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으로 올바른 베드타임 스토리
제임스 핀 가너 지음, 김석희 옮김 / 실천문학사 / 199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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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과 유사한 것으로는 일본 작가 키류 미사오의 <알고보면 무시무시한 그림동화>를 들 수 있다. 다른 점이라면 키류 미사오의 작품이 철저하게 하드 고어hard-gore적인 취향을 유지하고 있다면 이 작품은 PC적인 경향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PC란 Politically Correct, 즉 '정치적으로 올바른'이란 뜻으로 이것은 편견이나 차별에 바탕을 둔 언어적 표현이나 소수파에게 불쾌감을 주는 표현을 제한하자는 운동을 의미한다. 이 운동은 다문화, 혼성문화에 대한 다원적인 관점을 갖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책에서도 키류 미사오의 책에서 다룬 동화들이 재구성되어 다루어지고 있다. 백설공주의 악한 왕비인 계모는 '마술거울을 이용한 심리치료사'로, 백설공주는 요가명상을 수행하고, 신데렐라는 여성해방운동의 기수가 된다는 식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이야기를 비틀어 들려주고 있다. 즉 여기에 소개되는 동화들은 그동안 전세계적으로 성장기의 아동들에게 명작이라는 미명하에 읽혀진 책으로 현대사회의 고정관념을 형성하는데 무의식적으로 공헌한 작품들이라는 점이다. 이 동화의 관점은 철저하게 유럽의 백인들 시각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 결과 이 동화속의 설정은 이 세상의 한부분인 유럽의 백인들만의 사고방식에서 전세계적인 사고의 패턴으로 확장되고 그렇게 인식되어 버렸던 것이다. 이 결과 나타나는 문화적 괴리감은 사실 제3세계에서는 고려의 대상은 아니었다. 유럽=부의 공식이 지속되는 한 문화적 괴리감을 없애는 그 자체가 선진화되는 것으로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우리들의 고정적인 사고방식에 일침을 가한다. 물론 그 일침 역시 백인의 시각이라는 사실이 약간은 불안하지만... 그래도 저자는 PC적인 기준을 잣대로 삼아 이야기를 이끌어 가고 있기에 그나마 다행스럽다고 해야할까. 하지만 이런 약간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제일 먼저 시작되는 '빨간모자'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그 기발한 사고의 전환에 무릎을 치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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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이야기들
쥘 르나르 지음, 박명욱 옮김 / 문학동네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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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당무의 저자인 쥘 르나르의 서정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각각의 동물들에 대한 예리한 관찰을 바탕으로 뿜어내는 촌철살인의 평은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감탄을 하게 한다. 그의 동물에 대한 해석은 지금의 눈으로 보아도 상당히 전위적인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만큼 그는 정확한 관찰을 통해 자신의 심상으로 동물들을 그려내었던 것이다. 그가 취급하는 동물은 거대한 짐승도 아니다. 아주 흔하게 우리의 주변을 돌아다니는 짐승들이다. 그래서일까 그의 글을 읽는 순간 그들이 우리 곁에 있음을 자각하게 된다. 그만큼 그가 선택한 짐승들은 보편성을 띠고 있다는 증거이리라.

사실 우리들은 바쁜 일상을 부딛치며 살아가면서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자기 중심적으로 변모해 간다. 즉 공동체를 배려하는 마음에서 개인주의적 성향으로 변해가는 것이다. 그러다 어느날 문득 자신의 주변에도 살아 움직이는 생물체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속성상 급격한 실패를 맛보았을 경우에 한해서 우리에게 신이 내려주는 축복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그 순간 우리 주변에 너무나 많은 생물체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된다. 아주 작은 3자처럼 생긴 개미로부터 꼬리로 작은 횃불을 들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다람쥐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조금만 신경을 쓴다면 자신 이외의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느끼게 된다.

