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의 자식들
노르베르트 레버르트 외 지음, 이영희 옮김 / 사람과사람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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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수는 "훈장"이란 작품에서 미친 개였던 부친의 그늘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개새끼의 이야기를 그렸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은 결국 자신이 벗어나고자 하였던 부친의 그늘을 벗어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함을 느끼게 된다. 결국 주인공은 아버지와의 화해를 통해 그 무겁고 암울한 미친 개의 그늘에서 벗어나 개새끼가 아니라 한 사람의 개인, 박원일로 거듭 나게 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아버지의 유품은 훈장을 버리지 못하고 그것을 소중하게 벽에 걸어 놓는 것으로 끝이 난다. 결국 자신의 혈액 속에 미친개의 DNA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나치의 자식들"이란 책을 읽으며 내내 이외수의 작품이 머리 속에 맴돈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만큼 아버지의 그늘을 자식들이 벗어버리기에는 벅찬 것이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자신도 모르게 아버지를 닮아가고 있기 때문일까? 그 닮음은 자신의 콤플렉스가 되어 그것을 벗어나기 위해 자신과 자식들에게 아버지와 똑같은 행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나 있을까?

이 책은 역사와 公論으로서의 아버지와 사적인 개인으로서의 아버지가 상충된다. 가스 처형실과 강제 수용소라는 역사의 저편에는 크리스마스 때 마다 선물을 주고, 출퇴근 시에 자신들의 볼에 키스를 한 사적인 감정이 공존한다. 이럴 경우 자식들이 따라야할 기억은 무엇일까?  어떤 자식은 자신의 아버지 사진에 手淫을 하면서 부모의 존재를 부정한 반면 어떤 자식은 사제의 길을 걸으며 부모의 죄를 대신 속죄한 사람도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적인 감정이 점차 공적인 역사를 대치해 나가는 과정을 작가는 아버지와 아들 2대에 걸쳐 냉철하게 밝혀냈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자식들-여기서는 헤쓰, 보르만, 히믈러, 괴링, 쉬라흐, 프랑크의 자식들은 어쩌면 아버지의 영혼이 자신을 지배하도록 내버려둔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이들의 유년시절의 기억은 대부분 은밀하면서도 특별한 것이었다. 히틀러를 만나 선물을 받고 그 압도적인 모습에서 무엇인가를 느끼던 아이들이었던 것이다. 그래서일까, 쉬라흐의 아들은 어느날 나치제국의 훈장이 새겨진 상자속에서 아버지의 사진을 발견하고 지금의 가난과 당시의 영화를 생각해보며, '나는 태어날 때부터 이런 모습은 아니었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자신이 특별하였다는 것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었던 것이다. 바로 이 발견을 통해서 이들은 아버지의 그늘로부터 벗어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나치의 자식들 가운데 자신이 전범들의 자식이라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사람이 없다는 점이다. 이들은 모두 排除, 否認, 그리고 알려고 하지 않는 意志라는 3대 원칙에 충실히 자신을 맡겼다는 점이다. 이들은 자신에게는 솔직하지만 역사에는 엄격한 기준을 들이대는 것을 의식적으로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서 아버지를 배반하지 않으면서 역사에 대해서는 무시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들의 사고방식은 다음과 같은 증언과 일치한다.

"경찰이나 검사들과 이야기를 한번 해보십시오. 범인이 양심의 가책 때문에 자백을 한다거나 어떤 특정한 행동을 하는 경우는 결코 없다고 합니다. 그런 시대는 지났습니다. 정체가 발각된 다음에야 죄책감을 느낌니다."

얼마나 소름끼치는 증언인가? 아우슈비츠의 강제수용소 박물관을 견학하면서 울고, 기도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당사자이거나 그들의 가족이라고 한다.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지적호기심을 가지고 그 현장을 철저하게 구경하고 질문하는 사람들은 제 3자인 경우라고 한다. 그만큼 역사의 사실을 느끼는 감정과 시각이 다르다는 점이다. 이것은 심리학적으로 "전범자들-범죄자로 바꿔도 무방할 것이다-은 범죄행위 안에서 자아를 실현했기 때문이다. 반면 희생자들은 점범자들의 행위로 자아실현의 모든 가능성을 빼앗긴 것이다. 정말로 우습고 모순되는 이야기이지만, 타인을 괴롭히는 것은 괴롭힘을 당하는 쪽보다 부작용이 훨씬 적다고 한다"는 말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다. 독일의 이야기이지만 우리의 모습과도 무서울만큼 가깝게 느껴지지 않는가.

