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레니엄 -상
펠리프 페르난데스-아메스토 / 한국경제신문 / 1997년 5월
평점 :
품절


오래전에 아놀드 토인비의 대저 <문명의 연구>라는 책을 보면서 가슴 한쪽이 답답함을 느꼈던 적이 있다. 세계를 몇개의 문화권으로 분류해 놓으면서 아시아는 중국. 인도. 일본만을 문명권으로 설정해 놓았던 것이다. 국사를 통해서 일본에게 문명을 전수해줬다고 배운 나에게 있어 토인비의 이런 분류는 놀라움보다는 역사의 약자가 감수해야만하는 숙명처럼 느껴졌다. 이후 외국인들이 쓴 책을 보면 내가 배운 국사교육이 오히려 왜곡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우리의 위치는 아시아에서 초라한 위치에 있었다. 어떤 책에는 우리의 역사가 월남의 역사보다도 적게 취급되어 있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기도 하였다. 그만큼 주류의 역사와 주변부의 역사는 시각적으로 큰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은 이런 시각적 차이를 좁히기 위해 기획된 것으로 보인다. 즉 주류의 역사보다는 주변부의 역사를 취급함으로서 역사의 미흡한 부분을 보충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저자가 스페인어권 출신이기에 이런 생각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스페인 역시 한때 세계 최강의 제국이었지만 어느 순간 이류국으로 전락하면서 세계사에서 정당한 대접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스페인의 이런 심리는 이 책의 주변부 문명을 기술하는데 동병상린의 심정으로 표출되어 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주변부 문명과 함께 문명의 운명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문명의 태어남과 발전 그리고 쇠퇴를 기록한다. 저자는 그 시작을 기원 1000년으로 잡고 있다. 이 시기에 어떤 문명들이 어떤 모습을 보이며 등장하였는지를, 그러면서 우리에게 현재의 모습을 함께 보도록 요구한다. 그 문명 가운데 얼마나 많은 문명들이 지금까지 존재하고 있는지를.

지금까지 우리들이 바라본 세계사는 엄밀하게 말한다면 유럽사와 그 주변부의 역사라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국을 취급하면서 아프리카와 인도의 식민지 역사를 취급하고, 스페인을 취급하면서 남아메리카의 역사를 취급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다보니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배를 받지 않았던 중국과 같은 국가들은 유럽인들의 관점으로 보는 세계사 속에서 자연스럽게 빠질수밖에 없었다. 유럽인들이 중국을 처음으로 대하는 역사의 시작은 아편전쟁이라는 사실은 그들의 역사에 대한 편식을 짐작하게 한다. 이렇게 유럽인들의 관점으로 보는 역사는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의 간섭을 받지 않고 독립적 왕국을 유지한 국가들은 상대적으로 조명을 덜 받는다는 약점이 있는 것이다. 이 결과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에 대한 지식이 한국보다 더 많이 축적되었다는 점이다. 이런 연구의 결과는 그들이 서술하는 세계사 속에 그대로 반영되기 때문에 한국의 역사가 이들의 역사보다 더 적은 분량으로 소흘히 취급되는 것이다.

이 책은 이런 유럽적인 도식에서 벗어나 주변부의 역사를 자세하게 취급하고 있다. 사실 외국인이 저술한 책 가운데서 한국에 대해 이렇게 많은 장이 할애된 책은 이 책이 처음이 아닌가 싶을 정도이다. 그럼에도 이 주변부의 역사 역시 유럽적인 함정에 빠져들 위험을 안고 있다는 점이다. 이 주변부 역사 기술 역시 기준이 될 주류의 역사가 중심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는 아시아의 중국과 일본을 중심으로 기술하고 있다. 이렇게 기술하는 이유는 저자가 문명의 순환을 태평양시대, 대서양시대, 그리고 다시 태평양시대로 기술하기 때문에 선택한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1000년에서 2000년에 이르는 문명의 운명이 어떻게 변모해가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앞으로의 역사적 발전이 어떤 패턴을 따라 어느 방향으로 흘러갈 것인지를 거시적으로 유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두 권으로 이루어진 방대한 저서는 1부 주도권의 시대, 2부 풀어진 태엽, 3부 대서양의 위기, 4부 뒤틀리는 주도권, 5부 태평양의 도전으로 되어 있다. 각각의 시대에 주변부에서 가장 융성했던 문명을 다루고 있어서 당시 주도적인 문명과의 유기적 결합을 통해 한층 더 공정한 세계사를 볼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저자는 지난 천 년간의 역사를 통해 앞으로 천 년간의 역사를 우리에게 제시했다고도 볼 수 있다. 그것은 문명의 운명이라고 이름붙여진 역사의 순환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 황인종 중심의 초원의 문명이 세계를 지배했다면 르네상스 이후에는 유럽 중심의 대서양 문명이 세계를 지배하였다. 이 문명의 순환은 태평양과 아시아로 옮겨진다는 저자의 주장을 증명하기 위해 수많은 역사적 사실이 동원된다. 이런 소소한 역사적 사실을 읽는 것만으로도 이 책의 가치는 충분하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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