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느님, 자비의 아버지, 온갖 위로의 하느님, 당신은 높은 곳에 계시며, 낮은 것을 굽어보시며, 창조되기도 전에 모든 것을  알고 계시며, 당신 은총의 말씀을 통해 교회의 법들을 주셨으며, 시초로부터 아브라함의 의로운 종족을 예정하시고, 제왕들과 사제들을 세우시어 당신 성소聖所를 끊임없이 돌보게 하셨으며, 세상 시초부터 당신이 간택하신 이들 안에서 영광  받으시기를 기뻐하셨나이다. 이제 당신께로부터 오는 위대한 영의 능력을 이 형제에게 부어 주소서.

                        - 히뽈리뚜스의 ‘사도전승’ 가운데 주교(감독자) 서품 기도의 일부분 -



  중세시대는 성직자, 귀족, 농민의 위계질서로 구성된 사회였다. 이 위계질서의 최상층에 위치한 성직자들은 말 그대로 중세의 실질적인 주인공들이었다. 이들에 의해 중세의 기본적인 골격이 유지되었고 그 유산은 오늘날에도 유럽의 대부분을 지배하고 있다. 한 예로 현재 유럽의 대도시는 과거 중세시절 주교좌主敎座1)가 위치한 장소였다는 점이다. 영주의 성과 주교좌와 광장이 혼합된 중세의 도시적 특성은 지금도 현대적 포장 뒤에 고스란히 존재하고 있다. 게다가 이들 성직자 집단은 문자를 장악하고 있었다. 로마 제국의 유산인 라틴어의 전통을 계승함으로서 중세의 모든 기록을 자신들의 취향에 맞게 기록할 수 있었다. 중세 유럽에서 자신들의 언어로 일상이 기록되기 시작한 것은 14세기 이후에 시작되는 것으로 볼 때 이는 매우 중요한 교회의 지배 자산이었다.

  중세 교회의 장엄함에 비추어 볼 때 초세기 교회는 아주 단순한 조직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교회가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교회는 주교와 보조자라는 단순한 체계로는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조직이 되었다. 이 결과 교회는 교황, 대주교, 주교, 사제, 부제, 평신도로 이어지는 성직 질서를 탄생시키게 되었다.2) 이 질서는 성직자와 평신도로 단순화 되었지만 성직자는 상급성직자와 하급성직자로 다시 구분되었다.

  교회의 상급성직자는 교황과 추기경, 대주교, 주교, 수도원장을 포함하는 주교단이었다. 반면 하급성직자는 수도원의 수사신부와 본당本堂3)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사제들의 집단이었다.4) 이들 성직자 집단 역시 각각의 신분과 지위에 따라 철저하게 구분되어 있었다. 이런 관계로 중세 유럽에서 주교와 수도원장의 모임은 왕족과 귀족의 모임과 거의 다를 바 없었다. 그러기에 이들 상급 성직자와 하급 성직자들 사이에는  ‘주님에 대한 봉사’라는 점 이외에 동질적인 면을 찾아보기 힘들었다.5)

  중세 유럽에서 상급성직자와 하급성직자를 나누는 가장 큰 구분은 신분이었다. 상급성직자들은 대부분 왕족이나 제후 귀족 출신들의 자녀들이었다. 이들은 지배계급의 둘째나 셋째 혹은 서자들로서 가문을 이어받는 장자와는 달리 상속받을 재산이 없는 부류들이었다. 그러기에 이들은 자의에 의해서라기보다 부모들에 의해 반강제적으로 성직에 입문한 사람들이 태반이었다. 하지만 이들이 중세 교회의 고위 성직계급을 독점하였다. 반면 하급성직자들은 농민출신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들 하급 성직자들은 농촌에서 태어나 농촌에서 자란 사람들로 어떤 교양이나 실력을 갖추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들이 사제가 된 사연 역시 상급 성직자와 유사한 것이었다.  이들 하급성직자들은 중세시대를 수시로 관통하였던 기아와 질병의 산물인 경우가 많았다. 자신들의 아이들을 먹여 살릴 수 없었던 농민들이 수도원에 아이를 버리거나 위탁하였기 때문이었다. 수도원은 이런 아이들을 거둬들여 수도원의 평수사-이들은 수도원의 노동을 담당하였다-로 혹은 성직자로 양성하였다 이렇게 성직에 입문한 하급 성직자들은 성직을 수행하기 위한 가장 기초적인 교육-라틴어-만을 받고 서품되었다.6) 물론 종교적 열정에 스스로를 성직에 투신한 수많은 성직자들이 있었다는 점 또한 기억해야만 할 것이다. 이런 열성적인 성직자들을 통해 중세의 학문과 예술이 보존되고 발전되었다는 점 또한 분명한 것이다.

