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문서로 본 조선과 일본의 의사소통 경인한일관계 연구총서 46
이훈 지음 / 경인문화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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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외교의 기본은 사대외교와 교린외교였다. 사대외교는 조선과 중국(명과 청)과의 외교이고, 교린외교는 조선과 일본, 유구와의 외교였다.

조선과 중국의 외교관계는 말 그대로 책봉을 바탕으로 한 사대외교였기에 조선이 중국의 아래에 위치한 외교였다.

반면 교린 외교란 중국으로부터 책봉을 받은 국가간의 대등한 외교관계였다. 그러나 일본은 고대로부터 중국으로부터 책봉을 받지 않은 국가였기에 조선으로서는 일본과의 외교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조선이 건국하기 전에 일본의 실정막부의 족리의만이 명으로부터 일본국왕으로 책봉받음으로서 비로소 조선과 일본의 외교가 시작될 수 있었다. 이후 조선과 일본은 5백여년 간 지속적인 외교를 펼치게 된다.

이 책은 임진왜란 이후 조선 통신사로부터 시작되는 외교에 중점을 두고 있기 때문에 조선 전기에 펼쳐진 일본과의 외교관계는 생략되어 있다. 다만 임진왜란 이후 조선은 일본의 움직임을 파악하기 위해 국가 대 국가로서 외교를 펼치게 된다. 그리고 일본의 입장에서는 조선이 동아시아에서 자신들과 외교관계를 튼 유일한 왕조였기에 이를 통해 자신들의 위상을 과시하려 하였다.

조선 역시 전반기 교린외교라도 일본을 하대한 기미교린에서 일본의 무력을 실감하고 난 이후에는 복합적인 감정이 있음에도 일본을 자극하지 않으려 하였다. 이를 잘 알고 있는 일본은 이를 통해 자신들의 국격을 최대한 조선과 맞추려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은 명청 교체기 속에서 청에 굴복하는 최대의 국치를 맛보았지만 일본은 덕천가강의 강호막부가 시작되면서 국가적 자신감에 차 있던 시기였다. 일본은 이런 자신감을 바탕으로 자신들은 당唐 이후의 중국 문물을 그대로 보전한 국가라는 소중화주의가 대두하였다. 즉 일본은 한당漢唐 이래 끊어진 중국의 고유한 전통을 그대로 보전한 국가라는 자부심이 나타났던 것이다.

조선은 명의 멸망과 청으로부터의 굴욕을 받은 이후 조선만이 명의 정통성을 그대로 계승하였다느 소중화小中華로 침잠하였다. 조선이 명의 후계로 자처하는 사이 일본은 일본, 인도, 중국이라는 고대 세계관 속에서 자신들의 위치를 찾았고, 네덜란드와의 접촉을 통해 일본, 오란다, 중국이라는 근대적 세계관으로 발돋음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격변 속에서 조선과 일본의 외교는 교린을 바탕으로 외교가 전개되었다. 조선과 일본의 외교는 직접외교가 아니라 대마도를 통한 간접외교 방식으로 전개되었다는 점도 특이하다. 그리고 조선의 통신사가 일본에 도착하여 덕천막부가 있는 강호까지 통신사가 간 반면 일본은 부산과 동래의 왜관에 한정하여 외교를 펼쳤다는 점이다.

조선과 일본의 외교는 조선국왕과 일본막부의 장군간의 외교가 아니라 막부의 지시르 받는 대마도주가 외교서신을 조선의 예조에 보내는 형식으로 지속되었다. 이런 형식은 많은 문제점이 있었지만 조선과 일본의 유일한 외교적 통로였기에 다른 대안이 없었다. 이런 간접 외교방식은 일본이 명치유신을 통해 막부가 물러나고 천황이 직접 통치하게 되면서 막을 내리게 된다.

