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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도덕사상사
이에나가 사부로 지음, 세키네 히데유키 외 옮김 / 예문서원 / 2005년 1월
평점 :
절판
이 책은 일본 역사 속에 나타난 귀족, 승려, 무사, 조닌, 농민들의 실제적인 삶을 통해 그들의 도덕적 기반과 사상의 실체를 해부한 책이다. 한 나라의 도덕적 계보를 안다는 것은 현재의 삶을 뚫어볼 수 있는 혜안을 갖게 된다는 점이다. 그동안 일본에 대해 우리들이 접근한 방식은 대부분 일본의 외형적인 것에의 접근이었다. 이 결과 우리들이 접한 것은 일본이 왜 이렇게 빨리 근대화되고 세계적인 경제대국으로 발전하였는가와 같은 물질적인 부분이었다. 하지만 그 민족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하부구조인 물질적 토대와 상부구조인 정신적인 토대를 함께 알아야만 하는 것이 정석이라고 생각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그동안 우리들이 도외시하고 있었던 일본의 상부구조를 알려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저자는 이 책 속에서 일본인들이 자랑하는 그들만의 가치관을 강한 논조로 비판하고 있다. 예를 들어 우리들은 일본인들의 기록습관에 관해 아주 다양한 체험과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다. 비행기 사고로 추락하는 그 와중에서도 자신의 수첩에 그 상황을 기록한 일본인들의 기록습관이나 태평양 전쟁 당시 죽은 병사의 주머니에서 어김없이 발견된 작은 일기첩은 일본인들의 섬세함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저자는 그 기록의 습관을 무가시대의 좋지않은 흔적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무사들은 자신의 전공을 알리기 위해 그 자세한 기록을 남길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무사의 주인은 그 기록을 토대로 그에게 은급을 사여할 수 있었다. 즉 이 기록은 자신의 공과를 기록함으로써 자칫 배제될 수도 있는 논공행상에서 자신의 몫을 챙기기 위한 유일한 방편이었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우리들이 가장 일본적인 것으로 보고 있는 무사도의 정신 역시 저자는 무사의 발생에서부터 쇠퇴에 이르는 과정을 정밀하게 추적하면서 무사집단이 과연 니토베 이나조의 <일본정신의 기원>에서 묘사한 것과 같은 것인지를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일본의 무사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할복이라는 극단의 선택을 거침없이 시행하는 집단으로 알고 있지만 저자는 역사적 기록을 통해 그러한 것은 없었다고 단언한다. 무사들 집단은 배타적이며 이기적인 집단이었을 뿐이라고 말한다. 이들은 국가-당시 국가라는 개념이 있었다면-보다는 개인이 속한 가문을 위해 최선을 다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자신의 가문을 지키기 위해서는 배신과 충성을 마음대로 선택하였고, 자신의 주군과 연결된 것은 유교적 정신이 아니라 서로에 대한 필요의 교환이라는 점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무사도라는 것은 메이지 유신 이후 급조된 사상이라는 점이다.
일본의 정신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계급은 승려 계급이었다. 이들은 출가라는 선택을 통해 중생을 제도하였던 것이다. 이런 정신은 불교가 도입된 초기에는 그런대로 지켜질 수 있었지만 무가집단이 성장하면서 승려들의 위치는 축소되어 버리고 만다. 이 결과 승려들은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는 집단에서 집권세력의 나팔수로 전락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의 이런 목소리가 일반 백성에게 그대로 전달됨으로서 승려들은 귀족과 무사계급의 든든한 사상적 전달자로 전락해 버렸다는 점이다. 이 결과 백제로부터 유입되어 높은 도덕성을 유지하고 있던 불교는 급속하게 일본의 민중종교인 신도와 혼합되어 새로운 사상의 전파 대신 기존의 사상을 옹호하게 된다.
