는 경우가 많았다. 사실 황제가 자유롭게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환관의 행동반경은 좁아지기 때문에 이를 견제하는 환관들은 격식이 제도화되는 것에 따른 가장 큰 수혜자들이었다. 이들은 황제의 일거수일투족을 자신들의 노동력으로 제어함에 따라 권력의 중심부에 위치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중국의 역대 황제들이 환관제도의 부작용과 폐해를 잘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청조 말기까지 이를 폐기하지 못한것은 황제권은 환관들의 도움이 없이는 움직일 수 없는 권력의 일체화가 이루어졌기 때문이었다. 이는 황제들이 스스로를 하늘의 아들이라고 규정한 이래로 발생한 필연적인 결과였다. 인간이면서도 인간이 아닌 황제를 대신할 인간이 필요했던 황제들은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닌 내시를 만들어 이들을 통해 정치를 하는 환관제도를 만들고 스스로 그 체제의 덫에 걸린 형국이 된 것이다.

어쩌면 황제란 커다란 권력의 우리에  갇힌 움직일 수 없는 자바-스타워즈에 나오는 뚱뚱이-와 같은 존재가 아니었을까. 권력은 있지만 움직일 수 없는 존재. 그것이 바로 화려함이란 수식어로 치장한 황제의 본질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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