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이해 - 신화상징총서
에스터 하딩 지음, 김정란 옮김 / 문학동네 / 1996년 1월
절판


원시 공동체에서 사람들은 종종 달을 '여자의 주님'이라고 불렀다. 왜냐하면 그들은 달이 여성의 수태능력의 원천이라고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여성들이 하는 특별한 모든 행동에 있어서 그녀들을 도와주고 보호해주는 존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원시부족들은 여성들이 달과 같은 본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여성들이 달처럼 '부풀어오르기' 때문만이 아니라 달의 주기와 똑같은 기간 동안의 월주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53쪽

만일 여성이 아기를 가지기를 원치 않는다면, 그녀는 달빛을 받지 않기 위해서 조심하거나, 배가 불러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 배를 침으로 문질렀던 아트 족의 여성들처럼 피임 방법에 도움을 청한다. 이것은 아마도 우리가 알고 있는 가장 오래된 피임 방법일 것이다. 한편, 아기가 없는 여성이 아기를 가지기를 원한다면, 그녀는 초승달 빛을 받거나, 또는 달의 도움을 청하는 제사를 드린다. 초승달은 생장하는 모든 것, 또는 생장해야 하는 모든 것의 '수호자'였다. -55쪽

플루타르코스는 자라나는 국면의 달이 발아와 번식을 촉진시키며, '선의'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달이 선의를 가지고 있다느니 악의를 가지고 있다느니 하는 생각은 우리에게는 이상하게 여겨진다. 그러한 생각은 우리에게는 낯설게 여겨지는 달의 의인화를 전제로 하고 있다. 플루타르코스가 살던 시대의 그리스인들은 전혀 원시인들이 아니었다. 그들이 그렇게 생각했다는 사실은 윈시인들만이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59쪽

이 여성적인 힘이 남성적인 힘으로의 대체는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가장 중요한 결과들 중의 하나는 아마도 달에 의하여 상징되던 종교적이고 영적인 요소가 태양에게로 전이되고, 남성의 통제 하에 놓이게 되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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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명으로 보는 세계사
21세기연구회 지음, 이영주 옮김 / 시공사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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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취Walch, 월레스Walace, 월스Walles, 월리스Wallis, 월쉬Walsh, 월스맨Walsman, 웰치Welch, 웰리시Wellish, 웰즈맨Wellsman, 웰시welsh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이름에 모두 웨일즈Wales지방을 의미하는 뜻이 들어있다는 점이다. 즉 이런 이름이나 성의 근원은 웨일즈지방으로부터 유래된 것임을 알 수 있게 한다. 사실 웨일즈라는 뜻 자체도 그리 좋은 의미는 아니다. 브리튼 섬을 침입한 게르만계통의 앵글족과 색슨족이 켈트족을 자신들의 적이라고 생각하여 붙인 별명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유럽의 이름은 지명과 아주 재미있는 상관관계를 맺고 있다. 이름과 성이 지명과 연결되는 전통은 로마인들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씨족명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씨족명은 자신들의 발상지나 혹은 자신들이 신성하게 여기는 것의 이름에서 취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유럽인들이 성을 가진것은 고대 이전으로 거스러 올라갈 수 있는 셈이다. 그리고 이런 전통은 중세에도 그대로 유지되는데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과 출신지를 함께 병기하였다. 예를 들어 빙겐의 힐데가르트, 아빌라의 데라사, 피오레의 요아킴과 같이 이름과 출신지를 함께 병기함으로서 개인을 구별하였던 것이다.

유럽의 이름은 이 지역이 그리스도교화 되기 이전에는 각 종족마다 고유한 이름을 가지고 있었지만 개종 이후에는 성서에서 따온 이름으로 대체되었다. 이 결과 유럽세계의 이름은 급속하게 분권적인 고유한 부족적 특성이 사라지고 대신 통합적인 종교적 통일성만이 존재하게 되었다. 이렇게 됨으로서 유럽은 부족단위에서 언어 단위로 지역이 재편되었다.