일본의 귀족들은 율령제가 실시되면서 확고하게 자리를 잡게되는 집단이었다. 이들은 그 이전부터 가지고 있던 특권을 율령제를 통해 합법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기반을 다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들은 귀족이었지만 그에 상응하는 도덕적 소양을 갖고 있지는 못하였다. 헤이안 시대의 기록에 보면 귀족들은 노비를 소유하고 그들을 혹사한 다음 병이 들면 길에 버리는 일이 흔하였다는 것으로 볼 때 그들의 도덕적 양심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귀족들의 전성시대인 헤이안 시대가 끝나가면서 귀족들의 위치는 더욱 특권화되면서 고립적인 상황으로 변해간다. 이들 중앙 귀족들의 호화방탕한 삶은 새로 대두하기 시작하던 무사계급에게 질시와 부러움을 안겨주었다. 무사계급은 당시 농촌지역에서 부를 축적한 부농들이 었는데 이들은 중앙의 귀족들에게는 멸시를 받는 촌뜨기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무사계급은 귀족들의 이런 방탕함과 문관 특유의 유약함을 경멸하였다. 그러면서도 이들의 문화적 소양은 자신들이 본받아야할 것으로 치부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점이다. 이런 이중성이 그후 대두되는 무사계급의 한 전형이 되었다.
귀족, 승려, 무사 계급이 일본의 상층부를 구성하는 집단이라면 조닌과 농민계급은 착취당하는 위치에 놓여있었다. 이 가운데 조닌계급은 서양의 신흥 부르조아지와 유사한 계급이지만 서양의 신흥계급이 경제적 부를 통해 정치적 역량까지 획득한 반면 일본의 조닌 계급은 경제적 이익만을 위해 존재하였을 뿐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부를 이용하여 어떤 정치적 역량을 발휘할 수 없었는데 그것은 일본의 굳건한 4신분제도를 깨뜨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결과 이들 조닌 계급은 1930년대까지도 지배계급의 돈주머니로서의 역할만을 담당했을 뿐이다. 이들이 이렇게 신분제의 굴레속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는 것을 자신들이 벌어들인 부를 마음껏 과시하는 방향으로 폭발시킴으로서 일본의 서민문화를 풍족하게하는 데는 일조를 하였다. 하지만 사고방식의 한계성으로 인해 이들은 사회개혁세력으로 보다는 향락적 퇴폐주의에 함몰되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만큼 일본의 신분제 사회의 벽은 두터웠던 것이다.
일본인구의 80%를 차지하는 농민계급은 말 그대로 착취의 대상이었다. 이들은 귀족, 승려, 무가계급의 통치사상을 끊임없이 주입받으며 현실에 만족해야만 하는 삶을 살아야만 했다. 이들 지배 계급은 유가의 통치원리를 일본식으로 변형하여 사회전반에 걸쳐 폭넓게 적용하였다. 유가의 삼강과 오륜의 충과 효의 덕목을 각 집단의 지배 이데올로기로 변형시킴으로서 사회전체를 신분적 계급질서 속에 확고하게 묶어 놓을 수 있었다. 이들은 말 그대로 의무만 있고 권리는 없는 계층이었지만 메이지 유신 이후 급속하게 밀려드는 서양사조의 물결 속에서 보수적 전통을 지키는 마지막 보루였다. 하지만 농민들은 자신들의 사상에 대해서 스스로 기록하고 성숙시킬 여력이 없었기 때문에 지배자들의 기록에 의존해야만 하는 한계성이 있다. 즉 농민들의 도덕적 사고방식은 그들의 직접적인 목소리가 아닌 제3자의 기록에 의존해야만 하기 때문에 정확하게 그 실체를 파악하기 어려운 단점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농민들은 자신들의 반봉건적인 목소리를 근대 일본에 잘 전해 주었다는 점이다.
이 책은 비교적 적은 분량의 책이지만 일본인들의 가족도덕사상, 정치사상, 종교사상, 계급의식, 경제사상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이 책의 이런 점은 그동안 우리들이 쉽게 접할 수 있었던 미화된 일본의 사상사나 역사에 대하여 다른 측면을 바라볼 수 있게한다는 점이다. 저자가 이렇게 일본의 사상과 도덕을 냉철하게 분석하고 해석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학문적 중립성 때문이 아닐까 생각이된다. 저자인 이에나가 사부로 교수는 1962년도에 교과서재판을 야기시킨 인물이라는 점이다. 이에나가 교수는 그가 저술한 고등학교 교과서의 323개부분을 문부성이 적절치않다는 이유로 수정하게 하자 이에 대한 재판을 청구하였던 사람이다. 그의 외로운 싸움은 1997년 그가 소송한 일부가 인정됨으로서 32년간에 걸친 교과서 재판이 종결되었다. 이 책은 그 연장선상에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의 학자적 엄격함이 짙게 드러나는 책이라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