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표서 까치동양학 23
사마천 지음 / 까치 / 1996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마천은 “자고 이래로 천명을 받아 제왕이 된 자가 어찌 봉선을 행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늘의 감응과 길조가 없으면 서둘러 봉선대전을 행하였으며, 하늘의 감응과 길조가 나타났음을 보고도 태산에 가지 않는 천자는 여지껏 없었다”고 단언하고 있다. 이는 중국의 역대 왕조에서 차지하는 봉선이란 의식이 어떤 것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하겠다.

중국 역사에서 봉선의식은 아주 중요한 개념이었다.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내는 단순한 이 의식은 천자天子로 표현되는 제왕의 명칭과 함께 제왕의 권위를 드러내는 중요한 의식이었다. 하늘의 아들이라는 천자가 봉선이라는 상징적 제의를 통해 하늘과 땅의 실제적인 지배자이며 또한 하늘과 땅의 명을 받아 제국을 다스린다는 천명사상을 부각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중국의 왕조에서 이 봉선의식은 마치 서양의 도유塗油개념과 비슷한 의미를 담고 있었다. 기름부음을 받은 자만이 왕의 자격을 합법적으로 얻은 것처럼, 봉선을 행하는 자만이 천자로서의 자격을 부여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즉 천자는 자신에게 권위를 부여한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냄으로서 진정으로 하늘과 땅으로부터 인정을 받았음을 고하는 의식을 통해 자신의 왕조의 정통성과 제왕의 권위를 보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중세 유럽의 경우에 있어서도 왕의 일정한 조건이 구비되기 위해서는 교회의 축복을 통한 대관식과 이에 따른 도유가 병행되었다. 여기서 도유는 왕이 다른 인간들과는 구분되는 거룩한 신분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절차였다. 이 도유를 통해 왕은 신의 대리인으로서 지상에서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중세 유럽에서 왕이 되고자 하는 자는 교회에서 대관식을 거행함과 동시에 도유 의식을 받아야만 했다. 여기서도 신에 의해 권위를 받았다는 천명사상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봉선서에 기록된 제사 의식이 역대 중국 왕조에서 철저하게 수행되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속적이지는 않더라도 그것이 천자의 권위를 인정하는 하나의 의식이라는 점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무리 무능하거나 폭군적인 기질이 다분한 제왕이라 하더라도 봉선의식은 한번은 꼭 거행하였다. 이는 봉선 의식의 효과 면에서 아주 재미있는 변화인데 처자로서의 권위를 인정받기 위해서는 한번의 봉선 의식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드러나고 있어 흥미롭다. 하지만 신하들과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천자의 봉선 의식이 규칙적으로 거행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 왜냐하면 고대의 정치질서는 자연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홍수나 한발과 같은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자연재해가 덮쳤을 때 백성들은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통치자의 “덕”이었다. 통치자가 덕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하늘과 땅은 그 은혜를 베풀거나 거두어 간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런 경우 통치자는 하늘과 땅에 자신의 과오를 고백하고 용서를 빌어야만 했다. 그래야만 하늘과 땅은 노여움을 풀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풍요로움을 지상에 베푼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봉선 의식은 하늘과 땅의 노여움을 풀어주는 가장 확실할 방법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봉선 의식의 역사가 한으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사마천은 봉선의 역사에 대해 길게 서술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사마천은 하. 은. 주를 거쳐 진과 한으로 이어지는 유구한 역사 속에서 봉선의식이 어떻게 중단 없이 거행되어 왔는가를 보여주며 그 의식이야 말로 진정한 천명을 받은 왕조의 정통성을 증명하는 방식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사마천은 봉선의식을 게을리 한 군주들의 예를 들어가며 제왕의 직무로서의 봉선 의식을  정형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봉선서에는 봉선의식 뿐만 아니라 무제의 통치 시에 성행했던 황로술도 같이 언급되고 있다.  이 황로술은 봉선의식과는 다른 관점에서 사마천이 바라보고 있는 점이 흥미롭다. 봉선의식과 제사의식이 왕조의 정통성과 번영으로 연결된다면 황로술은 제왕의 심기를 흐리게하는 사술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봉선 의식을 거행하는 황제와 황제가 머무는 땅은 당연히 세계의 중심이 되어야만 했다. 그래서 이 봉선의식을 통해 고대 중국인들은 자신들을 중심으로 하는 중화적 세계관을 형성할 수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세계를 중국中國이라고 하고 그 주변의 국가를 교화되어야만할 대상으로 규정하였던 것이다. 이런 이들의 자국 중심적 세계관은 이웃에 대한 침범을 정당화시켰을 뿐 아니라 필요하다면 역사적 왜곡을 통해서까지 그들의 우월적 지위를 분명하게 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이런 그들의 의식은 역대 왕조의 사서를 통해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이들의 역사서에서 자신들에게 불리한 내용은 자신들 중심의 역사로 왜곡함으로서 모든 국가가 중국의 위엄에 자발적으로 굴복하여 조공을 받쳤다는 이야기로까지 확대되었다. 이런 중화적 세계관의 시작이 봉선 의식이라는 점에서 이는 매우 중요한 것이라 하겠다.

