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경 - 골든세계문학선 11
멜빌 지음 / 중앙출판사(중앙미디어) / 199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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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리에게 알려진 <白鯨>은 잘못 알려진 소설 가운데 하나이다. 일종의 해양문학 혹은 고래잡이 소설로 알려진 이 소설은 사실은 거대한 바다-또 다른 세계-에서 벌어지는 인간과 악의 문제를 비유적으로 다룬 소설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어린 시절부터 친숙하게 알려진 소설은 심오한 부분이 빠진 고래 추적기만이 짜집기 된 것이었다. 그래서일까. 많은 문학평론가들이 백경이 선과 악의 문제를 다룬 심도 높은 작품이라고 해설을 붙였지만 그 본 뜻을 이해하기는 힘들었던 소설이다. 사실 축약본들은 대략 5백여쪽이 넘는 원본의 반정도의 분량으로 출판되고 있다. 그래서 지금도 축약본을 읽은 아동들은 백경이 여전히 고래잡이 소설로 인식되고 있다.

이 소설속의 가장 중요한 두 인물은 선장인 외다리 에이허브 선장과 나레이터인 이스마엘이다. 이들의 이름은 아주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이스마엘의 이름은  <신이 들으신다>라는 뜻이다.  그리고 증오와 복수로 뭉쳐진 에이허브 선장이 있다. 그의 이름은 구약성서에서 이스라엘의 왕들 가운데 예언자들로부터 가장 욕을 많이 얻어먹는 아합Ahub의 이름이기도 하다. 특히 아합의 아내Ahub's wife인 이세벨Jezebel(고상하다는 의미)은 악독하기로 소문난 여자였다.  이름이 규정하고 있는 이스마엘과 에이허브의 예에서 보듯 이 소설은 거대한 상징의 장치에 의해 둘러싸여져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상징이라는 덫에 빠져 이 소설을 수수께끼를 풀어가듯 읽는다면 이 책이 말하고자하는 핵심을 놓칠 수 있다는 점이다. 저자인 허먼 멜빌은 이 책을 <사악한 책>으로 정의하였다. 그래서일까 이 책이 나왔던 1850년대의 미국 동부의 청교도들에게 외면을 당하고 말았다. 청교도적인 입장에서 볼 때 이 소설은 어찌보면 악의 승리를 묘사하는 책으로 이해되었을지도 모른다.

사실 이 책은 사실적인 묘사가 압권인 작품이다. 하지만 그 사실적 묘사가 상상력과 상징성에 의해 훼손을 받는다면 이 책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도구를 놓쳐버릴 수 있다. 이스마엘의 이름에 집착하거나 에이허브의 이름에 집착하게 된다면 당연히 우리는 일등항해서 스타벅Starbuck의 이름에도 골머리를 앓아야만 한다. 왜 커피 전문점 이름이 이곳에 나와있는것이지...

이 책은 우리에게는 낯선 항해용어와 배에 관한 용어가 많이 나온다. 그만큼 우리의 삶은 바다와 멀어져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특히 8장의 설교단의 이야기는 교회 자체가 포경선의 구조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설교하는 목사는 밧줄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존 휴스턴 감독이 만든 영화 <모비 딕>을 보고서야 그 구조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흰고래 역시 마찬가지이다. 흰색은 순결과 신을 향한 마음을 나타내는 색이지만 이곳에서는 악과 동일한 색으로 변화되며 마지막에는 죽음과 연결된다. 이스마엘도 흰색을 무신론적이며 무색의 색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에이허브는 흰고래에게 한쪽발을 잃어버린 뒤에 오직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는 사람이다. 그는 배의 선장으로서의 임무-선원들의 안전과 풍족한 수확-를 거부하고 오직 흰고래만을 쫓는다. 그리고 결국 모든 사람들을 죽음으로까지 몰고간다. 그렇다면 여기서 에이허브 선장은 선이고 흰고래는 악이라는 등식이 성립하는 것일까. 절대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모비딕에서 에이허브와 흰고래의 투쟁만을 따로 떼어놓고 본다면 80년대의 영웅본색류의 영화를 생각나게 한다. 거기에는 좋은 악당과 나쁜 악당이 나올 뿐이다. 사실 악당은 다 나쁜 존재이지만 여기서는 관객들이 좋은 악당을 응원하게 만든다. 그리고 좋은 악당에 의해 나쁜 악당이 괴멸되는 순간 공허한 박수가 어두컴컴한 극장속을 울려퍼진다. 그것뿐이다. 밝은 조명이 켜지며 엔딩 자막이 거대한 스크린 속에 흐르고 있을 때 사람들은 극장문을 빠져나오며 주윤발의 이미지만을 기억하는...