학창시절 학교 뒤편의 산책로를 거닐다가 길가로 나와 도토리를 주워먹던 다람쥐와 눈길이 마주친 기억이 난다. 그때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조용해 지면서 다람쥐가 놀래지 않도록 하고 있던 내 자신을 발견하고는 피식 웃었었다. 같이 산다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쥘 르나르의 이 책을 읽다보면 작가가 묘사한 그 수많은 진귀하고 아름다운 존재들이 내 곁에 함께 있다는 그 사실을 느끼게 된다. 그 사실을 느끼는 순간 세상을 배려하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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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과 예술 범우문고 82
야나기 무네요시 지음 / 범우사 / 198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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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우리들은 다나카를 전중田中이라 부르고, 나카소네를 중증근中曾根이라고 부르던 시절이 있었다. 이른바 주체적 작명법이었는데, 사람의 이름을 우리 식으로 부르던 방식이었다. 그런 당시 가끔 예술사 분야에서 柳宗悅이란 이름을 발견하였다. 당시 일본인의 이름을 소리가 아니라 글자식으로 부르고, 어떤 때는 소리식으로 부르던 때라 이 사람이 일본인인지 한국인인지 모호한 느낌이었다. 성으로 보면 완벽한 한국인이었고, 종열이란 이름 또한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어디선가에서 어느 분이 '야나기 무네요시'라는 사람의 이름을 언급하며 한국의 미를 집대성한 일본인이란 글을 쓴 것을 보았을 때 혼란은 절정에 달했었다. 柳宗悅과 야나기 무네요시가 같은 사람이란 것을 알게된 것은 얼마 지난 후에 였다.

상대의 문화를 이해하는 것은 그 체험의 깊이에 따라 다르다. 사실 이방인이 그 나라의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기란 어쩌면 불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야나기 무네요시의 한국예술에 관한 감식안은 대단한 수준이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야나기 무네요시의 탁월한 점은 당시 우리들이 거의 눈여겨 보지 않았던 것에서 진정한 조선의 미와 혼을 발견했다는 점일 것이다.  그의 이런 조선예술에 대한 감각은 후에 일본에서 그의 주도로 시작된 '民藝'운동의 밑거름이 되었다는 점이다.

외국인들은 일본의 문화를 '프리즘의 문화'라고 평가한다. 일단 원형의 빛이 프리즘을 투과하는 순간 굴절되어 분산되기 때문이다. 일본의 문화 역시 다른 나라의 문화 원형을 자신들의 프리즘에 투과 시켜 자신들만의 색으로 표현해 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의 문화를 바라보면서 그 원형이 어디인가를 질문하는 것은 무의미한 것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프리즘을 투과한 순간 그 문화는 일본의 것이 되기 때문이다. 사실 야나기 무네요시의 '민예'운동은 자기분야가 아니라 일본의 목공분야에 커다른 영향을 끼쳤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조선의 목공예품을 보고 자신은 서양에서는 영국의 목공품을 동양에서는 조선의 목공예품을 꼽는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무엇이 좋으냐고 묻는다면 영국것은 대강 얼버무릴 수 있지만 조선의 목공예품에 대해서는 딱히 뭐라 말할 수 없다고 하였다.  사실 일본의 목공품은 야나기 무네요시 이후로 뚜렷한 일본적 특성을 발휘하게 되는데 그것은 조선의 목공예품을 자신들의 프리즘으로 투과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로서 일본은 자기와 목공품으로 이어지는 예술적 시.공성을 확보하였던 것이다. 이런 일본의 특징은 헐리웃 영화에서 일본적인 것은 동양적인 것으로 치환시키며 자기와 목공품을 매치시키는 구조로 보여지는 것에서 확인될 수 있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일본것과 조선것을 비교하면서 일본이 재료도 좋고 도구도 좋은데 왜 만들어 놓은 것을 보면 조선의 것에 더 깊은 영혼의 숨결을 느끼게 되는 것인지를 자탄하고 있다. 즉 규칙성에 대한 비규칙성의 탁월함을 그는 이미 100여년전에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스피드 시대에 게으름의 찬양을 발견한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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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김인순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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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사신이 돌쇠에게 손을 들어 원을 그려보이자 돌쇠는 서슴없이 손을 들어 네모를 그려 보였다. 이에 중국사신은 놀라....>

깊이에의 강요를 읽다보면 이 옛날 이야기가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깊이란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요즘 텔레비전에 나오는 광고가 떠오른다. '파는 사람이 경쟁하면 가격은 내려갑니다'라는 카피의 반대편에는 '사는 사람이 경쟁하면 가격이 올라갑니다'라는 사실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깊이 역시 이와 같은 것이 아닐까.