여기에는 이외에도 제위기록에 관한 표(표는 생략하고 대신 표의 서문만 있다)와 藝.樂.律.曆.天官.河渠. 平準書등이 있다. 이들 모두 그 당시대의 기록과 연관되는 중요한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는 봉선서를 중심으로 글을 썼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밀레니엄 -상
펠리프 페르난데스-아메스토 / 한국경제신문 / 1997년 5월
평점 :
품절


오래전에 아놀드 토인비의 대저 <문명의 연구>라는 책을 보면서 가슴 한쪽이 답답함을 느꼈던 적이 있다. 세계를 몇개의 문화권으로 분류해 놓으면서 아시아는 중국. 인도. 일본만을 문명권으로 설정해 놓았던 것이다. 국사를 통해서 일본에게 문명을 전수해줬다고 배운 나에게 있어 토인비의 이런 분류는 놀라움보다는 역사의 약자가 감수해야만하는 숙명처럼 느껴졌다. 이후 외국인들이 쓴 책을 보면 내가 배운 국사교육이 오히려 왜곡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우리의 위치는 아시아에서 초라한 위치에 있었다. 어떤 책에는 우리의 역사가 월남의 역사보다도 적게 취급되어 있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기도 하였다. 그만큼 주류의 역사와 주변부의 역사는 시각적으로 큰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은 이런 시각적 차이를 좁히기 위해 기획된 것으로 보인다. 즉 주류의 역사보다는 주변부의 역사를 취급함으로서 역사의 미흡한 부분을 보충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저자가 스페인어권 출신이기에 이런 생각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스페인 역시 한때 세계 최강의 제국이었지만 어느 순간 이류국으로 전락하면서 세계사에서 정당한 대접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스페인의 이런 심리는 이 책의 주변부 문명을 기술하는데 동병상린의 심정으로 표출되어 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주변부 문명과 함께 문명의 운명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문명의 태어남과 발전 그리고 쇠퇴를 기록한다. 저자는 그 시작을 기원 1000년으로 잡고 있다. 이 시기에 어떤 문명들이 어떤 모습을 보이며 등장하였는지를, 그러면서 우리에게 현재의 모습을 함께 보도록 요구한다. 그 문명 가운데 얼마나 많은 문명들이 지금까지 존재하고 있는지를.