  상급 성직자들은 자신의 교구와 영지를 오가며 생활하였다. 반면 하급 성직자들은 수도원에서 공동생활을 하거나 본당에서 일생을 보내야만 했다. 이들 하급성직자들은 상급성직자들과 같이 종교적 소명보다는 타의에 의해 성직에 입문한 사람들이었기에 농민을 대상으로 하는 종교적 사목에 미진한 점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자질의 문제는 농촌을 종교적 후진 지역으로 남아있게 하였다. 이런 농촌의 후진성을 후에 종교개혁 이후 농촌지역의 격렬한 반동적 운동의 한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이런 문제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종교개혁 이후에도 하급 성직자에 대한 교육은 체계적인 것이라기보다는 필요에 따라 시행하였기에 큰 효과를 거둘 수는 없었다.

  중세 초기 성직자들의 자질은 많이 저하되어 있었다. 이는 게르만족의 이동에 의한 사회의 혼란도 한몫을 하였지만 교회의 세속화로 인한 통제력이 약화된 것이 큰 원인이었다. 이런 교회가 변화할 수 있었던 것은 위대한 개혁자 대 그레고리우스 교황-그레고리우스 7세-의 노력을 통해서였다. 교황의 개혁으로 인해 교계제도와 수도원제도는 일대 변혁을 가져오게 되었다. 교회는 지역적 독립체가 아니라 로마를 머리로 하는 완벽한 유기체로 되살아났던 것이다. 이 개혁은 중세 전 기간을 통해 교회 개혁의 모델이 되었다. 사실 교회는 그레고리우스 교황의 개혁을 통해 세속화의 유혹을 떨쳐버리고 11세기 교권의 절정을 이룩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레고리우스 교황의 개혁은 교회를 중세 유럽의 최정상에 올려놓는 기초가 되었지만 세속권과 경쟁을 통해 교회의 권력이 비대화되고 결국은 다시 세속화하는데 일정한 역할을 했다는 점 또한 부인할 수 없다.

  교회는 개혁을 통해 14세기에 절정에 올라섰다. 하지만 곧 바로 이 절정의 순간에 교회는 그것은 인위적인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재앙이었다. 그것은 14세기 유럽을 엄습한 페스트였다. 교권의 절정기를 맞이하고 있던 중세의 교회는 페스트로 인해 큰 타격을 받았다. 이로 인해 중세 유럽의 인구는 대폭 감소하였는데, 성직자들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 상급성직자와 하급성직자들도 많이 사망했는데 이는 종교적 헌신에 따른 희생 때문이었다. 당시의 기록에 따르면 상급성직자보다 하급성직자의 사망비율이 높았는데 이는 본당을 중심으로 농민들과 함께 생활해야만 했던 하급성직자들의 사정상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7) 이 결과 중세 교회는 성사집전에 가장 필요한 하급성직자들이 많이 부족하게 되었다. 교회는 이를 충원하기 위해 전시대보다 덜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여 하급성직자들을 충원하였다. 이런 교회의 결정은 현실적 필요에 의해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지만 결과적으로 큰 문제점을 드러내게 되었다.

  중세시대 농민들과 같은 피지배계층이 바라보는 교회의 모습은 상급성직자들의 모습에 초점이 맞춰져있었다. 이들 상급성직자들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종교적 소명보다는 정략에 의한 것이 많았기에 자신의 본연의 임무보다는 부차적인 즐거움에 탐닉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상급성직자들의 타락은 농민들의 분노를 야기하였고, 이는 결국 교회에 대한 경멸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농민들이 거주하는 지역의 본당 사제 역시 오랜 기간 동안 관습적으로 행해오던 대처帶妻풍습-성직자의 결혼은 독일지역이 특히 심했다. 그레고리우스 교황의 개혁에 의해 대처가 교회에 의해 금지되었음에도 독일지역에서는 완강히 저항하였다-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그리고 성직자로서의 전문성을 결여한 하급성직자들의 사목활동은 한심할 정도였다. 당시 교회의 전례는 라틴어로 집전되었고, 성경 역시 히에로니무스가 번역한 불가타 성서를 사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하급 성직자들의 라틴어 실력은 읽는 정도에 머물고 있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래서 사제들은 미사를 집전하고 성경을 읽고 강론을 행하여야 함에도 그 정확한 뜻을 이해하고 강론하는 하급성직자가 매우 드물었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세의 가장 비천한 농민계층과 살을 맞대고 생활하는 사제들이 바로 이 하급성직자였던 것이다.8)

