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건축이야기
루이스 헬만 지음, 임종엽 옮김 / 국제 / 199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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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건물이란 개념이 옷의 단순한 정의처럼 사람이 들어가 사는 것으로만 치부된다면 굳이 역사를 알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주변의 많은 건축물의 형태를 통해서 그 지역의 문화적. 역사적. 자연적인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지금은 거의 볼 수 없지만 어린 시절에 자주 볼 수 있었던 좁은 마루가 집을 한바퀴 돌아 감싸안은 일본식 적산가옥형태는 우리의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가옥과는 현격한 차이를 주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인간이 최초로 선택한 주거공간의 개념은 단지 자연으로부터 몸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동굴시대로 대표되는 그 시대에는 주거공간의 합리성이란 개념은 거의 찾아 볼 수 없었다. 오직 자신의 몸을 자연과 짐승으로부터 보호하는 기능만이 강조되었던 것이다. 이 시대를 지나 문명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건축은 다양한 재료를 통해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이 시대를 대표하는 것은 사원 건축물이다. 신의 안식처로서의 사원 건축물 역시 인간의 편리성 보다는 신에 대한 공경에 더 중점을 둔 형식이었다. 여기서도 인간은 건물의 요소로서 고려되지는 않고 있다. 오직 인간은 건물을 통해 신에 대한 외경심이 생겨나도록 설계되었을 뿐이었다. 이러한 건축의 외적 요소는 그 뒤로 역사적인 변형을 거치지만 그 원래적인 의미를 상실하지 않은 채 오랜 시간 이 세상을 지배하게 된다. 그 최후의 걸작품이 베르사이유 궁전이 아닐까. 그 거대한 궁전에 인간의 생리적 고통을 해결해 줄 화장실이 없다는 사실은 거대 건축물이 지향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잘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이 거대 건축물이 유행하던 시기에도 건축의 재료는 원시시대나 초기 역사시대를 더 이상 넘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석재와 벽돌 그리고 목재를 이용하여 집을 짓고 여기에 타일로 장식을 하는 것이었다. 이런 획일적인 건축재료에 일대 혁명을 불러온 것은 산업혁명으로 인해 나오게된 철이었다.

