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근대사
퍼시벌 스피어 지음, 이옥순 옮김 / 신구문화사 / 199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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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는 그 커다란 몸집에도 불구하고 거의 2백여 년 간을 영국의 식민지 지배하에 놓여 있었다. 사실 영국인은 인도라는 텐트에 살금살금 기어 들어온 낙타와 같은 존재였다. 맨 처음에는 머리를 그 다음에는 앞 다리를 그리고 마지막에는 뒷다리를 텐트 속으로 집어 넣었고, 결국 주인은 텐트 밖으로 나가야만 하는 신세가 되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인도는 영국이 통치는 했지만 지배할 수 없는 곳이었다. 에드워드 모건 포스터의 <인도로 가는 길>이 아니더라도 서구인들에게 인도는 깊은 문화적 이해보다는 경제적 낙후로 인해 경멸의 대상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을지 모른다. 인도로 가는 길에서 죄없는 피해자 아지즈는 자신을 고발한 아델라에 대한 증오감을 떨쳐버릴 수 없게된다. 그리고 그 분노와 증오감은 자신을 변호한 필딩을 향해서까지 연장된다. 그리고 아지즈는 필딩을 향해 '우리는 수천 년이 걸리더라도 당신들을 쫓아낼 것이다. 저주받은 영국인들을 한 명도 남김없이 바다로 몰아넣은 뒤에야 비로소 당신들과 나는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아지즈의 외침은 식민지 지배의 부당함을 경험한 한 평범한 인간이 어떻게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게 되는가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보여주는 한 백인 여성의 환각의 세계는 식민지 지배자인 백인들의 두려움인지도 모른다. 그 두려움에 대한 상상은 하나의 가상 임신처럼 현실세계로 투영되는 것이었다. 이런 영국의 식민주의자들의 감수성은 초기 미국의 농장주들이 상상했던 흑인 노예에 의한 백인 여성의 강간과 동일한 선상에 놓여진 허구성이란 사실이다. 이런 허구성의 깊은 곳에는 두려움이 존재하는 것이다. 인도나 미국에서 초기 백인 식민주의자들은 언제나 소수였다는 점이다. 이런 수적인 열세가 식민지 지배의 잔혹함으로 변질되게 되는 것이다.

인도는 서구학자들에 의해 카스트와 종교라는 걸림돌로 인해 민족주의가 발생할 수 없는 국가로 판정받기도 하였다. 이것은 거의 정설처럼 받아들여 졌고, 이런 가정하에서 인도는 백인들의 식민통치가 오히려 중세의 가혹함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는 식으로 호도하였다. 사실 카스트에 의한 신분의 확고한 분할과 힌두, 이슬람, 불교로 이어지는 종교적 대립은 인도를 하나의 국가로 통합시키는데 커다란 장애물이란 점을 인도인들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바로 그런 사실 때문에 인도는 하나보다는 다양함을 견지하는 것을 선호하였다는 점 또한 사실이었다. 이런 인도의 약점을 파악한 식민주의자들은 이를 더욱 부각시킴으로서 실질적으로 분열된 인도를 기정사실화 하려 하였다. 영국인들이 인도에 들어와 무굴 제국을 서서히 잠식해 들어가던 초기에  영국인들은 인도인들이 이를 자신들의 경쟁자를 제거하는 호기로 생각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영국인들은 인도가 이렇게 사회적 종교적으로 분열상을 지속하게 된다면 자신들의 인도 지배가 수세기 동안은 아무런 근심없이 지속될 것으로 생각하였다.

인도인들이 식민지배자인 백인들에게  증오심을 품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하나의 통일된 형태로 결집시키기에 인도의 종교와 카스트제도는 너무나 완고하고 무너질 수 없는 벽이었다. 이런 인도는 스스로 세속적인 의미의  민족주의를 창출할 수 없었다. 이런 이유로 인도는 내부로부터의 자극이 아닌 외부로부터의 자극을 통해 민족주의를 배웠던 것이다. 즉 외부의 자극을 통해 인도인들은 자신들의 분열된 모습을 보았고,  이런 자각은 고클레, 틸락, 바르네지와 같은 선각자들에 의해 하나의 민족주의로 발전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선각자들의 민족주의에 대한 교육이 있게되면서 간디의 운동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즉 간디는 이들의 민족주의라는 토양에 국가라는 것을 세울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던 셈이다.