조선과 일본의 외교관계는 조선국왕과 일본 막부의 장군간의 외교였다. 하지만 일본에는 장군이라는 실질적인 통치자 위에 형식적인 천황이란 존재가 있었다. 조선에서도 이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외교의 주체를 누구로 할 것인지 고민할 필요가 있었지만 실질적인 통치자와의 외교관계를 지속하였다. 하지만 일본이 명치유신을 단행하고 막부장군을 축출한 뒤 천황의 통치체제가 실현되면서 조선국왕과 일본천황의 관계가 재 설정되어야하는 문제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이 책은 이런 조선과 일본의 후반기의 여러 외교 문제를 외교서식을 통해 재미있고,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지금처럼 복잡한 동북아시아의 정세를 보면 우리는 지금 사대외교를 하고 있는 것인지 교린외교를 하고 있는것인지 곰곰히 생각하게 한다. 외교란 자신의 자만속에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세종대왕이 대마도를 정벌하자 일본은 조선을 만만히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한쪽 벽을 허물었다고 생각한 일본은 조선과 대등한 외교관계를 실행하려 지속적으로 노력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조선과 일본 모두 자신들이 중국의 정통후계자란 소중화사상 속에서 서로를 바라보았다는 점은 재미있는 점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일본은 소중화를 통해 근대적 세계관으로 나아간 반면 조선은 소중화속으로 자신을 침잠沈潛시켰다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여러가지 복잡하고 아쉬운 생각이 드는 것은 나의 착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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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찰의 서 문명텍스트 38
우사마 이븐 문끼드 지음, 김능우 옮김 /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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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찰의 서는 제목처럼 심오하고 어려운 책이 아니다. 오히려 재미있게 읽히는 한 개인의 역사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오래 전 레바논 출신으로 프랑스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민 말루프의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을 읽었던 적이 있다. 이 책에서 아민 말루프는 유럽 중심의 십자군 전쟁의 시각을 아랍인의 시각으로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아민 말루프는  우사마 이븐 문끼드라는 저자의 책을 인용하기도 했는데 그가 인용한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아민 말루프는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에서 실제로 아랍의 방대한 자료를 섭렵하여 지금까지 유지해온 유럽 편향적인 십자군 전쟁의 맹점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었다. 우사마 이븐 문끼드의 이 책 역시 서구 편향적 십자군 이야기에 맛을 들인 우리들의 시선을 교정해 줄것이다.

성찰의 서는 제1차 십자군 전쟁으로 예루살렘이 함락된 시기에 태어나 쿠르드의 위대한 영주 살라딘이 예루살렘을 해방하는 것을 본 인간의 이야기이다. 십자군은 이름처럼 종교적으로 거룩한 전쟁이 아니었다. 탐욕과 배신과 위선이 십자군의 실체였다. 자신의 신앙을 고수하기 위해 타인의 신앙을 무시하고,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타인의 행복을 무너뜨린 십자군의 실체는 예루살렘이란 상징으로 인해 너무도 왜곡되었다. 실제로 십자군의 예루살렘 정복은 성지의 탈환이 아니라 피의 기록이었다. 그 무모한 학살은 살라딘이 예루살렘을 해방했을 때 보여준 아랍의 관용과는 너무도 다른 것이었다.

예루살렘 함락의 비극은 이 당시 태어난 우사마를 비롯한 동시대의 아랍인들에게 서구의 야만성을 각인시켰다. 이들은 오늘날 팔레스타인 사람들처럼 빼앗긴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해 거룩한 성전에 자신을 바쳤다. 하지만 그 당시 아랍의 상황은 그렇지 못하였다.  분열된 아랍세계는 단일한 지도체계를 갖추지 못하고 독립적으로 유럽의 침입자들과 싸우거나 유대를 맺어야 했다. 우사만의 기록에도 나타나듯 유럽의 병사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용맹스런 존재였다. 이런 존재를 분열된 아랍은  감당할 수 없었다. 

우사마가 이런 분열된 아랍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은 언제나 한결같다.  '알라의 위대함'이 그것이다. 아랍이 이렇게 된 것은 알라의 좀 더 큰 뜻이 작용하기 위한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즉 알라의 의지에 의해 자신들의 성지를 야만족에게 빼앗겼다면 그 역시 알라의 의지에 따라 다시 해방시킬 것이란 믿음이 그것이다. 그의 이런 관점은 인생을 보는 관점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알라의 뜻이 그러하다면 죽을 수밖에 없고 아니라면 살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살고 죽음의 세계를 떠나 언제나 알라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행복이며 진리라는 것이다.