인간들은 철을 이용하여 이전에 건축했던 건물보다 더 튼튼하고 더 다양한 모양을 설계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시기부터 인간은 건축에서 기능적인 것을 생각하게 되었고 그 혜택을 조금씩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철과 여기에 가장 알맞은 부재료였던 유리는 너무나 잘 어울리는 한쌍의 재료였다. 이 결과 건축물은 공간이 더 넓어지고 더 밝아지게 되었다. 건축설계사들은 넓어진 공간의 동선을 인간의 생활과 일치시킴으로서 건물과 인간을 하나로 결합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유리를 이용하여 더 많은 빛을 건물 안으로 흡수시킴으로서 건물을 새로운 유토피아로 설계할 수 있었다. 이때까지 인간들은 집과 자신들이 활동하는 공간이 분리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들 현대적 재료를 이용하여 집과 활동공간이 연결된 하나의 복합건물이 탄생하게 되면서 인간들은 자연을 새롭게 창조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이런 인간의 생각은 새로운 진화론이었다. 게다가 새로운 건축물을 후원하는 집단은 신흥 부르조아지들이었다. 이들은 신적인 세계보다는 이익의 세계와 합리적인 세계를 원하는 새로운 족속들이었다. 이들에게 있어서 시간은 돈이었으며 그 시간을 효율적으로 이용할 공간 역시 꼭 필요한 개념이었다. 이런 합리성으로 무장한 건축물은 실용성이 강조되면서 도시를 거대한 콘크리트의 상자쌓기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이런 신흥 부르조아지들의 생각은 건축뿐만이 아니라 모든 부분에 걸쳐 실험되었다. 바다에 제방을 쌓아 공장부지를 만들고, 산을 뚫어 터널을 건설하면서 좀더 빠르고 편한 세상을 만들어 보려고 하였다. 이런 기능적인 측면에서 접근하는 건축의 역사는 인간의 삶에 있어서 자연적인 요소가 배제되어 버리고 말았다. 이 결과 삭막한 도시라는 관용어가 생겨났을 뿐이다. 인간의 거주공간으로서 건축물은 점차 산업거대주의의 양상에서 탈피하여 좀더 인간적인 형식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하지만 완벽하게 우리 인간들을 충족시켜주는 건축물은 아직 태어나지 않고 있다. 그것은 건축이라는 것이 획일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더 다양한 것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그 다양함에는 그 지역의 자연과 관습과 역사가 포함되고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인간들은 어떤 건축물을 원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속에서 생활하는 주체는 언제나 인간이라는 사실이다. 그 인간의 육신과 정신을 감싸줄 건축물의 최종적인 형태는 "宇宙의 子宮"이 이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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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를 찾아 떠나는 여행
베로니크 모뤼스 지음, 이선임 옮김 / 해바라기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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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가 쇠퇴한 오늘날에 있어서 니체가 한 말은 의미심상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오늘날 인간은 신화를 빼앗기고 굶주린 채, 과거에 둘러싸여 서 있다. 그리고 비록 그것이 아득히 먼 과거일지라도, 및친 듯이 뿌리를 파내야만 하는 것이다. 이 위대한 역사적 굶주림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주변의 수없이 많은 이질적인 문화의 고향의, 신화의 자궁의 상실 이외에 그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니체는 신화가 제거된 과거를 자궁의 상실로 묘사하고 있다. 그것은 사실 우리들의 원천적인 기억을 제거하는 두엽절개수술과 같은 것이다. 신화의 세계는 한시적인 사건의 세계가 아니다. 그렇다고 신델렐라와 같은 동화의 세계도 아니다. 그 세계는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시적인 영감을 자극하는 세계인 것이다. 오래 전 "엑스칼리버"란 영화를 보면서 거대한 화면속에서 울려나오던 바그너의 음악은 지금도 기억에 선명하다. 그후로 바그너의 음악을 들으면 깊고 깊은 떡갈나무 숲의 신비스러움이 상상속에 떠오른다. 여기서 나는 신화의 세계를 느낄 수 있다. 브리튼의 섬과 게르마니아의 떡갈나무 숲이 혼합된 세계 그것이 바로 신화의 세계가 아닐까.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신화의 세계는 아서왕, 파우스트, 빌헤름 텔, 멜뤼진, 드라큘라, 아틀란티스의 섬 등이다. 지역적으로도 브리튼섬, 독일, 스위스, 프랑스, 트란스실바니아, 그리스 등 유럽 전 지역을 아우르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모두 우리에게 친숙한 이야기이다. 그럼에도 이들의 이야기 속에는 시작과 끝이 명시되지 않은 우르보소스의 세계를 볼 수 있다. 서로 꼬리와 꼬리를 물고 영원히 회귀하는 영겁의 뱀, 우르보소스는 신화의 세계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상징인지도 모른다.

이 상징의 터널을 현대문명의 이기를 이용하여 지나가면서 바라본다면 어떤 느낌을 받을까. 사실 우리들은 너무나 경험적이며 합리적인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신화적 세계를 바라보는 상상력의 부족함을 겪기도 한다. 드라큘라의 무대가 되는 루마니아의 "트란스실바니아"의 세계를 한번 생각해 보자. 이 세계는 어떤 세계일까? 실바니아란 단어에서 연상되는 "銀". 하지만 이 실바니아는 銀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이 지명은 라틴어 silva에서 온 단어이다. 실바는 울창한 숲이란 의미이다. 그러므로 드라큘라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은 銀으로 된 문을 통과하는 것이 아니라 울창한 숲 저편 너머trans로 들어가야만 하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신화는 원시적인 우리의 감정과 연결되는 것이다.