그럼에도 영국의 인도 지배는 인도의 발전에 있어서 지울 수 없는 외적인 흔적을 남겼다는 점이다. 의회민주주의라는 이들의 정치체제는 종교와 계급으로 분열된 인도인들이 선택할 수 있는 차선이었다. 이 책은 식민지 통치라는 공통점을 가진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인도인들이 영국의 통치를 어떻게 극복하면서 그 흔적을 지웠는가가 이 책의 주제는 아니다. 오히려 인도가 식민지배를 받았지만 고대의 찬란한 문명으로부터 지금까지 어떻게 "계속성"을 유지하면서 인도다움을 견지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즉 이런 계속성의 관점은 역사를 단절성으로 보려는 우리의 시선을 좀더 넓혀주는 하나의 색다른 경험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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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인도의 일상 생활
자닌 오브와예 지음, 임정재 옮김 / 우물이있는집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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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나라의 역사를 막론하고 고대사를 정확하게 규명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기록의 散失은 예외로 하더라도 그 시공간 상의 괴리감으로 인해 더욱 그러할 수 있다. 그럼에도 많은 나라에서는 고대사를 정확하게 규명하고자 노력을 하고 있다. 이것은 자국의 고대사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이해함으로써 현재의 자신들이 누구인가를 밝히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즉 고대사를 정확하게 규명하고 밝히는 과정이 바로 민족의 정체성을 “P히는 것과 같은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인도의 사학자인 람 샤란 샤르마는 <인도 고대사>에서 인도 고대사를 이해할 수 있는 자료로 유물, 주화, 금석문, 문헌자료, 외국인의 기록 등을 열거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유물과 함께 민족의 역사의식을 거론한다. 그러면서 샤르마 교수는 서구인들이 인도인들을 처음 보았을 때 자신들과 같은 역사적 기록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보고 인도인들의 역사의식이 결여되었다고 평가하였다는 점을 반박하였다. 그에 따르면 인도인들은 역사를 기록했지만 그리스인의 방식으로 기록하지 않았을 따름이라는 점을 들고 있다. 대신 인도인들은 뿌라나라 불리우는 종교문학의 형태로 역사를 기록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도만의 특징이라고 볼 수는 없다. 유대인들도 이런 방식을 이용하여 역사를 기록했기 때문이다. 이 뿌라나는 역사적 사건이 발생한 이후에 기록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서술방식은 미래시점으로 기록하였다는 점이다. 이 결과 뿌라나에서는 역사의 필수조건인 변화의 개념을 담을 수 없었다. 쉽게 말하자면 인도의 종교문학으로 기록된 역사를 통해서는 '역사의 기억을 조직해서 현재를 고발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이러한 역사를 서구식으로 재구성하여 보여준다는 것은 어찌보면 인도 역사를 정확하게 보여주는 것은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뿌라나식의 역사기술은 인도의 전체모습을 보여주는데 미흡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 책은 인도의 역사를 서구인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절충적인 방식일 수도 있는 셈이다. 그래서일까 모두 3부로 구성된 이 책은 인도의 역사를 헤로도투스의 방식으로 다시 서술한 것처럼 매끈하다는 점이다. 1부에서는 인도인의 총체적인 삶을 2부에서는 개인과 집단에 대해서 3부에서는 황궁과 귀족의 생활을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이 책에서는 인도의 고대 생활을 지금의 시각에서 보더라도 미화된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저자가 인도의 고대를 연구하면서 본 인도의 문헌들의 특성상 그럴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앞에서도 말했듯이 과거를 미래의 시점에서 기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인도인들의 모습을 아주 자세하게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저자는 종교문학적 서술로 기술된 느리고 변화감이 없는 인도의 고대사 문헌들을 재구성하면서 전체적으로  활력을 불어 넣었다. 그 활력은 인도가 카스트제도라는 족쇄에 감싸있었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 다른 느낌을 주기에 충분하다. 보통 우리들은 역사속의 현재는 과거의 연장이라고 본다. 그래서 후진국을 볼 때 그들의 과거 역시 그랬을 것이란 가정을 쉽사리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인도의 고대인들의 삶을 읽다보면 이런 역사적 가정이 가끔은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고대 인도의 종교적, 관습적인 것들을 읽을 때면 고대와 현재의 차이를 거의 느낄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고대의 인도와 현재의 인도가 이론과 원칙과 실재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사회이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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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9-01 18: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dohyosae 2005-09-01 2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冊의 變態"인가 봅니다.
 
