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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개석은 왜 패하였는가 ㅣ 서울대학교동양사학강의총서 8
로이드 E. 이스트만 지음, 민두기 옮김 / 지식산업사 / 1990년 5월
평점 :
1911년 10월 10일 일단의 혁명세력들이 우창武昌에서 흥한멸청興漢滅淸을 내걸고 봉기하여 중화민국 군정부를 수립하였다. 이들의 봉기를 신호로 중국 역사에서 제1혁명이라고 불리우는 신해혁명이 시작되었다. 쑨원孫文 을 지도자로 하는 일군의 청년들이 일으킨 이 혁명은 무능과 부패로 상징되던 구체제를 순식간에 뒤엎어 버렸다. 이 결과 1912년 1월 1일 쑨원을 임시 대총통으로 하는 남경정부가 들어서면서 청조는 몰락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중국 역사에서 2천여년을 계속해온 전제정부에 대항하여 최초의 공화국이 성립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후 혁명은 위안스카이袁世凱의 반동과 군벌의 할거, 그리고 공화국의 창건자인 쑨원의 급서로 위기를 맞게된다. 하지만 쑨원의 뜻-삼민주의-을 이어받은 국민당이 그의 유업을 계승하여 혁명을 이어나가게 된다. 혁명 초기 국민당원들은 중국인들에게 하나의 희망으로 다가왔다. 아편전쟁, 청일전쟁, 의화단의 난을 거치면서 상처받을 대로 받은 중국의 자존심을 국민당이 회복시켜 줄 것이라고 민중들은 믿었기 때문에 그들을 지지하였던 것이다. 재벌과 중산층 및 지식인과 학생들의 지지를 받은 국민당의 중국 통합은 성공할듯이 보였다. 유럽 열강들 역시 국민당 정부를 중국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인정하였다. 이렇게 전도양양하던 국민당과 국민당 정권이 왜 급속하게 붕괴되어 결국에는 대륙에서 쫓겨나 타이완으로 물러나게 되었을까? 이 책은 바로 그 영광의 정점에서 나락으로 굴러 떨어진 국민당과 그 정권의 몰락사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국민당과 그 정권의 몰락을 9장에 걸쳐 설명하고 있다. 특히 국민당 정권이 몰락하는데 있어서 미국의 원조중단이라는 도식적인 이론에 집착하기 보다는 좀더 근본적인 문제에 치중하고 있다는 점이다. 저자는 미국의 군사원조 중단이 국민당 정권이 몰락하는데 일조했다는 논거를 반박하고 있다. 즉 국민당 정권의 군대는 패배 직전까지 무기의 부족에 직면한 적이 결코 없었다는 점을 증거를 들어 논박하고 있다. 국민당의 패배는 이런 외적인 요인이 아니라 내적인 요인이 더 컸다는 점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패배의 한 원인으로 국민당의 인적 자원의 부족을 들고 있다. 이렇게 된 이유는 혁명 초기에 양성했던 유능한 인적 자원이 일본과의 전쟁 초기에 급속하게 소진되면서 회복불능 상태에 빠져 버렸다는 점을 들고 있다. 이 결과 부족한 인적자원을 보충하기 위해 급조된 교육시설을 통해 대량으로 양산했지만 그 질적 저하는 군사적인 면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던 것이다. 현대전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군간부들의 무모한 혹은 소극적인 작전을 통해 국민당 군대의 무능은 회복할 수 없을 정도였다. 미국의 군사고문단들은 병사들은 용감했지만 간부들은 무능했다는 말로 국민당 군대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또 다른 문제는 군벌과 국민당간의 관계가 명확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지방에 할거한 군벌들을 확실하게 통제하지 못한 국민당 정부-이 역시 일본과의 초기 전투에서 군사력을 대량으로 상실한 결과였다-는 군벌들을 제압하기 보다는 회유하고 이간시키는 방법을 취하였다. 이 결과 군벌들의 자율권을 어느 정도 보장할 수 밖에 없었고, 이로 인해 국민당 정부의 중앙집권적인 정책에 큰 차질을 가져왔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국민당은 이를 시정할 능력을 결여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부족한 군사력을 전적으로 군벌의 군대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국민당 정부의 몰락을 가장 제촉한 것은 국민당과 농민과의 관계였다. 국민당은 혁명 초기부터 인구가 집중한 해안 지방을 중점적으로 공략하였다. 하지만 일본과의 전쟁에서 해안지방이 일본군의 수중에 떨어지면서 국민당의 가장 중요한 지지계층이 적의 수중에 떨어져 버렸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국민당은 이를 농촌에서 보충할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오히려 농촌과 농민을 수탈의 대상으로 인식했다는 점이다. 해안지방의 부유한 도시를 상실한 국민당 정부는 이를 만회하기 위해 농촌지역에서 세수를 걷어들이는데 열중하였던 것이다. 이 결과 농민들의 삶은 일본군, 국민당에게 착취당하는 형세가 되어 버렸다. 이에 반해 공산당은 좀더 엄격한 규율을 통해 자신들의 병사들을 지도하여 농민들의 피해를 최소화하는데 전념하였다. 국민당의 농촌에서 약탈은 어쩌면 자신들이 자초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세수의 감소를 보충하기 위해 농민들을 닥달하고, 농민들은 이에 저항하였고, 부족한 세수로 인해 군대에 보급을 제대로 할 수 없자 물품의 부족을 느낀 군사들이 농촌지역을 무자비하게 약탈하고, 약탈당한 농민들은 세수를 낼 여력이 없어지는 악순환의 반복이었다. 국민당은 이런 군대의 무질서를 공산당처럼 철의 규율을 세워 통제하여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간부급들의 부패로 인해 오히려 약탈이 더 성행하였다는 점이다. 이 결과 40년이 이후부터 국민당에 대한 농촌지역의 지지는 급속하게 줄어들었다.