이로서 신화는 로브-그리예의 말처럼 "... 바로 이 순간에 내가 살고 있는 사회는 신화의 사회이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요소는 모두가 신화적 요소이다"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즉 신화를 탐험하는 여행을 통해 그 신화의 진화과정을 통해 그 신화가 죽어있는 것이 아니라 시대를 흘러가며 생명력을 가지고 새롭게 재생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새로운 신화의 해석을 통해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단 그것을 의식하느냐 못하느냐는 순전히 우리 개인의 몫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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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난 희귀동물
다이앤 애커맨 / 세종(세종서적) / 199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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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크 물범, 짧은 꼬리 알바트로스, 황금 사자 타마린 원숭이, 왕나비...

우리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조만간 우리들의 곁에서 사라질 동물들이다. 이 동물들의 서식처는 한결 같이 인간의 둥지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들의 서식처 역시 언제까지 유지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멍크물범은 오래 전에는 태평양과 카리브 연안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물범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기록한 물범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현재는 1천 2백여마리밖에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이들은 점차 자신들이 살고있는 곳을 인간의 침입으로 상실해가고 있다. 5백년전에는 태평양은 거대한 진공지대였다. 범선으로 이곳을 통과하는 것은 목숨을 내건 대모험이었다. 이런 시기에 멍크물범은 충분히 인간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요즘은 하룻만에 지구를 완주할 수 있는 시대이고 인간은 멍크물범의 움직임보다 더 빠른 총을 가지고 있다. 사실 인간들이 마음만 먹는다면 멍크물범의 멸종은 언제든 가능하다는 말이다. 하지만 인간은 점점 자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세상에 인간만이 넘쳐나는 세상을 상상해 보라. 그 얼마나 기괴한 혹성일까. 외계인들이 이런 인간의 모습을 보면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단일종만이 우글거리는 낙후된 혹성...>

같이 어우러진다는 것은 여유이면서 공간의 공유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의 유전자속에는 어울림과 공유라는 단어에 대한 혐오감이 잠재해 있는 것 처럼 보인다. 그래서일까, 인간은 울타리를 치고 자신과 다른 종에 대해 유별난 공포감을 가지고 있다. 바로 이런 인간의 편협함은 알바트로스나 원숭이에게 조차 자신의 공간을 조금도 양보해 주지 않으려 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기서 저자인 다이앤 애커맨이 주장하는 환경의 보호는 선진국의 논리일 뿐이다. 1800년대 산업혁명을 통해 이미 굴뚝 산업을 졸업하기 시작하는 선진국들은 다른 개발도상국의 국가들에게도 이를 강요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환경 훼손의 주범들은 이들 선진국이란 사실이다. 이들은 자국에서 굴뚝산업을 제3세계로 철수시켰을 뿐이다. 즉 이들의 환경보호는 전세계적인 차원에서 시행되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자국중심으로 시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선진국의 환경정책은 제3세계의 무분별한 개발로 이어지고 있다. 제3세계에서 시행되는 개발은 그 나라의 이익을 위해서라기 보다는 선진국의 이익을 위해서 개발되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런 현상은 서구 유럽이 식민지에서 행했던 자연파괴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이앤 애커맨은 함께 공유하는 세계를 이야기하지만 이것을 어떻게 실행해야하는지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다만 그에게 있어서 멍크물범이나 브라질과 플로리다의 관목림, 황금 타마린드 원숭이, 알바트로스와 같이 사라질 위기에 처한 동물과 지역에 대한 감상적인 논평이 중요할 뿐이다. 그녀는 "누가 이처럼 아름다운 생명체를 죽일 권리가 있는가?"라고 묻고 또 "왜 우리는 멸종 위기에 처한 생명들을 보고도 가만히 있는가?"라고 분개하고 있다. 하지만 그녀의 질문과 분노는 그것 뿐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느끼는 것은 이런 동물들을 보호하기 위해 인간의 희생은 가능한가?라는 것이다. 애커맨은 환경과 생물의 어우러짐을 생각할 뿐 그곳에서 살고 있는 진짜 인간들의 모습은 애써 보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다만 확실한 것은 그녀의 주장에서 미국이 말하는 인도주의적 감수성이 어떤 것인지를 감지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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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아이 2005-04-11 2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지만 환경운동가와 미국 자본을 같은 미국인으로 동일시할 수는 없지 않을까요. 미국의 환경운동가들이 미국 자본을 상대로 싸우고 있는지도 모르니까요. 다만 그들이 제3세계에서 이루어지는 환경 파괴에 분노하기만 한다면 저도 도요재님 의견에 동감합니다.

dohyosae 2005-04-12 0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숨은아이님의 의견에 동감합니다. 다만 여기서 제가 지적하고 싶었던 것은 환경운동에 대한 낭만성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의견 감사합니다.
 