반면 동양인들은 자신들의 이름이 함부로 불리우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 그래서 중국과 한국에서는 이름대신 號를 부르게 하였다. 그리고 태어나서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를 때까지 정식 이름을 작명하지 않고 개똥이니 쇠똥이니 하는 식으로 불렀다. 이것은 이름을 함부로 부름으로해서 그 당사자에게 해가 돌아갈 것을 염려해서였다. 이렇듯 동양인들에게 있어서 성과 이름은 신성한 것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성과 이름을 함부로 바꾸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유럽인들의 성과 이름에 대한 개념은 동양인들보다 상대적으로 희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사정은 어찌보면 정주의 문화와 이동의 문화가 내포하고 있는 숙명적인 특성인지도 모른다.그리고 한국이나 중국의 경우 인명이나 성을 족보라는 책에 기록하였기 때문에 이름의 어원이나 뜻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족보의 이름은 항렬이라는 순서에 의해 지속적으로 내려온 가문의 지속성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족보에서 개인의 위치는 거대한 나무에 붙어있는 하나의 잎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한국과 중국의 이름은 어떤 뜻이라기 보다는 가문의 연속성에 위치한 자신의 위치를 표시하는 하나의 기호인 것이다. 반면 아프리카의 종족들에게 이름은 자신이 태어난 날의 역사적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의 이름을 통해 그 개인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런 유형의 이름은 북미 원주민들의 이름에서도 발견된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름은 개인적 체험의 기록인 것이다. 그리고 그 이름은 개인과 부족이 몸담고 있는 자연과 일체가 되는 것이다. 이런 이름의 종족별 특성이 점차로 지구촌이라는 개념이 도입되면서 우세한 문화권의 이름으로 동일화되어 가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힘이없는 종족은 자신들의 이름마저도 지킬 수 없는 것일까?

**Adelheid의 애칭이 Heid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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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녀 2005-04-07 1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클라라의 그 가정부 아줌마... 로덴마이어? 로 뭐더라? 하여튼 그 아줌마가 늘 하이디를 아델하이트라고 불렀던 기억이 나네요 ^^
이 책도 재밌겠어요... 정말 세상은 넓고 읽을 책은 많아요.
(늘 도요재님 서재에서 좋은 글 읽고 가고 있습니다)
 
철학의 위안 - 에코의 즐거운 상상 2
움베르코에코 지음, 조형준 옮김 / 새물결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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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고트족의 왕 테오도리쿠스는 자신을 "존엄한 자" 즉 아우구스투스Augustus라고 불렀다. 하지만 그는 라틴어를 읽을 줄도 모르고 서명도 할 줄 모르는 청맹과니였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의 이런 무지를 똑똑한 인물을 기용함으로써 보충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가 선택한 사람은 로마의 원로원 의원이었던 카시오도루스였다. 카시오도루스는 야만인들을 교화시키려고 끊임없이 노력하였다. 그의 이런 노력은 테오도리쿠스의 딸인 아마라슨타를 교화시킬 수 있었다. 이 결과 야만인이었던 그녀는 얼마 후에 라틴어를 그리스어로 번역할 수 있는 수준으로까지 성장하게 되었다. 그녀는 당연히 테오도리쿠스의 후계자이며 자신의 아들인 아타나리쿠스를 말에 올라타는 것보다 우선 먼저 책상앞에 앉게하였다. 일견 카시오도루스의 노력을 빛을 보는듯이 보인다. 하지만 고트족의 친위병들과 귀족들이 왕에게 항의를 한다. "용감한 전사를 기르는데 읽고 쓰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카시오도루스는 이들의 말에 침묵을 지킨다. 하지만 문화의 힘이 야만을 이길 날이 꼭 올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테오도리쿠스에게는 카시오도루스 외에 보에티우스라는 자문관이 하나 더 있었다. 보에티우스는 테오도리쿠스에게 시간과 천체의 움직임을 나타내보여주는 시계를 만들어 받쳤다. 테오도리쿠스는 보에티우스에게 감사의 편지를 보낸다. 하지만 보에티우스는 그 편지를 자신의 동료인 카시오도루스가 쓴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보에티우스는 이들이 야만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몇 백년은 족히 지나야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보에티우스는 초조했다. 이들이 로마가 이룩해 놓은 문명을 완전히 파괴한다면 인류는 문명의 암흑속에서 고생해야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보에티우스는 콘스탄티노플로 한 장의 편지를 보낸다. 그것은 콘스탄티노플의 황제가 군대를 이끌고 이곳 라벤나로 침공해 오도록 요청하는 반역의 서신이었다. 하지만 이 어설픈 역모는 발각이 되고 보에티우스는 사형을 언도받고 감옥에 갇힌다. 보에티우스는 감옥에서 사형이 집행되기 전의 마지막 시간을 할애하여 현재 지상의 가치가 가지고 있는 허무함을 철학의 가치에서 추구하는 최고의 선bonum summum과 대비하여 기술하는 작업을 한다. 그는 자신이 <철학의 위안>이라고 이름붙인 저서를 통해 위안을 받는다.