오스만 제국은 왜 몰락했는가
앨런 파머 지음, 이은정 옮김 / 에디터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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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오스만 제국은 19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황제가 사망하거나 폐위되었을 경우 항상 계승문제를 야기했다. 그 이유는 하렘 때문이었다. 황제들 대부분은 하렘에서 지위가 낮은 첩뿐만 아니라 여러 명의 부인들을 총애하였는데 이것이 큰 문제의 시발점이었다. 여기서 태어난 수 많은 아이들은 장차 황제가 궐위되었을 때 경쟁자로 돌변하였던 것이다. 실제로 15-16세기에는 새로운 황제가 즉위하면 바로 그날 친형제들과 이복형제들을 교살하는 것이 하나의 관례였다. 오스만 제국은 이런 식으로 왕권에 도전할 경쟁자를 제거하였던 것이다. 이 결과 오스만 왕실은 항상 남성이 부족한 현상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래서 종교 지도자들은 형제의 집단살해가 도덕적이고 옳바른 일인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였다. 이후 황제의 남성 친족들은 황제의 거처인 톱카프 궁의 4번째 안채에 마련된 작은 방-이를 새장 혹은 kafes라고 불렀다-에 감금되었다. 이들은 이 좁은 방에서 왕의 자리로 불리울 때까지 감금된 생활을 해야만 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이들 감금자들에게 강제로 음주와 여자가 제공되어 정신적. 육체적으로 피폐하게 만들기도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즉위하는 황제들은 어떤 정상적인 역할을 맡거나 수행할 여력이 확실히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오스만 제국은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에 걸쳐 건설된 대제국이었다. 이 제국은 무려 6백여 년간 지속되었다. 이렇게 오래 동안 제국이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의 왕성한 정복력 때문이었다. 오스만 제국은 이슬람의 제국답게 정복과 정복민으로 이루어진 왕국이었다. 이슬람은 초기부터 정복된 땅의 주민을 개종시켜 그들을 전사로 만들어 정복을 감행하였다. 그러므로 이슬람 제국에서 정복이 멈추는 그 시점은 바로 제국의 쇠퇴가 시작되는 것을 의미하였다. 사실 오스만 제국이 쇠퇴기로 들어서는 시점이 1683년 제2차 빈 공격 실패에 따른 것이었다. 이후 오스만 제국은 더 이상 영토를 확장할 수 없게 되면서 급속히 몰락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그 이전까지 오스만 제국은 유럽의 정복지에서 5-6세정도 되는 그리스도교 아이들을 5명당 1명의 꼴로 착출하여 이슬람으로 개종시켜 강력한 군대조직을 만들었다. 이들이 역사에서 예니체리Yeni Ceri로 불리우는 군대였다. 이들은 근대 유럽에서 최초의 상비군으로 불리우는 조직으로 창설 당시에는 상당히 선진적인 군대였다. 이들은 철저하게 이슬람교도로 훈련되었으며 이들 가운데 똑똑한 아이들은 제국의 총리대신의 지위에까지 승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조직은 본질적으로 군대조직이었다. 그러나 이런 강력한 조직은 정복전쟁이 지속될 때만이 유효한 조직이 되는 것이다. 그렇지 못할 때 이런 강력한 군사조직은 황제의 권력과 사회질서를 위협하는 조직으로 변할 수 있다. 이들은 이런 특성 때문에 일생동안 결혼을 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이들은 끊임없이 정복지에서 보충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6세기 중반-1566년-에 이들의 결혼이 허락되면서 여기서 태어난 아이들이 예니체리에 입대하게 되었다. 이런 결과 1676년 점령지인 동남유럽에서 마지막으로 대대적인 착출이 마지막으로 이루어졌다. 이후 예니체리는 오스만 제국 황제의 핵심 전력이 아니라 민간 예비병력으로서의 역할에 치중하게 되었다. 이 결과 오스만 제국의 군사력은 급속하게 붕괴되었다.

