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8년, 중세 유럽은 절정기를 향해 가고 있었지만 내부적으로는 혼돈 그 자체였다. 로마와 아비뇽에는 각각의 교황이 자신들의 지지자들에 둘러싸여 그리스도교 세계를 '대분열'속으로 몰아 넣고 있었다. 이 분열은 20여년간 지속되고 있었다. 이 종교적 분열은 어느 한 쪽의 양보를 통해서만이 해결될 수 있는 문제였지만 그럴 기미는 결코 보이지를 않았다. 이런 종교적 분열을 해결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정치적인 것이었지만 당시 유럽은 그럴 형편이 아니었다. 중세의 강자인 프랑스와 잉글랜드는 백년전쟁이라는 역사의 터널 속에서 헤매고 있었다. 그들은 길고 긴 터널의 반을 지나왔고 앞으로도 50년 이상을 어둠 속에서 헤매야만 할 운명이었다. 독일은 40여년전 대공위시대 이후 강력한 황제가 나올 수 없는 제도적인 장치 속에 자신을 묶어놓고 분열에 분열을 거듭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적 해결은 기대할 수 없었다. 이런 가운데 로마와 아비뇽의 교황은 상대방을 향해 가장 파멸적인 무기인 '파문'을 선고하였다. 이것은 유럽 전체가 죄의 나락 속에 떨어짐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사태가 이렇게 돌아가자 프랑스 왕과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만나 종교적 대분열을 종식시키려 하였다.
하지만 문제는 두 명의 왕과 황제에게 있었다. '주워온 왕'이라고 불리운 발로아 왕가의 초대왕 필립6세의 현손인 샤를 6세는 원래 허약한 혈통의 소생이었기에 왕의 직무에 짖눌려 광기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게다가 샤를 6세의 광기는 간혈적인 것이었기에 더욱 문제가 컸다. 그의 파트너읜 보헤미아의 왕이자 신성로마제국이 황제인 벤체슬라스는 보헤미아의 '선한 왕'이라 불리운 성 벤체슬라스와 이름은 같았지만 비슷한 점도 없었다. 그는 '주정뱅이'였던 것이다.
중세 교회의 대분열을 막기 위해 광기의 왕과 주정뱅이 황제가 만나 토론을 하였으니 잘 될리 만무하였다. 샤를 6세는 제 정신으로 돌아오는 때가 점심을 먹고 난 오후였다. 그때쯤이면 정신이 맑아져 정무를 보거나 신하들과 토론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오후에는 오전부터 술을 퍼 마신 벤체슬라스 황제가 곤드레 만드레가 되어 버리는 시간이기도 하였다. 물론 오전에는 그 반대였지만... 이 두 사람이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역사적 결과는 분명했다는 점이다. 이 둘의 만남도 교회의 대분열과 타락을 막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1419년 벤체슬라스 황제가 사망하였다. 그리고 3년 후 샤를 6세도 사망하였다. 샤를 6세가 사망하였을 때 프랑스는 기묘한 안도감과 슬픔이 교차했다고 한다.