이책은 이런 인생의 교훈적인 것 외에도 당시 유럽 기사들의 행태나 군사전술, 아랍 세계의 뛰어난 문명수준과 유럽의 후진적인 모습, 그리고 이국 땅에 눌러앉은 유럽인들이 어떻게 아랍 세계에 동화되어 가는지를 담담히 운명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우사마는 훌륭한 전사이면서 문장가였다. 그는 이 책을 기술하면서 아랍의 유려한 싯귀를 자주 인용하고 있다. 아랍어는 가장 배우기 힘든 언어이지만 운율적으로 아름다운 언어라고 한다. 특히 싯구를 읖는데 있어 아랍어의 리듬감을 따라올 언어가 없다고 한다. 차갑고 어둔 사막의 밤에 모닥불 주위에 앉은 아랍의 전사들이 시인의 목소리에 귀를 귀울이는 장면을 상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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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쿠라 막부 정치사의 연구 한국문화사 한국연구재단 저술총서 8
남기학 지음 / 한국문화사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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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역사에서 가마쿠라 막부, 일명 겸창막부鎌倉幕府(1192-1333)는 특이한 시대라고 할 수 있다. 또 이 시대는 한국사의 고려 무신정권武臣政權(1170-1270)과 맞물린 시기이기도 하다. 거의 같은 시기에 한국과 일본에서 문신지배의 질서를 거부하고 무신들이 정권을 잡은 것이 신기할 정도이다. 한반도와 일본열도에서 각기 정권을 잡은 무신들은 이후 길을 달리하게 된다. 한반도의 무인정권은 거대한 몽골제국과의 지난한 힘겨루기에서 기진맥진한 후 소멸되었고 , 이후 한반도에서는 무인들이 정권을 장악할 기회가 사라지게 된다.  반면 일본열도에서 성립된 무인정권은 몽골의 침입을 거국적으로 막아낸 후 자신들의 입지를 튼튼하게 하여 앞으로 열리게 될 무로마치室町 막부와 에도江戶 막부의 길을 열어주게 된다. 즉 가마쿠라 막부는 이후 명치유신을 지나 군부에 의한 2.26사건과 5.15 사건을 통해 군국주의로 연결되는 시발점이라 할 수 있다.

고려에서 무신정권이 성립된 12세기는 사회 경제적 변동이 촉진되고 유교적 정치이념이 심화된 시기였다. 특히 유교적 정치이념의 심화는 지배계급 안에서 정통성의 강조로 이어진다. 이런 경향은 정치에서도 문벌귀족의 득세와 경제적 집중으로 농민과 무인들의 몰락으로 나타나게 되고 이에 대한 반발로 무신들의 정변이 발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무신정권이 성립되면서 문벌귀족의 득세로 나타난 사회 경제적 모순을 극복하지 못하고 정치력의 한계를 자신들이 배척한 문신들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처지가 되면서 문신에서 무신으로 권력의 이동만 있게 되었을 뿐 전반적인 통치질서는 유교적 이념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일본에서 가마쿠라 막부를 성립한 무신들 역시 이런 문제에 봉착하였다. 승구承久의 난으로 무신들은 고대로부터 이어져 온 공가公家(천황과 귀족집단)의 정치지배를 끝내고 자신들의 지배력을 확립하였다. 그러나 이들 역시 고려와 마찬가지로 정통성에 대한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무신들은 천황으로부터 지배의 정당성을 부여받아야만 했다. 이는 다른 문제를 야기하였는데 막부가 정권의 실체였지만 천황으로부터 권위를 부여 받은 것에 대한 통치철학을 세워야만 했다. 즉 지배 이념을 정립해야만 했다. 무로마치 막부는 힘을 의미하는 무위武威와 문을 뜻하는 무민撫民 사상을 정립하기에 이른다.

무로마치 막부의 지배자들은 천황의 권위를 인정하면서도 자신들의 통치에 대한 정당성을 과시하기 위해 자신들만의 역사서를 기술하기도 하고 천황의 통치이념을 모방한 자신들의 지배이념을 창출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런 과정을 통해 무신들은 자신들의 통치도 천황의 치세에 못지않은 것이란 자부심을 드러내었다. 

이 과정을 읽다 보면 마치 중세 잉글랜드를 침입한 노르만 귀족들이 자신들의 통치를 위해 기사도를 강조하여 무력의 정당성을 교묘히 희석시킨 것을 떠오르게 한다. 일본의 무사계급들 역시 자신들의 위치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천황이란 존재를 유지시키지 않는 한 자신들의 위치는 언제나 훼손될 수 있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막부의 지배자들은 무위를 통해 반대자를 철저히 억누르면서 무민을 통해 백성들을 다독거렸다.