오스만 제국은 얼음으로 만든 성처럼 시간이 흐르면서 그대로 녹아 버린 것일까. 왜 이들은 개혁의 노력을 하지 않았을까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사실 오스만 제국은 끊임없이 역사의 변화속에서 자신들의 현재를 바꾸려 시도하였지만 성공할 수 없었다. 그것은 앞에서 언급한 황제의 자질과 예니체리의 수구성에 기인하바가 컸다. 그래서 오스만 제국이 시행한 개혁은 언제나 표면적인 선에서 끝나버렸던 것이다. 게다가 신흥강국으로 도약하기 시작한 러시아와의 끝없는 분쟁은 허약해지기 시작한 오스만 제국을 대책없는 소모전의 늪으로 끌어들였던 것이다. 이 결과 오스만 제국은 밑에서부터 흔들리게 되었던 것이다.

오스만 제국이라는 거대한 실제를 정확하게 파악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제국이 3대륙에 걸쳐 방대하게 전개되어 있고, 여기에 수 많은 인종과 종교가 뒤섞여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구인들은 곧잘 오스만 제국의 붕괴가 이런 다양성을 하나로 통합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가설을 내세우기도 한다. 하지만 사실 이런 가설은 서구의 통합적인 사고의 산물일 뿐이다. 오스만 제국에는 상당한 인종적, 종교적 관용이 존재하였다.  이는 오스만 제국이 억압이 아니라 타협과 관용으로 제국을 통치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같은 시대에 잉글랜드가 인도에서 보여준 것과는 상당한 대비를 이룬다는 점에서 특기할만한 것이라 하겠다.

오스만 제국은 18-19세기에 들어와 변혁의 기회를 맞이할 수 있었다. 즉 당시 기세가 맹렬하던 이슬람 종교의 개혁을 추진하면서였다. 하지만 이슬람 종교 역시 사회건설을 위한 개혁의 추진을 이슬람의 후퇴로 규정하면서 흐지부지하게 되었다. 이 결과 오스만 제국은 서구제국의 발전에 동참할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하였던 것이다. 당시 이슬람에서는 부르조아 계층과의 협력을 통해 이슬람을 경제적. 정치적 개혁으로 이끌려 했지만 기득권의 반발로 실패하였다. 대신 이런 실패를 만회하기 위하여 기득권층은 독일과 협력을 강화하면서 일차세계대전에 빠져들어가는 우를 범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는 케말 파샤의 혁명 이후 발발한 이차세계대전에서 터어키가 히틀러의 독일의 간절한 구애를 물리치고 중립을 유지한 것과 대조를 이루는 장면이라 하겠다. 일차세계대전 당시 오스만 제국은 명분없는 서구의 전쟁에 말려들었던 것이다. 즉 범게르만주의와 범슬라브주의가 부딪치는 와중에 이슬람이 끼어든 형상이었다. 이 결과 오스만 제국은 독일의 패전과 함께 패전국의 오명을 뒤집어 쓰고 제국의 해체가 시작되었다.

이 책은 서구인의 손에 의해 집필된 것으로 곳곳에 서구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이슬람 세계 혹은 오스만 왕조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다. 그 모습은 한때 유럽의 중심부인 빈까지 침공하였던 제국의 모습이 아니라 무능과 부패로 점철된 것이다. 이런 묘사의 깊숙한 곳에 자리잡은 유럽 우월주의적 시각-특히 오스만 제국이 유럽 열강의 도움으로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듯한 기술-은 오스만 제국의 역사를 아주 볼품없는 것으로 만들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오스만 제국은 무려 6백여 년이나 3대륙에 걸쳐 존속한 제국이란 사실이다. 서구의 힘에 의존하는 환자가 이런 장구한 세월동안 버틸 수 있었을까? 아닐 것이다. 오히려 이 책의 이런 반오스만 제국적인 묘사 속에서 오히려 그 제국의 위대함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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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점 범우비평판세계문학선 56
미우라 아야코 지음, 최현 옮김 / 범우사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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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믿고 있던 신념이 무너지는 것은 어떤 것일까. 유다는 예수라는 인간을 따라 다니며 그를 혁명가로 생각하였다. 예수 벤 요셉이라는 사람을 유다는 '체 예수'로 생각하였다는데 문제가 있었다는 점이다. 결국 그는 예수를 배반함으로서 그의 신통력을 확인하려 하였다. 하지만 그가 본 것은 매를 맞으며 침묵하는 무력한 인간이었다. 그는 자신이 지금까지 따라 다닌 사람이 사기꾼이라고 믿으며 죽었다. 반면 한 인간은 그를 세번이나 배반했지만 그의 존재를 진실로 확신한 인물이었다. 그는 불타는 로마를 벗어나 화급하게 도망치던 순간 한 사람이 불타는 로마로 가는 것을 보고 자신이 지금 도망치는 것이 얼마나 잘못 되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 순간 그는 네번째 배반의 유혹을 벗어나 죽음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빙점을 읽으면 이렇게 두 가지의 신념이 교차하게 된다. 성경으로 읽어서 알게된 이론적인 사랑과 실천적인 사랑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원수를 사랑하라"는 아주 원초적인 말을 막연히 수행하고자하는 이론적인 인간 쓰찌구치 게이조의 인간적 오만은 우리들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이론과 실천의 차이점은 과정의 두려움에 있는 것이다. 누구나 한번쯤은 경험했겠지만 맞는 순간이 두려운 것이지 맞는 것이 두려운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론은 그 과정의 두려움보다는 맞는 두려움에 더 큰 비중을 둔다는 점이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그 말을 실천하려는 의사 쓰찌구치 게이조는 그 사실이 드러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그 과정의 두려움을 앞서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는 정말로 원수를 사랑했다기 보다는 원수를 길렀을 뿐인 것이다.