  일찍부터 교회는 성직자들의 자질에 대하여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그래서 초세기 교회는 선출에 의해 성직자를 뽑은 뒤에 모든 신자들의 동의를 얻어야만 이를 발표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런 절차를 거쳐 뽑힌 성직자는 주일날 신자들과 주교단에 의해 안수를 받아 정식으로 임명되었던 것이다.9) 즉 교회는 도덕적인 면뿐만 아니라 학문적인 입장도 고려하였다. 그러므로 초세기 교회에서 성직자는 자질에서나 실력에서 신도들의 인정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신도 중심의 교회는 시간이 흐를수록 교회의 존립을 위협하는 문제점을 드러내었다. 신도들의 투표라는 민주적 절차가 세속의 권력과 이익과 결합하면서 성직매매나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 성직자로 선출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교회의 위기는 5세기 경 레오 1세 교황에 의해 교황중심-성직자 중심-의 교회로 바뀌면서 신도들이 성직자의 선출에 관여할 수 없게 되면서 해결되었다. 이 결과 성직자의 서품은 교회의 전유물이 되었고, 성직자의 교육은 교회의 손에 일임되었다. 하지만 교회가 체계적으로 하급성직자들을 교육시키기 위해서는 대학이 생길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10) 그 전까지 성직자를 교육시키는 임무는 수도원이 떠맡을 수밖에 없었다.

  중세 유럽에서 수도원이 수행했던 종교적 성과는 개혁이었다. 수도원은 교회의 세속화를 막아준 방패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이를 통해 교황권이 강화되었다. 하지만 수도원 역시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달성한 순간 세속화라는 덫에 걸리고 말았다. 이 결과 12세기 초에는 제후들이 수도원을 설립하기 보다는 그들의 성채 옆에 수도 참사회 성당ecclesia collegialis11)을 두는 것을 선호하였다. 이것은 교회와 성직자가 제후의 행정관 혹은 자문관의 역할을 떠맡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성당참사회가 성립되는 과정에서 흥미로운 사실은 12세기 말부터 시작된 경제적 위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당시 수도원에서는 더 이상 이익을 낼 수 없는 토지나 수도원 령을 따로 떼어내 그 땅을 한 수도사에게 맡겼던 것이다. 땅을 맡게 된 수도사는 경영을 위해 수도원을 떠나야만 했던 것이다. 이것은 공동생활을 하는 수도원의 생활 방식이 사제들의 단체나 교구에 거주하는 수사신부-교구사제-의 참사회로 변모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즉 수도원을 떠난 수사 신부들의 삶은 지금의 교구 사제의 모습과 유사성을 띠고 있다는 점이다.

  반면 하급성직자들은 농촌에서 농민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이들의 삶은 제후에게 봉사하는 상급성직자들보다 열악하였다. 게다가 미래에 대한 희망도 없었다. 이들은 교회의 상위계급인 주교나 대주교로 올라갈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이런 처우 속에서 하급성직자들이 자신의 본분인 사목활동에만 전념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이들은 농촌 사회의 중심에 있었다. 왜냐하면 중세는 본질적으로 종교의 사회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농민들은 많은 성직자들이 자격이 미달되어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 농민들의 갈등은 심화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이유로 마르틴 루터가 종교에 대한 개혁을 외쳤을 때 많은 농민들이 호응할 수밖에 없었다. 종교개혁은 교회 상층부의 문제뿐만이 아니라 하층구조에도 심각한 결함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상급성직자들이 중세 전 기간을 통해 끼친 영향은 엄청난 것이었다. 독일의 경우 황제를 선출하는 7명의 선제후 가운데 트리어, 마인츠, 쾰른의 대주교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렇듯 상급성직자들의 경우 왕국의 상층부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정치적인 견해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했다. 이것은 중세의 봉건제가 하나의 가정에서 출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왕국을 지상에 재현하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중세는 신분제를 만들고, 이들 신분의 완벽한 조화를 꿈꿔왔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발상은 중세 사회를 성과 속의 지배계급간의 갈등, 영주와 농민간의 계급적 갈등이 끊이지 않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이들 투쟁의 중간에는 언제나 종교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귀족계급이나 농민계급이 완전히 새로운 질서를 세우기 위해서 반드시 극복해야만 하는 대상은 종교였던 것이다.

