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만 제국은 왜 몰락했는가
앨런 파머 지음, 이은정 옮김 / 에디터 / 2004년 2월
평점 :
절판


오스만 제국은 19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황제가 사망하거나 폐위되었을 경우 항상 계승문제를 야기했다. 그 이유는 하렘 때문이었다. 황제들 대부분은 하렘에서 지위가 낮은 첩뿐만 아니라 여러 명의 부인들을 총애하였는데 이것이 큰 문제의 시발점이었다. 여기서 태어난 수 많은 아이들은 장차 황제가 궐위되었을 때 경쟁자로 돌변하였던 것이다. 실제로 15-16세기에는 새로운 황제가 즉위하면 바로 그날 친형제들과 이복형제들을 교살하는 것이 하나의 관례였다. 오스만 제국은 이런 식으로 왕권에 도전할 경쟁자를 제거하였던 것이다. 이 결과 오스만 왕실은 항상 남성이 부족한 현상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래서 종교 지도자들은 형제의 집단살해가 도덕적이고 옳바른 일인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였다. 이후 황제의 남성 친족들은 황제의 거처인 톱카프 궁의 4번째 안채에 마련된 작은 방-이를 새장 혹은 kafes라고 불렀다-에 감금되었다. 이들은 이 좁은 방에서 왕의 자리로 불리울 때까지 감금된 생활을 해야만 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이들 감금자들에게 강제로 음주와 여자가 제공되어 정신적. 육체적으로 피폐하게 만들기도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즉위하는 황제들은 어떤 정상적인 역할을 맡거나 수행할 여력이 확실히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오스만 제국은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에 걸쳐 건설된 대제국이었다. 이 제국은 무려 6백여 년간 지속되었다. 이렇게 오래 동안 제국이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의 왕성한 정복력 때문이었다. 오스만 제국은 이슬람의 제국답게 정복과 정복민으로 이루어진 왕국이었다. 이슬람은 초기부터 정복된 땅의 주민을 개종시켜 그들을 전사로 만들어 정복을 감행하였다. 그러므로 이슬람 제국에서 정복이 멈추는 그 시점은 바로 제국의 쇠퇴가 시작되는 것을 의미하였다. 사실 오스만 제국이 쇠퇴기로 들어서는 시점이 1683년 제2차 빈 공격 실패에 따른 것이었다. 이후 오스만 제국은 더 이상 영토를 확장할 수 없게 되면서 급속히 몰락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그 이전까지 오스만 제국은 유럽의 정복지에서 5-6세정도 되는 그리스도교 아이들을 5명당 1명의 꼴로 착출하여 이슬람으로 개종시켜 강력한 군대조직을 만들었다. 이들이 역사에서 예니체리Yeni Ceri로 불리우는 군대였다. 이들은 근대 유럽에서 최초의 상비군으로 불리우는 조직으로 창설 당시에는 상당히 선진적인 군대였다. 이들은 철저하게 이슬람교도로 훈련되었으며 이들 가운데 똑똑한 아이들은 제국의 총리대신의 지위에까지 승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조직은 본질적으로 군대조직이었다. 그러나 이런 강력한 조직은 정복전쟁이 지속될 때만이 유효한 조직이 되는 것이다. 그렇지 못할 때 이런 강력한 군사조직은 황제의 권력과 사회질서를 위협하는 조직으로 변할 수 있다. 이들은 이런 특성 때문에 일생동안 결혼을 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이들은 끊임없이 정복지에서 보충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6세기 중반-1566년-에 이들의 결혼이 허락되면서 여기서 태어난 아이들이 예니체리에 입대하게 되었다. 이런 결과 1676년 점령지인 동남유럽에서 마지막으로 대대적인 착출이 마지막으로 이루어졌다. 이후 예니체리는 오스만 제국 황제의 핵심 전력이 아니라 민간 예비병력으로서의 역할에 치중하게 되었다. 이 결과 오스만 제국의 군사력은 급속하게 붕괴되었다.