가정이란 가장 기초적인 공동체는 사랑이라는 개념으로 다져진 공동체라 할 수 있다. 사랑과 신뢰라는 두 축이 작동하는 순간 가정은 원활하게 돌아간다. 하지만 그 사랑과 신뢰는 부부의 결합에 의해 유지되는 불안한 것이라는 점이다. 흔히 부부간을 "無寸"이라고 부른다. 아버지와 아들 간은 1촌, 형제 간은 2촌이지만 남편과 아내는 촌수가 없다는 점이다. 이는 그만큼 부부 사이의 관계는 신뢰와 사랑이라는 무형에 의해 존재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부부가 헤어지면 남이 되는 것이다. 그 신뢰와 사랑이 붕괴된 지점에 남게 되는 것은 불신과 증오인 것이다. 그 불신과 증오의 감정은 누구의 몫이 될까.

제목의 "氷点" 또한 상징적이다. 우리는 수학시간에 기원전과 기원후를 배울 때 이런 식으로 배웠다. 기원전 100년, 99년, 98년... 3년, 2년, 1년, 기원후 1년, 2년, 3년.... 하지만 온도계의 경우는 아주 다르다. 영상 10도, 9도, 8도... 2도, 1도, 0도, 영하 1도, 2도, 3도... 역사에는 0년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온도에는 0도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양수와 음수에서도 중간에 0은 존재한다. 하지만 0은 양수도 음수도 아닌 존재이다. 이것은 말 그대로 경계선일 뿐이다. 역사에는 경계선이 없다. 그것은 역사의 연속성이라는 관점에서 타당할 듯 싶다. 하지만 감정에는 경계선이 존재하는 법이다. 바로 그 경계선이 빙점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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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개석은 왜 패하였는가 서울대학교동양사학강의총서 8
로이드 E. 이스트만 지음, 민두기 옮김 / 지식산업사 / 199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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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 10월 10일 일단의 혁명세력들이 우창武昌에서 흥한멸청興漢滅淸을 내걸고 봉기하여 중화민국 군정부를 수립하였다. 이들의 봉기를 신호로 중국 역사에서 제1혁명이라고 불리우는  신해혁명이 시작되었다. 쑨원孫文 을 지도자로 하는 일군의 청년들이 일으킨 이 혁명은 무능과 부패로 상징되던 구체제를 순식간에 뒤엎어 버렸다. 이 결과 1912년 1월 1일 쑨원을 임시 대총통으로 하는 남경정부가 들어서면서 청조는 몰락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중국 역사에서 2천여년을 계속해온 전제정부에 대항하여 최초의 공화국이 성립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후 혁명은 위안스카이袁世凱의 반동과 군벌의 할거, 그리고 공화국의 창건자인 쑨원의 급서로 위기를 맞게된다. 하지만 쑨원의 뜻-삼민주의-을 이어받은 국민당이 그의 유업을 계승하여 혁명을 이어나가게 된다. 혁명 초기 국민당원들은 중국인들에게 하나의 희망으로 다가왔다. 아편전쟁, 청일전쟁, 의화단의 난을 거치면서 상처받을 대로 받은 중국의 자존심을 국민당이 회복시켜 줄 것이라고 민중들은 믿었기 때문에 그들을 지지하였던 것이다. 재벌과 중산층 및 지식인과 학생들의 지지를 받은 국민당의 중국 통합은 성공할듯이 보였다. 유럽 열강들 역시 국민당 정부를 중국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인정하였다. 이렇게 전도양양하던 국민당과 국민당 정권이 왜 급속하게 붕괴되어 결국에는 대륙에서 쫓겨나 타이완으로 물러나게 되었을까? 이 책은 바로 그 영광의 정점에서 나락으로 굴러 떨어진 국민당과 그 정권의 몰락사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국민당과 그 정권의 몰락을 9장에 걸쳐 설명하고 있다. 