사실 우리의 주변에는 역사에 대한 두 가지의 상이한 시각이 존재하고 있다. 하나의 시각은 "해방 이후 진실로 우리의 진정한 역사를 가져본 적이 있는가"하는 과거 부정의 역사와 "해방 이후 우리의 역사는 도전을 극복하는 역사"였다는 긍정의 역사이다. 이 두 역사관의 가장 큰 차이는 해방 이후 친일을 얼마나 확실하게 단죄하였는가의 유무이다. 전자의 입장에서는 친일이 청산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의 진정한 역사가 없다는 주장이지만, 후자의 경우는 친일보다 더 시급했던 역사의 과정을 헤쳐나온 것이 더 급했다는 현실론적인 주장이다. 이 두 주장의 접점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이제야 본격적으로 반쪽의 역사가 아닌 온전한 역사를 이야기할 때가 온 것이 아닐까? 이것에 대해 거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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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자예술의 역사 - 고대와 중세의 패러디 이미지
샹플뢰리 지음, 정진국 옮김 / 까치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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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0년대 프랑스는 제2 제정기였다. 이 당시 프랑스를 풍미하고 있던 예술 사조는 소설에서는 구스타프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 미술에서는 구스타프 꾸르베와 같은 레알리즘적인 작품이 유행하고 있었다. 이런 사조가 대중의 호응을 얻게 된 것은 얼마전에 처음 등장한 사진술의 영향이 적지 않았다. 플로베르의 시골 하층 계급의 위선적이면서 속물적인 삶을 무자비하게 해부한 작품이나 회화작품에 사진과 같은 경향을 과감하게 도입하여 표현한 미술 역시 그러하였다. 즉 당시의 프랑스에서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유행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또 하나 고고학의 발전을 들 수가 있다. 당시 태동하고 있던 고고학의 열풍은 아무리 하찮은 것에서도 어떤 상징성을 찾고자하던 고고학자들의 열망이 일반인들에게도 전염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 결과 전통적이면서 정통적인 예술에서는 인정받지 못하는 분야에까지 예술의 영역이 확장될 수 있었다. 사람들은 우리들의 눈이 미치지 못하는 부분, 즉 숨어있는 공간을 찾기 시작하였다. 그 숨어있는 공간은 "위대한 예술이 거부한" 곳이었다. 그 외면한 곳은 신화와 일반 민중의 감정이 교묘하게 혼합되어 있는 곳이었다. 또 이 세계는 교회와 지배계급으로부터 외면당한 장소이기도 하였다. 그 숨겨진 세계를 이 책은 드러내고 있다.

Caricature는 라틴어 caricare와 연관이 있다. 이 단어는 수레를 의미하는 carrus와 동사 어미인 -care가 결합된 것으로 짐을 많이 실은 수레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 단어가 과장을 의미하는 용어로 전용된 것이다. 과장은 언제나 지배계급의 몫이었다. 고대와 중세의 벽화나 그림을 보면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구별이 쉽게 드러난다. 지배자는 크게, 피지배자는 작게 그려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지배자의 과장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피지배자의 과장을 보여준다는 점이 신선하다. 피지배자의 과장은 어떠하였을 까. 피지배자가 그리는 그림은 독자적인 것이기 보다는 지배자의 주문이나 요구로 그려지거나 조각되어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런 주문제작을 하는데 있어서 피지배자가 자신이 의도하는 것을 과장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피지배자들은 그들의 과장을 아주 은밀하게 집어 넣었다는 점이다. 복잡한 그림의 한 구석에 혹은 조각의 무리 뒤 편에 아주 소심하게 새겨넣은 그림과 조각의 모습은 "저항이 숭고하고 순수해지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풍자와 과장의 세계는 웃음으로만 넘어갈 수 있는 세계는 아니다. 여기에는 피지배층의 고통과 원망과 희구가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갈망하는 세계 혹은 고통으로 점철된 바로 그 순간이 응축되어 있다. 그러기에 이 풍자의 세계는 어쩌면 가장 진솔한 세계를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그 표현의 비속함이나 조잡함은 사변적인 예술이라는 입맛에 맛들여진 사람들에게는 유치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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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카를라 3부작 1
존 르카레 지음, 이종인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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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르 카레의 스파이 소설은 매우 차분한 편에 속한다. 그의 소설에는 제임스 본드라든가 미키 스필레인의 과격한 액션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포사이스의 해박함이 지나쳐 과시의 욕망에도 사로잡혀 있지 않다. 그래서 사실 존 르 카레의 소설을 제대로 읽는다는 것은 고통일수도 있다. 그의 소설 가운데 가장 쉽게 읽은 작품은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였다. 그리고 번역되었던 <북 치는 작은 소녀>나 <러시안 하우스>는 솔직히 읽다 읽다를 반복하여 기억에도 희미하다. 그리고 영화로 보았던 <거울 나라의 전쟁>의 경우는 추운 겨울의 배경만이 기억에 남아있다.