움베르토 에코는 <매스 미디어>라는 또 다른 야만족이 서구를 침공하였다고 경고하고 있다. 매스 미디어는 문자의 시대를 일거에 구석으로 밀어 버리고 말았다. 이런 상황은 로마제국이 야만족의 말발굽 아래 찬란하게 이룩해 놓은 기존의 문명이 해체되는 것과 같은 것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에코에게 있어서 이런 상황 속에서 자신을 위로해 줄 그 무엇은 역시 "철학"이었던 셈이다. 현대의 매스 미디어가 아무리 막강한 위력을 떨치고 있다 하더라도 그 철학적 사유가 그 기본적 방향은 불변이라는 점은 불변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면서 에코는 대립쌍의 문제를 검토하면서 사회적 감성을 보수와 진보라는 등식으로 절단하는 것이 매우 부적절한 것임을 말하고 있다. 사실 읽는 문화에서 보는 문화로 급속하게 변모하고 있는 이 세상에서 책은 조만간에 사라질 유물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틀린 지적이었음이 드러났다. 이것은 사무실에서 필기도구가 사라질 것이라고 예언한 것과 마찬가지의 이유인 것이다.

그럼에도 요즘의 사람들은 하나의 주장에 너무나 쉽게 몰입한다는 점이다. 그 몰입의 시간은 점점 짧아지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교가 분열하는데 천년의 시간이 필요했지만, 다시 분열하는데는 5백년도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 분열이 분열하는데는 1백년도 걸리지 않았다. 이렇게 하나의 사회적 기초가 되는 원리조차도 급속한 시간 속에서 변해가고 있다. 하물며 인간 개개인의 사고는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오래 전에 어떤 코메디언이 "허리가 긴개와 다리가 짧은 개가 싸우면 누가 이길것인가?"라는 우스개스런 문제를 낸 적이 있었다. 사람들이 이 질문에 대답하는 방식은 정말로 대단했다. 하지만 답은 의외로 간단한 것이었다. "힘이 센 개가 이긴다"였다. 그제서야 사람들은 그 질문이 내포하고 있던 오류를 생각하고 웃을 수 있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에코 역시 우리에게 그 코메디언과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사실 요즘과 같이 정보가 대량으로 쏟아져 나오는 시대에 정말로 나 자신을 위로해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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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나무 - 안범진 유고시집
안범진 지음 / 좋은글방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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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고통은 이 세상의 고통을 짊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이 자신이 뱉어내는 소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시인의 목소리는 이해될 수 없는 방언일수도 있다. 그 언어는 어떤때는 새의 소리가 되고, 어떤 때는 바람이 되어 우리의 귀를 스쳐 지나간다. 그리고 때로는 소낙비가 되어 우리의 영혼을 세척하는가하면, 바늘이 되어 양심을 찌르기도 한다. 그 소리를 이해하는 것을 우리들의 몫이다.

한 시인의 "유고시집"을 읽는다는 것은 고통이다. 그를 뒤늦게 알았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 그를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하였기 때문이다. 시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고통이다.

그 고통은 우리는 결코 그 시인의 마음 속으로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오직 그 마음의 주변만을 맴돌 뿐이다. 그리고 그 시인의 아주 하찮은 한부분을 바라보고 그것을 시인의 전체로 생각하기도 한다. 정말 그럴까...