무민과 무위를 통해 지배한 막부정권은  한계성을 보이기도 한다. 즉 자신들 역시 이전 시대에는 정권의 기회를 잡을 수 없었던 하위신분이었음에도 정변을 통해 정권을 잡고 신분상승을 이루었지만 공고한 통치질서를 확고히 하기 위해 신분의 이동을 철저히 금지하였다. 그리고 무민의 이상이 한계에 이르렀을 때는 주저없이 무위를 과시하였다. 

가마쿠라 막부가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립한 것은 내부적인 통치에서 온 것이 아니라 외부적인 압력을 극복하면서 실현되었다. 1274년과 1281년에 일어난 원元의 일본 정벌이 그것이다. 두 차례에 걸친 원의 침입을 막아내면서 가마쿠라 막부는 정치적 안정을 또 통치의 정당성을 얻었던 것이다. 이 두 차례의 침입을 막아낸 것은 무사들의 집단적 자부심이었다. 이 무위의 자부심은 이후 일본의 역사에 국가적 위기가 찾아올 때 마다 무민의 이상을 교묘히 감싼 형태로 등장하였다. 전국시대를 통일한 풍신수길은 일본, 중국, 인도를 어우르는 대제국을 꿈꾸며 조선을 침략하였고 그 후계자들은 훗날 대동아공영권이란 무민의 이상에 군국주의란 무위를 덮씌워 미증유의 전쟁을 일으켰던 것이다. 가마쿠라 막부는 이런 일본의 무민과 무위라는 이중성을 표출한 시작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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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루뭄바를 죽였는가 - 콩고민주공화국 초대 총리 살해와 그 배후
에마뉘엘 제라르.브루스 쿠클릭 지음, 이인숙 옮김 / 삼천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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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익숙한 메르카토르Mercator 투시도법에 의한 지도를 보면 아프리카Africa는 아주 왜소하게 보인다. 총면적 30,221,532㎢는 북아메리카와 유럽을 합친 크기와 맞먹으며 남아메리카의 두 배에 가까운 크기이다. 그럼에도 평면의 지도 위에서는 아프리카는 왜소한 모습으로 표현된다. 이렇게 아프리카는 넓이를 잘못 알고 있는 것처럼 지리 또한 왜곡되어 있다. 아프리카는 결코 암흑대륙이 아니다. 이 널따란 대륙은 사막-북쪽의 사하라 사막, 남쪽의 칼라하리 사막-과 거대한 초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바나라고 불리는 널따란 초원은 사막을 경계로 끝없이 펼쳐져 있다. 유럽인들이 아프리카를 암흑이라고 부른 이유는 적도赤道 바로 아래에 펼쳐져있는 광대한 밀림 때문이다. 이른바 콩고 분지盆地-앙골라, 중앙아프리카공화국, 카메룬, 콩고민주주의 공화국, 콩고 공화국, 부룬디와 르완다, 가봉, 적도기니-로 불리는 콩고 강 유역의 지역 때문이다. 아프리카 대륙의 8분의 1을 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이 분지는 3,700,000㎢에 달하며 습도가 높고 어두운 밀림이 이어져 있다. 단일한 지리적 특징을 가진 지역이 아메리카 본토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 면적을 유럽의 지도에 일치시키면 스페인Spain, 프랑스France, 독일Germany, 스웨덴Sweden 그리고 노르웨이Norway에 필적하는 넓이이다. 콩고민주주의 공화국은 벨기에 식민지에서 독립한 킨샤사 콩고Kinshasa Congo를 말한다. 콩고 공화국은 콩고 강 북쪽에 위치해 있으며 프랑스의 식민지였다. 이 나라는 프랑스인 브라자가 개척하여 브라자빌 콩고Brazzaville Congo라고 불렸다.

 

콩고는 1960년 6월 30일 벨기에로부터 갑작스럽게 독립하였다. 식민 종주국이었던 벨기에는 1950년대부터 일기 시작한 아프리카의 자치요구에 과민반응을 일으켰다. 실제로 1959년 레오폴드빌에서 콩고인들이 자치요구를 시위를 일으키자 벨기에는 유혈 진압으로 응수하였다. 이때만 해도 벨기에는 콩고가 독립을 하기는 하겠지만 그 시기는 수 십 년 후라고 생각하였다. 이를 대비하여 벨기에는 소수의 콩고인들을 훈련시키기 시작하였다. 이를 30년 계획The thirty year plan이라 부른다. 하지만 독립의 요구가 거세지자 벨기에는 이듬해 콩고를 독립시킬 수밖에 없었다. 당시 이 거대한 나라에 대학을 졸업한 원주민은 30명이 채 안되었다. 게다가 콩고 현지출신의 흑인장교, 엔지니어, 의사 등은 전무하였다. 콩고를 사실상 통치하였던 5,000명의 관리들 가운데 흑인은 단지 3명뿐이었다.