히스패닉 세계 - 스페인과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와 문화
존 H. 엘리엇 엮음, 김원중 외 옮김 / 새물결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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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지리 선생님이 꿈 많던(?) 우리들에게 언어를 배우려면 영어도 좋지만 중국어와 스페인어를 배우라고 하였다. 당시 중국어와 스페인어는 우리들의 세계에서는 약간은 낮선 언어였다. 여학생들은 불어를 남학생들은 독어를 선택하는 시절에 스페인어와 중국어는 고려할 대상이 아니었다. 그리고 중국어는 자유중국이라는 우리와 가까운 나라의 위상과 후진적인 中共이라는 현실과 어우러져 과연 중국어를 배워야만할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이런 상상은 스페인어로 가보면 답답함 그 자체였다. 당시 우리들에게 알려진 스페인은 돈 키호테의 세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프랑코라는 독재자-당시 우리도 독재자를 가지고 있었다-의 시대착오적인 정책으로 스페인은 유럽에서 포르투갈과 함께 가장 못사는 나라로 기억되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점차 독서량이 시험위주에서 내 자신의 필요성에 따라 읽어가게 되면서 스페인이란 나라는 언어적으로 영어권보다 더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되었을 때 놀라웠던 기억은 지리시간에 왜 선생님이 스페인어를 배우라고 했는지를 이해하게 하는 충격이었다. 리오 그란데 강 이남에서 마젤란 해협에 이르는 방대한 제국에서 사용되는 언어가 스페인어였다는 사실은 이베리아 반도의 낙후된 나라 스페인의 또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스페인은 여전히 프랑코라는 거대한 그림자에 의해 장악되고 있는 나라였다. 

스페인이란 나라를 다시 보게 된 것은 1982년에 일어난 실패한 군사쿠데타에서였다. 한 극우 육군중령이 의사당에서 국회의원들을 인질로 삼고 옛체제로의 복귀를 요구하는 그 시점에서 스페인 국민들은 동요하지 않았으며, 더욱이 프랑코의 꼭두각시로 알려져 왔던 후안 카롤로스 국왕이 직접 텔레비전 방송에 출연하여 쿠데타 세력을 향해 "자신의 시체를 밟고 가라고" 말하면서 민주주의의 강력한 방패로 변모하는 모습을 보며 스페인이란 나라가 가벼운 나라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어떻게 이렇게 짧은 민주화의 과정 속에서도 흔들림 없는 성숙함을 보여주었던 스페인 국민과 지도층의 저력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히스패닉의 세계는 그 대답의 아주 많은 부분을 대답해 줄 수 있다. 역사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스페인의 모든 것 뿐 아니라 스페인의 다른 자식인 라틴 아메리카의 모습도 함께 음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많은 것을 보여주는 것의 단점이 갈증 또한 어쩔 수 없다는 점이다. 사실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라틴 아메리카는 우리와는 대척점에 위치해 있는 지구상의 반대편에 있는 장소이다. 그럼에도 이 세계는 우리와 상당히 가까워지고 있다. 하지만 이 세계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많은 제약이 따르고 있다. 즉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정보의 부족이 큰 원인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라틴 아메리카를 탄생시킨 히스패닉 세계를 조망한 이 책은 그 자체만으로도 가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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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05-04-22 1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주의 리뷰 당선, 저도 축하드립니다^^ 잘 읽었구요...

dohyosae 2005-04-24 1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늦게 알았습니다. 운빈현님, 감사합니다.

dohyosae 2005-04-24 1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연님, 감사합니다.

dohyosae 2005-04-24 1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만두님, 감사합니다.