  상급성직자들의 삶은 귀족의 생활과 별 차이가 없었다. 이들은 사냥을 즐기고, 궁중 연회에 참석하며 삶을 즐겼다. 그리고 자신이 감독하는 교구를 방문하는 것은 드물었다. 실제로 중세의 주교들 가운데 자신의 교구를 한 번도 방문하지 않은 주교들도 있었다. 이것은 후일 상당히 큰 문제점을 야기하게 된다. 자신의 교구의 실정을 자세히 파악하지 못한 주교에 의해 거두어 들여지는 세금의 무게로 인해 농민들의 종교에 대한 감정이 더욱 악화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중세의 그리스도교가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수도원을 통한 끊임없는 자기 혁신을 거듭하였기 때문이었다. 종교가 본연의 길에서 일탈의 조짐을 보일 때마다 어김없이 수도원 운동이 일어나 교회 상층부에게 경고음을 발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12세기 교황권이 확립되면서 수도원 운동은 더 이상 중세 교회에 활력을 불어 넣을 수 없었다.

  중세 농촌의 중심에는 마을의 성당이 있었다. 농민들은 태어나면 이곳에서 세례를 받고, 죽으면 장례미사를 통해 마을의 교회묘지에 묻혔다. 중세 농민들에게 자신이 태어난 곳이 바로 세계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 세계 바깥은 두려움의 세계였다. 본당의 사제들 역시 이곳에서 농민들과 같이 일생을 보내야만 했다. 외부의 소식을 들을 수 있는 것은 가끔 방문하는 순회수도자나 외지인을 통해 듣는 것이 유일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듣는 소식은 언제나 실제보다 과장되어 있거나 축소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성직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소임을 맡은 성당에서 고단한 삶을 살아가야만 했다. 조악한 농촌의 현실과 귀족들의 멸시12)를 견디어 내며 자신의 직무를 수행해야만 했다. 이들 하급성직자들은 상급성직자들의 예속민이었다. 영주에게 농민이 있듯 상급성직자에게는 하급성직자들이 존재했던 것이다. 이렇게 표현한다면 너무 잔인한 것처럼 들리겠지만 현실이었다. 중세 전 기간을 통해 종교문화의 중심은 수도원에 있었기에 이들 지역의 하급성직자들의 모습은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을 뿐이다. 하지만 하급성직자들은 농민들이 거주하는 곳에 존재하였고, 이들을 통해 종교적 성사가 매일 진행되었다.

  하급성직자들의 질적 저하는 교회의 성사와 행정 등의 분야에서 통일성을 지향하는데 걸림돌이 되었다. 이것은 초 세기부터 교회가 지향한 통일성이라는 대전제에 비춰볼 때 상당히 위험스런 것이었다. 하지만 성직자의 자질은 하루 한 순간에 향상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 때문에 교회의 고민은 깊을 수밖에 없었다. 중세 유럽의 경우 교육은 순전히 수도원의 몫이었다. 이런 수도원의 역할을 제왕이나 영주들이 빼앗기 위해 대학을 설립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대학은 성직보다는 왕의 관리를 양성하는데 더 치중함으로서 성직자와 성직지망생들에게 균등한 양질의 교육을 시행할 수 없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중세 말기 대학이 설립되기 까지 중세 유럽에서 문화와 학문의 중심은 수도원이었다. 그러므로 수도원의 울타리 너머에 존재하는 수많은 하급 성직자들과 그들이 사목하는 농촌의 교회는 이런 학문과 예술의 세례에서 소외된 지역으로 남았다.  