지금까지 우리들이 바라본 세계사는 엄밀하게 말한다면 유럽사와 그 주변부의 역사라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국을 취급하면서 아프리카와 인도의 식민지 역사를 취급하고, 스페인을 취급하면서 남아메리카의 역사를 취급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다보니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배를 받지 않았던 중국과 같은 국가들은 유럽인들의 관점으로 보는 세계사 속에서 자연스럽게 빠질수밖에 없었다. 유럽인들이 중국을 처음으로 대하는 역사의 시작은 아편전쟁이라는 사실은 그들의 역사에 대한 편식을 짐작하게 한다. 이렇게 유럽인들의 관점으로 보는 역사는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의 간섭을 받지 않고 독립적 왕국을 유지한 국가들은 상대적으로 조명을 덜 받는다는 약점이 있는 것이다. 이 결과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에 대한 지식이 한국보다 더 많이 축적되었다는 점이다. 이런 연구의 결과는 그들이 서술하는 세계사 속에 그대로 반영되기 때문에 한국의 역사가 이들의 역사보다 더 적은 분량으로 소흘히 취급되는 것이다.

이 책은 이런 유럽적인 도식에서 벗어나 주변부의 역사를 자세하게 취급하고 있다. 사실 외국인이 저술한 책 가운데서 한국에 대해 이렇게 많은 장이 할애된 책은 이 책이 처음이 아닌가 싶을 정도이다. 그럼에도 이 주변부의 역사 역시 유럽적인 함정에 빠져들 위험을 안고 있다는 점이다. 이 주변부 역사 기술 역시 기준이 될 주류의 역사가 중심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는 아시아의 중국과 일본을 중심으로 기술하고 있다. 이렇게 기술하는 이유는 저자가 문명의 순환을 태평양시대, 대서양시대, 그리고 다시 태평양시대로 기술하기 때문에 선택한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1000년에서 2000년에 이르는 문명의 운명이 어떻게 변모해가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앞으로의 역사적 발전이 어떤 패턴을 따라 어느 방향으로 흘러갈 것인지를 거시적으로 유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두 권으로 이루어진 방대한 저서는 1부 주도권의 시대, 2부 풀어진 태엽, 3부 대서양의 위기, 4부 뒤틀리는 주도권, 5부 태평양의 도전으로 되어 있다. 각각의 시대에 주변부에서 가장 융성했던 문명을 다루고 있어서 당시 주도적인 문명과의 유기적 결합을 통해 한층 더 공정한 세계사를 볼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저자는 지난 천 년간의 역사를 통해 앞으로 천 년간의 역사를 우리에게 제시했다고도 볼 수 있다. 그것은 문명의 운명이라고 이름붙여진 역사의 순환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 황인종 중심의 초원의 문명이 세계를 지배했다면 르네상스 이후에는 유럽 중심의 대서양 문명이 세계를 지배하였다. 이 문명의 순환은 태평양과 아시아로 옮겨진다는 저자의 주장을 증명하기 위해 수많은 역사적 사실이 동원된다. 이런 소소한 역사적 사실을 읽는 것만으로도 이 책의 가치는 충분하다고 생각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중국인의 의식구조 1
백양 / 문조사 / 1994년 5월
평점 :
품절


이 책의 저자인 백양이라는 사람은 일생을 투사로 살아온 인물이다. 그의 본명은 곽의동이지만 백양이라는 필명으로 더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의 경력으로 볼 때 자신이 사회와 타협을 했다면 국민당 정부하에서 탄탄대로의 길을 걸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1960년 중국 운남성과 버마, 태국, 라오스 접경 지역에서 잊혀진 채로 살아가고 있는 국민당 패잔병들의 참상을 전해들으면서 정부의 정책에 항의하기 시작하였다. 그가 대만의 국민당 정부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하게 된 원인이 된 부대는 1949년 이미 장군의 국민당 제8군의 이야기인 것이다. 이들 제8군은 다른 국민당군대들이 대만으로 철수한데 반하여 오지에 고립되어 무원의 처지가 되었다.  그럼에도 이들 부대는 그곳에서 운남성을 탈환하라는 명령을 수행해야만 했다.  이 고립무원의 군대는 이곳에서 무려 11년간 대만 정부의 변변한 지원 하나 받지 못한채 본토수복의 명령을 이행하며 죽어갔던 것이다. 이들은 한마디로 정부라는 거대한 조직의 책임회피에 의해 희생된 사람들인 것이다. 이런 국민당 정부의 무능과 무책임에 분노를 느낀 곽의동은 백양이라는 필명으로 국민당 정부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이 결과 그는 1968년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8년으로 감형되어 화소도에 수감되었다.  1976년 만기 출소하였으나 다시 화소도에 보내졌으나 국제적인 압력으로 이듬해 석방되었다.

