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6년 크리스마스, 노르망디의 서자 귀옴은 잉글랜드의 국왕으로 추대되어 웨스터민스터 수도원에서 대관식을 거행하였다. 이제 그는  프랑스식의 귀옴이 아니라 윌리엄이란 잉글랜드의 발음으로 불리울 사람이었다. 그는 10월에 자신의 사촌인 해롤드를 죽이고 잉글랜드를 정복하였던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름부음을 받으면 명실상부한 잉글랜드의 국왕이 되는 것이었다. 이 기쁨은 그만의 것이 아니었다. 그의 달콤한 유혹에 현혹되어 대륙을 건너온 2백여명의 귀족들의 승리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를 따라온 사람들 역시 자신과 같은 서자이거나 별볼일 없는 귀족가문의 떨거지들이었던 것이다. 이런 그들이 마침내 도박에 성공하여 한 나라의 지배자가되는 순간이었던 것이다. 이들은 너무 기쁜 나머지 프랑스어와 잉글리쉬로 기쁨의 함성을 내질렀다. 이 거대한 함성이 수도원 밖으로 울려퍼지자 노르망디 출신의 경비병들에게는 어떤 불길한 소리로 들렸다. 이들은 잉글리쉬는 생소했고, 자신들의 고향에서 멀리 떨어져 왔기에 상당히 긴장된 상태였다. 이런 경비병들에게 귀에 익은 프랑스어와 낮선 잉글리쉬가 함께 들려온 것은 수도원 안에서 어떤 불길한 사건이 벌어진 것으로 여겨졌다. 이들 경비병들은 직감적으로 수도원 옆의 건물에 불을 지르고 적의 공격에 대비하기 시작하였다. 겨울의 건조한 바람을 타고 불길이 수도원으로 번지자 수도원 성당안에서 대관식을 거행하고 있던 귀족들과 병사들이 동요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해롤드의 잔당들이 자신들을 공격하는 것으로 오해하였던 것이다. 갈팡질팡하는 귀족들과 병사들 사이에서 그나마 침착을 유지한 사람은 대관식을 주관하던 주교와 수도자와 윌리엄 뿐이었다. 기름부음을 받기 위해 제단 앞에 무릎을 꿇고 있던 윌리엄도 사실은 겁이 났지만 자신이 이룩한 성공을 포기할 정도는 아니었다. 우여곡절 끝에 대관식이 끝나고 윌리엄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브리튼 왕실의 시조가 되었던 것이다.

1087년 프랑스의 필립 1세가 자신의 영지인 노르망디를 침입하였다. 윌리엄은 이를 방어하기 위해 망트로 군사를 이끌고 행군하였다. 망트에서 필립의 군대와 대치한 자신의 군사들을 독려하던 윌리엄은 자신이 탄 말이 모닥불의 불씨를 피하기 위해 요동을 치자 말 안장에 배를 심하게 부딪치며 낙마하였다. 이때 윌리엄의 장이 파열되었다. 하지만 이를 알지 못한 윌리엄은 아픈 몸을 무릅쓰고 프랑스군과 대치하였다. 파열된 장에서 흘러나온 불순물로 장 전체가 오염이되고 복막염으로 악화되었다. 윌리엄은 이런 상태로 5주간이나 방치되었다. 결국 그는 장이 썩어 들어가면서 배가 부풀어 오르기 시작하였다. 그는 죽음을 직감하고 자신의 세 아들을 망트로 불러 유언을 남겼다. 윌리엄은 세 아들 가운데 가장 무능하다고 여긴 로베르-잉글랜드에서는 로버트-에게는 노르망디를 세째인 헨리에게는 은화 5천 마르크를 남겼다. 그리고 가장 사랑한 붉은 얼굴의 둘째 아들 윌리엄에게는 잉글랜드를 상속하였다. 윌리엄은 자신의 땅을 아들들에게 분배한 뒤 이 세상에서 자신이 유일하게 사랑했던 아내 마틸다-4년전에 자신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의 곁으로 자신의 영혼을 맡겼다. 그의 장례식은 9월9일 캉의 성 에티엔 성당에서 거행되었다. 왕국의 봉신들과 후계자가 참석한 장례식은 슬픔보다는 희극적인 요소로 마지막을 장식하였다. 윌리엄의 시신에 관 뚜껑을 덮을 때 일이 발생하였다. 관 뚜껑이 잘 닫히지 않았던 것이다. 그 이유는 윌리엄의 배가 너무 부풀어 올랐기 때문이었다. 이를 무시하고 병사들이 관 뚜껑을 무리하게 닫는 순간 부풀어오른 윌리엄의 배가 폭발하면서 누런 고름이 성당의 벽과 바닥을 뒤덮었다. 참석한 조문객들은 그 악취에 코를 감싸쥐고 모두 성당 밖으로 도망을 칠 정도였다. 서둘러 관의 뚜껑이 닫혀지고 그의 시신은 성당 구내에 묻혔다. 그의 시신이 어찌되었던 그가 이룩한 왕국은 굴러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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