  이런 문화적 학문적인 불균형은 종교개혁이 일어나면서 교회의 개혁을 외치는 프로테스탄트들의 이념적 공격에 농촌 지역의 사제들은 전통이라는 무기 이외에 별 다른 대안이 없었다. 물론 이런 성직자들의 뒤에는 수 백 년 동안 전통 속에서 생활한 고집불통의 농부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급진적인 선동에 쉽게 흔들리는 성향을 보였다는 점이다.13) 이는 상대적으로 농부들이 착취의 대상이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드러낸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풍토는 13세기 초부터 변화된 중세의 종교관이 큰 역할을 했다. 집단에서 개인으로 변모해 가는 중세의 개인주의는 종교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공동체적인 미사가 개인의 기도로 대체되는 경향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개인주의는 종교 및 농업-당시의 주된 산업-에서도 큰 위력을 발휘하였다. 이런 개인성향의 종교는 수도원이라는 공동체에서 교구의 지역에 한정된 교회로 종교의 중시미 옮겨지는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이제 중세 종교의 중심은 수도원이 아니라 교구에 소속된 지역교회가 담당하게 된 것이었다. 여기서 문제가 된 것은 사제의 자질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하락된 성직자의 자질은 부분적으로19세기에 이르기까지 회복되지 않았다.

 

1)주교좌란 원래 교회의 의식 때 주교가 앉는 의자를 말한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주교의 권위나 가르침 혹은 주교의 지위를 나타내는 단어로 전이되었다. 그러므로 주교의 의자가 있는 성당을 주교좌성당이라 한다. 주교는 자신이 관할하는 교구내의 어느 교회에도 머물 수 있으나 교회는 주교가 상주하는 특정한 교회를 지정하여 영구적으로 관할하도록 권장하고 있다. 바로 이 성당을 주교좌성당이라고 한다.

 2)현대적 의미의 교회 위계질서를 보려면,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가운데 교회에 관한 교의헌장인 인류의 빛Lumen Gentium 3장을 참조할 것.

 3)본당은 지역 사회 속에서 구체적이고 lf제적이며 기초적인 교회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단위 교회를 말한다. 여기에는 주교를 도와 권한을 위임받은 주교의 협조자인 사제가 상주하면서 주교에 의해 정해진 관할 구역 안에서 사목을 한다. 여기서 단위교회란 교계제도상 주교의 권한에 속하는 지역 단위 교회를 말한다.

 4)우리가 생각하는 수도자-수사-는 엄밀하게 말하면 성직자가 아니었다. 수도자 가운데 서품을 받은 사제만이 성직자였다.

 5)이들 성직자들은 사제라는 직책에 의해서는 수평적인 관계였지만, 교계제도에 의해서는 수직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관계였다.

 6)로버트 그로스테스트Robert Grosseteste는 이런 중세의 유별난 인물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에 대해서는 <중세 이야기> ‘합리주의와 인문주의의 갈림길 : 로버트 그로스테스트’를 참조할 것. 

 

 7)당시 흑사병이 엄습하였을 때 성직자들에 관해 알아보려면, ‘흑사병. 필립 지글러. 한길. 2003. 10장 타락하는 성직자, 죽어가는 사람’부분을 참조할 것. 

 

 8)상급성직자에 대한 농민들의 인식은 어떠하였을까? 카를로 진즈부르그의 ‘치즈와 구더기’ 8장을 보면 이들 상급성직자들은 ‘가난한 사람을 억압하는 자’들로 인식되고 있다.

 9)사도전승, 히뽈리뚜스, 분도출판사, 1992, p75

 10)중세 유럽의 대학은 이슬람이 정복한 이베리아반도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이슬람의 코란학교인 마드라사와 유사한 종교 전문 교육기관인 대학이 유럽에 처음 등장한 것은 12세기경 이탈리아의 볼로냐와 프랑스의 파리였다. 자크 르 고프의 ‘중세의 지식인들’은 교회와 대학과의 관계를 잘 알 수 있다. 

 

11)수도 참사회 성당은 교구 및 본당의 성당과는 달리 성직자 또는 참사회원들의 단체에 관할권이 위임된 교회이다. 이들 참사회 성당은 초대교회의 사도들을 본받아 공동생활을 할 것을 규정한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회헌을 채택하였다. 이 참사회 성당은 공동체적인 수도원과 개인적인 본당의 중간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현대의 수도원 가운데 예수회가 가장 이와 유사한 수도단체라고 할 수 있다.