그가 취급하고 있는 중국인의 개념은 대만과 본토를 아우르는 총체적인 중국인이다. 그가 바라보는 중국인들의 모습은 우리가 느끼는 중국인들과  사뭇 다르다. 그는 절대로 과장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민족에 대해 자학적인 수준으로까지 끌어 내려 비판한다. 그럼에도 그의 비판은 천박한 논리로 흐르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중국에 대한 사랑과 애정을 느낄 수 있을 뿐이다. 그는 중국인들의 과대망상과 자기 중심적인 세계관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가령 중국인들에게 民主란 <너는 民>  <나는 主>라는 개념으로 이해된다는 이야기를 읽으면 외부에서 바라보는 중국과 내부에서 느끼는 중국의 간극이 얼마나 큰 지를 알 수 있다. 그는 중국인들이 이렇게 왜곡되게 세상을 바라보는 원인을 된장항아리문화醬缸文化이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중국인들의 된장은 우리의 된장과 달리 걸쭉한 늪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한다. 즉 저자는 이런 된장 항아리를 통해 중국 인민들이 이 속에서 허우적 거리며 헤어나지를 못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이 늪은 중국인들이 자랑하는 자국의 문화이지만 그 문화는 이미 썩을대로 썩어 어찌해볼 도리가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게 된 이유를 중국인의 정신구조에서 찾고 있다.

중국인의 결점으로 더러움, 무질서, 소란, 파당, 내부투쟁, 사라진 근면, 자신의 과오를 시인하는 아량이 없음 드을 들고 있다. 그리고 이런 결점을  정치. 경제. 사회. 역사 속에서 철저하게 찾아내어 이야기 하고 있다. 그러면서 과연 중국인들이 역사 속에서 어떤 공헌을 하였느냐고 질문하고 있다. 그리고 중국사에서 드러나고 있는 인명경시, 야만적 풍습, 과거시험, 유교와 한자문화, 인구 과잉 등에서 파생된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을 중국인의 정신구조를 형성하는 하나의 토대이면서 골격이었다고 보고 있다. 저자는 이런 중국인들의 결점은 자기도취와 자아망상 그리고 중화주의라는 허상속에서 극대화되고 있다고 보고있다. 이런 점은 외국에 나가 있는 화교들 역시 다르지 않다고 보는데, 그 온상이 바로 차이나타운이라는 주장은 압권이었다.

이 책을 읽고나면 중국이라는 거대한 실체가 사실은 허상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일까, 이 책은 대만에서는 금서로 낙인찍혀 오랫동안 판금이 되었고, 중국 본토에서는 비밀리에 당간부들이 숙독했다고 한다. 이 책은 중국의 아픈 곳을 가감없이 드러낸 책이다. 하지만 이 책은 중국을 비하하는 책은 결코 아니라는 점이다. 

 **이 책은 1984년에 같은 출판사에서 <추악한 중국인>이라는 책으로 출판되었습니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포도나라 2005-05-21 0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님 덕분에 좋은 책 알게 되었네여 캄샤~~^^
 
민담의 역사적 기원 현대의 문학 이론 17
V.Y.프로프 지음, 최애리 옮김 / 문학과지성사 / 1990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솔직히 고백하자면 모두 9장으로 이루어진 이 책을 3장까지만 읽고-1장 전제, 2장 이야기 시작, 3장 신비한 숲-서평을 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서평은 전체적인 내용에 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 3장까지만 읽어야만 했는가? 4장에 들어서 읽기 시작하면서 러시아 민담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만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민담집하면 흔히 그림 동화집을 손꼽지만 이에 못지않게 러시아 민담 또한 민담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이렇게 된 것은 민담을 집중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나라가 독일과 러시아였기 때문이다. 두 나라의 민담에 대한 연구는 역사가 오랜 만큼 그 축적된 지식의 양 또한 만만치 않음을 이 책을 통해서 느낄 수 있었다. 각설하고...