이런 국민당은 당내에서 혁신운동을 시행했지만 실패하였다. 그 실패의 가장 정점에는 국민당의 우두머리이며 중국의 총통이었던 장카이색蔣介石이 있었다. 그는 당의 혁신을 바라면서도 그 혁신의 바람이 자신에게까지 불어오는 것을 거부하였다. 그는 자신의 측근이 비리에 연루된 것을 알면서도 그 어떤 제재를 가하지도 않았다. 이에 대해 장카이색은 인적 자원의 부족을 들었다. 그는 그 비리에 연루된 사람을 쫓아낸다면 그 자리에 누구를 앉혀야 하겠느냐고 미 군사고문단장이던 스틸월에게 하소연하기도 하였다. 사실 그만큼 국민당의 인적 자원은 곤궁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적 자원을 확충하기 위한 그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국민당에서는 복지부동이 만연하였다. 어떤 일을 벌이기 보다는 가만히 있는 것이 득이 된다는 사고방식이 간부들의 머리에 깊이 각인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총통의 명령이라 할지라도 거부하거나 하는 시늉만을 내며 시간을 끄는 일이 다반사였다. 이렇게되어 결국에는 지휘계통마저 붕괴되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고 당원들 사이의 견제와 시기 역시 국민당 정부의 붕괴에 큰 역할을 하였다는 점이다. 서로 협조가 필수적인 군사 작전에서 두 장군 사이의 불화로 인해 제때 지원을 하지 않아 전선이 붕괴되는 일은 큰 일도 아니었다. 그만큼 무능과 부패는 국민당 사이에서 일반적인 것이었다.
국민당 정권의 붕괴의 마지막 신화는 금원권金元券으로 불리우는 통화로 바꾸는 화폐개혁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이 정책의 실패가 국민당 정권의 몰락을 재촉한 것이라고 보았지만 저자는 이 화폐개혁이 없었더라도 국민당 정권은 위의 이유로 인해 붕괴될 것이라고 하였다. 다만 문제는 시간의 차이였을 뿐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저자는 국민당 정권이 이 화폐개혁을 한 것을 다 죽어가는 환자는 그 어떤 처방이라도 시행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으로 대신하였다. 사실 국민당으로서 이 화폐 개혁은 급속한 인플레로 인하여 붕괴되어 가는 경제를 살리기 위한 마지막 도박이었고, 결국 실패하였다는 것이다. 이런 조치마져 안했다면 국민당의 붕괴는 더 빨라졌을 것이라는 것이다. 사실 이 화폐 개혁이 실패하고 1년만에 국민당 정부는 붕괴하고 대륙을 공산당에게 넘겼던 것이다.
저자는 이런 다양한 분석을 시도하면서 묻고 있다. "국민당이 성공할 수 있었던 기회는 없었을까?" 물론 있었다는 것이다. 그 시작을 1927년 4월 18일 국민당이 남경에 국민정부를 건설한 시기부터 1937년 일본의 중국침략이 시작되는 10년간의 시기였다고 말하고 있다. 이 10년간 국민당은 개혁에 집중하여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앞에서 언급된 모순을 더욱 심화시키면서 시간을 허송했다는 것이다. 즉 저자의 시각에 따르면 이 10년간이 중국의 국민당 정부에게 주어졌던 개혁을 위한 가장 안정적인 시기였다는 것이다. 이 안정적 시기를 놓침으로서 국민당은 이후 계속 현상 유지를 위한 악수만을 둘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었다. 이 10년간 인재를 키우고, 군사력을 확장하고, 인민 대중을 혁명정신으로 결합시키는 대신 공산당을 탄압하면서 국론을 분열시켜 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 결과 사회적 기반은 붕괴되어 버리고 이를 대신할 군사독재를 실시한 것이 국민당 패배의 가장 주된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장카이색은 1949년 타이완으로 물러간 뒤에 대륙에서의 패배를 성찰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우리들의 패배의 원인은 여러가지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아직 대륙에 있을 때의 우리의 반공투쟁에 대한 치명적인 타격은 행정적인 결함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었다... 치명적인 타격은 조직, 방법, 정치와 전략에서의 중대한 착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의 민족적 의지력이 가장 강화되어야 했던 때에 약화된 데에 연유한 것이었다.> 그 통렬한 반성은 타이완에서 그대로 시행되었다. 다만 시기와 장소가 늦었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