 12)영주가 지역의 사제를 얼마나 하찮게 여겼는지는 미셀 풀코의 ‘사형집행인’을 보면 잘 드러나 있다. 이 소설은 사형집행인을 다루는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중세의 아기자기한 풍경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13)중세농민들의 종교개혁시 평등사상에 몰입되는 과정은 노만 콘의 “천년왕국운동사”를 참조할 것.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398년, 중세 유럽은 절정기를 향해 가고 있었지만 내부적으로는 혼돈 그 자체였다. 로마와 아비뇽에는 각각의 교황이 자신들의 지지자들에 둘러싸여 그리스도교 세계를 '대분열'속으로 몰아 넣고 있었다. 이 분열은 20여년간 지속되고 있었다. 이 종교적 분열은 어느 한 쪽의 양보를 통해서만이 해결될 수 있는 문제였지만 그럴 기미는 결코 보이지를 않았다. 이런 종교적 분열을 해결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정치적인 것이었지만 당시 유럽은 그럴 형편이 아니었다. 중세의 강자인 프랑스와 잉글랜드는 백년전쟁이라는 역사의 터널 속에서 헤매고 있었다. 그들은 길고 긴 터널의 반을 지나왔고 앞으로도 50년 이상을 어둠 속에서 헤매야만 할 운명이었다. 독일은 40여년전 대공위시대 이후 강력한 황제가 나올 수 없는 제도적인 장치 속에 자신을 묶어놓고 분열에 분열을 거듭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적 해결은 기대할 수 없었다. 이런 가운데 로마와 아비뇽의 교황은 상대방을 향해 가장 파멸적인 무기인 '파문'을 선고하였다. 이것은 유럽 전체가 죄의 나락 속에 떨어짐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사태가 이렇게 돌아가자 프랑스 왕과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만나 종교적 대분열을 종식시키려 하였다.

하지만 문제는 두 명의 왕과 황제에게 있었다. '주워온 왕'이라고 불리운 발로아 왕가의 초대왕 필립6세의 현손인 샤를 6세는 원래 허약한 혈통의 소생이었기에 왕의 직무에 짖눌려 광기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게다가 샤를 6세의 광기는 간혈적인 것이었기에 더욱 문제가 컸다. 그의 파트너읜 보헤미아의 왕이자 신성로마제국이 황제인 벤체슬라스는 보헤미아의 '선한 왕'이라 불리운 성 벤체슬라스와 이름은 같았지만 비슷한 점도 없었다. 그는 '주정뱅이'였던 것이다.

중세 교회의 대분열을 막기 위해 광기의 왕과 주정뱅이 황제가 만나 토론을 하였으니 잘 될리 만무하였다. 샤를 6세는 제 정신으로 돌아오는 때가 점심을 먹고 난 오후였다. 그때쯤이면 정신이 맑아져 정무를 보거나 신하들과 토론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오후에는 오전부터 술을 퍼 마신 벤체슬라스 황제가 곤드레 만드레가 되어 버리는 시간이기도 하였다. 물론 오전에는 그 반대였지만... 이 두 사람이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역사적 결과는 분명했다는 점이다. 이 둘의 만남도 교회의 대분열과 타락을 막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1419년 벤체슬라스 황제가 사망하였다. 그리고 3년 후 샤를 6세도 사망하였다. 샤를 6세가 사망하였을 때 프랑스는 기묘한 안도감과 슬픔이 교차했다고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066년 크리스마스, 노르망디의 서자 귀옴은 잉글랜드의 국왕으로 추대되어 웨스터민스터 수도원에서 대관식을 거행하였다. 이제 그는  프랑스식의 귀옴이 아니라 윌리엄이란 잉글랜드의 발음으로 불리울 사람이었다. 그는 10월에 자신의 사촌인 해롤드를 죽이고 잉글랜드를 정복하였던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름부음을 받으면 명실상부한 잉글랜드의 국왕이 되는 것이었다. 이 기쁨은 그만의 것이 아니었다. 그의 달콤한 유혹에 현혹되어 대륙을 건너온 2백여명의 귀족들의 승리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를 따라온 사람들 역시 자신과 같은 서자이거나 별볼일 없는 귀족가문의 떨거지들이었던 것이다. 이런 그들이 마침내 도박에 성공하여 한 나라의 지배자가되는 순간이었던 것이다. 이들은 너무 기쁜 나머지 프랑스어와 잉글리쉬로 기쁨의 함성을 내질렀다. 이 거대한 함성이 수도원 밖으로 울려퍼지자 노르망디 출신의 경비병들에게는 어떤 불길한 소리로 들렸다. 이들은 잉글리쉬는 생소했고, 자신들의 고향에서 멀리 떨어져 왔기에 상당히 긴장된 상태였다. 이런 경비병들에게 귀에 익은 프랑스어와 낮선 잉글리쉬가 함께 들려온 것은 수도원 안에서 어떤 불길한 사건이 벌어진 것으로 여겨졌다. 이들 경비병들은 직감적으로 수도원 옆의 건물에 불을 지르고 적의 공격에 대비하기 시작하였다. 겨울의 건조한 바람을 타고 불길이 수도원으로 번지자 수도원 성당안에서 대관식을 거행하고 있던 귀족들과 병사들이 동요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해롤드의 잔당들이 자신들을 공격하는 것으로 오해하였던 것이다. 갈팡질팡하는 귀족들과 병사들 사이에서 그나마 침착을 유지한 사람은 대관식을 주관하던 주교와 수도자와 윌리엄 뿐이었다. 기름부음을 받기 위해 제단 앞에 무릎을 꿇고 있던 윌리엄도 사실은 겁이 났지만 자신이 이룩한 성공을 포기할 정도는 아니었다. 우여곡절 끝에 대관식이 끝나고 윌리엄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브리튼 왕실의 시조가 되었던 것이다.