오스만 제국은 얼음으로 만든 성처럼 시간이 흐르면서 그대로 녹아 버린 것일까. 왜 이들은 개혁의 노력을 하지 않았을까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사실 오스만 제국은 끊임없이 역사의 변화속에서 자신들의 현재를 바꾸려 시도하였지만 성공할 수 없었다. 그것은 앞에서 언급한 황제의 자질과 예니체리의 수구성에 기인하바가 컸다. 그래서 오스만 제국이 시행한 개혁은 언제나 표면적인 선에서 끝나버렸던 것이다. 게다가 신흥강국으로 도약하기 시작한 러시아와의 끝없는 분쟁은 허약해지기 시작한 오스만 제국을 대책없는 소모전의 늪으로 끌어들였던 것이다. 이 결과 오스만 제국은 밑에서부터 흔들리게 되었던 것이다.

오스만 제국이라는 거대한 실제를 정확하게 파악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제국이 3대륙에 걸쳐 방대하게 전개되어 있고, 여기에 수 많은 인종과 종교가 뒤섞여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구인들은 곧잘 오스만 제국의 붕괴가 이런 다양성을 하나로 통합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가설을 내세우기도 한다. 하지만 사실 이런 가설은 서구의 통합적인 사고의 산물일 뿐이다. 오스만 제국에는 상당한 인종적, 종교적 관용이 존재하였다.  이는 오스만 제국이 억압이 아니라 타협과 관용으로 제국을 통치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같은 시대에 잉글랜드가 인도에서 보여준 것과는 상당한 대비를 이룬다는 점에서 특기할만한 것이라 하겠다.

오스만 제국은 18-19세기에 들어와 변혁의 기회를 맞이할 수 있었다. 즉 당시 기세가 맹렬하던 이슬람 종교의 개혁을 추진하면서였다. 하지만 이슬람 종교 역시 사회건설을 위한 개혁의 추진을 이슬람의 후퇴로 규정하면서 흐지부지하게 되었다. 이 결과 오스만 제국은 서구제국의 발전에 동참할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하였던 것이다. 당시 이슬람에서는 부르조아 계층과의 협력을 통해 이슬람을 경제적. 정치적 개혁으로 이끌려 했지만 기득권의 반발로 실패하였다. 대신 이런 실패를 만회하기 위하여 기득권층은 독일과 협력을 강화하면서 일차세계대전에 빠져들어가는 우를 범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는 케말 파샤의 혁명 이후 발발한 이차세계대전에서 터어키가 히틀러의 독일의 간절한 구애를 물리치고 중립을 유지한 것과 대조를 이루는 장면이라 하겠다. 일차세계대전 당시 오스만 제국은 명분없는 서구의 전쟁에 말려들었던 것이다. 즉 범게르만주의와 범슬라브주의가 부딪치는 와중에 이슬람이 끼어든 형상이었다. 이 결과 오스만 제국은 독일의 패전과 함께 패전국의 오명을 뒤집어 쓰고 제국의 해체가 시작되었다.

이 책은 서구인의 손에 의해 집필된 것으로 곳곳에 서구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이슬람 세계 혹은 오스만 왕조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다. 그 모습은 한때 유럽의 중심부인 빈까지 침공하였던 제국의 모습이 아니라 무능과 부패로 점철된 것이다. 이런 묘사의 깊숙한 곳에 자리잡은 유럽 우월주의적 시각-특히 오스만 제국이 유럽 열강의 도움으로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듯한 기술-은 오스만 제국의 역사를 아주 볼품없는 것으로 만들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오스만 제국은 무려 6백여 년이나 3대륙에 걸쳐 존속한 제국이란 사실이다. 서구의 힘에 의존하는 환자가 이런 장구한 세월동안 버틸 수 있었을까? 아닐 것이다. 오히려 이 책의 이런 반오스만 제국적인 묘사 속에서 오히려 그 제국의 위대함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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