프로프는 민담의 일반적 유형을 언급하면서 사회주의적 경제하부구조적인 이론을 바탕으로 전개한다. 물론 공산주의가 붕괴된 오늘날 이런 주장은 공허한 이론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민담의 모티브가 주제와 밀접하게 연관되는 한에서 민담의 주제 또한 시대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시대의 산물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맑스와 엥겔스의 말처럼 "경제적 하부구조의 변모는 거대한 상부구조 전체의 변화를 초래한다"는 입장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야기는 과거의 사회제도에 대조하여 거기에서 기원을 찾아야 한다는 어떤 전제가 성립될 수 있다는 것이 프로프의 견해이다. 그리고 프로프는 종교도 엄격한 의미에서 하나의 제도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그에게 있어서 종교적 제의와 관습은 같은 것은 아니지만 하나의 관습은 제의로서 구성된다고 보기 때문에 종교적 제의와 관습을 분리하여 연구하는 것은 타당하지 못하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민담의 주제는 현실에 모순적으로 대응하고 있다고 본다. 즉 민담이 취급하는 이야기의 주제는 역사의 합리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비합리적이면서 현실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에 기원을 둔 것도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민담은 어쩌면 원시적인 살아있는 싱싱한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원시적인 사고는 추상을 모르기 때문이다. 원시적인 사고는 행위로 혹은 사회구성의 형식으로 민속문학과 언어로 나타난다. 즉 삶의 직설적인 이야기 속에 철학적 현상을 뽑아내려 하는 것은 원시인들이 아니라 현대인들이라는 점을 프로프는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다. 그래서 프로프는 사고의 사실인 것을 실제로 있었던 사실로 혹은 그 역으로 오인할 위험을 안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므로 민담을 연구할 때 학자들은 민담 자체를 한 가지 주제, 한 문명 또는 인위적으로 설정된 다른 어떤 경계 내에 한정하는 오류를 범하기 쉽다고 지적한다.

민담은 언제나 정형화된 말로 시작한다. "옛날 옛날 어떤 나라에..."로 시작되는 이 첫 문장은 "...가 있었다"로 끝을 맺는다. 즉 이야기의 요소들이 워낙 긴밀하게 얽혀있기 때문에 등장하는 가족들의 성격은 사건의 진행과 함께 조금씩 밝혀질 수 있을 뿐이다.  이런 구조는 주일날 성당에서 사제가 봉독하는 복음서의 형식과 유사한 모습을 보인다. "그때 예수께서..."로 시작되는 복음의 이야기에서 항상 반복되는 그때in illo tempore라는 단어는 과거의 어느 시점이 아니라 그 사건이 지금 재현되고 있음을 의미하는 단어인 것이다.  그러나 민담에 있어서 동일한 반복은 역사적 시간과 공간속에서 재현되는 어떤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2장에서 프로프는 왜 민담 속에서 아이들은 가두어지는 가에 대해 프레이저의 황금가지의 네미 호수의 사제, 라푼첼, 그리스 신화의 다나에의 예를 들어가며 설명한다. 프레이저의 이야기 속에서는 복잡한 금기 체계를 언급하고, 라푼첼에서는 월경과 관련된 소녀들의 감금을, 다나에의 예에서는 결혼의 준비나 특별한 결혼을 의미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 설명의 최종 결론은 인간 존재를 둘러싸고 있는 보이지 않는 힘들 앞에서의 공포로 귀결되고 있다.