1087년 프랑스의 필립 1세가 자신의 영지인 노르망디를 침입하였다. 윌리엄은 이를 방어하기 위해 망트로 군사를 이끌고 행군하였다. 망트에서 필립의 군대와 대치한 자신의 군사들을 독려하던 윌리엄은 자신이 탄 말이 모닥불의 불씨를 피하기 위해 요동을 치자 말 안장에 배를 심하게 부딪치며 낙마하였다. 이때 윌리엄의 장이 파열되었다. 하지만 이를 알지 못한 윌리엄은 아픈 몸을 무릅쓰고 프랑스군과 대치하였다. 파열된 장에서 흘러나온 불순물로 장 전체가 오염이되고 복막염으로 악화되었다. 윌리엄은 이런 상태로 5주간이나 방치되었다. 결국 그는 장이 썩어 들어가면서 배가 부풀어 오르기 시작하였다. 그는 죽음을 직감하고 자신의 세 아들을 망트로 불러 유언을 남겼다. 윌리엄은 세 아들 가운데 가장 무능하다고 여긴 로베르-잉글랜드에서는 로버트-에게는 노르망디를 세째인 헨리에게는 은화 5천 마르크를 남겼다. 그리고 가장 사랑한 붉은 얼굴의 둘째 아들 윌리엄에게는 잉글랜드를 상속하였다. 윌리엄은 자신의 땅을 아들들에게 분배한 뒤 이 세상에서 자신이 유일하게 사랑했던 아내 마틸다-4년전에 자신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의 곁으로 자신의 영혼을 맡겼다. 그의 장례식은 9월9일 캉의 성 에티엔 성당에서 거행되었다. 왕국의 봉신들과 후계자가 참석한 장례식은 슬픔보다는 희극적인 요소로 마지막을 장식하였다. 윌리엄의 시신에 관 뚜껑을 덮을 때 일이 발생하였다. 관 뚜껑이 잘 닫히지 않았던 것이다. 그 이유는 윌리엄의 배가 너무 부풀어 올랐기 때문이었다. 이를 무시하고 병사들이 관 뚜껑을 무리하게 닫는 순간 부풀어오른 윌리엄의 배가 폭발하면서 누런 고름이 성당의 벽과 바닥을 뒤덮었다. 참석한 조문객들은 그 악취에 코를 감싸쥐고 모두 성당 밖으로 도망을 칠 정도였다. 서둘러 관의 뚜껑이 닫혀지고 그의 시신은 성당 구내에 묻혔다. 그의 시신이 어찌되었던 그가 이룩한 왕국은 굴러가고 있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황석영의 '탑'이란 단편 소설이 있다. 월남전을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은 그 탁월한 전투장면의 묘사와 아시아와 유럽의 결코 어울릴 수 없는 상이한 시각을 상징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탑의 내용은 아주 간단하다. 월남전에 참전한 한국 해병대는 어느 마을로 진입하여 그 마을의 상징인 탑을 지켜내라는 명령을 접수한다. 해병대원들은 어렵게 전우들을 희생시켜가며 그 탑을 지켜낸다. 전투가 끝나고 탑을 지켜냈다는 포만감이 가시기도 전에 미군 공병대가 도착한다. 그리고 전투에 방해가 되는 그 탑을 제거한다는 내용이다. 해병대원들은 탑을 지켜내면서 소대내에 잠재되어있던 병과 하사관과의 갈등이 우리들의 탑이라는 동질감으로 서서히 해소되면서 전우애로 발전한다. 그 전우애로 발전해 가는 과정이 바로 탑을 지켜내는 과정이면서 월남인들의 탑이 전우의 피가 흘러내릴 때 마다 우리의 탑으로 변모해 간다. 그리고 그 탑을 지켜냈을 때 그 탑은 이미 월남인들의 탑이 아니라 우리의 탑, 해병대의 자랑스런 탑이 되었다는 점이다. 그 우리의 탑을 파괴하는 미군 공병대의 모습은 탑이라는 존재가 하나의 물질에서 정신적인 존재로 무겁게 변모되어 감을 느끼게 된다.