벨기에의 보두엥Baudouin 국왕은 콩고가 독립하는 날 레오폴드빌Leopoldville 에 도착하여 “여러분, 우리의 신뢰를 받을 가치가 있는지는 이제 여러분의 손에 달려있습니다”라고 거만하게 말하였다. 이에 대해 파트리스 루뭄바는 즉각 반발하였다. 이 용감한 아프리카 인은 벨기에의 식민정책 나아가 제국주의의 식민정책이 아프리카에 끼친 해독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하였다. 그는 한 달 후에 치러진 선거에서 수상으로 선출되었다. 루뭄바는 아프리카의 진정한 해방은 정치적 독립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 식민지 상태에서의 독립이 병행되어야만 가능하다고 보았다. 루뭄바의 이런 견해는 당시 콩고에 투자한 벨기에, 영국, 미국의 기업들의 경계심을 자극하였다. 루뭄바의 이런 주장은 콩고를 넘어 아프리카 대륙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하였다. 루뭄바의 이런 정책은 서구의 지지를 받을 수 없었다. 이 결과 루뭄바는 소련에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루뭄바의 이런 결정은 자신의 사형집행장에 스스로 서명한 꼴이 되고 말았다.

콩고가 벨기에로부터 독립하는데 큰 힘을 발휘한 인물이 세 명 있다. 콩고 강 하류의 콩고인 연맹-ABACO;Alliance des Bakongo-과 연계한 가장 큰 세력의 요셉 카사부부Joseph Kasa-Vubu, 콩고에서 자원이 가장 풍부한 카탕카Katanga 주를 배경으로 한 모이세 촘베Moïse Kapenda Tshombe, 그리고 이들 셋 가운데 가장 지지 배경이 미약한 테텔라Tetela족 출신인 파트리스 루뭄바가 그들이다. 콩고가 독립하면서 카사부부가 대통령으로 선출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수상으로 파트리스 루뭄바가 취임한 것은 운명이었다. 내심 수상 자리를 원하고 있던 촘베는 이에 대한 반발로 카탕카 주의 독립을 공공연하게 떠들었다. 이 세 사람은 벨기에와 투쟁할 때는 협력하였지만 독립하면서 노선차이로 갈라서게 되었다. 가톨릭 선교사로부터 교육을 받고 신학과 철학을 전공한 카사부부는 보수적인 색채가 강한 인물이었고 루뭄바는 우체국 직원으로 시작하여 노조운동을 통해 단련된 자유주의자였다. 반면 부유한 실업가의 아들로 태어나 신학교를 졸업한 촘베는 반공주의자이며 기독교도였다. 카탕카 주는 캘리포니아 주보다 넓고 벨기에의 16배나 된다. 이곳에서는 코발트, 구리, 주석, 라듐, 우라늄, 다이아몬드가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다. 촘베가 1960년 7월 11일 카탕카 주의 독립을 선언하자 벨기에와 서방은 이를 지지하였다. 게다가 벨기에는 자국민의 보호를 이유로 카탕카 주에 자국군自國軍 6,000명을 파견하였다. 이에 대해 루뭄바는 소련으로 경도傾倒될 수밖에 없었다.