르 카레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저마다 하나의 개성을 가지고 있다. 그 개성의 개별화는 그의 소설이 주인공을 따라 흘러가는 소설의 형태라기 보다는 개성적인 인물의 혼합처럼 보이게 한다. 그래서일까, 르 카레의 소설을 읽다보면 곧잘 재자리 걸음을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초반부에 느끼는 지루함의 압박감을 벗어나지 못하면 쉽게 르 카레의 세계로 접근할 수 없다. 이런 느낌 때문일까.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 역시 이런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들의 행동과 사고방식은 일반적인 사람들과는 다른 세계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사회성이란 일반인들이 느끼는 것과는 동떨어져있기 때문이다.

조지 스마일리라는 인물을 보더라도 그렇다. 그의 이름 스마일리는 스파이 세계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스마일리는 웃음이 거의 없는 사람이다. 그에게 스마일이란 이름이 붙어있는 그 자체가 스파이 세계의 아이러니를 희극화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들 스파이들에게는 직업으로 연결된 유대감만이 존재한다. 그 유대감은 일종의 감정의 공유와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마치 성직자들이 성직자들과 교감하는 느낌처럼 말이다.

스파이 세계는 어찌보면 성직자의 세계와 유사한 분위기를 풍긴다. 인류의 구원이란 문제에 대한 접근의 방식이 다르지만 신념 혹은 신앙이 없다면 결코 수행할 수 없는 임무와 같은 것은 특히 그런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일까, 르 카레의 주인공들은 각자의 신념과 이념을 수호하는 성직자의 이미지를 풍긴다. 이들 세계의 두더지들은 유다처럼 보이지 않는가?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그들의 자백과 고백은 구원의 사다리가 아니라 죽음의 조종이란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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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차문화 - 중국문화의 이해
왕총런 지음, 김하림.이상호 옮김 / 에디터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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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들과 차와의 관계는 불가분의 인연처럼 보이기도 한다. 중국인들에게 차는 마시는 것 이상의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차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역사를 음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여기에는 중국인의 차에 대한 모든 것이 수록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번다한 차 도구와 이론은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차에 대한 무지를 더욱 심화시킬 뿐이다.

차는 마시는 것이다. 그 마시는 것이 전제되지 않을 때 차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런데도 실용적인 중국인들은 차를 마시는 것에 어떤 품격을 부여하였다는 점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차에 대한 형식적인 품격이 만들어지는 唐代에는 차를 마시는 것 이상으로 바라보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물론 그때에도 차에 대한 약효적인 특성 때문에 사람들은 차를 마시는 그 자체를 좋아하기는 하였다. 하지만 차를 마시는 것에 대한 형식과 이론이 완성되는 宋代에 이르면 차를 마시는 것보다는 그 마시는 과정이 주가 된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다. 이런 형식에 함몰된 송왕조의 최후가 어떠하였는가는 역사가 잘 말해주고 있다.

송의 뒤를 이은 元代에 차는 유목민들의 후예인 몽골인들 답게 아주 실용적인 음다의 형태로 되돌아왔다. 그러나 원이 북으로 물러가고 한족이 중심이 된 明代로 돌아오면서 이런 형식적인 것은 송대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중국적인 것이라 하여 다시 유행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명대의 음다는 송대가 외적 형식에 치중하였다면 이론에 치중한 차 문화였다. 극미한 이론 속에 둘러쌓인 차 마시기는 사대부의 탁상공론의 분위기와 너무나 흡사하였다는 점이다.

명이 멸망하고 만주족인 淸이 중국을 지배하였지만 차 문화에 대해서는 중국인들의 관습을 따라야만 할 정도로 차 문화는 중국인들의 일상으로 변모하였다.