그리고 3장에서는 왜 아이들이 숲으로 들어가야만 하는가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숲이란 은밀한 장소이면서 시련과 단련의 장소로 묘사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숲은 현실의 세계와 새로운 세계를 갈라 놓는 중간지대인 셈이다. 이 숲을 통과하는 과정은 마치 엘리아데의 "성과 속"에서처럼 경계선의 의미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프로프는 이 세계를 숲과 통나무집-이즈바-의 문지방을 동일한 세계로 놓고 러시아의 민담 이야기를 시작한다. 러시아 민담에서 자주 등장하는 통나무집은 숲의 변형으로 보고 이론을 전개해 나가는 프로프의 혜안은 감탄을 금치 못하게 한다. 하지만 그의 자유자재로 다루고 있는 러시아 민담 앞에서 무릎을 꿇을 수 밖에 없었다. 나 역시 통나무 집의 문지방 앞에서 앞으로 가느냐 마느냐의 갈등 속에서 주저 앉고 말았던 것이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05-05-26 15: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기상천외의 발굴! 로빈슨 크루소의 그림일기
요엘 퀴노 지음, 정창호 옮김 / 삼우반 / 2004년 6월
평점 :
절판


로빈슨 크루소나 15소년 표류기와 같은 모험 소설을 읽다보면 하나의 세계가 머릿속에 그려진다. 그 상상의 세계는 순전히 자신의 머릿속에서 설계되지만 그 소설의 이야기가 골격이 된다. 사실 로빈슨 크루소의 이야기를 읽었을 때 한 동안 책상밑에 나만의 동굴을 만들어 놓았던 기억이 있다. 그 동굴속의 삶은 원시적인 생활이 아니라 원시를 이기기 위한 문명의 몸짓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성인이 되어서도 로빈슨 크루소의 자연속에서의 문명을 갈구하는 삶은 하나의 모범이 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어느 싯점에 이르자 로빈슨 크루소의 삶에 하나의 의문을 제기하게 되었다. 그것은 로빈슨 크루소의 이야기가 모험소설이 아니라 어떤 정당성 혹은 명백한 운명과 같은 서구제국의 주장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해서 나에게 낭만적인 세계관은 종언을 고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이 책을 읽고 다시 글을 쓰게된 것은 종언을 고한 세계관은 나의 기억 속에서 완전하게 포멧되지 않았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요엘 키노의 글과 그림은 로빈슨 크루소의 상상은 인간의 내부에 자리잡은 원초적인 피를 항상 솟구치게 하기 때문이다. 다니엘 디포는 당시에 이런 것을 염두에 두고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단지 그가 추구했던 것은 제국의 문명적 우월성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내부에 도사리고 있던 인간의 원시적 충동성은 그가 예상하지 못한 덤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행운이라고 할 수있다. 이 그림과 글이 어울어진 책은 로빈슨 크루소의 모험을 읽고 자신의 머릿속에 상상의 세계를 만들었던 사람들은 그 히미한 기억이 다시 솟아나는 것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을 보면서 자신의 상상과 합치되는 부분을 만나면 어떤 생각이 들까? 원시로의 회귀와 그곳에서 살아가려 노력하는 인간의 사고에는 흑인, 황인, 백인의  색과 관계없이 대동소이함을 느낄 것이다.

이 책에 그려진 세밀한 그림들을 보노라면 중세 이후 유럽 출판에서 선호하였던 자세한 그림과 해설이 덧붙여진 책의 전통을 보는듯 하다. 그리고 이 전통의 효과에 잠시 빠져들게 된다. 그것은 그 가상의 현실이 언제 어디선가 역사적 사실로 존재했던 것이 아니었던가하는...

바로 이것이 이 책이 노리는 효과인지도 모른다. 어디선가 존재했던 이야기... 그것은 바로 우리들이 생각하는 사고의 보편성을 공유하는 것이 아닌지.  그림과 짧은 글로 이루어진 로빈슨 크루소의 미발굴 기록이라는 이 책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전하는 의미는 역사의 데쟈뷰 현상이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