결쿡 콩고는 독립한지 2주도 지나지 않아 내전상태로 돌입한 것이었다. 콩고는 레오폴드빌의 합법정부-카사부부-와 스텐리빌Stanleyville을 중심으로 한 경쟁파-루뭄바- 그리고 카탕카 주의 분리독립파-촘베-로 분열되었다. 여기에 미국을 비롯한 서방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권 그리고 각 파에서 고용한 용병傭兵들이 얼키고 설켜 콩고내전은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은 합법적인 선거를 통해 출발한 루뭄바 정권을 붕괴시키기 위한 작업에 착수하게 된다. 사실 미국은 콩고가 독립하기 전부터 루뭄바의 존재를 불편해 하였다. 미국의 입장에서 루뭄바는 ‘공산주의자’인지 아니면 자신의 세력을 강화하기 위해 ‘공산주의자의 탈’을 쓰고 있는 것인지 가늠하기 힘들었지만 분명한 것은 콩고에서 반서방反西方세력이 급속히 확장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루뭄바는 당시 유엔사무총장이었던 다그 함마슐드Dag Hammarskjöld와 콩고사태를 논의하기위해 1960년 7월 24일 미국을 방문하였다. 이 방문에서도 콩고 위기에 대한 합의점이 도출되지 못하였다. 미국은 콩고 사태가 장기화되는 것을 불안하게 지켜 보았다. 사태가 장기화되면 될수록 콩고에서 소련의 입김이 점증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8월 콩고주재 미중앙정보국 지부에서 ‘콩고가 공산주의자의 전형적인 권력탈취를 경험해가고 있는 것으로 믿는다’는 전문을 본국으로 타전하였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콩고가 제2의 쿠바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행동할 수 있는 시간이 많이 남아있지 않는 것으로 사료된다’고 보고하였다. 이것은 미국이 루뭄바를 제거하고 친서방 인물로 대체하려고 하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1960년 9월 5일 콩고 대통령 카사부부가 수상 루뭄바를 해임하였다. 루뭄바는 콩고의회에서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음에도 카사부부가 해임한 것은 정치적인 권력투쟁의 결과였다. 보수주의자인 카사부부는 국가주의적이며 진보적인 루뭄바의 정책과 충돌하면서 중앙정부의 기능이 마비된데 따른 조치였다. 하지만 루뭄바는 이에 반발하여 의회의 도움을 받아 카사부부를 대통령직에서 해임하는 결의를 하였다. 양측의 대립은 콩고의 군 실권자 조셉 모부투Joseph Mobutu가 카사부부와 모종의 협약을 맺고 쿠데타를 일으켜 루뭄바를 체포하면서 해소되었다.

루뭄바는 모부투가 쿠데타가 일으키자 즉시 유엔평화유지군의 도움을 요청하였다. 유엔의 개입으로 루뭄바의 신변은 잠시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루뭄바가 카사부부와의 권력투쟁에서 패배하였음에도 미국은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특히 콩고의회가 개원되는 것을 강력히 저지하였는데 그 이유는 의회가 루뭄바를 다시 권력의 정상에 복귀시킬 결정을 할 수있기 때문이었다. 당시 미국은 ‘루뭄바가 그의 권력기반을 절반쯤 상실한 것으로 보이면서도 그때마다 제자리로 복귀하는 것은 그의 재능과 행동력이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고 판단된다. 바꿔 말하면 루뭄바는 한계에 다달았다고 보여도 그때마다 사태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전개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이는 미국이 루뭄바를 얼마나 경계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있다.

9월의 쿠데타 이후 루뭄바는 줄곧 유엔의 보호 하에 있었지만 미국은 여전히 그를 잠재적인 위협으로 보고 있었다. 게다가 미국은 외부세력-소련-이 콩고에 개입하여 루뭄바를 다시 복귀시키는 것이 아닌지 내심 걱정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종결하기 위해 미국 중앙정보부는 루뭄바가 유엔의 보호 하에 있을 때 암살을 시도하려 했지만 결국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미국의 이런 생각은 ‘현재 우리가 지지할 수 있는 것은 루뭄바를 행동불능으로 하던지 아니면 체포하는 것 뿐이다. 보다 결정적인 행동이 필요할 때라도 또는 어떤 행동을 취하든 그것은 전적으로 콩고인들의 손으로 처리되어야만 한다’는 미중앙정보국 콩고지부의 전문에서 잘 알 수 있다. 미국은 루뭄바를 제거하고 싶지만 자신들의 손에 피를 묻히고 싶지 않다는 점이었다.