마냐 2005-04-27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대의 제국, 에스파냐의 흔적은 이제 히스패닉....으로, 스페인어권으로만 남았네요. 그나마 지은이는 앵글로색슨인듯 하군여...흠흠...아, 축하드려요. ^^

dohyosae 2005-04-28 0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냐님, 감사합니다.
 
돌부리에 채이고 가시에 찔리고 중국철학우화 1
엄북명 외 엮음 / 서광사 / 199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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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언뜻보면 고사성어집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중국 철학서에 실려있는 우화들을 출전과 연대순으로 정리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원문과 함께 출전이 명시되어 있어 자료집으로 이용하여도 좋을듯 싶다.

중국의 철학에 대하여 아는 것이라곤 대학시절 동양철학사에서 잠시 맛보았던 것이 전부인지라 뭐라 말할 수 없지만, 이 철학적 우화를 보고 있자면 중국인들이 철학을 대하는 모습을 알 수 있는 것 같다. 수많은 예를 들어가며 핵심으로 접근해 가는 중국적 방법은 질문에 질문을 퍼부어대면서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을 인정하게하는 소크라테스적인 방식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차이점이라 하겠다.

중국의 철학적 전통은 이런 우화와 비유의 세계속에서 발전하였다. 이 비유의 황금시대는 중국 역사에서 가장 언론의 자유가 활발했던 전국시대였다. 현재 중국에 존재하는 모든 사상적 기원이 전국시대에 형성되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사상적으로 활기찬 시기였다. 당시 제자백가들이 쏟아낸 다양한 철학적 우화들과 비유들은 사상적 경향을 반영하면서도 현실적인 문제 또한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중국의 사상적 자원은 춘추전국시대를 끝으로 급속하게 쇠퇴하기 시작한다. 이후 이런 우화적인 작품이 간혹 나오기는 하지만 춘추전국시대처럼 삶과 밀접히 연관되어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순수한 창작적 우화라기 보다는 불교의 유입에 따른 외국의 우화가 많이 소개된다. 이렇게 우화가 급속하게 소멸하게 되는 것은 시대상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사실 춘추전국시대가 끝나면서 중국은 대체적으로 안정적인 왕조체제의 역사속으로 들어간다. 왕조 말엽의 교체기에 약간의 혼란을 제외하고는 대체적으로 평온한 시기를 보내게 됨으로서 이런 우화적인 것보다는 文, 詩, 賦, 詞와 같은 정통 문학이 그 자리를 대신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화의 특성이 촌철살인에 있었기 때문에 역대 왕조들 역시 이런 우화를 그리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리고 우화가 쇠퇴하게된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는 유학을 꼽을 수 있다. 즉 심학으로 불리우는 유학을 국가의 중심학문으로 채택함으로써 학문은 경전을 암기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유학경전 이외의 책은 중요하게 취급되지 않음으로서 전국시대 이전까지 다양하게 싹트기 시작했던 중국의 학문적 풍요로움은 일시에 쇠퇴하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국가적 사상성의 통일이라는 더 큰 목적을 달성하였기 때문에 권력자들에게 있어서 이런 손실은 충분히 감내할 만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풍요로운 전통이 지배계층에서는 단절되었지만 기층민중의 세계에서는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유학의 딱딱한 문장이 아니라 살아있는 삶의 비유가 우화속에 간직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책의 마지막 우화는 그 유명한 公孫龍의 <白馬非馬論>이다.  "말이란 말의 모양을 가리키는 것이고, 희다는 것은 말의 색깔을 가리키는 것이다. 색깔은 모양과 다르므로 흰말은 말이 아니다." 그러면서 그는 사람들이 잘 이해하지 못할까봐 이런 예를 들었다. "말을 살 때 어떤 말을 사도 좋다. 그것이 누런 말이든 간에 검은 말이든 간에. 그러나 흰 말을 살 때는 경우가 달라진다. 흰 말을 사지 않은면 안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흰 말은 말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오히려 예를 든 것이 더 어려운 이 학설을 사람들이 얼마나 알아들었는지는 모른다. 보편과 개별의 문제를 사람들이 어떻게 이해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白馬非馬論이 黑猫白猫論으로 대치되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것이 지배층과 기층민중간의 간극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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