특히 국민당 정권이 몰락하는데 있어서 미국의 원조중단이라는 도식적인 이론에 집착하기 보다는 좀더 근본적인 문제에 치중하고 있다는 점이다. 저자는 미국의 군사원조 중단이 국민당 정권이 몰락하는데 일조했다는 논거를 반박하고 있다. 즉 국민당 정권의 군대는 패배 직전까지 무기의 부족에 직면한 적이 결코 없었다는 점을 증거를 들어 논박하고 있다. 국민당의 패배는 이런 외적인 요인이 아니라 내적인 요인이 더 컸다는 점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패배의 한 원인으로 국민당의 인적 자원의 부족을 들고 있다. 이렇게 된 이유는 혁명 초기에 양성했던 유능한 인적 자원이 일본과의 전쟁 초기에 급속하게 소진되면서 회복불능 상태에 빠져 버렸다는 점을 들고 있다. 이 결과 부족한 인적자원을 보충하기 위해 급조된 교육시설을 통해 대량으로 양산했지만 그 질적 저하는 군사적인 면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던 것이다. 현대전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군간부들의 무모한  혹은 소극적인 작전을 통해 국민당 군대의 무능은 회복할 수 없을 정도였다. 미국의 군사고문단들은 병사들은 용감했지만 간부들은 무능했다는 말로 국민당 군대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또 다른 문제는 군벌과 국민당간의 관계가 명확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지방에 할거한 군벌들을 확실하게 통제하지 못한 국민당 정부-이 역시 일본과의 초기 전투에서 군사력을 대량으로 상실한 결과였다-는 군벌들을 제압하기 보다는 회유하고 이간시키는 방법을 취하였다. 이 결과 군벌들의 자율권을 어느 정도 보장할 수 밖에 없었고, 이로 인해 국민당 정부의 중앙집권적인 정책에 큰 차질을 가져왔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국민당은 이를 시정할 능력을 결여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부족한 군사력을 전적으로 군벌의 군대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국민당 정부의 몰락을 가장 제촉한 것은 국민당과 농민과의 관계였다. 국민당은 혁명 초기부터 인구가 집중한 해안 지방을 중점적으로 공략하였다. 하지만 일본과의 전쟁에서 해안지방이 일본군의 수중에 떨어지면서 국민당의 가장 중요한 지지계층이 적의 수중에 떨어져 버렸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국민당은 이를 농촌에서 보충할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오히려 농촌과 농민을 수탈의 대상으로 인식했다는 점이다. 해안지방의 부유한 도시를 상실한 국민당 정부는 이를 만회하기 위해 농촌지역에서 세수를 걷어들이는데 열중하였던 것이다. 이 결과 농민들의 삶은 일본군, 국민당에게 착취당하는 형세가 되어 버렸다. 이에 반해 공산당은 좀더 엄격한 규율을 통해 자신들의 병사들을 지도하여 농민들의 피해를 최소화하는데 전념하였다. 국민당의 농촌에서 약탈은 어쩌면 자신들이 자초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세수의 감소를 보충하기 위해 농민들을 닥달하고, 농민들은 이에 저항하였고, 부족한 세수로 인해 군대에 보급을 제대로 할 수 없자 물품의 부족을 느낀 군사들이 농촌지역을 무자비하게 약탈하고, 약탈당한 농민들은 세수를 낼 여력이 없어지는 악순환의 반복이었다. 국민당은 이런 군대의 무질서를 공산당처럼 철의 규율을 세워 통제하여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간부급들의 부패로 인해 오히려 약탈이 더 성행하였다는 점이다. 이 결과 40년이 이후부터 국민당에 대한 농촌지역의 지지는 급속하게 줄어들었다.