루뭄바는 수상관저에서 영어囹圄의 몸이었지만 유엔군은 그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관저주변에 병력을 배치하였다. 그리고 쿠데타 군 역시 루뭄바가 도주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관저 주변에 배치되었다. 1960년 11월 27일 루뭄바는 유엔군의 보호를 이탈하여 자신의 지지자들이 있는 스텐리빌로 탈출하려다 모부투의 군대에 체포되었다. 당시 상황은 카사부부와 모부투의 중앙정부는 레오폴드빌에 근거를 두고 레오폴드빌Leopoldville 주와 에콰토르Equateur 주에서 통제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루뭄바의 지지자들은 오리엔탈Orientale 주와 키부Kivu 주에서 강세를 보이고 있었다. 카탕카 주는 여전히 촘베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 루뭄바 체포 소식이 전해지면서 콩고 사태는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시한폭탄과 같은 상태가 되었다. 해가 바뀐 1961년 1월 서방과 레오폴드빌의 카사부부와 모부투에게 불길한 소문이 들려왔다. 콩고 치안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군과 경찰이 대대적인 급료인상을 실현해주지 않으면 반란을 일으키겠다고 공공연하게 떠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국의 입장에서 이 반란은 루뭄바의 복귀를 결정지을 중요한 변수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1961년 1월 14일 미국정부는 콩고의 유력한 정부관리 한 사람으로부터 루뭄바를 촘베가 정권을 잡고 있는 카탕카 주로 보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모부투에게 체포된 이래 루뭄바는 레오폴드빌에서 150㎞떨어진 사이스빌Thysville의 캠프 아디Camp Hardy의 군막사에 연금된 상태였다. 1961년 1월 17일 루뭄바는 강제로 그의 협력자인 모리스 므폴로Maurice Mpolo와 죠셉 오키토Joseph Okito와 함께 비행기에 태워져 카탕카 주의 바꾸왕가로 이송되었다. 루뭄바의 철천지 원수인 촘베의 카탕카 주로 이송은 곧 그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지만 서방은 이 사실에 모두 침묵하였다. 루뭄바를 태운 사베너 DC-4 수송기가 바꾸왕가로 향했지만 공항에 유엔군이 주둔하고 있음을 알게되자 경로를 바꿔 엘리자베스빌Elisabethville-후일 루뭄바시Lubumbashi로 개명됨-로 향하였다. 1961년 2월 13일 카탕카 주 정부는 2월 12일 루뭄바와 동료 두 사람이 탈출했지만 적대감을 품은 촌민村民들의 손에 잡혀 살해되었다고 발표하였다. 하지만 유엔은 루뭄바와 동료 두 사람은 엘리자베스빌에 도착한 1월 17일 21:40에서 21:43사이에 살해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그와 동료의 시신은 비밀리에 버려져 지금도 시신의 행방은 알 수 없다. 루뭄바가 지금까지 살아있다면 그가 약속한 희망을 충실하게 전했을지는 미지수이지만 미국과 서방은 루뭄바에게 그런 기회조차 주지 않고 허용하지도 않았다. 루뭄바의 비극은 어쩌면 냉전의 비극적 산물인지도 모른다.

콩고 사태의 최종적인 승리자는 카사부부도 촘베도 아닌 모부투였다.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그는 1965년 쿠데타를 일으켜 30년 동안 독재자의 자리를 지켰다. 모부투가 한 일은 1971년에 콩고라는 이름을 버리고 자이레Zaire로 바꾼 것 이외에 기여한 것이 하나도 없다. 오히려 그는 풍부한 자원의 나라 콩고를 피폐시키고 비참의 늪으로 몰아넣었다. 흑단 지팡이와 표범 가죽 모자를 쓴 그의 모습은 신식민주의의 하수인의 표본이었다.

1961년 루뭄바가 살해되고 1965년 모부투가 쿠데타로 정권을 잡기까지 5년 동안 콩고는 열강의 세력 각축장이 되었다. 미국과 소련 그리고 용병들이 이 광대한 대륙에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콩고의 혈관을 절개했던 것이다. 루뭄바 살해 이후 소련은 그의 죽음을 기려 모스크바에 그의 이름 딴 루뭄바 대학을 만들어 제3세계 혁명가들을 양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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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제리전쟁 1954-1962 - 생각하는 사람들의 식민지 항쟁 스투디움 총서 8
노서경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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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5월 7일 프랑스의 반대편에 있는 인도차이나의 디엔비엔푸에서 프랑스군이 호지명이 이끄는 월맹군에게 패배하였다. 

1954년 10월 31일 알제리 민족해방전선FLN의 병사들이 알제리에 주둔 중인 프랑스군의 병영과 관공서를 공격하였다. 이틑날인 11월 1일 FLN의 이름으로 프랑스와 전쟁을 시작한다는 벽보가 곳곳에 나붙었다. 

전쟁의 시작은 아일랜드 공화국군이 1921년 부활절 봉기를 일으킨 것과 비슷하였다. 알제리인들은 이 전쟁의 시작에 무관심했고, 프랑스는 이것이 8년 동안 벌어질 비극의 시작인지 알지 못했다. 어찌되었든 알제리와 프랑스의 전쟁은 시작되었다. 프랑스는 의례적으로 외인부대를 파견하고 알제리에 산재한 정당들을 해산하는 것으로 전쟁을 맞이하였다. 