중국인들이 침입자들도 어찌해 볼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하게 만들어 놓은 차 문화는 한마디로 종합예술과 같은 것이었다. 차와 물과 다구의 조화는 물론이고, 여기서 끓여지는 차의 향기와 풍미, 이른 음미하며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는 시인과 묵객들의 조화는 중국의 차 문화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저자는 중국의 차문화를 옛것과 현대의 것을 이어주는 것이며 이 음다의 취미가 소멸되지 않는다면 전통적인 생명력이 중국 문화에서 끊임없이 갱신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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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법諡法 - 한 글자에 담긴 인물 評
이민홍 지음 / 문자향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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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화와 서양화를 비교해보면 여백의 차이를 그대로 느낄 수 있다. 동양의 여백은 빈 공간이 아니라 그곳에 그린 사람의 나머지 마음이 존재해 있다는 점이다. 반면 서양화에서는 여백을 증오라도 하듯 빈 공간을 촘촘하게 채워버린다. 이런 서양적 사고와 동양적 사고는 곳곳에 존재한다. 서양과 동양의 차이 가운데 또 다른 하나는 휘諱라는 개념이다. 동양에서는 부모나 왕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는다. 이를 위해  자字. 호號와 같은 대체 호칭법이 발전하였다. 반면 서양에서는 휘라는 개념이 동양만큼 까다로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서양 이름의 어미형인 -son은 '-의 아들'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잭Jack의 아들은 잭슨Jackson이 되고, 로빈Robin의 아들은 로빈슨Robinson이 되는 식이었다. 즉 서양에서는 부모의 이름을 꺼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름에 적극적으로 융화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서양의 왕들 역시 특정한 몇 개의 이름이 대종을 이루기 때문에 이를 구분하기 위해 1세, 2세, 3세 하는 식으로 구분을 짓고 있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왕의 신체적 특성을 따서 비만왕, 단구왕, 미남왕, 갈고리와 같은 별명을 붙여 부른다. 동양에서 이런 서양식 호칭법을 진시황이 처음 창안해 냈지만 그의 정치적 실험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그런 호칭법은 두번 다시 언급되지 않았다.

이후 동양의 왕들은 자신의 일생을 한 글자로 요약하여 붙이는 시호諡號를 받게 되었다. 이를 위해 시법諡法이 제정되었고, 이 시법은 사후 왕의 행적을 평가하는 주요한 근거로 활용되었다. 옛사람들은 시諡는 행위의 발자취이고, 호號는 공적의 표시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시법이란 한 인물의 행위와 공적에 대한 압축적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우리 한국의 시법의 역사는 삼국시대에 시행되었다. 이때 시행된 시법은 한국 고유의 시법이었는데 이런 시법은 지증왕 이후 중국의 시법에 의해 공식적으로 종언을 고하였다. 한국에서 중국의 시법은 신라에 의해 주도적으로 시행되었다. 신라가 시행한 시법은 고려에 의해 계승되고 조선조에서는 이를 더욱 극밀하게 정비하여 완벽한 시법체계를 구축할 수 있었다. 그런데 한국에서 시법을 행할 때 호는 우리 전래의 전통시법과 연계한 면을 드러내 보이는 반면 시는 중국의 시법 체계를 따라 부여되었다. 삼국시대부터 시호에 대한 문제는 신하가 과연 주군의 행업을 평가하여 올릴 수 있느냐는 문제였다. 하지만 이 문제는 하늘의 뜻을 빌어 대신한다는 것이라는 이론으로 비껴갈 수 있었다.

고려 시대에는 시호와 묘호 그리고 능호가 확실하게 정리되어 왕의 사후에 올려졌다. 고려의 시호는 모두 효孝자가 붙어 있는데 이는 '길이 천하를 소유하여 종묘에 제향을 받으며, 자혜롭게 부모형제를 사랑하고, 덕으로 나라를 다스리며 조야가 협력하여 새시대를 열기를 기원'하는 당대의 염원을 형상화한 글자였다. 이런 고려의 시법은 원의 통치 기간 동안 효에서 충忠으로 변경되었다. 그러나 원의 간섭이 끝나는 시기에 고려는 다시 효로 시호를 회복시켰다. 묘호는 시호와는 달리 중국식  조종법祖宗法에 의해 붙여진 것으로 고구려의 태조와 신라의 대종무열왕이 처음으로 시도하였다. 백제의 경우 멸망 때까지 중국식 묘호는 시조 온조왕 이외에는 사용하지 않았다.   능호는 전통적으로 외자이다. 그래서 역대 왕들의 능 이름은 모두 헌릉, 영릉과 같이 외자를 사용한다.  

시법은 과거가 현세인들에게 보여주는 권장과 징계이다. 과거인들은 자신들이 시행하는 시법을 엄숙 단정하게 사용함으로서 그 제도의 준정함을 강조하였다. 옛사람들은 자신들에게 매우 엄격하였다. 그것은 자신이 이 세상을 구성하는 개체가 아니라 주체로 파악하였기 때문이었다. 그 엄격함을 시법을 통해 새삼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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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아이 2005-08-02 1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렵다... ^^ 시와 호를 어떻게 구별하는지 궁금하네요. 이를테면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에서 "국강상광개토경"은 시, "평안호태왕"은 호인가요?

dohyosae 2005-08-02 1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구려의 경우 시보다는 호가 월등하게 많았고, 호도 묘호의 성격을 가진 것이었습니다. 기록에 나타난 고구려의 시호는 장수왕이 북위의 효문제에게 받은 "康"이 유일합니다. 그러므로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은 시라기 보다는 호라고 이해되는 것이...

숨은아이 2005-08-02 2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그럼 시와 호를 구별할 수 있는 다른 예는 혹시 없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