독일작가 만프레드 그레고르의 '다리' 역시 황석영의 '탑'과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차세계대전이 막바지에 다다른 날, 일곱명의 소년병사들이 고참병 한 명과 다리를 사수하기 위해 도착한다. 이들 일곱명은 이 다리가 존재하는 마을에서 함께 자란 친구들이다. 이들이 이 다리를 사수하러 온 것은 사령관의 시간벌기 작전에 희생양으로 투입된 것이었다. 사령관은 이들 일곱명이 단 5분만이라도 미군의 진격을 저지해 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 5분의 시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5분을 저지하면 미군의 습성상 대략 2시간의 여유시간을 벌 수 있다고 계산했기 때문이었다. 일곱명의 소년병사들은 5분이 아니라 무려 하루동안 미군을 저지한다. 그러면서 소년병들은 하나 하나 희생되어 간다. 이 과정에서 소년병들은 자신들이 사수하려는 다리가 지도상의 지형에서 우리들의 다리로 서서히 변모해 간다. 소년병들이 희생은 아랑곳하지 않는 사령관은 아직도 다리가 소년병들에 의해 장악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내심 놀란다. 하지만 이제 그 다리는 더 이상 존재할 가치가 없다. 결국 사령관은 미군이 재반격하여 다리를 점령하기 전에 폭파하기로 결정하다. 사령관은 공병대를 파견하여 다리를 폭파하려 한다. 그러자 살아남은 소년병들이 격렬하게 저항한다. 그 과정에서 소년병들은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희생당한다. 소설은 소년병들이 하나씩 희생될 때마다 그의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의 모습을 담담하게 그려낸다. 작가가 보는 이들의 삶은 히틀러라는 괴물이 지배한 독일이 만들어낸 새로운 형의 인간으로 묘사하고 있다. 히틀러 시대의 전형적인 맥락이 없는 삶이 하나씩 하나씩 드러나면서 다리를 사수하는 소년병들의 전체적인 모습이 드러난다. 이들의 전체적인 모습이 드러났을 때  이들이 태어나고 자라고 공부한 이 작은 마을의 허위와 뿌리뽑힘이 드러난다. 이들 일곱명 가운데 히틀러 시대의 삶과 다른 전통적인 독일적 삶을 살아온 소년은 한 명 뿐이다. 작가는 야훼가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를 40년간 방랑하며 고집스런 세대를 모조리 죽이고 새로운 세대에게 가나안을 주었듯이 여기서도 히틀러시대의 인간형들은 다리를 사수하면서 하나씩 죽인다. 오직 한 명의 생존자만이 새로운 독일에 합류하게 된다. 그는 근면과 성실이라는 전통적인 독일적 가치관을 지닌 인물이다. 작가는 이를 통해 현재의 독일이 히틀러시대와 단절되어 있으며 사악하지 않고 희망이 있음을 보여주려 한다. 하지만 기성세대는 이런 생존자에게 가혹한 삶은 오직 자신들의 전유물인것처럼 말한다. 하지만 기성세대는 이들이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라는 점을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 결국 어린 생존자는  침묵을 통해 항변할 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옛날 초원을 방랑하던 형제가 넓은 숲과 나지막한 산봉우리가 줄지어선 땅을 발견하였다. 형제는 언덕에 서서 이렇게 말을 주고 받았다.

"죽어서 이 곳에 묻혔으면!" 

한숨짓 듯 말하는 형의 말에 아우가 역시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여기서 살았으면!"

결국 두 형제의 마음은 같은 것이었다.

                                                   - 만프레드 그레고르의 "다리" 중에서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