시집을 읽다보니 이 시인이 즐겨 사용한 단어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 단어들을 조립해 본다. 달月, 거리, 비, 석양과 중간지대... 이런 단어들을 통해 시인의 삶을 유추해 본다는 것은 어쩌면 교만이면서 부질없는 유희일지도 모른다.

한 시인이 살아온 시대는 그의 언어 속에 투영될 수 밖에 없다. 안범진시인은 이 세상을 결코 아름답게 보지는 않았다. 시인이 절망하는 사회는 침묵의 사회인지도 모른다. 침묵을 강요하는 사회...

안범진 시인은 시집의 말미에 "또 다른 글1.2.3"을 남기고 있다. 이 세편의 시 아닌 시를 통해 그는 자신의 외로움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다. 그 외로움은 자신을 숙성시키는 발효제이면서 자신을 깍아먹는 부패의 원료가 되었을 것이다. 왜 이 유고집의 시인은 발효와 부패 사이에서 절망해야 했던가.  그의 마지막 말이 눈과 가슴을 아리게 한다.

"..... 이렇게 지면으로 인사를 드리니 정말 시인이 된 기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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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의 신비와 마법
F.C. 엔드레스 외 / 고려원(고려원미디어) / 199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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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하면 할머니가 지팡이 집고 둥둥둥, 둘 하면 두부장수 종을 친다고 쟁쟁쟁, 셋 하면 새색씨가 화장을 한다고..."하며 끝없이 이어지는 우리의 전래동요가 있다. 이 노래를 부르던 오래전의 사람들은 노래를 통해 숫자에 대한 확실한 기억을 아이들에게 심어주기 위해 그렇게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수의 세계가 순서와 셈의 질서만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는 다른 의미도 전해주려 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흔히 숫자를 배우고 일. 이. 삼. 사... 와 하나. 둘. 셋. 넷..으로 이어지는 두 가지 숫자를 배운다.  기수와 서수로 알려진 이 숫자체계는 우리들이 별 다른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것 가운데 하나이다. 이 의심없이 받아들인 수체계는 히한하게 일생을 함께 간다. 심지어 죽어가는 순간에까지 죽는 사람은 기수와 서수의 구분법을 정확히 사용하여 자식들을 호칭한다는 점이다. 일번 아들아가 아니라 언제나 첫째야, 둘째야 하는식으로 호칭한다는 점이다.

이렇게 숫자와 언어는 한번 우리의 기억 속에 입력이 되면 절대 잃어버리지 않는 특성이 있다. 그런데 우리들은 이 숫자 속에 숨어있는 깊은 의미를 아무도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왜 성황당을 지날 때 침을 세번 뱉고 깨금다리로 자신의 나이만큼 콩콩거리며 뛰어가야 하는지를 의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숫자가 그만큼 우리들의 기억속에 의심없이 입력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은 수의 체계와 역사부분과 수의 소사전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수의 역사와 체계부분은 그동안 우리들이 많이 접해 보았던 수의 역사이다. 이 책의 가장 빛나는 부분은 수의 소사전부분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각각의 수에 대한 고대인, 그리스도교, 유대교, 이슬람교의 시각을 자세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  그 각각의 수가 의미하는 상징성이라든가 포함하고 있는 함축성을 읽어가면서 우리들이 알고 있던 기수와 서수라는 인식을 급속하게 신학과 철학 그리고 과학이라는 영역으로 이동해가게 한다. 다만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저자들이 독일어권의 인물들이기 때문에 중국과 인도 그리고 수학에 있어서 위대했던 마야와 같은 지역이 간단하게 언급되어 있다는 점일 것이다. 즉 유럽 중심의 숫자역사를 기술함으로서 반쪽의 숫자역사가 되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이 책을 읽다보면 숫자를 통해 인간 문명의 다양성과 다양함을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 통일된 숫자의 세계조차도 인간의 사고는 풍요한 자신들만의 관습을 만들어 냈다는 그 점이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낄 수 있는 점이라 하겠다.  그리고 이 책을 통해서 안네마리 쉼멜이라는 이슬람학의 대가를 만났다는 점 역시 큰 수확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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