<하느님, 저 늙은이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는 스스로 마음 속에 어떤 존재를 창조해서 그 생각 때문에 스스로 프로메테우스가 되고 말았습니다. 독수리가 그의 심장을 영원히 뜯어먹고 있는데, 그 독수리는 바로 그가 창조해 낸 존재이옵니다.>

이스마엘이 읊조리는 기도 속에 이 소설의 모든 것이 들어있다고 한다면 루리일까.  그래서 이 소설은 사악한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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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고리대금업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14
이화승 지음 / 책세상 / 200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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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 장사 왕서방>이란 말이있다. 이 말에는 여러가지가 함축적으로 내포되어있다. 중국인에 대한 우리의 멸시감, 수전노, 화교... 하지만 이 말의 핵심은 중국인이란 돈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굳이 김동인의 <감자>를 예로 들지 않더라도 중국인은 아끼고 돈을 모으는 인간으로 묘사되고 있다.  실제로 중국인들처럼 재물에 강한 집착을 보이는 민족도 없다. 아마 이런 중국인들의 유전적 기질이 상업이란 제3의 산업을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사실 이런 중국인과 경쟁할 만한 상대는 유대인밖에 없지만 유대인들은 종교라는 거름장치를 통해서 돈에 대한 집착을 순화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중국인에게는 유대인과 같은 절대적인 가치를 약속하는 종교가 없었다. 이들에게 현실이 아닌  내세를 약속하는 종교는 그리 설득력있게 다가오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이들에게는 오직 현세의 福을 보장해주는 돈만이  최고의 가치인것처럼 보인다. 

 이런 중국인들은 일찍부터 代金業의 효용성에 눈을 뜬 사람들이었다. 심지어는 중생을 구제하여야하는 불교의 경우도 중국에 와서 토착화하는 과정에서 경제적 방향으로 발전하였다는 사실을 보면 그저 이들의 재능에 놀라움을 느낄 뿐이다. 저자는 중국의 대금업이 위진남북조시대 이후 당을 거치면서 확립되어가는 역사를 차분하게 추적하고 있다. 그러면서 각 시대별로 통용되던 용어를 자세히 설명해 줌으로서 한자문화권의 특징인 용어를 알면 반을 안다는 사실을 증명해주고 있다.

이 책은 아주 얇은 쪽수의 책으로 마음만 먹으면 지하철 2호선을 타고 한바퀴도는 시간이면 완파할 수 있는 분량이다. 하지만 그 적은 분량속에는 현재의 중국을 가능하게한 2천여년에 걸친 이들의 노하우가 담겨져 있다. 사실 고리대금업이란 것은 현재의 기준으로 볼때 가혹하게 보이는 수탈의 한 형태로 보일지 모르지만 저 먼 고대에 돈이 구르면 구를수록 부피가 커진다는 사실을 체득한 이들의 혜안이 부러울 뿐이다. 그리고 이런 가혹한 민간의 고리대금업을 금지하는 대신 지켜지지는 않았던 자세한 규정을 제정함으로서 시대를 거듭할 수록 정교하게 다듬어질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해 주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민족 왕조인 元代에 이르러서는 정부가 직접 고리대금업에 개입함으로서 국가 재정을 보충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활용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현대의 정부들이 보유힌 외화를 가지고 벌이는 사업과 유사한 것이라 하겠다. 하지만 이런 중국적 전통의 대금업은 근대 이후 서양의 현대적인 금융업과 맞서는 과정에서 개혁의 기회를 잡지 못하고 쇠퇴하였는데 이는 대금업이 국가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관계로 자생력을 확보하지 못한 것이 원인이었다. 하지만 이런 대금업의 전통은 중국의 화교들이 진출한 도시에서는 어김없이 상호부조하는 형태로 나타나 중국인들이 현지에서 자리를 잡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중국인들끼리의 상호부조적인 대금업은 부의 축적을 쉽게하는 장점도 있다. 이 결과 동남아시아에서 중국계 화교들이 경제권을 장악하였다는 점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닌 것이다 중국의 대금업은 1949년 대륙이 공산화되면서 자본주의적 퇴폐로 규정되어 철퇴를 맞았지만  1980년대 개방화 정책 이후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이 사실은 중국적 대금업의 전통은 역사가 오랜 만큼 그 뿌리 또한 깊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일 뿐이다.