이런 국민당은 당내에서 혁신운동을 시행했지만 실패하였다. 그 실패의 가장 정점에는 국민당의 우두머리이며 중국의 총통이었던 장카이색蔣介石이 있었다. 그는 당의 혁신을 바라면서도 그 혁신의 바람이 자신에게까지 불어오는 것을 거부하였다. 그는 자신의 측근이 비리에 연루된 것을 알면서도 그 어떤 제재를 가하지도 않았다. 이에 대해 장카이색은 인적 자원의 부족을 들었다. 그는 그 비리에 연루된 사람을 쫓아낸다면 그 자리에 누구를 앉혀야 하겠느냐고 미 군사고문단장이던 스틸월에게 하소연하기도 하였다. 사실 그만큼 국민당의 인적 자원은 곤궁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적 자원을 확충하기 위한 그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국민당에서는 복지부동이 만연하였다. 어떤 일을 벌이기 보다는 가만히 있는 것이 득이 된다는 사고방식이 간부들의 머리에 깊이 각인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총통의 명령이라 할지라도 거부하거나 하는 시늉만을 내며 시간을 끄는 일이 다반사였다. 이렇게되어 결국에는 지휘계통마저 붕괴되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고 당원들 사이의 견제와 시기 역시 국민당 정부의 붕괴에 큰 역할을 하였다는 점이다. 서로 협조가 필수적인 군사 작전에서 두 장군 사이의 불화로 인해 제때 지원을 하지 않아 전선이 붕괴되는 일은 큰 일도 아니었다. 그만큼 무능과 부패는 국민당 사이에서 일반적인 것이었다.

국민당 정권의 붕괴의 마지막 신화는 금원권金元券으로 불리우는 통화로 바꾸는 화폐개혁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이 정책의 실패가 국민당 정권의 몰락을 재촉한 것이라고 보았지만 저자는 이 화폐개혁이 없었더라도 국민당 정권은 위의 이유로 인해 붕괴될 것이라고 하였다. 다만 문제는 시간의 차이였을 뿐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저자는 국민당 정권이 이 화폐개혁을 한 것을 다 죽어가는 환자는 그 어떤 처방이라도 시행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으로 대신하였다. 사실 국민당으로서 이 화폐 개혁은 급속한 인플레로 인하여 붕괴되어 가는 경제를 살리기 위한 마지막 도박이었고, 결국 실패하였다는 것이다. 이런 조치마져 안했다면 국민당의 붕괴는 더 빨라졌을 것이라는 것이다. 사실 이 화폐 개혁이 실패하고 1년만에 국민당 정부는 붕괴하고 대륙을 공산당에게 넘겼던 것이다.

저자는 이런 다양한 분석을 시도하면서 묻고 있다. "국민당이 성공할 수 있었던 기회는 없었을까?" 물론 있었다는 것이다. 그 시작을 1927년 4월 18일 국민당이 남경에 국민정부를 건설한 시기부터 1937년 일본의 중국침략이 시작되는 10년간의 시기였다고 말하고 있다. 이 10년간 국민당은 개혁에 집중하여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앞에서 언급된 모순을 더욱 심화시키면서 시간을 허송했다는 것이다. 즉 저자의 시각에 따르면 이 10년간이 중국의 국민당 정부에게 주어졌던 개혁을 위한 가장 안정적인 시기였다는 것이다. 이 안정적 시기를 놓침으로서 국민당은 이후 계속 현상 유지를 위한 악수만을 둘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었다. 이 10년간 인재를 키우고, 군사력을 확장하고, 인민 대중을 혁명정신으로 결합시키는 대신 공산당을 탄압하면서 국론을 분열시켜 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 결과 사회적 기반은 붕괴되어 버리고 이를 대신할 군사독재를 실시한 것이 국민당 패배의 가장 주된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장카이색은 1949년 타이완으로 물러간 뒤에 대륙에서의 패배를 성찰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우리들의 패배의 원인은 여러가지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아직 대륙에 있을 때의 우리의 반공투쟁에 대한 치명적인 타격은 행정적인 결함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었다... 치명적인 타격은 조직, 방법, 정치와 전략에서의 중대한 착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의 민족적 의지력이 가장 강화되어야 했던 때에 약화된 데에 연유한 것이었다.>  그 통렬한 반성은 타이완에서 그대로 시행되었다. 다만 시기와 장소가 늦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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