전쟁은 프랑스나 알제리 모두 길게 가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1956년 말 가톨릭 신자이자 좌파 언론인 로베르 바라가 쓴 징집병들의 이야기가 출판되면서 알제리 전쟁은 갑자기 식민주의와 제국주의, 양심과 비도덕의 문제로 비약되기 시작하였다. 프랑스의 지식인들은 '프랑스의 알제리'에 대해 깊은 숙고를 시작하였다. 지식인들이 알제리 전쟁을 철학적, 사회학적으로 탐구하는 동안 알제리는 보복과 보복이 난무하는 아수라장으로 변모하였다. 프랑스군은 인도차이나에서 배워온 고문과 군사기술을 사용하여 알제리인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하였다. 이에 맞서 FNL도 무자비한 보복으로 맞대응하였다. 죽고 죽이는 아수라장 속에서 프랑스 지식인들은 자신들이 제2차 세계대전 시절 나치 독일의 비밀경찰이 레지스탕스를 사냥하고 고문하는 방식으로 알제리를 다스리고 있음을 알았다. 빛나는 레지스탕스 전통의 프랑스 지식인들은 이에 대해 큰 충격을 받았다. 저항의 프랑스가 탄압의 프랑스로 변질되는 것은 프랑스의 타락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알제리인들은 프랑스의 잔악함에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알제리인들은 프랑스가 나치에 굴복했을 때 자신들의 조국 프랑스를 위해 싸웠다. 알제리인들에게 전쟁은 자신들이 프랑스의 일원으로 싸움으로서 프랑스의 지배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보증으로 여겼다. 하지만 알제리 전투에서 보여준 프랑스의 무자비함은 알제리인들에게 자신들이 결코 프랑스의 일원이 아님을 자각하게 하였다. 

프랑스는 알제리가 프랑스임을 강조하면서 알제리에 집착하였다. 프랑스인들은 자신들이 알제리에 투자한 문명과 과학이 알제리를 변화시켰다고 주장하였다. 프랑스인들은 왜 알제리가 이런 문명의 혜택을 거부하는지 이해하지 못하였다. 

알제리인들은 프랑스의 이중성을 처절하게 느꼈다. 프랑스의 알제리는 결코 자신들을 동등하게 만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오직 알제리의 알제리만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다.

프랑스와 알제리는 전쟁 기간 내내 내부적으로 동상이몽이었다. 프랑스 국내는 알제리의 독립을 요구했지만 알제리의 프랑스인들은 프랑스의 알제리를 외쳤다. 반면 프랑스에 유학온 많은 학생들은 프랑스의 알제리를 외쳤지만 알제리의 민중들은 알제리의 알제리를 외쳤다. 

프랑스는 알제리를 고립시키고 군사적으로 제압하기 시작하였다. 프랑스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하였다. 폭력, 처형, 강간, 방화.... 알제리 역시 모든 역량을 총동원하여 프랑스를 자극하고 도발하였다. 그러나 전쟁이 길어질 수록 프랑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저울추가 기울기 시작하였다. 알제리의 투쟁 역량이 바닥을 드러낼 즈음 프랑스에서 드골이 집권하였다. 드골은 집권하면서 프랑스의 알제리를 다시 한번 외쳤다. 하지만 그가 외친 프랑스의 알제리는 프랑스의 양심과 도덕성을 회복시키기 위한 명예로운 철수를 의미하였다. 프랑스는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지만 더 중요한 '영광스런 프랑스'를 택하였다. 하지만 영광스런 프랑스의 이면이 어떤 것인지 전세계인들이 알 수 있었다. 

프랑스가 영광스런 프랑스를 위해 알제리를 포기할 때 알제리는 국내에서 저항한 집단과 해외에서 활동한 집단간의 투쟁이 시작되었다. 결과는 국내 무장집단의 승리였다. 이 결과 국내 무장집단이 권력투쟁에서 승리하였다. 알제리의 승리 역시 떳떳한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프랑스라는 이름으로 상징되는 서구 식민주의자와의 싸움에서 승리했지만 알제리 인민은 새로운 독재에 직면해야 했다. 

알제리 전쟁은 양쪽 모두에게 '쟈칼의 날이 끝난 것'이 아니라 시작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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