중국은 2천년대 들어와 2020년에 일본을 추월하고 그리고 2050년에는 미국을 능가하겠다는 포부를 서슴없이 밝히고 있다. 이는 중국의 문화적 저력을 보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보여진다. 하지만 우리는 중국의 문화적 다양함이 어떤 것인지를 잘 알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중국적 획일성-혹은 무식함-때문일 수도 있다. 이 책은 그 다양성의 한면을 우리에게 조금 맛을 보여준 책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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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를 다시 본다
송기호 지음 / 주류성 / 199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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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은 발해가 건국된지 1천 3백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 해에 우리는 역사속으로 사라져간 한 왕조를 기념하기 보다는 금을 모으며 IMF를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발해는 역사적으로 볼 때 고구려와도 참 인연이 깊은 나라였다. 고구려의 발상지인 만주지방에서 건국이되었고, 고구려의 후예답게 자신들 역시 天孫의 후예라고 자처하였던 나라였다. 그리고 우리는 국사 시간에 한민족 최대의 영역을 확보했던 나라를 고구려라고 배우지만 사실 발해의 영역이 고구려의 영역보다 더 컸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발해가 잊혀짐으로서 그 영역 또한 잊혀진 것이 되고 말았다.

이 책은 발해에 대한 단상을 여러 곳에 발표했던 것을 한 권의 책으로 엮어 만든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일관된 주제를 이야기하고 있다기 보다는 발해라는 한 왕국에 대한 개괄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오히려 이 점이 발해의 전체적인 모습을 파악하는데 장점으로 다가온다. 게다가 용어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한 예로 저자는 발해가 건국된 지역을 만주로 할 것이냐 동북지역으로 할 것이냐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방위를 뜻하는 동북지역을 중국측이 사용하는 지역의 이름이라고 한다. 이는 이 지역이 중국의 역사적 권역에 속하는 지방이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고 한다. 이 용어의 반대편에는 만주란 용어가 자리잡고 있는데 이는 일본인들이 만든 용어라는 것이다. 이 용어는 만주가 독립적인 지역이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고 한다. 즉 우리가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만주와 동북지역이라는 단어 속에는 중국과 일본이 바라보는 이 지역에 대한 속뜻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정을 고려할 때 발해의 역사가 얼마나 복잡한 국제정치의 역학구도속에 자리잡고 있는가를 알 수 있게 한다. 사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발해는 중국, 러시아로부터 자국의 역사가 아니라는 이유로 홀대를 받아왔다. 그러나 1980년대를 기점으로 중국은 발해사를 자국의 영역에 편입시키는 작업을 시작한다. 이런 결과 중국 역사 교과서의 당왕조 지도에는 발해와의 국경선이 사라져 버렸다. 중국측이 이렇게 발해의 역사를 자국의 역사로 편입시키자 제정러시아때부터 만주지역에 관심을 보여온 러시아 역시 발해를 중국과 한국의 역사에 떼어내어 독립적인 왕국으로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이런 사정으로 인해 발해는 러시아, 중국, 한국의 역사로 갈라지게 되면서 체계적인 역사를 조망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이로 인해 한국민의 발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이 다행이라고나 할까.

발해 건국 1천 4백주년이 되는 2098년에는 어느 나라에서 폭죽을 울리며 성대하게 기념행사를 치를지 궁금해 진다. 만물이 유전하듯 역사도 돌고 돌아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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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에로틱한 영화 베스트 50
매이틀랜드 맥도나우 / 천마 / 199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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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구입하고 제일 먼저 한 일은 목차를 보면서 내가 보았던 영화를 기억해 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거의 대부분을 영화관 혹은 비디오를 통해 보았다는 사실을 알았을때 내 스스로가 이런 영화를 어지간히 밝힌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약간의 변명을 한다면 에로영화와 에로틱영화의 차이는 글자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아주 크다는 점이다. 에로틱 영화와 에로 영화의 차이는 간단하다. 두 남녀가 숲속의 자동차 안에서 요상한 짓거리를 벌이고 있다면 에로틱 영화이다. 하지만 두 남녀가 숲속으로 들어가고 카메라는 숲속 밖에서 숲을 계속 찍어 대고 있다면 에로영화이다.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영화는 대부분 우리의 귀에 익은 영화들이다. 하지만 이들 가운데서 몇 몇의 영화는 그것이 과연 에로틱한 영화였는가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1946년에 만들어진 리타 헤이워드주연의 <질다Gilda>를 읽으며 수긍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영화의 가장 유명한 장면은 팀 로빈슨과 모건 프리먼이 주연한 <쇼생크 탈출>에 나온 영화의 영화속 장면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책의 저자인 매이틀랜드 맥도나우가 염두에 둔 이 책의 방향과 맥을 같이한다. 저자는 에로틱과 야함을 같은 위치에 배치하지 않는다. 저자는 선정된 영화가 만들어진 시대의 역사적. 사회적 배경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러므로 이 영화를 에로틱 영화의 안내서로 착각한다면 큰 실망을 할 수도 있다.  여기에 에로틱한 영화로 선정된 <사관과 신사>의 경우 고등학생 입장가의 영화였다. 그래서 어른들보다는 고등학교 남.여학생들이 많이 관람한 영화였다. 이런 영화가 에로틱한 영화라니... 나의 기억속에도 이 영화에서 야한 장면을 굳이 찾아보라면 보트를 타고 가면서 엉덩이를 까는 무닝mooning정도가 아닐까. 차라리 이 영화보다는 다이앤 키튼이 주연한 <미스터 굿바를 찾아서>가 더 야한 영화가 아니었을까.