여기서 쥐스킨트가 다루는 세계는 착각의 세계인지도 모른다. 체스의 고수와 도전자는 그 사실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고수는 언제나 인습에 젖어있다. 그에게 있어서 체스판의 첫 수는 언제나 똑같은 것이다. 첫 수는 어쩌면 관습이면서 관례와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도전자에게 있어서 그 관례와 관습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도전자가 던진 아무것도 아닌 수에 고수는 머리를 쥐어짜야만 하는 것이다.

진부한 이야기이지만 인습과 관습은 손잡이가 안에만 달린 문과 같은 것이다. 밖에서 그 문을 열기 위해서는 문을 부술수밖에 없다. 문을 부수지 않고 열 수 있는 길은 안에서 여는 방법밖에는 없다. 하지만 안에서 문을 열기 위해서는 수많은 시행착오와 도전이 있어야만 한다. 쥐스킨트는 그 결과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만을 냉정하게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강요당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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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 당나귀
아풀레이우스 지음, 송병선 옮김 / 시와사회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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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셉 켐벨은 아시아와 유럽의 접점을 이란으로 상정하였다. 켐벨은 이란을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으로 구분하여 아시아와 유럽의 경계로 삼았던 것이다. 그가 이렇게 한 것은 신화의 패턴에 따른 구분이었다고 생각한다. 그의 이런 구분은 이란을 통과한 유럽의 신화가 인도를 거치면서 아시아적으로 변화하고, 반대로 아시아의 신화가 인도를 거쳐 이란에 닿음으로서 유럽화되는 것을 볼 때 충분히 가능한 학설로 이해될 수 있다. 켐벨은 중간지대인 인도를 아시아로 잡았다는데서 학자로서의 깊이와 넓이의 탁월함이 엿보인다고 하겠다.

<황금당나귀>라는 작품을 읽다보면 유럽의 이야기이지만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이야기의 구조를 갖추고 있음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다. 황금당나귀는 오비디우스의 <변신>과 같은 형식의 이야기이다. 다만 여기서는 신이 인간의 세계로 내려오기 위하여 선택한 변신이 아니라 인간이 동물의 세계로 떨어지는 변신이라는 점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물론 신이 인간으로 인간이 짐승으로 변신하는 것은 등급의 하락이라는데서는 일치할 수 있지만 말이다.

사실 역사 속에서 개인이 집단을 눌러 이긴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개인의 역사는 집단의 역사에 비하면 일천한 역사일 뿐이다. 그럼에도 이 황금당나귀는 집단의 이야기가 아니라 개인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특이한 작품이라 할 수있다. 전체가 개인의 모든 것을 대표하는 시절에 한 사나이가 당나귀로 변하게된다. 이것은 그 당시의 생활관습으로 보았을 때 사회적인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 죽음은 자신이 속한 사회 이외의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하였다는 점이다. 당나귀로 변모한 사나이는 여러가지 과정을 거치면서 다양한 경험을 하게된다. 그 경험의 내부적인 모습은 인간의 사고이지만 외적인 경험은 당나귀라는 차이에서 오는 모순은 어쩌면 개인과 집단의 모순을 이야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황금당나귀는 분명 유럽적인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인도를 거쳐 아시아로 건너오면서 골격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다른 이야기로 변모하였다. 황금당나귀의 아시아판은 무엇일까? 게으른 사나이가 소 혹은 말로 변하여 죽도록 고생한다는 이야기인 것이다. 짐승으로 변한 사나이는 그 고생을 면하기 위해 파를 먹고 죽으려 하지만 그 죽음은 다시 인간으로 변하게하는 하나의 장치였다는 사실이다. 황금당나귀가 신의 뜻에
따른 인간의 굴곡진 모습이라면 동양의 이야기는 자신의 행위에 대한 응보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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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6-15 01:1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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