내가 이 책에 나온 50편의 영화 가운데 정말 에로틱한 영화라고 생각한 것은 검열의 포탄속에 누더기가 되어 비디오로 출시된 <비엔나 호텔의 야간배달부The Night Porter>였다. 성의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는 세월이 흘러 흘러 아주 오래 흘러도 그 어떤 방아쇠가 작동하는 순간 다시 옛날의 그 순간, 가해자와 피해자로 되돌아간다는 그 법칙은 성의 탐닉이란 이렇게 끈질기고 무서운 것이란 것을 느끼게 한 영화였다. 물론 이 영화는 페미니스트들에게도 유대인들에게도 비난을 엄청나게 받았다. 하지만 이 영화 이후 혐오스럽지만 은근히 즐기는 수용소 영화가 봇물처럼 터져나오는 계기를 마련한 영화였다.

영화는 영상의 미학이기 때문에 그 표현의 방식에 따라 이해하는 부분이 각자 다를 수 있다. 즉 감독의 세계를 완전히 이해하기는 곤란하다는 점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은 영화를 보는데 있어 하나의 참고서 역할을 할 수 있는 책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참고서가 우리의 상상력을 제약하듯 이 책 역시 자유로운 상상력을 통해 영화를 감상하는 사람들에게는 사고의 제한을 가져올 수 있다는 점에서...

*영화배우의 이름이 정말로 우습게 표기된 것이 한 두명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 책은 약간의 실망을 안겨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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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위에 새긴 생각
정민 엮음 / 열림원 / 200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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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 한 치의 돌 위에 우주를 집어 넣는다해서 전각을 方寸의 미학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그 우주는 아주 묘한 구석이 있다. 전각도로 새겨내려가는 우주의 깊이에 따라 혹은 그 여백의 넓이에 따라 다르게 표현되기 때문이다. 돌을 새기는 것은 어찌보면 마음을 다듬는 자세인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그 돌에 자신의 의지를 새김으로서 변하지 않는 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의 선인들은 자신이 사용할 도장을 새겨 그 刀劃 하나 하나에 새겨진 마음을 음미하였다. 일본의 검사들은 본능을 숭배하였다고 한다. 검술은 요모조모 재면서 하는 術이 아니기 때문이다. 순간의 선택으로 한 사람의 목숨이  혹은 자신의 목숨이 사라지는 術이기 때문에 검술은 본능이라고 까지 하였다. 그래서 이들은 이런 야성의 본능을 순화시키기 위해 茶道와 같은 번외의 術을 배우고 심취하였던 것이다. 반면 선비는 지조를 숭배하였다. 이들에게 지조는 무사의 본능과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지조는 術이 아니라는 점이다. 지조가 術로 변질되면 曲學阿世의 邪術로 변질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선비들은 자신의 마음을 비추는 거울로 글씨와 전각에 심취하였던 것이다. 보통 사람의 심성을 보고자 하면 그 사람의 글씨를 보면 안다고 할 정도로  은연중 자신의 마음을 드러나게 한다. 그리고 그 글씨의 마무리로 낙관을 하는데 그 낙관의 도장이 전각으로 만들어 진 것이다. 그래서 글씨를 감상할 때면 글씨 그 자체와 발문과 낙관을 본다고 한다. 그래서 글을 보면 쓴 사람의 품격을 알 수 있다고 하였던 것이다.

印譜를 보면 그 다양함에 기가 질릴 때가 있다. 하나의 글자가 전서.예서.해서.행서.초서로 표현되어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듯이 전각 역시 하나의 글자를 복잡하게 혹은 과감하게 축약하여 표현하는가하면 거칠게 혹은 매끄럽게 깊게 얕게 혹은 곧게 둥글게 표현함으로서 글자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충실하게 드러나게 한다. 어찌보면 전각은 그 방식에 있어서 서예보다 더 원시성을 느낄 수 있다. 즉 전각에는 서예의 세련됨보다는 원초적인 힘을 더 느낄 수 있는데 그것은 그 조그만 방촌의 세계에서 자연을 혹은 우주를 접하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는다. 서예에서 기교를 본다면 전각에서는 힘을 본다고 한다면 너무 편협되고 과장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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